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앙 잡설 -5/5-
<몽매(蒙昧)의 팡세> (8)
2013년 7월 31일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기독교 문답'의 '예정론'
1.
내가 조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볼 수 있고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성결(聖潔)을 마음에 느낄수 있게 된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기독교는 과학과 마찬가지로 첫째로 사실이 있으며 그 후에 이론이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의 실험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豫定)>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이 증명되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2.
진심으로 말하건대 나(우치무라 간조)는 착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훨씬 선한 사람이 많다.
내게 무언가 선(善)한 구석이 있어서 하느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마음 속에 악이 가득찼음을 나처럼 철저히 느끼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무엇을 내가 지녔기 때문에 내가 크리스찬이 된 것이 절대로 아니다.
나는 억지로 크리스찬이 된 것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통적인 사무라이 집안 출신)
만일 내 생애가 나의 의지와 계획대로 되었더라면 나는 결코 크리스찬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세상에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전파한다는 짓거리는 내가 진심으로 거부하고 회피한 일이었다. (우치무라 간조는 '성서의 연구' 발행인으로도 유명하다)
크리스찬이 된 후에도 '제발 제발 전도사만은 되지 말게 해줍시사' 하고 얼마나 기도를 하였던지.
이 사실은 내 친구들이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전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셨을 때, 그나마 나의 애국심이나 공의심(公義心)이 가장 왕성할 때가 아니었다.
내가 실망하고 낙담했을 때였고, 내 마음 속에서 백귀(百鬼)가 날뛸 때였다.
3.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전도를 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상한 사실일 것이다.
진심으로 크리스찬이 되기를 바라고 열성껏 전도한 사람은 아니되고, 유전이나 교육이나 환경이나 심지어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엉뚱한 사람이 크리스찬이 된다는.
기독교의 감화력(感化力)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경험에 의하면 이 감화는 영혼의 중심에 까지 이르지 못하더라.
감화를 받는 영혼은 따로 있었다.
아, 서로 배리(背理)되는 이 의외성(意外性)을 어떻게 설명하랴.
그리하여 나는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선(善)을 행할 자유는 주셨지만 영혼을 살리는 일 만은 당신의 손에 보유(保有)해 두신걸로 확신한다.
이 확신은 나 자신의 '사실의 실험'에 의하여 얻은 것이다.
성서를 보라.
<나자렛에서 무슨 선한 자가 날 수 있느냐,>
그리스도 자신도 환경(環境)의 아들이 아니었다.
열두제자를 보라. 모두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을 보라.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하신 바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의 회심(回心)을 어떻게 이해할수 있는가.
4.
로마 천주교에는 수많은 유식한 신학박사(神學博士)들이 있었지만, 복음(福音)을 초대(初代)의 순결(純潔)로 돌아가게 한 사람은 광부의 아들 '루터'였다.
단상(壇上) 하나 갖지 못한 '존 웨슬레'가 근세 종교적 신기원을 열지 않았나.
느끼건대 오히려 교회를 천시(賤視)하고 신학교를 경시(輕視)하는 하나님이시다.
확언(確言)하는바 하나님은 교회나 신학교를 중요한 예정사역(豫定使役)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셨다.
요즘도 신학교에서는 가장 순수한 기독교가 나오지 않는다
‘무디’나 ‘헨리 드라민드’처럼 신학자도 아니고 목사도 아닌 자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자였다.
(아시다시피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의 창시자)
'올리버 크롬웰'을 들어 보라.
“나는 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아, 나는 어둠 속에서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미워했다.나는 큰 죄인이다. 그렇다. 죄인의 괴수이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성스러운 것을 미워했다. 그러나 하느님은 나를 돌보셨다. 아, 하나님의 은혜는 얼마나 큰지. 바라건대 나를 위해 하나님을 찬미하여라. 나를 위해 기도해 다오. 내 안에서 사업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날에 이것을 완성하시기를! -'크롬웰'이 그의 사촌 여동생 '센트 존' 부인에게 보낸 편지의 한 대목- 카아라일 저 '크롭웰전' 중에서-”
5.
당연히 예정설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때부터 제기된 의문이 있다.
