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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염려
출 4:1-9
1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5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6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8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9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출 4:1-9 / [모세가 이의를 제기하다] 모세가 하나님께 여쭈었다. `그들이 저를 믿지도 않고 제 말을 듣지도 않으며 여호와께서 제게 나타나시지 않으셨다고들 말할 것입니다.' 2)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3) `그것을 땅에 던져라' 그래서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되었다. 모세가 무서워하며 피하자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아라.'' 모세가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자 그의 손에서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5)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그들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가 네게 나타났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이다.' 하시고 6)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손을 품에 넣어 보아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냈더니 손에 문둥병이 생겨 눈처럼 하얗게 변해 버렸다. 7) 여호와께서 `다시 손을 품속에 넣었다가 꺼내 보아라.'고 말씀하셨다. 모세가 그대로 하였더니 본디 살갗으로 되돌아와 깨끗해졌다. 8)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그들이 너를 믿지 않고 처음 이적을 표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두번째 이적은 표징으로 믿을 것이다. 9) 그런데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않고 네 말을 듣지도 않거든 강물을 조금 떠다가 땅바닥에 쏟아라. 네가 떠다가 쏟아 부은 그 물이 땅바닥에서 피로 변하리라.'
앞 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시고, 그와 동행하고 후원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부르심에 주저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1)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형편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40년 전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자로 나섰다가 동족의 배척을 받았던 것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또한 400년 간 나타나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나타나셨다고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르심에 주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땅에 던지라(2-5) 여호와께서는 주저하는 모세에게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하십니다. 그리고 지팡이라고 대답하는 모세에게 그것을 땅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이때 그 지팡이는 뱀으로 변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여 순종하였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는 주저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소명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하여 지팡이가 뱀으로, 뱀이 지팡이로 바뀌는 이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네 손을 품에 넣으라(6-7) 두 번째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그의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신 후 손을 품에서 꺼내라고 하십니다. 그의 손을 꺼내고 보니 그 손에는 나병이 생겼으며, ‘다시 품에 넣으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넣었다가 내어보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구약시대의 나병은 심판과 저주를 상징하는 질병이었습니다. 이러한 나병은 스스로 벗어나기 어려운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살이와 천대 또는 부도덕과 우상 숭배에 더럽혀진 모습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모세의 손을 회복시킨 이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복시켜 주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8-9)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을지라도, 두 번째 표적을 볼 때에 믿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해도 믿지 않는다면 나일 강의 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면 피가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나일 강의 물이 피로 변한다는 것은, 그 강의 신에 대한 심판과 나일 강의 신보다 하나님이 더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적용: 당신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나 말씀에 주저한 적은 없습니까? 그 때마다 주로 하는 핑계는 어떤 것입니까? 핑계보다 순종하는 것이 복됨에 대하여 나누어 봅시다.
‘살다 보면 흔히 저지르게 되는 두 가지 실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예 시작도 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끝까지 하지 않는 것입니다.-파울로 코엘료 <마법의 순간> 중에서.
모세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을 거부하거나 위협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필요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결점을 이유로 거듭 사명을 거부합니다. 모세의 두려움을 아신 하나님은 책망하지 않으시고, 세 가지 이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우리도 겸손을 핑계로 하나님의 적극적인 음성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순종하기를 망설이는 소극적인 마음이 있다면, 허물 많은 모세를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
출 4:1-9 / 이성우 목사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고 있었던 모세를 불러서 애급에 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키라고 하는 엄청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사명을 받은 모세는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주저하며 핑계를 대게 되었습니다.
❶ 이미 쫓겨나온 곳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애급에서 태어나 바로 왕의 딸이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기 동족인 히브리인을 향해서 폭력을 행사하는 애급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나면서 미디안으로 망명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급에 다시 갈 수가 없었습니다.
