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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7)*
청빈의 아이콘 최영 .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
학교 다닐때 다들 배우셨져?
이말은 최영이 한 말이 아니라 최영의 부친 최원직이 한 말이다.
실제로 최영은 고려말기를 떠받치는 무인이자 명장이었으나 공을 세울때 마다 국가에서 내려주는 전답을 그때마다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짓게 했고,
좁은 집에서 아주 청빈하게 살다 죽었다.
그는 사는 집이 누추했으나 이에 만족하였고, 끼니를 끓일 쌀이 없었다고 한다.
살찐 말을 타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는 벼슬아치들을 보면 개나 돼지같이 멸시하였다고 한다.
최영은 충숙왕 3년(1316) 종6품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커가면서 힘이 장사였고 체구가 우람하였다.
사람들은 최영을 용의 얼굴에다 봉의 눈, 범의 걸음걸이를 지녔다고 했으며, 그는 전쟁에 나가 패한적이 없었다.
듣고보니 관우와 맞장뜰만하겠다.
공민왕 8년(1359) 원의 토벌군에 쫓긴 4만의 홍건적이 고려를 침략했다가 반격에 쫓겨가고,
이어 공민왕 10년에 10만여의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여 수도인 개경이 함락되었다.
요시점에서 잠깐 '놋다리 밟기'의 유래를 잠깐 알아보고 가실게요~
*역사적 유래*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전설 가장 널리 알려진 유래는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피난길의 환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피난을 오던 중, 광명송(송야천)이라는 내를 건너야 했습니다.
*인간 다리*
당시 마을 부녀자들이 차가운 물속에 들어가 허리를 굽혀 다리를 만들었고, 노국공주가 그 등 위를 밟고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합니다.
*기념과 전승*
안동 시민들은 공주를 극진히 모셨던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놀이를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놀이의 구성과 진행*
놀이는 매우 조직적이며, 화려한 노래와 춤이 곁들여집니다.
*단계 주요 내용*
대열 형성 수십 명의 부녀자가 앞사람의 허리를 잡고 길게 늘어서서 '인간 다리'를 만듭니다.
공주 선발 어린 소녀 중 한 명을 뽑아 '공주'로 삼습니다.
공주는 다리 위를 걷는 주인공이 됩니다.
행진과 노래 공주가 등 위를 한 발짝씩 뗄 때마다 시녀들이 양옆에서 손을 잡아 보좌하며, 다리를 만든 사람들은 특유의 **'놋다리 노래'**를 부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
공민왕이 노국대장 공주와 함께 홍건적을 피해 복주(지금의 안동)로 피난을 갈때였다.
밤새 내린비로 피난길 앞에 놓여진 개울의 징검다리를 건너지 못한 두 남녀는 발을 동동거리고 있던 참인데
그 마을 백성들이 모두 나와 엎드려 공민왕과 노국대장 공주가 백성들의 등을 밟고 개울물을 무사히 건너갔다고 한다.
(으음..이때 까지만 해도 공민왕은 쓸만했군!)
최영은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 이성계등과 더불어 홍건적에게 함락된 개경을 수복하고 이들을 격퇴했다.
이 공로로 최영은 전리판서에 올랐으나 신돈의 견제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다.
신돈이 제거된후 다시 찬성사에 오른 최영은 우왕때 홍산전투를 멋지게 치루어내 빛나는 승리를 거머쥐었다.
최영은 군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간신 이인임과 손을 잡고 국정을 끌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의 국정농단이 극에 달하자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일파 100여명을 숙청하고.
딸을 우왕의 왕비로 들임으로써 우왕의 장인이 되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고봉에 유배되었다가 참수되어 목은 효수되고 시체는 길가에 버려졌다!
(아~아 어찌 이런일이..)
☆ 충신의 아이콘 정몽주 ☆
고려말 학자들 사이에서는 자를 지을때 '은'자 돌림이 유행했는데 '은'은 '은거'한다는 뜻이다
세상이 보기 더러우니 세속에서 은퇴하여 산에 들어가 산다는 소망을 나타내는 자이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 초은 이은복, 농은 최해 등이 10은 이라 불렀다.
고려말의 3은이란 순서대로 앞의 세사람을 말하고 정몽주는 빼야한다. 그는 은거한적이 없다.
정몽주가 이성계와 처음 인연을 맺은 때는 1360년!
도지휘사 한방신을 따라 동북면에 나갔다가 당시 병마사였던 이성계를 처음 만났다.
처음에 정몽주와 이성계는 대단히 가까운 사이였다.
이성계는 출전할 때마다 정몽주와 함께 했고
정몽주는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과도 가까운 사이였으나 왕조를 뒤엎는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은 임금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정몽주는 이성계와 뜻을 같이 해 위화도 회군을 지지했고.
우왕을 축출하고 공양왕의 즉위를 찬성했으나 고려 왕실의 존속을 강력히 희망했다.
정몽주가 위화도 회군에 찬성하고 우왕과 창왕의 신분격하에 동참한것은 그가 고려의 충신이었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의문을 품게 한다.
