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워할 뿐…
수행이란 끝이 없는 것으로
수행 기간이 길고 짧음에 차별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이 여겨야 한다.
- 벽안 스님 -
내가 출가하여 금강산 마하연(摩詞衍) 선방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처음 하게 됐다.
그 당시 조실스님은 고(故) 석우(石友) 노(老) 화상이고
입승(立繩)은 청담(靑潭) 화상이며 대화주(大化主)는 적음(寂音) 화상이었다.
국내의 이름난 선객(禪客)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70이 넘었다.
현 해인총림방장(海印叢林方丈) 성철(性撤) 화상, 고(故) 지월(指月) 화상도 참방(參榜)했다.
그때 스님들의 정진은 밤낮의 분별이 없었고 계행(戒行)은 모두 청정하였다.
그때 내 생각으로는 지월 스님이 참된 보살이라고 여겨 큰 감명을 받았다.
스님은 말을 항시 묵언과 같은 태도로 대화를 나누었으며
복잡한 일이 있으면 “소승이 하겠습니다.”하고 다라니 외듯 도맡아 하곤 했다.
나는 초발심(初發心)한 거사(居士)로서 말석에 참여해서 시자(侍子) 노릇을 했다.
그 해가 기묘년(己卯年)이었다.
그다음 해에도 다시 금강산에 들어가서 또한 마하연 선방(禪房)에서 하안거를 마치었다.
그 후 제방선원(諸方禪院)을 편력하면서 수십 성상(星霜)을 보냈다.
정신생활은 참으로 인간을 경질(更迭)하는 야로(冶爐)이다.
이 용광로를 거쳐야만 승가의 본분을 그 나름대로 수호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화 후에는 행정 부문에 발을 붙여 오늘에 이르도록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림을 실로 참괴해 마지않는다.
옛글에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하셨으니,
도인의 행은 무애(無碍)의 길이 될 것이나 미혹한 이가 길에 나서면 행여 잘못됨이 없지 않다.
승가의 본분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참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 뭇사람의 사표(師表)가 되어야 하리라.
초심납자는 부질없이 허황(虛荒)된 짓으로 세월 보내는 것을 삼가서 바른 믿음을 가지고
마음을 밝혀 애욕과 분노와 우치(愚痴)를 벗어나는 길을 찾도록 전력(全力)해야 한다.
처음 먹은 의지를 굳게 지켜 스스로 꾸짖어 게을리 말고,
공부 중에 잘못됨을 알았거든 즉시 고쳐서 바른길로 가도록 채찍질함이 옳다.
또한 초심자는 복잡하고 세간의 정이 끓는 곳을 벗어나
조용한 곳을 찾아 부지런히 수행해야 하리라.
조금 공부가 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자만하고
세속만능(世俗萬能)에 휩쓸리려 한다면 마(魔)가 그자에게서 끊이지 않으리라.
관(觀)하는 힘이 없어 함부로 속단하여 제 잘난 체만 한다면
헛된 세월만 보내고 말 것이니 부지런히 자기를 닦아 관(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그리하는 자는 뒤에 시정(市井)에 나서도 오욕(五慾)에 흔들리지 않아
참다운 공부를 계속하여 행하는 일이 더욱 깨끗해질 것이다.
이렇게 오래 계속하면 선정과 지혜가 저절로 원만해져 제 성품을 볼 수 있으며
자비와 지혜로 중생을 제도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흑자는 시간만 지나면 대도(大道)가 이루어지는 줄 알아 법랍(法臘) 자랑하기를 즐겨하지만,
수행이란 끝이 없는 것으로, 수행 기간이 길고 짧음에 차별을 두지 말고
오직 자기의 허물을 부끄러이 여겨야 한다.
우리 종단의 현실은 수행 생활에 집중하지 않는 승려가 너무 많다는 여론이 없지 않다.
종단의 여러 선지식은 후진들을 위해서 자비를 베풀고 정진에 힘쓰도록 이끌어 줌으로
청정한 승가가 대다수 나타나 국가와 민족의 복리증진에 지표가 되도록 해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초심 납자(衲子)에게 참고가 될 만한 옛 조사의 게송을 소개한다.
자세하게 화두를 들되 들뜨지도 말고
또한 혼침(昏沈) 되지도 말라.
비고 밝음은 물에 비친 달과 같고
늦고 급함은 거문고 줄 같아
병든 사람이 의원을 찾듯이
배고픈 아기가 어머니를 생각하듯이 공부를 친절히 하면
아침에 붉은 해가 동녘 하늘에 솟아오르도다.
- 벽안 스님 - [197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