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센터 나비가 소재하는 서린동 99번지에 위치한 SK 사옥 로비에는 백남준의 <TV 첼로(TV CELLO)>(1980)와 박현기의 <현현(顯現)>(1999)이 옆으로 나란히 설치되어 있다. 그 두 작품은 1999년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 관장이 직접 선정하여 SK 사옥 ‘환경조형물’로 서울시 심의를 통과해 소장된 작품들이다. 물론 오늘날 ‘미디어 아트’라는 용어는 언론을 통해 자주 보도되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용어이다. 하지만 1999년 ‘미디어 아트’는 생소한 용어였다. 따라서 당시 ‘미디어 아트’를 신축건물에 환경조형물로 선정하고 심의까지 통과했다는 것은 놀랍기까지 하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오늘날도 여전히 신축건물들 앞에 ‘식상한’ 환경조형물이 설치되고 있으니 말이다.
박현기 <현현(顯現)> 1999
백남준과 박현기의 작품들은 아트센터 나비가 공식적으로 개관한 2000년 1월 1일 <<멀티미디어 아트 프로젝트>>라는 타이틀로 첫 선을 보였다. 그러나 외람되게도 백남준과 박현기는 모두 아트센터 나비의 개관전 오프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백남준은 당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릴 <<백남준의 세계>> 전시준비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고, 박현기는 암투병으로 인해 참석하지 못했다.
아트센터 나비 노소영 관장의 회고에 의하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당시 박현기 선생님은 몇 개월 전부터 암 투병 중이신대도 전혀 말씀하시지 않고 작품 구상에서부터 설치까지 일일이 직접 책임감 있게 관여하셨습니다. 고요함 속의 움직임을 통해 감동을 주는 선생님의 <顯現>처럼 선생님은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이면서 자신의 진술은 명확하게 전달하셨던 멋있는 분으로 기억합니다.”
박현기는 2000년 1월 13일 결국 세상을 하직했다. 따라서 SK 사옥 로비에 설치된 <현현>은 박현기의 유작(遺作)이 되는 셈이다. 박현기의 <현현>은 선돌과 사각의 돌판(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사각의 돌판 표면에는 천장에 설치된 모니터(LCD Player)에서 투사된 연못의 영상을 담고 있다. 흥미롭게도 선돌은 양(陽)으로 그리고 돌판의 연못(영상)은 음(陰)으로 비유된다는 점에서, 박현기의 <현현>은 일종의 ‘현대판 산수화’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흔히 ‘비디오 아트’하면 ‘백남준’(1932-2006)을 쉽게 떠올린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백남준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즉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하지만 그가 대한민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는 아니다. ‘대한민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는 박현기(1942-2000)이다. 왜냐하면 백남준이 대한민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1970년대 중반 대한민국 대구에서 처음으로 비디오 아트를 작업한 아티스트가 바로 박현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현기는 백남준에 가려져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박현기는 1942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는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수료하고 건축과로 전과해 졸업했다. 박현기는 70년대 초 서울에서 고향 대구로 내려가 건축사무소 큐빅을 운영하면서 현대미술 운동에 동참하며 행위예술과 비디오 아트 등 급진적인 작업을 했다. 박현기는 사일구 세대의 작가이다. 물론 그는 사일구 당시 20세가 채 되지 못한 18세였다. 그러나 김현의 목소리를 빌려 말하자면 박현기는 한글세대로 사일구식으로 세상을 읽는 분단세대라고 말이다. 따라서 그에게 분단은 해석이나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분단은 박현기의 작품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사일구 세대는 TV를 보면서 자라난 세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중학교를 다닐 때 TV가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이 TV 보급으로 인해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현기는 대부분의 사일구 세대가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새로운 미디어에 주목했다. 박현기는 자신이 미디어 아트를 시작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박현기 왈, “1974년 대구 미국문화원 자료실에서 우연히 백남준 선생님의 비디오 작품(Global Groove)을 보고 비디오 아트에 매료되었습니다.”
70년대 중반 박현기는 밀수품으로 국내에 들어온 소니(sony) 비디오를 구입하면서 새로운 매체에 대한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 1977년 대구 현대미술제를 통해 처음으로 박현기는 자신의 비디오 작품을 선보인다. 그것은 사진관 암실의 현상용 트레이에 담긴 물을 휘저어 물결을 만든 후 원상태로 돌아가는 과정을 촬영한 비디오 작품이다. 그런데 그 물 표면에는 전기 스텐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물을 휘저어 물결을 만들면 그 그림자가 해체되었다가 물결이 잔잔해 지면 그림자가 원 상태로 돌아가는 일종의 ‘윤회’를 느끼게 하는 영상작품이다.
박현기 <비디오 돌탑> 1978
하지만 박현기의 트레이드마크로 알려진 작품은 ‘비디오 돌탑’이다. 1978년 박현기는 돌들을 쌓아 만든 돌탑 사이에 TV 모니터를 삽입시킨 일명 <비디오 돌탑>을 제작한다. 박현기의 <비디오 돌탑>은 TV화면 속 가상의 돌이 실재 돌탑에 삽입되어 ‘가상과 실재’ 사이에서 놀이한다. 심플하면서도 관객의 딋통수를 때리는 <비디오 돌탑>은 박현기를 1979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와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박현기 <물 기울기> 비디오 퍼포먼스. 1979
박현기는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물 기울기> 비디오 퍼포먼스를 행했다. 그 퍼포먼스는 물이 찬 영상을 담은 TV 모니터를 들고 작가가 모니터를 기울이는 각도에 따라 물의 기울기가 달라 보이게 하는 깜찍한 상황을 연출한 작품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TV 모니터의 영상은 이미 촬영된 것으로 박현기는 이미 촬영된 영상을 따라 행동해 마치 작가의 행동에 따라 모니터에 담긴 물이 기울어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같은 해 박현기는 대구 현대미술제에 TV 속 물고기가 어항 속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보이는 <TV어항>을 출품한다. 박현기의 <TV어항>은 TV 모니터의 프레임이 마치 어항처럼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비디오로 그리는 동양화’라는 찬사도 받았다.
물론 뉴미디어 아트가 대세인 오늘날 박현기의 비디오 아트는 새롭게 보이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박현기의 비디오 작품이 국내에 컬러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도 전인 1970년대 말경 제작된 것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비디오 작품이 “척박한 땅에 쌓아 올린 비디오 탑”이라는 강태희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