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정(이지함) 선생님의 전설 이야기
이지함(李之菡, 1517~1578)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학자였습니다.그러나 그는 학자로서 보다 우리에게는
토정 비결의 창시자로 더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그의 자는 형중(馨仲)이고, 호는 토정(土亭)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였습니다. 본관은 한산(韓山)이씨로, 아버지는 치(穉, 1477~1530)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
(光山金氏)로 판관 김맹권(金孟權)의 딸이였습니다. 보령에서 태어났고 충청도 보령에서 자랐습니다.
장년이 되어서 종실(宗室)인 이정랑(李呈琅)의 딸과 결혼하여 한때 처가인 충주 주변에 산 적도 있으며,
서울의 마포 강변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토정.이지함"
토정은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기를 좋아하여 한번은 제주도에 갔드니 제주 목사가 그의 명성을 듣고
반가히 맞이해 관사(官舍)로 안내를 받았습니다.그리고 난 후 목사는 최고의 대접을 한다고 목석이 아니
고는 반하게할 그런 기똥차게 잘 빠진 기생을 불러 오늘밤 저 손님을 유혹해 함께 잠자리를 하면 창고의
곡식을 다 주겠다고 말하며 토정을 유혹하게 했습니다.
그랬드니, 기생은 눈이 똥그래져서 밤새 토정 선생을 온갖 기교를 다 부리며 유혹해 보았지만, 끝내 함께
합궁해서 토정의 고걸 꼴잉시키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요게, 소문이 난 후로 더 유명해 져서 세상
사람들은 토정 선생을 성인이라며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생으로 유혹하는 제주 목사"
그가 포천 현감으로 갔을때 있었던 일입니다. 아전들이 음식상을 잘 차려왔습니다. 토정 선생이 한참
보고 있다가 먹을 만한 것이 없다면서 상을 물리치자 아전들이 겁을 먹고 더 좋은 음식을 차려왔습니다.
역시 보다가 먹지 않고 물리치니 아전들이 엎드려 죄를 청했습니다. 이에 토정 선생은,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 아무렇게나 땅에서 밥을 먹는데 왜 혼자 상에다 음식을 차리느냐”고 나무라고, 오곡 섞은 잡곡
밥 한 그릇과 나물국을 삿갓에다 싸서 가져오라 해서 먹었다고 합니다. 그가 포천 현감을 그만두게되어
떠나던 날은,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어며 슬프하고 아쉬워며, 가지 마라고 하면서 울었다고들 합니
다.
"토정의 잡곡밥과 나물국"
그후 토정 선생이 아산 현감으로 부임해 백성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백성
들은 관장(벼슬아치)들이 맨날 백성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저 연못의 물고기를 잡아 바치라 하는데, 고
기가 다 잡혀서, 더 잡히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대답했드니, 토정 선생은 곧 그 연못을 흙으로
메워 버리라 하니, 이후로 백성들의 고런 고통은 없어 졌다고 합니다.토정 선생은 모든 정사(政事)를 백
성들의 뜻에 맞게 명령하니 백성들이 모두 존경했는데, 갑자기 그가 이질에 걸려 62세로 사망하니 아산
백성들이 부모를 잃은 것 보다 더 슬프들 했다고들 합니다.
"벼슬아치들의 물고기 상납"
이런분이신, 이지함(토정)은 어린 시절 부터... 욕심이 없고 기품이 보통 사람과 많이 달랐다고 합니다.
하루 종일 옷을 벗고 차가운 겨울에 밖에 나가 있어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으며, 10여 일을 굶어도 병들
지 않고 건강했고, 세상의 번화함을 싫어했으며,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습니다.
본관이 같은 한산 이씨인 이율곡과는 친분이 두터웠고, 율곡은 그를 기이한 풀과 꽃, 진귀한 새와 기묘
하게 생긴 돌 등에 비유하며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율곡( 이이)"
토정 선생은 청풍군수를 지낸, 이지번(李芝蕃)의 아우로 기사(기이한 행동을 하는 선비)였습니다.
베옷에 짚신을 신고 부들삿갓을 쓰고 다니며, 사대부들과는 전혀 다른 방약무인(傍若無人)의 행동만을
골라서만 했고, 가관인건 쇠로 모자를 만들어 쓰고 다니면서 식사 때가 되면 고걸 벗어 씻고는 거기에
다 쌀을 넣어 밥을 지어 먹으니 솥을 지고 다닐 필요가 없었던 사람이였습니다.