정도전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옳거니..) 그후에야 임금이 있다고 생각해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임금도 언제든지 바꿀수 있다고 생각했으니
이 사고방식의 차이가 두 정씨로 하여금 서로 반대의 길을 가게 만들고 이성계와도 등을 지게 만들었다.
어느날~
이성계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크게 부상을 입고 자리에 눕자
이틈을 타서 정몽주는 조준, 정도전, 남은 등 이성계의 수족들을 유배보내고 공양왕에게 상소를 올려 그들을 죽이려했다.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란 이성계는 부상을 무릅쓰고 개경으로 귀환을 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동정을 살피려고 직접 이성계의 집을 찾았고,
이때 이방원은 '하여가'를 읊어 정몽주의 마음을 떠보았다.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화답하여 고려 조정에 대한 절개를 표현했다.
(하여가,단심가는 앞편에 있으니 참고하셔요)
결국 정몽주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이방원은 조영규를 시켜 선죽교에서 철퇴로 때려죽이고 말았다.
그의 나이 56세였다!
이성계 일파는 그의 머리를 잘라
저잣거리에 효수했다.
정몽주가 맞아 죽을때 그 다리를 선지교라 불렀는데, 정몽주가 죽은후 다리옆에서 대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해서 선죽교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392년 7월 17일 고려는 건국 475년만에 멸망했다
태조때까지만 해도 조선건국을 방해한 간신으로 인정되었던 정몽주는 그를 죽인 태종 이방원이 영의정부사로 추증하면서 복권되었고
중종대에 들어서서 조선 성리학의 시조임을 인정받아 그의 신주를 문묘에 모시게 되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8)☆
잠깐 앉아 계시다가 내려온 정종과 꼬마 동생들을 죽인 태종 이방원
제1차 왕자의 난 (1398)
신덕왕후 강씨와 정도전의 후원으로 11세의 방석이 세자가 되었다
(누가 열 좀 받았겠는걸?)
그러자 권력을 장악한 정도전은 어리고 유약한 세자를 보호하기위해 한씨 소생 왕자들의 힘을 제거하는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먼저 대군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철폐했고, 대군들을 지방으로 보내 별전을 관리하도록 했다.
사서에는 정도전이 한씨 소생 대군 4명을 살해하려고 밀계를 꾸미고 있는것을 이무의 밀고로 이방원이 선수를 쳐서 정도전 일파를 척살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것은 나중에 태종 이방원이 시켜서 쓴 것이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이방원 곁에는 정도전의 정적인 하륜이 책사로 있었고, 이숙번, 조영무등의 장사와 이거이, 처남 민무질, 민무구 등이 있었다
제1차 왕자의 난때 계책을 낸 사람은 책사 하륜이었고, 군사를 지휘하여 대신들을 요절낸 사람은 이숙번이었다
(이방원의 처 대장부 민씨의 내조도 한몫을 했쥐~)사실 이방원도 열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개국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정몽주를 죽여 왕자들중 가장 공이 컸으나
공신에도 들지 못하고 정도전에게 밀렸으니 독을 안 품을수가 없었다.
이방원은 부하들중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뽑아 몰래 사병으로 끌어들였으며(육룡의 무휼은 가상의 인물인것 아시져?)
형 방간도 모의에 끌어들였다.
또 이방원은 궁궐을 숙위하고 있는 도진무 조은을 설득해 난에 가담시킴으로써 천군만마와 같은 힘을 얻게 되었다.
태조 7년(1398) 8월 26일 이성계가 아파서 눕자 종친들이 모두 대궐로 모여들었다.
정도전 일파가 한씨 소생들을 궁궐에서 척살할 것이라는 제보를 받은 방원은
선수를 쳐서 100여명의 사병들을 이끌고 정도전 일파가 모여 있다는 남은의 첩 집을 급습했다
당시 남은의 첩 집에는 정도전과 남은을 비롯해 심효생과 이근 등이 모여 요동정벌에 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남은의 첩 집에 도착한 이방원은 병사를 시켜 집에 불을 지른 다음 뛰쳐나오는 심효생, 이근, 장지화등을 모조리 활로 쏘아 죽였다
정도전과 남은은 담을 넘어 피신했으나 모두 잡혀 살해되었다.
이성계는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난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조은이 난군에 가담하여 군사를 모을수가 없었다.
정도전 일파를 숙청한 이방원은 방번과 방석의 출궁을 요청했다.
말로는 이들을 다치게 하지않고 안치시키겠다 했으나, 이성계는 자신의 안위조차도 위험한 상태라 눈물을 머금고 방석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은 방석이 궁궐에서 나오자마자 죽이고 태조에게는 먼 곳으로 안치했다고 속였다.
그리고 정도전 일당이 역모를 꾸몄기에 모두 살해했노라 고했다!
(이룬~눈가리고 아웅 하다니..)
방석은 죽을 당시 17세였다.