❷ 상대의 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40년 망명 생활로 미디안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낮이면 양을 치고 밤이면 잠을 자면서, 남편과 아버지 노릇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 실력을 키운 일도 없고 특공대나 독립군을 만든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맞서 싸워야 할 바로 왕은 막강한 애급 군대의 총사령관이면서 싸움에도 조예가 깊은 무사였습니다. 수많은 기병대와 보병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위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단신으로 바로와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❸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을 원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사실은 애급에 들어가서 확인한 사실이긴 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그냥 그대로 애급에서 살기를 더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해방시켜 인도해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애급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는 했지만 빠져 나갈 구실을 찾기에 급급했던 모습을 출애굽기 3-4장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급으로 가지 못한다는 모세의 변명과 핑계는 여러 가지였는데, 그 변명과 핑계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금년 한 해 전도에 주력해야 할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한번 살펴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❶ 그럴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3장 11절에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급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나는 바로에게 갈 형편이 못되며 이스라엘을 인도해 낼만 한 능력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 핑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3장 12절에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는 한 모세의 약점이나 허물은 문제가 되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❷ 자기를 애급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3장 13절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라고 모세가 묻고 있습니다. 가령 창세기의 경우를 보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 당시 애급 사람들에게는 이름난 신들이 많았습니다. 암몬, 푸다, 콘스, 크놈, 몬투 등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신들을 숭배하였습니다. 그러한 다신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애급 사람들을 찾아 가서 자신을 그들에게 보낸 신의 이름을 밝혀야 하는데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모세의 핑계였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3장 14절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는 것입니다. 이 뜻은 ‘홀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이며,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 존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여기서 자신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혀 주심으로써 모세가 애급에 들어가서 할 말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십니다. 그 누구에 의해 존재하거나 그 무엇에 의해 조종되는 신이 아닌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❸ 그들이 믿지 않을 것이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4장 1절을 보면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직 모세가 애급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짐작으로 핑계를 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어떤 일을 시작도 하지 않고 해 보지도 않은 채 핑계를 먼저 대는 사람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지 애급으로 가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모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으로만 대답하지 않으시고 기적을 보여 주시며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그 때 모세의 손에는 양치는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던졌더니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뱀을 보고 피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 잡았더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뱀은 애급의 바로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모세가 애급에 들어가 뱀 같은 바로의 꼬리를 잡고 흔들어 댈 것을 미리 보여주는 의미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넣었다가 빼어보니 문둥병이 걸려 있었습니다.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꺼내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대로 했더니 손이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는 불치의 병인 문둥병처럼 해방이 불가능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건져 내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나병(문둥병)은 저주스러운 병입니다. 문둥이 시인으로 불리는 한하운 시인이 쓴 ‘소록도 가는 길’이라는 시입니다.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 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地下足袋)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千里), 먼 전라도 길.” 이런 고통의 시를 쓰면서 피보다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고 합니다. (이 시를 생각하면 ) 문둥병을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두렵고 무서운 병인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두 번째 표적은 모세의 손에 나병(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놀랐겠습니까?
❹ 자신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4장 10절을 보면,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고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거절할 만한 이유는 되지 못했습니다. 말을 잘 한다고 하나님의 심부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말을 잘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을 잘하지 못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형 아론을 모세와 함께 애급으로 들어가게 했으며 모세의 대변인 노릇을 하게 하심으로써 말을 못해서 갈 수 없다는 생각을 고쳐 주셨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모세로서는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4장 20절을 보면,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급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 2절을 보면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 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는 미디안 광야에서 자신의 장인 이드로의 양 떼를 칠 때 사용하던 나무 지팡이였습니다.
그런데 4장 20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고 했습니다. 조금 전까지 손에 잡고 있던 양을 치던 나무 지팡이가 금빛 나는 쇠 지팡이로 변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모양도 크기도 색깔도 재료도 그 지팡이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고 모세로 하여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며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에 대한 분명한 징표가 되는 것이 바로 지팡이이었기 때문에 모세의 지팡이는 이제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은 모세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핑계를 대며 사명을 회피하고자 하는 모세에게 세 가지 말씀을 하시면서 능력을 주심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❶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8-2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하달하시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심으로써 사명을 받는 제자들을 격려하며 용기를 주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사명을 들려주신 모세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면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로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심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도록 일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경험한 이 놀라운 사건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신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앞으로도 항상 함께 하실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사건이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 능력을 주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❷ 내가 네 곁에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약속에 대해서 ‘나는 입이 뻣뻣한 자’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12절 말씀에서 “내가 네게 할 말을 가르치리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늘 곁에 계시면서 모세가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며 역사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사명을 맡겨 주신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과 형편, 그리고 약점까지도 잘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늘 곁에 계시면서 그 부족함을 채워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일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성경 사사기에 나오는 사사들의 경우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사사기에는 13명의 사사들이 등장하는데, 사실 그들은 모두가 사사로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여러 가지 연약함과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고 난 이후 그들은 더 이상 연약하거나 부족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을 놀라운 능력으로 감당해 내게 된 사실을 사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 같이 인간적인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에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감당해 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그들이 성령으로 충만해 짐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되었기 때문이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❸ 내가 너를 도울 자를 보내 주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14-16절 말씀에서 모세의 형 아론을 붙여주실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모세를 도울 자를 보내주실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모세로 하여금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도우심을 약속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자를 붙여 주심으로써 능력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형 아론은 때로는 모세를 힘들게 하기도 함으로써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모세의 부족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줌으로써 함께 하나님의 일을 감당해 나가도록 하나님께서 붙여주신 동역자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구원하도록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던 것처럼, 그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죄와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혀서 신음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구원하도록 사명을 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능력을 주셨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 항상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늘 곁에 계시면서 일하심으로, 그리고 도울 자를 붙여 주심으로써 능력을 주심으로써 그 사명을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졌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사사들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심으로 능력을 주시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심으로 능력을 주습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은 방법으로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칭찬과 상급을 받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출 4:1-5, 10-12 / 김서년 목사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 말씀 속에는, 구약성경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불리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에 대해서는 여러분, 잘 아시지요? 모세는 120년을 살았는데, 그의 생애는 40년을 단위로 하여 세 부분으로 아주 뚜렷하게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처음 40년은 왕궁에서의 생활입니다. 여기서 모세는 당대의 최강국이었던 애굽에서 모든 문물을 배웠고, 익혔습니다. 그리고 왕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지식과 경험을 쌓았습니다. 한마디로 하자면, 그는 이 세상의 그 누구와 비교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학식과 덕망을 갖춘 인재였습니다.