"토정의 쇠로 만든 모자로 밥짓는 모습"
그뿐만이 아니라...그의 소원은 사람들에게 매를 한 번도 맞아본 적이 없어서 저세상 가가전에 꼭 한번
맞아보고 싶었던게 소원이였다고 합니다.그래서 민가에 들어가 부부가 앉아 있는 가운데에 앉졌드니,
주인이 화를 내고 때리려고 하다가는, 늙은이라서 그냥 쫓아 보내서 실패했던게,고게 넘 분해서 그래서
관청의 형벌 매라도 맞아보려고 관인(官人) 행차에 뛰어들어 앞을 가로막았는데, 그 관인이 화를 내고
노려보다가, 그 생긴 모습이 넘 기이하고 가관인 기라서 그냥 돌려보내서 결국 매를 맞아 보려는 그의
소원은 이루지 못했고 그래서 그는 죽을때까지 매를 한 번도 안 맞고 저세상에 간 단 하나뿐인 사람이
지만 기네스북에는 등재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요런 매맞기를 원했던 토정"
그가 바다에 나가서 배를 잘 타는 노하우는 배의 네 귀퉁이에 바가지를 달고 배를 띄워,그 바가지들이
배의 평형을 유지 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풍랑에도 무사히 견딜수 있어서 그는 제주도를 세 번이나
갔다 왔고, 또 바다 가운데 있는 섬에다가는 박을 심어 가꾸어 수만 개의 바가지를 만들어 고걸 내다
팔아, 그 돈으로 곡식 1천 석을 마련해 서울 마포(麻浦) 강촌에다가는 그 돈으로 품삯을 넉넉히 주면서
그곳의 진흙위에 흙을 쌓아 100여 척 높이의 땅을 조성해서 그기다가 작은 ‘토정(土亭)’을 짓고는 살았
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토정 앞 마포강의 강물의 방향이 자신의 마음에 좀 안든다고 해서... 다른 방향
으로 조금 옮길려고 마음먹게 됩니다.
"이지함의 토정"
그는 돈을 들이지 않고, 물의 방향을 옴길 방법을 고안했는데...그 방법은 나무로 인형을 깎아 만들어, 그
리고 난 후 고걸말이다 망치로 인형의 머리를 탁 치니,희한하게도, 그 나무 인형이 강물 속으로 들어가 서
서 생글생글 웃는 것이었습니다. 근처 강가에 사는 아이들이 몰려와 희안한 인형을 보고 돌을 던져서 맞
히니까,그 인형이 입을 벌리고 더 크게 웃는기라...그래서 아이들이 재미있어서 날마다 새까마게 많이 몰
려와 돌을 던지니, 그 돌이 쌓여 언덕이 형성되고 강물의 흐름을 토정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 주는 기라...
그는 그래서 돈 한 푼들이지 않고 물의 향방을 바꿔놓았다고 합니다
"마포강에 돌을 던지는 아이들"
그는 마포 강가의 이 집을 ‘토정(土亭)’이라 이름 짖고, 밤에는 이 토정 아래에서 자고 낮에는 그 위에 올라
가 쉬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얼마동안 살다가는 이집을 버리고 떠났는데,그 이유는 장사를 하여 큰돈을
벌어 그 돈을 가난하고 못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또 장사하는 법도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는
일을 하기위해서였다고 합니다.그러나 그가 아무리 벌어서 도와줘도 백성들은 여전히 헐벗고 굶주린 것
을 보고는 그래서 토정은 아예 그들과 같이 자신도 그들이 사는 토굴속에서 같이 생활을 하면서, 직접 그
들에게 먹고살 수 있도록 농업과 공업, 그리고 상업에 대한 노하우를 그들의 적성에 맞쳐서 일일히 직접
개인 적성에 맞는 맞춤식 지도 방식으로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만든 짚신"
그렇게 가르쳐도 전혀 재주가 없어 못사는 사람에게는 짚신 삼는 법을 가르쳐 살아가게 했는데, 몇 달
지나니 그 짚신 삼는 기술을 배운 사람들도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드란 겁니다. 그렇게까지 하면
서 가르친거는 백성들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노력하지 않은 게으름에 원인이 있다는걸 스스로 알게
해 주려는 거였다고 하는 겁니다.즉 아무리 재주가 없어도 짚신은 삼을 수가 있는 것이니 그래서 고걸
가르쳐 보았다고 합니다.요로코롬 토정 선생이 밑바닥 백성들에게 까지 직접 개인 지도로 각 개인의
적성에 맟게 가르치는 방법은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묘하고 특이한 데가 있는 전인교육방법이
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요런 사람이였습니다. 부모의 산소 자리를 손수 마련하면서, 그 자리가 후손들에게 재상이 날
자리이지만,그러나 막내아들인 자신에게는 좋지 않다는 묘자리란 걸 알면서도, 선생은 그가 삼형제 중
막내인데도 우겨서 그곳에 묘를 썼다고 합니다. 뒤에 맏형 이지번의 아들인 이산해와 둘째 형 아들 이
산보는 모두 1품 벼슬을 했지만, 토정 선생 아들은 그 묘자리 때문인지...? 일찍 죽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그는 자신 보다는못사는 백성들은 물론 가족들을 배려하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살다 가
신분입니다.