결국 태조는 귀여워하던 자식 둘이 눈 앞에서 패대기쳐져 죽는 것을 보면서 아무 말 못하고 방원이 요청하는대로
둘째 방과를 세자로 삼았으며,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제 2대 방과(정종)는 원치도 않은 왕위에 올라 이방원을 세제 (주방세제 절대 아녀~) 로 삼은 뒤에 아들
15명(아고~많기도 해라)을 모두 중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후환을 아예 없애버렸다.
사실 정종이란 시호도 몇 백년후에 받은것이고, 당시는 그냥 공정대왕이었다.
공정대왕은 재위기간동안 술 드시고 골프(격구) 치면서 시간을 죽이다가 그냥 내려오셨다.
이방원은 세제가 된 후 노골적으로 선위를 요구했고 정종은 채 2년도 왕 노릇을 못한채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상왕인 이성계는 이름뿐인 태상왕이 되었고, 73세로 병사했다
누가 찬밥 이성계를 조선을 세운 영웅이라고 했지?
인생무상! 삶의 회의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백성편에서 쓴 조선왕조실록
왕을 참하라(9)☆
*제 2차 왕자의 난 *
1400년 1월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이성계의 4남 이방간이 일으킨 난이 제 2차 왕자의 난이다.
방간은 같이 난을 일으켰던 방원이 모든 권력을 좌지우지하고 자신은 별 볼일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불만에 차 있던중 박포가 이방원이 방간을 치려한다는 방원을 제거하러 나섰다.
같은 형제끼리 다시 피의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원래 방간은 무식하고 어리석은데다 다혈질이라(ㅋㅋ 나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모자랐다.
능력면에서도 방원이가 훨씬 웃길인데도, 형인 자기가 세제가 되지 못하고 동생인 방원이 세제가 되자 주제파악도 못하고 일을 꾸민것이다.
지중추원사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때 사병을 동원하여 방원을 도운 무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원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고 믿고 있었는데 논공행상에서 2등이 되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박포는 불평을 늘어놓았고, 공신들의 분열을 우려한 방원은 잠깐 박포를 귀양보냈었다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박포가 방간을 부추겨 난을 일으킨 것이었다.
밀정을 심어놓고 방간의 행동을 체크하던 방원은 재빨리 군사를 정비하여 방간과 맞섰고
이숙번이 쏜 화살에 방간의 아들 이성기가 말에서 떨어지자 대세는 굳어졌다.
결국 패한 방간은 도망가다가 체포되어 토산으로 유배되었고,
그 일당은 모조리 처형되었다.
(그러니까 넘볼데를 넘봤어야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형제들을 주륙한 방원이 태종(3대) 으로 즉위하면서 바야흐로 공신들의 풍년시대가 되었으니,
이는 태종이 무자비한 숙청을 감행하게 되는 빌미가 되었다.
* 조사의의 난 *
태종 2년(1402) 안변부사 조사의가 난을 일으켰다.
조사의는 죽은 태조의 둘째부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척으로 제1차 왕자의 난때 제거된 이방석과 방번의 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었다.
겨우 반란군의 숫자가 6천~7천명 정도인 조사의의 난이 의미를 갖는것은
왕좌에서 쫒겨난 이성계가 그 배후에 있었을것이기 때문이다.
(거봐! 권력엔 부모 자식 다소용 없다니까~)
이성계는 찬밥이 된후 한양과 동북면을 왕래하면서 지냈는데
이성계가 안변의 석왕사로 떠난 직후 '조사의의 난' 이 보고되었다.
당시 이성계는 반란지역의 중심에
있었던 것이다.
태종은 박순을 파견하여 지방 수령이 조사의를 따르지 않도록 무마하라 했으나,
박순은 조사의의 군에게 피살되었다.
함흥차사로 죽은게 아닐세..)
이로써 철령이북은 조사의 반군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성계의 행방은 알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동북면에서 이성계는 자신의 사병들이었던 가멸치들을 주도 면밀히 모병한 흔적이 있었다.
모든 증거를 참작할때 이 난의 배후에는 이성계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태종은 조영무, 김영렬등의 장수로 하여금 4만 관군을 이끌게 하고 친정에 나섰다.
살수에서 관군과 대치하게 된 반란군은 관군의 숫자를 알자 사기가 크게 위축되었고,
원병을 보내리라 기대했던 여진족은 사태를 관망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살수의 얼음이 꺼져 수백명이 익사하면서 반군 진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조사의는 아들 조홍과 함께 안변으로 퇴각했으나 생포되어 난은 어렵지 않게 진압되었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생포된 다음날 개경으로 돌아왔고, 조사의의 난으로 수십명이 처형되고 유배되었다
(이성계는 오리발 내밀기 하고 있는겨?)
조사의의 난에는 동북면의 수많은 지역수령들이 연루되었으나 상당수가 관대히 처벌되었거나 복권되었고
이 때문에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정에서는 관련자에 대한 추궁이 끊이지 않았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아버지 이성계에 대해 태종 이방원은 참회하는 마음에 아버지의 죄를 추궁하지 않은걸까? 궁금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