"예정이 진리라면 인간은 자기의 구원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 아닌가."
이미 구원받을 자와 멸망되어질 자로 구분되어 있는데 무어하러 괴로워 할 것이며 무어하러 몸부림 칠 것인가.
복불복(福不福)의 운명(運命)이 아닌가.
"편애(偏愛)로 피조물을 구분하여 결정하신 분을 어찌 공평(公平)과 공의(公義)의 하나님으로 부를수 있으랴."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반박이다.
창조(創造)와 피조(被造)의 속성(屬性)을 곰곰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그 뜻을 누가 대적하느뇨.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이 없겠느냐 -로마서 9장>
공평(公平)과 공의(公義)를 들어 하나님을 힐문(詰問)하는겐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을 탓하려면 자연(自然)도 탓해야 하지 않는가.
자연이란 얼마나 불공평한 것인가.
사자(師子)는 동물의 왕으로 포식자이고 양이나 사슴은 그들의 배를 불려주는 먹이감이다.
누구는 모두 돌아보는 미인(美人)으로 누구는 얼굴을 돌려버리는 추녀(醜女)로, 누구는 띵까띵까 부자집 자식으로 누구는 지지리궁상 가난뱅이로 태어난다.
뱀은 어째서 미움받고 비둘기는 왜 사랑받는 존재인가.
자연에 충만(充滿)한 그 이치를, 그 이유를 당신은 아는가?
아, 피조물(被造物)로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 밖에는 없다.
"그와 같은 이치는 우리가 알 바 아니다. 자연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걸 알 뿐이지 그 밖의 원인과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6.
그렇다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받은 자들은 무조건적으로 행복을 쟁취한 자들로 여기려는가.
그들의 풍모(風貌)는 고아(高雅)하며 삐까번쩍 황금 옷을 걸치는 줄 아는가.
아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서 53장>
그들의 신고(辛苦)는 보통사람이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험, 검(劒), 교회에서의 추방, 부모형제로 부터의 소외와 모욕, 친구로부터 위선자로 매도.., 그 밖에 말 못할 고통이 그들을 엄습한다.
그 비통과 굴욕을 참고 견뎌야 하는 자들이 바로 선택된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주어진 자들인 것이다.
고통은 현세(現世)에서 먼저 맞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榮光)은 미지(未知)의 영역에서 나중에 맞는다.
예수께서 부르짖으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하실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우리같은 작은 자들임에랴.
우리는 예정의 고통을 참지 못하고 기독교 신자의 특권을 포기하려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豫定)이 먼저 알려진다면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자들은 그 예정에 동참(同參)하지 않게 되기를 간절하게 기도할 것이다.
7.
또 반박 할 것이다.
예정이 진리(眞理)라면 기독교란 얼마나 허무한 종교인가.
하나님이 점지한 자가 따로 있는데 복음을 전파한다는 건 또 얼마나 허망한 노릇인가.
전도(傳道)를 하나 안하나, 심지어는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하나님이 점지한 자는 반드시 구원을 받는다는데 전도할 필요가 어디에 있단 말가.
그러나 전도(傳道)라는 건 세상에서 알고있는 그런게 아니다
나는 지자(智者)요 너는 우자(愚者)이기 때문에 전도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방의 몽매(蒙昧)함을 깨우쳐 준다는 교만(驕慢)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전도가 아니다.
또한 나는 구원받고 너는 타락했기 때문에 나는 너를 거두어준다는 교만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요컨대 기독교의 전도는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전도가 아니다.
세상의 교사(敎師)의 입장으로 전도에 임하는게 아니다,
8.
다음을 아는게 전도 성공의 첫째 요건이다
첫째, 전도는 하나의 고백(告白)이라는 점이다
전도는 '네 죄가 이러저러하니 네 죄를 회개하라'는 게 아니다.
'나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이러저러하게 될수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이것을 알리려고 한다,'는 자세.
바로 그것이다.
즉 훈계적(訓戒的)이 아니라 발표적(發表的)인 것이다
바울의 서신(書信)을 읽어보라.
바울은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을 표본(標本)으로 하여 세상에 자신의 고백(告白)을 들려 줄 뿐이다.
