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목사가 전한 진리는 조선 민족을 자유케 하고 오늘의 우리가 있게 했다 언더우드는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 교회를 설립하고 경신학교와 연세대학을 세웠다. YMCA를 조직했고 한국어 문법책 ‘한어문전’과 영한사전인 ‘영조자전’을 편찬하였으며 ‘한국성교서회’(현 대한기독교서회)를 창설하였다. 최초의 악보 있는 한글 찬양가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는 조선 복음화와 근대화를 위해 인생을 다 바쳤으며 진정으로 한국과 한국 문화를 사랑한 사람이다.
이외에도 많은 업적이 있지만 선교사 언더우드의 모습은 한 작은 예화에서 잘 드러난다. 언더우드가 입국할 당시 조선은 공개적인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어 있었다. 교육자로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는 알렌의 제중원에서 일하며 선교의 열망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알렌의 어학 선생인 노춘경이 서재에 있던 한문 성경을 읽고 신앙고백을 하였다. 알렌은 국법을 내세워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이 국내에서 이루어진 프로테스탄트 세례의 첫 기록이다. 이 작은 일 하나가 그가 어떤 성향의 선교사였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1889년 3월 언더우드는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선교사 릴리어스 홀튼과 결혼했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 집안에만 갇혀 살던 조선 여성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했다. 그러기 위해 여성들도 여행을 하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그들의 의식을 깨우치고자 외국인들이 여행을 하기엔 아직 불안정하고 위험한 시기에 송도, 평양, 강계를 지나 의주까지 신혼여행을 떠났으며 많은 이들이 이들의 여행 행렬을 구경하였다. 여성들에 대한 언더우드의 관심과 배려는 선교사 벙커와 결혼하여 제중원 의학교를 그만 둔 엘러스에게 여학교 설립을 강력히 권면하여 정신여학당을 설립하게 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영국의 회중교회 출신으로 네덜란드 개혁교회 계통의 교회와 신학교에서 훈련 받았으며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에 의해 한국에 파송되었다. 미국 감리회 선교사인 아펜젤러와 함께 교파를 초월한 선교 활동을 펼쳐나가며 한국에서 복음주의적 단일 교회를 세우자고 의논하고 ‘한국기독교회’라는 이름까지 지었으나 본국 교회의 높은 교파주의의 장벽을 넘지 못해 무산되었다. “내 평생 이 땅에 장로니 감리니 하는 교파의 구별이 없는 하나의 교회가 설립되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말한 언더우드였지만 장로교 선교사로서의 정체성은 분명하였다. 그는 ‘자전 자치 자립’이라는 네비어스 선교의 삼자원칙을 받아들여 ‘한국장로교 선교원칙’을 마련했고 여기서 ‘트라이앵글 메소드’라고 불리는 독특한 한국 선교의 모형이 생겨났다. ‘트라이앵글 메소드’는 학교 옆에 병원, 병원 옆에 교회라는 삼각 꼭지점의 종합 선교 거점을 뜻하는데 중요 선교 거점 도시마다 그대로 실현되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 교회 초기 모습. 새문안 교회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미국 선교회에 보낸 아펜젤러의 보고서에는 일본을 거쳐 제물포로 들어온 이야기와 도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황당한 이야기와 이후에 조선에서 선교 사업을 진행한 모든 과정이 일기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펜젤러가 입국할 당시 조선은 불과 4개월 전에 일어난 갑신정변으로 시국이 불안한 상태였다. 신혼부부로 임신 중인 아내와 동행한 아펜젤러는 미국공사의 권유로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아내를 남겨두고 스크랜톤과 함께 5월 3일에 입국한다. 서울에 정착한 아펜젤러는 교육사업에 착수한다. 두 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해 1886년 6월 8일 고종 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학교명과 현판을 하사받았다.
1887년 10월 9일에는 한국 개신교의 모교회인 정동감리교회를 창립했다. “우리는 9월에 작은 집 한 채를 샀다. 여기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10월 9일, 나는 처음으로 조선 사람들을 위한 공중 예배를 드렸다…다음 주일 나는 성경 매서인의 아내인 28세의 젊은 부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부인은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 세례 받은 최초의 여인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 내에 협성회를 조직했다. 협성회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학생회이며 서구식 의회법을 제일 먼저 실천한 단체다.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독립협회를 조직할 당시부터 관여하여 독립문의 주춧돌을 놓을 때는 배재학당 학생들을 동원하여 예식의 순서를 맡게 하고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옥고를 치를 때 도움을 주는 등 민주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육성했다.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협성회보’ 등을 발간하며 문서운동과 성서번역 사업을 이끌던 아펜젤러는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고 가던 중 선박 사고로 목포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45세였다. 조수 조한규와 이화학당 학생을 데리고 함께 가다 당한 사고에서 마지막까지 이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다 숨졌다고 한다. 고종에게 학교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은 배재학당. 지금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언더우드에 비해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과 조선 사람을 사랑하여 불꽃같은 인생을 살다 간 아름다운 선교사의 죽음은 13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마음 한 구석 아픈 감사로 기억되고 있다. 아펜젤러의 죽음으로 안식년에 미국에 가 있던 자녀들은 성장기 동안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까지 마친 아펜젤러 2세는 다시 돌아와 배재학당 4대 교장이 되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이화여자전문학교 초대교장이 된 맏딸 앨리스 역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한국의 교육 사업을 이어가 선교 사명을 끝까지 이루어냈다. 제자 김활란을 후계자로 세우고 명예총장으로 예배를 인도하던 중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뇌출혈로 쓰러져 별세한 앨리스 장례는 정동교회장으로 치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