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신여다야
어릴 적부터 무엇 하나 풍족히 드셔본 적 없는 엄마에게 사과, 딸기, 귤은 ‘시다’는 말로 표현되는 과일이다. 굳이 그 시절로 돌아가 보지 않아도 학교 문턱 들어서는 날보다 강가에 쭈그려 앉아 남동생 기저귀 빠는 날이 더 많았을 엄마는 그 흔한 밭에 토마토 하나 마음껏 따 먹어 보지 못하는 맏딸의 삶을 살다 당신 아니면 못 산다는 사내를 만나 덜컥 결혼을 했다.
아버지를 만나 신접 살림을 차린 날부터 엄마는 여자가 아닌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고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이내 엄마가 되었다. 첫 아들을 낳고 얼마쯤 지나고 나자 엄마가 아니면 못 살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말은 금세 거짓말인 게 들통났다. 평소 술을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슬슬 농사일은 뒷전이고 읍내 대포 집에서 친구분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날 밤을 세우는 일이 잦아졌다. 밭일도 소홀해지고 엄마가 추수한 작물을 몰래 내다 팔고 며칠씩 집을 비우기도 해서 싸운 적도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당연히 봄부터 겨울까지 밭일이며 집안일은 엄마 몫이 되었다.
그렇게 엄마 속을 썩이더니 병을 얻은 아버지는 몇 년을 병석에 누워 계시다 엄마의 간호를 받는다고 또 오랫동안 엄마 손을 빌리셨고 그것이 못내 미안하셨는지 어느 여름날 서른을 갓 넘긴 엄마와 초등학교에 2학년 나와 일곱 살 동생을 남겨두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물 한 잔만 다오.”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셨다.
나는 너무 일찍 아버지라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아버지.” . “아빠.” 부르고 싶어도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없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아버지의 부재이지만 20년 전 결혼할 때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엄청난 반대에 부딪히며 뼈아픈 말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내 고충의 엄마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엄마가 홀로 우리 남매를 키웠던 시절만 해도 과부라는 말이 성행했다. 남편이 먼저 죽으면 그건 여자가 박복한 탓이라 여겼던 시대라 이웃들의 편견과 따가운 눈초리가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돌싱, 재혼, 새혼 같은 말들이 있고 각자의 삶을 존중하고 남들의 시선 보다 개인의 행복을 존중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예전에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 여자 혼자 애 키우는 집, 결손가정으로 인식되어 어딜 가나 기가 죽기 일쑤였다. 엄마가 가장이다 보니 늘 엄마가 퇴근해 돌아올 때까지 동생과 나는 고픈 배를 잡고 엄마를 기다렸던 기억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시간들이 다 옛말이 되었다. 생활력 강하시고 절약 정신이 강한 엄마는 혼자 힘으로 공장도 다니고 장사도 하시더니 임대 아파트도 얻고 집도 사고 나와 동생 결혼도 시키고 지금은 일흔이 넘어 쉬엄쉬엄 노인일자리를 나가시며 노후를 보내신다. 엄마가 살아오신 인생을 되돌아보면 단 한순간도 흐트러짐이 없다. 허투루 쓴 시간도 없다. 그런 고단한 삶 속에서도 상상도 못 할 유머가 있고 재치 있는 입담으로 시를 쓴다. 나는 엄마의 그런 입담을 닮아 글을 쓰는 재주를 물려받았다,
누구나 그러하듯 나 역시 나의 엄마가 자랑스럽다. 숱하게 당신을 향해 던진 사람들의 모진 눈초리와 거친 공격들을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스스로를 지켜내고 우리 남매를 키워내신 그 강인한 정신력을 존경한다. 나도 곧 쉰이 된다. 이만큼의 나이를 얻게 되니 딱 이만큼 보이는 엄마의 마음이 있다. 이제 엄마에게 사과, 딸기, 귤은 신맛만 나는 과일이 아님을 알려줘야 할 때가 왔다. 오랫동안 본인을 위해 새로운 맛을 찾기 위한 대가를 지불한 경험이 많지 않기에 어쩌면 사과와 딸기, 귤이 달콤함과 톡톡 튀는 상큼한 맛도 있다는 걸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