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 귀인
며칠 전 반가운 전화가 왔다. H군의 전화다. 군 제대 후 복학하여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고 한다. 전화로 우선 축하를 전하고 연수가 끝나면 만나기로 하였다. 취직하면 주려고 명합지갑과 볼펜을 준비하여 두고 있다.
속설을 신봉하시는 어머니는 매년 정초 즈음에 절에서 토정비결을 보고 오셨다. 내용은 해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안 변하는 게 하나 있었다. 남방에서 귀인이 와서 돕는다는 내용이다. 부산 집이 바닷가에서 1km 정도 북쪽에 위치해 있는지라 내게 '남방 귀인'이라 하면 남쪽의 해안가 사람이나 제주도 사람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다. 도움을 받을 확률도 희박하거니와 이런 걸 안 믿을 사건도 하나 있었다.
고등학교 추첨하러 가는 날, 어머니는 절에서 받아 온 부적을 교복 안에 넣어주셨다. 은근히 부처님의 가호 아래 명문인 K 고등학교에 배정이 되리라 기대를 하셨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집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다 평판도 그리 좋지 않은 불교 재단의 학교로 배정이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뜻이 있어 불교 학교로 이끌어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부터 미신 비슷한 것은 믿지 않게 되었다. 나중에 원하는 대학에 가지도 못했고, 인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회사에서 30년 넘게 근무했지만 업무 관계로 한 번도 고등학교 선배를 만난 적이 없는 걸 보면 부적의 효력은 없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인생에 남방 귀인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조금 가지고 있다. 굳이 따져보니 인생에서 남방 귀인의 도움을 받은 일이 있기는 있었다 군에 입대했을 때 논산의 수용연대에서 뒷집 친구를 만난 것이다. 그 친구 집은 우리 집보다 5m 남쪽이었다. 그 덕분에 6주간의 훈련 기간에 장군의 아들도 막 대하던 내무반장이 군대 동기의 친구라고 약간씩 열외를 시켜주었다. 훈련병의 열외는 대단한 특혜(?)였다.
10여 년 전 직장에서 동남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장학재단을 맡아 운영한 적이 있다. 10여 개 국의 중ㆍ 고등학생 수백 명에게 장학금을 주는 재단이다. 기본 보직이 있는 상태에서 겸직을 했고 한 학생당 장학금도 금액이 크지 않았으니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어느 날 담당 직원이 몽골대사관의 전화를 돌려주었다. 몽골의 교육부 장관이 한국에 오는데 나를 만나고 싶다는 전화였다. 일정을 잡고는 몽골에 대한 공부도 약간 하고 잘 못하는 영어로 대화할 준비도 마쳤다. 2주일 후 몽골의 장관이 내방하였다. 잠깐의 환담 후 보드카 1병을 선물로 주면서 수없이 "Thank you so much."를 말씀하시고 떠났다. 그날 저녁에 직원들과 보드카를 나눠 마시면서 금액도 많지 않은데 장관이 인사를 하러 오는 상황에 대하여 조금은 민망하다고 했지만 자그마한 보람도 느꼈다. 장학금을 받은 몽골 학생의 입장에서는 우리 회사가 남방 귀인이었으리라.
그때 문득 내 머리에 떠오른 건 내게 남방 귀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누군가의 남방 귀인이 되자.'라는 생각이있다. 2016년 금리 하락을 예상하고 조금 큰 금액을 투자했던 외국 채권에서 기대 이상의 수익이 났다. 그 돈으로 뭘 할까 고민하다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고 학생 1명을 선발하여 4년 간 장학금을 주었다. 그 학생이 H 군이다. 장학재단을 맡아 운영하지 않았으면 생각지도 않았을 일이다. 이후에도 수익이 나면 2호 3호.. 장학생을 만들고 싶었으나 그 뒤로는 그저 생활비와 여행 경비나 조금 벌 뿐이다.
아직은 내 인생에 진정한 남방 귀인이 찾아올 것이라고 기대를 한다. 대학 때부터 서울 살이를 했으니 서울 남쪽의 지역 사람은 다 남방 귀인이 될 수 있으리라 여긴다. 그래서 부산 태생인 아내가 내 인생의 가장 귀한 남방 귀인일 수도 있다! 그러면 부적의 효과로 불교 재단의 학교를 간 것부터가 아내를 만나게 되는 인연의 과정이 아닐까? 그리 생각하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부처님의 은혜가 가없다고 느껴진다
이상호 부산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