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육사, 군의 뿌리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정부가 바뀔 때 마다 역사를 가지고 장난을 친다
참으로 미친논들의 장난이다
역사는 점진적으로 바르게 가고 있다
제발 역사를 가지고 정치권은 장난을 치지 말아라
윤석열 정부도 역사 싸움에 말려들지 말아라
나라를 빼앗긴 뒤 독립의 역사는 시작된다.
1905년 을사 보호조약
1910년 한일 합방
1919년 3·1 독립운동 정신인 포용, 정의정신을 배우라
한국인이여! 지성을 배우라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독립 선언서
‘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자주 독립, 지성, 인류사랑을 선언하였다
“오늘 우리 조선의 독립은 조선인이 정당한 번영을 이루게 하는 것인 동시에,
일본이 잘못된 길에서 빠져나와 동양에 대한 중책을 다하게 하는 것이다.
좋은 세상 동양 평화, 세계 평화, 인류 행복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융합과 표용과 통합의 ‘ 지성’이 가득하다
남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우수한 민족이다
인류 평등의 대의를 밝히고,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릴 것을 천명했다.
옳고 바른 심성을 가진 민족이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수립은
자주 독립, 지성, 인류사랑을 실천하는
민주공화국임을 선언 하였다
임시정부의 헌법도 당시의 지성인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미국의 헌법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였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수립도 1948.8.15이다
1948.8.15.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축하대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임시정부 건국 이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념
대한민국의 중심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진보들이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헌법 정신에 맞게 말을 제대로 하라”
“민주사회를 외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전체주의와 사회주의이고,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것은 부패한 카르텔이다
“헌법 정신에 충성해달라"
“내정도 외치도 자유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갖고 추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공화국이다”
국민에게 믿음이 가는 정치를 하여라
대한민국 독립군의 뿌리는
석주 이상용은 이회영, 이시영과 함께 간도에서 독립군 기지 개척에 힘썼으며,
(회영 6형제 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으로 해방이 되어 회영과 시영은 돌아와서
이시영은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이회영의 손자 이종찬, 이종결은 국회의원을 지내고
이종찬은 광복회회장이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을 통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전념했다.
1909년 신민회(新民會)는 만주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이동녕(李東寧)·이회영(李會榮)·장유순(張裕淳) 등을 기지 건설지 답사를 위해 만주에 파견하였다.
1910년 7월 이들은 남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柳河縣三源堡鄒家街)에 우선 정착하였다.
그 뒤 토착민의 배척이 심해 일상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았으나,
1911년 봄 한인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구국이념과 항일정신을 고취시켜
조국광복의 중견간부로 양성시킬 목적으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이었다.
우당 이회영선생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의 충의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찬(사촌 이종걸의원)
이에 이석영(李石榮) 소유의 전답(6,000석)을 매각한 돈으로 경비를 충당했고,
아울러 선생과 학생들의 노동력이 합쳐져 마침내 신흥강습소를 준공할 수 있었다.
본관이 낙성된 뒤, 1913년 신흥중학교로 개칭하고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다가
중학반은 폐지하여 지방중학에 인계하고 군사반만 전력하였다
1919년 유하현 제3구 고산자가(孤山子街)로 이전함과 동시에 신흥중학교를 점진적으로
폐교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3·1운동 이후 수많은 우국지사들이 해외로 망명하였는데,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육군 중위 지청천(池靑天),
윈난(雲南)사관학교 출신 이범석(李範奭) 등 유수한 무관들이 들어왔다
하사관반 3개월, 특별훈련반 1개월, 장교반 6개월과정 등 3개 과정을 두었고, 독립군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이 청산리전투의 대첩과 친일 주구배(走拘輩) 주살 등 독립전선 각 분야에서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졸업생들의 활동지역을 보면 주로 만주와 중국본토 등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학교가 만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에서 활동하였는데
그들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로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를 들 수 있다.
