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할까봐 걱정되는 마음은 당연하지만, 냉장 보관이 오히려 맛과 영양을 떨어뜨리거나 더 빠르게 변질시키는 식재료가 있다. 냉장고가 만능 보관함이 아니라는 것, 이 5가지만 알아도 식재료 낭비를 줄일 수 있다.
1. 수박
여름 대표 과일인 수박은 통째로 냉장 보관하면 영양 손실이 생긴다. 미국 농무부(USDA) 연구에 따르면 수박을 실온 보관할 때 라이코펜 함량이 냉장 보관보다 최대 40% 높게 유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라이코펜은 수박의 붉은 색소이자 항산화 성분으로, 저온에서 생성·유지가 억제된다. 베타카로틴 함량도 마찬가지다.
수박은 본래 열대 작물로 13도 이하의 환경에 취약하다. 냉장고 내부 온도(보통 4~8도)에 장시간 두면 저온 장해가 생겨 과육이 퍼석해지고 단맛도 줄어든다.
통 수박은 직사광선을 피해 그늘진 실온(15~20도)에서 보관하고, 먹기 2~3시간 전에 냉장고에 넣어 차게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 한 번 자른 수박은 단면을 랩으로 밀착해 감싸 냉장 보관하고 2~3일 내에 먹어야 한다.
2. 토마토
토마토를 냉장 보관하면 먹을 때 밋밋하고 분이 날아간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기분 탓이 아니다. 토마토의 풍미를 만드는 휘발성 향미 화합물은 12도 이하에서 생성되는 효소가 억제되면서 크게 줄어든다. 미국 플로리다대 연구팀의 실험에서도 냉장 보관한 토마토는 실온 보관 토마토보다 향미 성분이 유의미하게 낮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냉장 온도에서는 토마토 세포벽이 손상되면서 과육이 물러지고 퍼석한 식감이 된다.
덜 익은 토마토는 반드시 실온에 두어야 숙성이 제대로 이루어진다. 완전히 익은 토마토도 가급적 실온에서 보관하고, 부득이하게 냉장 보관할 경우에는 최대한 짧게 두고 먹기 30분 전에 꺼내 실온에서 온도를 회복시킨 뒤 먹으면 풍미를 어느 정도 살릴 수 있다.
3. 바나나
냉장고에 바나나를 넣으면 껍질이 빠르게 검게 변하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보기 나쁜 것 이상의 문제다. 저온에서 바나나의 세포벽을 이루는 효소가 손상되면서 세포 내부 조직이 무너지고, 이 과정에서 검은 색소인 멜라닌이 생성된다. 껍질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과육의 질감과 당도도 함께 떨어진다.
바나나는 열대 작물로 13도 이하 환경을 견디지 못한다. 실온에서 보관하되 직사광선과 습한 환경을 피하는 것이 기본이다. 여러 개를 함께 보관할 때는 손잡이(꼭지) 부분을 랩으로 감싸두면 에틸렌 가스 방출이 줄어 숙성 속도를 늦출 수 있다. 완전히 숙성된 바나나를 오래 두고 싶다면 껍질을 벗겨 냉동 보관하는 것이 맞는 방법이다.
4. 감자
감자를 냉장고에 보관하면 안 된다는 것은 단순한 민간상식이 아니다. 저온에서 감자 내부의 전분이 당분으로 전환되는 '저온 당화(cold-induced sweetening)' 현상이 일어난다. 이렇게 당분이 높아진 감자를 고온에서 튀기거나 구우면 당분과 아미노산이 반응해 발암 가능 물질인 아크릴아마이드(acrylamide)가 더 많이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 여러 연구를 통해 확인됐다. 영국 식품기준청(FSA)도 감자를 냉장 보관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감자는 서늘하고 어두우며 통풍이 잘되는 실온 공간이 최적이다. 햇빛에 노출되면 솔라닌이라는 독성 성분이 생성돼 껍질이 녹색으로 변할 수 있으므로 빛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문지나 종이봉투에 싸서 어두운 찬장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
5. 빵
빵이 남으면 신선하게 유지하려고 냉장고에 넣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냉장 온도(4~8도)는 오히려 빵을 가장 빠르게 굳히는 온도대다. 빵의 주성분인 전분은 저온에서 '노화(retrogradation)'가 가속화되는데, 이 과정에서 전분 분자가 재결정화되면서 수분을 잃고 딱딱하게 굳는다. 냉장 보관한 빵이 실온 보관보다 훨씬 빨리 퍼석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빵은 당일 먹을 양은 실온에서 밀봉 보관하고, 며칠 내로 먹지 못할 양은 냉장이 아닌 냉동 보관이 정답이다. 냉동 보관한 빵은 에어프라이어나 오븐에 살짝 가열하면 갓 구운 것에 가까운 식감을 되찾을 수 있다.
냉장고는 만능 보관함이 아니다. 식재료마다 최적의 보관 온도와 환경이 다르고, 이를 무시하면 영양은 줄고 맛은 떨어지고 오히려 더 빨리 상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여름이라도 냉장고보다 서늘한 실온이 더 잘 맞는 식재료가 있다는 것, 이것만 기억해도 식탁이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