이설화는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에 대한 전설이야기로 시대는 조선 시대 인데, 한국 설화에 있는 토정의
여러 설화들 중에서 삿갓이 중요한 것 만 참고해서 재편집해서 포스팅한 글입니다.이 설화를 재편집하
면서 이지함에 대한 그분의 이타적인 삶이 너무나 특이하다는점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행일치(言行一致) 즉 말과 행동을 같이 하고 실천한 분이였고 그리고 그분은 우리나라
전인교육의 창시자라고 해도 될 그런 인물이란, 걸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그게 큰 교훈이고 배웠던 수
확인것 같습니다.요즘 항간에는 토정(이지함)이 토정비결의 저작자이다 아니다란 설을 주장하는 사람
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삿갓은 전자에 동의하는 사람입니다.토정 비결의 점괘들의 내용을 보면 토정이 가난한 사람들
과 함께 동거동락하다 보니,그런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점을 넘 많이 보고 그 점괘에 삶을 의지하는 기
라...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건 오직 이 가난한 사람의 운이 잘 나와 희망을
갖이고 살도록 해주는 점괘가 나오도록 모든 점괘를 저작해 주는게 그들이 희망을 갖이고 살수가 있다
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리학과 주자학을 전공한 지함은 서경덕 선생과 율곡의 영향을 받아 역학,의학,천문,점술과 풍
수까지 정통해 여기에 뿌리를 두고 토정이 중국인들이 잘 보는 한해의 신수인 오행점을 참로로 해서 저
술한 책이 토정비결인데...이 오행 점과 좀 다른건 대부분 운이 좋게 나오게 저술 했다는 점 입니다만,
그런데도 행여라도 점괘의 운이 잘 못나오게 되면, 고런 경우는 요런걸 주의하면 된다라고 하는 처방까
지 첨부해 주는 점괘가 나오도록 저작해 주어... 잘못 나온 점괘의 우환 같은걸 미리 해결해 주어 그들의
지나친 걱정들을 없게 해 주었다는 겁니다.
그런 점괘와 처방이 나오게 한 것은...그렇게 해 주는 게,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
각했던 것 같습니다.그런 점괘을 나오게 해 그들이 살아가는데 늘 좋은 행동의 씨를 뿌리며 살아가도록
그 점괘로 유도 했고 고런 행동이 또 습관이 되고 생활화 되게 해서 고런 처방들이 그 사람의 성격형성이
되도록까지 유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토정비결의 점을 본 사람은 좋은 일만 하고 살아가도록 점괘를 만들어 유도 해 주었으니... 그
점괘를 받은 사람은 그 점괘를 믿다 보니,그 점괘가 유도한 되로 정직하게만 살아 갈수밖에 없었고,그러다
보니,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점괘되로 하는 행동을 보고는 착하다고 다 그 사람을 도와주게 되는 것
입니다.그러니,그 사람의 하는 일은 만사가 다 잘 풀리게되고 토정비결을 보고 그 점괘가 처방한 되로만 살
아가니,그렇게 실천한 사람들은 좋은 운만 생기니,그 토정이 저술한 점괘가 신통하다고 매년 마다 꼭 보는
그런 운수 대통 점괘의 책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 입니다.(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