기독교는 이론이 아니라 실험이다,
신학연구(神學硏究)는 아무리 그 오의(奧義)에 도달하였다 하더라도 기독교의 전도사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세상에 보여줄 심령적실험(心靈的實驗)을 갖지 못한 사람은 전도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 전도는 감사(感謝)의 제사(祭祀)이다.
세상의 죄악에 분노하여 전도에 나서는게 아니다.
분노해야 할 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죄에 대해서다.
또한 다른 사람의 타락을 가엾게 여겨 구원사업(救援事業)을 하는 것도 아니다
가엾게 여겨야 할 것은 죄인의 괴수인 자기자신인데 누구를 가엾게 여긴다는 말인가.
전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격려(激勵)되고 고무(鼓舞)된 자기자신의 표출(表出)이다.
아무리 침묵을 지키려해도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기쁨으로 안절부절 못하기 때문이다.
젖먹이가 옹알이 하듯, 하나님이 내 입을 열기 때문이다.
의무에 강요(强要)되어 종사(從事)하는 전도는 전도가 아니다.
마음 속에서 역사(役事)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자극되어 자발적으로 착수(着手)하는 사업이 전도이다.
기독교 전도는 의무가 아니라 특전(特典)인 것이다.
쾌락이고 도락이다.
이와 같은 환희(歡喜)가 없는 전도는 반드시 실패하고 만다
예정신앙(豫定信仰), 그것은 전도에 방해가 되기는 커녕 전도의 정신을 더욱 북돋아 준다.
예정은 인간에 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관념(義務觀念)을 크게 늘여주는 것이다.
예정신앙은 그 어떤 박해(迫害)도 모진 굶주림도 견딜수 있는 힘이다
전도란 혹여 이기적 애국심의 변형된 모습이 아닌가하고 묻는다면.
아니다.
'리빙스턴'은 그의 애국심에 격려되어 영국에게 새 영토를 얻으려고 아프리카 전도한 게 아니다.
모라비아의 선교사는 애국심에 격려되어 그린랜드의 빙산 속 에스키모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애국심은 분명 강대한 힘임에는 틀림없다, (우치무라 간조는 일본을 사랑하고 걱정한 진정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애국심을 전도의 정신으로 삼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사회개량의 수단으로서의 전도는 어떠할까. (기독교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침탈의 첨병이기도 하였지만 근대 건전한 산업사회의 자본주의 정착에도 지대한 기여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사회개량과 진보에 있어서 기독교적 전도가 가장 큰 힘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크리스찬은 사회개량을 목적으로 전도에 종사할수는 없다
사회개량 되건말건 그게 크리스찬의 힘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
오직 그것만이 전도자를 지배하는 유일한 힘이다.
9.
거듭 묻는 택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애시당초 확정되어져 있는데, 전도할 보람은 어디 있단 말가.
복음 전파의 목적은 크리스찬을 만들기 위한게 아니라, 크리스찬을 찾기 위한 것이다. (예정된 자를)
경험많은 크리스찬은 이 사실을 뻐저리게 느낄 것이다.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2장>
예정된 자가 드러나는 것, 이것이 전도에 성공하는 표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일렀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려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4장>
씨는 이미 하나님이 에정에 의하여 뿌리신 것.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이 씨를 뿌린 밭에서 여문 곡식을 추수하러 갈 뿐이다.
10.
숙고(熟考)하라, 너 삐딱한 자여.
하나님의 예정(豫定)과 선택(選擇).
숙명적(宿命的) 결정론(決定論)으로 인식하여 회의하거나 도피하지 말 것.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있다는 실존적 자아의식, 인식의 리얼리즘이 되도록 할 것.
벌을 주거나 멸망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의 자비와 사랑에 의해서 구원하려는 은총의 역사(役事).
은총을 느낄 것.
나의 신앙고백(信仰告白)이 되도록.
그래, 기도 할 것.
11.
아아, 나의 팡세는 천비(賤婢)한 지식과 척박한 사유(思惟)로 힘들어하며 헐떡인다.
12.
언필칭 팡세라니, 몽매가 백치(白痴)에 이르렀다.
주여, 도우소서.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