그 밖에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지역의 대한통의부,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
주요 주무장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하였다.
중국 본토 지역에서 활동했던 단체로서 주목되는 조직으로는 의열단과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학교가 폐교된 이후에도 만주와 중국본토의
여러 독립운동단체에서 각각 활발히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가중되는 탄압과 잇단 사고 등으로 1920년 가을 폐교되고 말았다.
지청천은 사관생도 300명을 인솔 백두산지역 안도현(安圖縣) 삼림지대로 들어가
홍범도(洪範圖)의 부대와 연합하였다.
김좌진부대의 뒤를 따라 밀산(密山)에 도착하여 대한독립군단 결성에 참가하였다.
이에 실망한 이시영은 봉천으로, 이동녕은 러시아령으로 가는 바람에
권위 있는 독립투사 양성기관이자 명실상부한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던
신흥무관학교는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1921년 대한 독립 군단과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벌인 싸움.
대한 독립 군단이 이르쿠츠크파 공산당과 러시아 동맹군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였으며
많은 한국인 사상자가 생겼다.
상해파 통칭 사할린부대. 한인사회당 + 조선인 빨치산.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후원.
이르쿠츠크파 통칭 고려혁명군.
고려공산당을 조직하는데 구분하기 위해 상해파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 부름.
상해파 부대는 극동공화국의 농민과 마찰이 심했는데 특히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 부르는
대량학살 사건에도 가담했었음 한인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지시함.
홍범도의 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극동공화국의 요청에 따라 무장해제를 수용했다.
이때 상해파 지청천, 이범석, 김좌진의 부대는 무장해제를 거부.
극동공화국에서 나와서 연해주로 넘어갔지만 거기서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함.
상해파의 사할린부대는 끝까지 무장해제를 거부하다가 극동공화국의 군대가 동원되어
이 사할린부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36명의 사망자 발생. 이게 자유시 참변의 시간흐름.
우파 독립군은 애초에 자유시에 없어 참변을 당하지 않았다는 점과.
중국으로 넘어간 뒤 어차피 바로 중국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다는 점.
홍범도가 소속된 이르쿠츠쿠파는 무장해제 요구를 받아들여 진압대상이 아니었다는점.
즉 자유시참변에 죽은 독립군도 공산당임.
홍범도가 원했던건 극동공화국의 후원을 통한 독립군활동의 지원이었고
그를 위해 당국의 요구를 수용한 반면 상해파는 그걸 수용하지 않아서 참변을 당한것임.
자유시참변에서 죽은 우리독립군도 좌파이며 공산당이었다는 점.
즉 이건 좌우의 대립에서 홍범도가 우파를 저버리고 공산주의의 편에 선게 아니라
공산주의 계열의 두 파벌중 한쪽이 무장해제를 거부해서
극동공화국 군대에 의해 진압당한 사건이 자유시 참변이다
항일운동은
“소련, 중국, 미국이 같이 했다”
“미국과 소련은 같은 동맹, 한 전선에서 일본과 싸웠다”
육사와 국군의 뿌리
어떤 무식한 지도자는 "육사의 뿌리가 신흥무관학교"라고 정신나간 소리를 했는데,
그게 요즘 또 도마에 올랐다.
또 국군의 뿌리가 독립군이라고 했다.
이건 역사를 왜곡하다 못해 등나무 처럼 밸밸 꼬는 것이다.
육사의 외형적 시초는 미 군정이 통역관 및 군간부요원 확보를 위해
1945년 12월 5일 미군정이 서대문 냉천동 감리교회 자리에 세운
[군사영어학교]가 될 것이다.
해방된 한국의 치안을 담당할 자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미군정에서 과거에 군경력을 가진
일본군, 만주군, 중국군 출신을 대상으로 공모를 통해 일정한 교육을 시켜서 장교로 임관을 시켰다.
