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년 금속공예 외길 인생 '광주시 공예명장 1호' 우뚝이제 공예도 산업이다…장인의 요람을 찾아서 "공예는 나의 생명"…'스토리' 담긴 작품 제작 주력장애인협 활동 등 왕성 "'아트 주얼리' 체계화 바람""금속공예는 저의 또다른 생명이예요."광주 충장로 5가 도매상가 거리에서 빛고을귀금속공예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고경주(66)대표. 그에게 금속공예의 의미를 묻자 선뜻 '생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결혼 당시의 일화를 덧붙였다."결혼하려고 했을 때 집사람이 물었어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냐'고. 그래서 대답했죠. 첫번째는 망치고 당신은 두번째라고 했어요. 조금 서운해하던 기색이었는데…(웃음)"그렇게 고 대표는 50여년을 오롯이 금속을 망치로 두드리고 줄로 갈면서 장인의 삶을 살았다.힘들 때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눈 팔지 않고 쉼없이 달려왔다.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그는 전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금속공예 장인으로 우뚝 섰고, 올 6월에는 광주시 공예명장 1호에 등극했다.▲생계유지 위해 귀금속 선택 사실 고 대표는 몸이 불편하다. 어린 시절 앓은 소아마비 때문이다. 이 같은 신체적 결함이 고 대표로 하여금 공예에 발을 내딛게 한 요인이 됐다. 물론 그의 타고난 예술적 감각도 한몫 했다.그는 중학교 시절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녹록지 않았던 가정형편과 불편한 몸이 발목을 잡았다. 생계문제가 우선이었기 때문이었다.그래서 선택한 것이 금속공예였다.그 중에서도 반지·목걸이 등 부피가 작고 가벼우며 이동이 간편한 귀금속공예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고 대표는 1964년 서울 미도파백화점에서 귀금속공예점을 운영하던 고영석 선생의 문하로 들어갔다.고 선생은 당시 전국에서 다섯손가락 안에 들던 대장인이었다.고 대표는 고 선생 문하에서 도제방식으로 5년동안 혹독하게 기술전수를 받은 뒤 1년 정도 공백기를 보내고 다시 1년 6개월동안 숙련기간을 거쳤다.그렇게 7년여를 고 선생 문하에서 배우고 또 배운 고 대표는 1975년 순천에 '푸른태양'이란 귀금속공예연구소를 개설하고 본격적인 귀금속공예 장인의 길에 들었다.▲'스토리 삽입' 품격 차별화고 대표는 평범한 작품 제작을 거부한다. 그만큼 기술과 디자인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얘기다."스토리가 있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늘 고민해요.""비록 작은 반지고 목걸이지만 그래야 고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게 고 대표의 생각이다.고 대표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역사적 사건이 '5·18'이었다."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칼에 찔리고 시체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그 처참했던 광경을 지켜보면서 고 대표는 자료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고, 80년 말 작품 제작에 들어가 81년 '5월 그날이 다시오면'이란 제목의 금속 화병을 완성했다.이 화병은 현재 광주시청 1층 광주공예명장 작품관에 전시돼 있다.고 대표의 이 같은 작품 제작 경향은 2000년 귀금속 부문으로 확대됐다.반지나 목걸이를 상품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아트 주얼리'가 바로 그것이다.그 첫 시도가 함평군의 요청으로 나비축제에 전시한 '나비반지'였다.고 대표는 이 반지 속에 1년이 채 안되는 나비의 일생을 담았다.고 대표는 "작품에 치중하다 보면 경제적으론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도 "감동이 있는 작품을 포기하고 싶진 않다"고 말했다. 고 대표의 예술적 감각은 앞서가는 디자인으로도 표출됐다.대표적인 예가 지난 2008년 개발한 '꽃귀걸이'다.은을 재료로 한 귀걸이 틀에 조화를 꽂을 수 있도록 한 것으로 개발 당시 큰 호응을 얻었다.귀걸이가 '보석' 개념에서 '패션' 개념으로 변화하는 추세에 맞춰, 하나의 제품으로 다양한 개성을 연출할 수 있고 더불어 비용도 줄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아쉽게도 판매에서는 실패했다. 귀걸이에 꽃을 꽂는 것에 대한 여성들의 부정적 인식이 문제였다.고 대표는 "디자인이 유행을 앞서갈 경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가 쉽지 않다는 걸 배웠다"고 회고했다.▲'아트 주얼리 체계화' 바람고 대표는 작품활동 외에도 장애인 관련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왔다. 자신이 누구보다 그들의 처지를 잘 이해했기 때문이다.실제 고 대표는 지난 86년 사비를 들여 장애인기능개발협회를 만들었고, 무료 기술전수를 통해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취업의 길을 열어줬다.또 광주시장애인복지관이 건립된 이후에는 그곳에서 귀금속공예 전임강사로 활동했다.그렇게 해서 키워낸 장애 공예인들이 200여명에 달한다.이들은 대부분 국내는 물론 일본, 미국 등지에서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대표는 "이들이 국내외에서 자리를 잡고 제역할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고 대표는 "그동안의 대부분의 작업이 남들을 위한 상업적인 것이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예술 작품을 만드는데 주력하겠다"며 "이를 통해 '아트 주얼리'를 체계화하고 싶다"고 덧붙였다.글=윤승한·사진=오세옥기자 "기술-디자인 균형 발전 이뤄져야""디자인 부문만 중시 아쉬워"市 공예육성책 편향성 지적"공예산업이 발전하려면 기술 부문과 디자인 부문이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고경주 대표는 광주시의 수공예 육성 사업에 대해 "디자인만을 너무 중시하는 것 같다"며 정책의 편향성을 지적했다."공예를 크게 기술과 디자인으로 나눠 보면, 기술이 60% 디자인은 40% 가량의 비중을 차지해요. 과거에는 기술이 80∼90%를 차지했어요."그런데 광주시의 정책은 이를 역행하고 있다는 것이다."수공예사업의 시 예산이 5억가량인데 전액 디자인센터에 배정돼 있어요. 반면 정작 중요한 기술 개발이나 기술 전수 관련해선 한 푼도 없잖아요. 품질 보다 보여지는 포장에만 관심이 있다는 얘기예요."고 대표는 얼마 전 논란이 됐었던 천안의 명물 호도과자를 예로 들었다."겉포장은 그럴싸한데 속 알멩이는 천안산이 아닌 외국산 호도를 써서 난리가 났잖아요."디자인만을 중시하는 현 광주시의 정책은 공예 부문의 건전한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고 대표의 생각이다.겉포장만 멋지고 정작 품질이 떨어지면 누가 그 공예품을 다시 사겠느냐는 것이다."기술과 디자인이 같이 가야죠. 그래야 균형있는, 건전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고 대표는 "그러기 위해선 시의 정책도 기술과 디자인을 '6대4' 정도의 비중으로 추진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그는 "그 방안의 하나로 실질적인 기술 개발이나 교육, 전수가 가능한 기관·단체에 사업을 지원하는 문제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고 대표는 "일자리 창출 등 지역경제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균형있는 공예산업의 발전이 꼭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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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광역시 남구장애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홍보이사(박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