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학시절 청주엔 공설운동장이 없었다.
그래서 그 무슨 행사만 있으면 으례 무심천 둔치에 모여들곤 했다.
헌데 철철이 벌어지는 운동경기는 그런 무심천에선 어림도 없는 일이고 그 무심천 제방둑 밑에 커다란 운동장을 가지고 있는 청주공고 운동장이 정석이었다.
벗나무가 즐비한 그 무심천 제방아래 자리한 청주공고 운동장은 그야말로 광할했다.
축구며 배구, 농구, 테니스 등 모든 경기를 동시에 치룰수있는 거대한 운동장이었다.
거기서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 인근에 있던 우리 청주중학 캠버스에선 그 들려오는 환성들 때문에 그냥 교실에 죽치고 머물 기분이 아니었다.
어느 학급이나 수업을 일찍 중단하고 주루룩 달려서 한 5분거리의 그 운동장으로 집결하기 일쑤다.
헌데 우리학교 선수들은 폼은 그럴듯 한데 시합에는 늘 헛발질 판이고 엉망진창이었다.
사실 그시절 형편없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으니 그런것 가운데 시합도중에 본부석 우승기를 우격다짐으로 우리학교 응원석 앞에 꼽아 놓는 완전 날강도같은 해프닝도 있었다.
그런 짓들이 공공연한데는 따로 그 까닭이 있어 보였는데 거기에도 그 이데오르기 때문이라는 얘기였다.
해방정국의 소용도리가 한창이던 당시 청주엔 우리 청주중학을 위시해서 청주농업, 청주공업, 청주사범, 청주상업 그리고 청주여중과 청주여상이 있었는데 대개 청주중학과 청주공업 그리고 청주농업, 청주여중이 전통적으로 右派라면 영세민 출신이 많은 청주상업과 청주사범 청주여상 학생들의 사상이 조금은 좌편향한데서 늘 左右 패싸움이 빈번했었다 한다.
그 여파로 청주상업이나 청주사범은 늘 청주중학이나 청주공업등에 밀려 뒷골목으로 피해 숨어다니는 꼴이었다.
그러나 운동시합에선 소위 그들 좌파가 힘 한번 써 볼 절호의 찬스인데 거기서 마저도 그들 우파의 강세에 눌려 기세를 펴지 못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축구의 명문은 청주상업이었다.
우암산 중턱에서 남몰래 단련한 그들의 근육질 다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우락부락한 정기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최중심에 소위 "곤따로" 코치선생이 있었다.
아마 잘은 모르지만 그분의 姓氏가 權氏로서 그의 별명을 일본식으로 權太郞(곤따로)라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그는 청주상고나 그 부속중학교 턱인 대성중학의 체육선생이자 축구코치였다.
축구시합이 있는 날이면 그는 늘 그 학교 축구선수 유니폼믈 입고 운동장 한구석에서 거의 무표정인채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네 선수들의 동작만 살피는 식이었다.
구릿빛의 그의 종아리를 감싼 줄무늬의 스타킹이 퍽 인상적이었다.
盡人事 待天命이랄까!
다른 학교 코치들이 허세를 부리며 길길이 날뛰고 고함고함 지르는것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그저 입을 꽉 다물고 딱 버티고 서서 온갖 심판들의 엉터리 짓거리들을 그대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마치 낙타가 고개를 바짝 추켜들고 상대방을 노려보는듯 한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기상이 그 시합을 압도하고 있었다.
검붉게 탄 그의 온 몸에서 발산하는 그 무언의 열기가 그 시합을 지배하는것이다.
그러니 온갖 반칙과 협잡이 난무해도 최후의 우승은 늘 그들 淸商의 몫이었다.
바로 그곳 출신들이 마침내는 우리나라 축구의 수퍼스타로 군림하기에 이른다.
60년대 趙모선수 90년대 崔모 스트라이커 그리고 2002 월드컵의 李모 수문장등이 바로 그런 '곤따로'코치의 후예들인것이다.
지금도 살벌하기만 했던 그 운동장에서 '곤따로'코치선생의 그렇듯 무언의 뚝심어린 항변이 우리의 적이었지만 정말 멋있고 근사해 보였던 추억으로 새삼 떠 오른다.
이미 고인이 됐을 그 코치 '곤따로'선생을 그려 마지않는다.
그분이야 말로 당대의 프로 코치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