그 때 배출된 사람들이 군번 1번을 받은 이형근 대위로부터 마지막 군번 110번을 받은 이응준 대령 등
총 110명이었다.
백선엽·정일권·장도영 등이 1기로 들어와 국군 장교로 신분이 세탁됐다.
그당시는 해방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달고 있던 계급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에 어떤사람은 소위,
어떤사람은 대위, 중령, 이런식으로 임관을 시켰다.
이는 46년 5월1일(육사 개교기념일) 국방경비사관학교로 이어진다.
그때 1기생으로 서종철, 김점곤 등이 입교를 하여 임관하였다.
그러다 전쟁통에 10기까지만 가까스로 임관을 시키고, 중단되었다가
1951년 8군사령관 밴플리트 장군의 도움으로 진해에 4년제 정규육사가 문을 열게된 것이다.
그 때 전두환, 노태우 등이 11기 생도로 입교하였다.
신흥무관학교가 육사는 아무 상관이 없다
1952년 백선엽에서 1969년 김계원에 이르기까지 육군 참모총장이 모두 이 군사영어학교 1기 출신들이고,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문재인이란 놈이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육사의 뿌리를 찾고자
이회영 선생을 포함한 독립영웅 흉상들이 육사에 세워진 것은 육사의 뿌리를 일본군이 아닌
독립군을 길러낸 1919년 신흥무관학교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는 중대한 기점이었다.
우리 헌법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지만,
군은 그때까지 국군의 뿌리를 해방 이후 미 군정에 의해 창설된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로 봤다.
2018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책자를 발간해
처음으로 독립군과 광복군(1940)을 우리 군 역사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정통성을 독립군에 두려 한 것이다.
이 책은 육사 교재로 사용됐다.
당시에도 일부 육사 출신 퇴역 장성들 가운데 반대가 있었지만, 목소리가 크진 않았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에서 홍범도 장군을 공산당이라며 육사에서 쫓아내기에 이른 것이다.
육사의 뿌리를 다시 만주군관학교로 두자는 것처럼 들린다.
육사는 반공학교가 아니다. ‘주적관’ 운운하지만, 군의 존재 이유는 국민 보호다.
주적을 무찌르는 것도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1946년 1월 15일에 최초로 국군 1연대가 지금 육사가 있는 태릉에서 창설되었다
또 국군의 뿌리가 왜 광복군인가?
오늘의 육사는 분명히 미국 육사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복사해 온 것이나 다름없다.
창설 당시에 밴플리트 장군의 처남이 육군 중령으로 미육사에 근무하고 있어서
어렵게 생도들의 학과 프로그램을 보내주어서 웨스트포인트와 유사하게 교육을 시켰으며,
병사들의 훈련도 미군정 시대에는 미군교관들이 시켰다.
그리고 전투하는 방식도 미군 전투교범에 있는 원칙과 준칙을 적용했기 때문에
국군의 뿌리가 광복군이니, 독립군이니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종찬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세운 "신흥무관학교"를 인정해 주지않는다고 서운해 하는 모양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인정을 하지, 누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 사람은 없다.
다만, 신흥무관학교가 육사의 뿌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公과 私는 분명히 가려야 한다.
공도 아니고 사도 아닌 어정쩡하게 방치하면 결국 우리 후손들이 고생을 하게 된다.
앞 사람들이 잘못해 놓으니, 안해도 될 싸움을 하고 있지않는가.
문재인이 나라 역사를 흔들기 위해 육사에 2018년 흉상
지청천,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이회영 독림애국지사 세워
육사와 국군의 뿌리를 가지고 역사를 왜곡하였다
육사 본관을 가로막고 줄지어 서 있는 동상은 세계 어디에도 보기 어렵다.
그 다섯 분은 훌륭한 분들이니 육사박물관 회랑에 모시는 것으로 충분하며,
독립기념관에 모시는 것이 육사보다 하대(下待)가 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