이 때 그는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습니까? ‘무엇이든 하면 된다’고 하는 자신감에 넘쳐 있었을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지요. 애굽사람을 쳐죽일 만한 민족애도 있었고, 의분도 있었고, 용기와 혈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그가 이제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나서, 장인인 이드로의 양을 치면서 40년간을 초라하게 생활하게 됩니다. 양을 치고 있는 이때의 그의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 당시의 그의 심정을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것 같습니다. 왕궁에 살던 사람이, 천하를 호령하던 사람이, 이제 쫓겨나서 광야에서 양이나 치면서 세월을 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그 신세가 처참했겠습니까?
여기서, 과거의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던 그 용맹하고 학식 있던 모세는 다 죽어버립니다. 용기도, 자신도, 의분도, 야망도 다 죽었습니다. 그에게 더 기대할 것이 없는 비참한 인간으로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렇게 하여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보내었습니다. 아마 이때쯤, 모세는 그 젊었을 때의 꿈도, 야망도 다 잊어버렸고, 이제는 그저 이렇게 양이나 치며 생애를 끝낼 생각을 하고 있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같이 형편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신 이 ‘시기’와 이때의 ‘형편’이 아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를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까? 젊기도 하고, 무엇을 좀 할 수 있을 때에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무기력해져서 죽어있을 때에 ― 가진 것도 없고 능력도 없는, 아무것도 못할 것 같은 그러한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호렙산 기슭에서―가시나무 떨기 속에서―그 불꽃 속에서 부르십니다. “모세야, 네 발의 신을 벗어라.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라.” 그리고는 “애굽에서 노예 된 내 백성을 구하여 내어라!!” ― 아주 중대하고 굉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마지막 40년을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생활을 하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이 장면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모름지기 모세는 이것이 젊었을 때부터의 그의 소원이었고, ‘민족을 건져내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야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지금도 그의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 모세에게 이렇게 중대한 말씀을 내리실 때, 그는 사양하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 바로 자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처지를 돌아보니, 초라하고 비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인 것이지요. 정말 사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자기의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주저하며 사양하는 말을 합니다. “만약 내가 주의 부르심에 응하여 애굽으로 간다고 하더라도, 저들이 나를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을 모세로서 할 수 있는 말이다. 40년간 광야에서 양하고만 지낸 이 같은 사람을 보고 누가 믿고 따르겠습니까? 지금과 같은 이런 처지를 보고서야 누가 모세를 믿어주겠습니까? ‘40년간’ 양떼하고만 지냈으니, 그 입은 녹이 슬었고 ― 양을 치라면 자신이 있지만 사람을 인도하라니 ― 도무지 자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저하는 모세를 우리는 십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그렇다 / 우리는 주님께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시는 지상최대의 명령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나도 전도해야 되겠다 하는 이 생각은 크리스찬이라면 누구나 다 가질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전도하자니 마땅한 대상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상대를 막상 생각해도, 평소 그의 성품을 잘 아는 터라 말을 잘 들을 것 같지 않습니다. 평소 시장에서 또는 어떤 곳에서 보던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간 말을 가까이 나누던 사람도 아닌데, 막상 말을 걸려니 쑥스럽고, 혹 무안당할까, 창피를 당하지는 않을까 망설여지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 내게 자신이 없는가? 왜 용기가 생기지 않는가? ― 그 이유를 심각히 생각해 보아야만 합니다.
▶ 모세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왜 모세는 망설였던 것입니까? 생각건대, 그 때에 모세는 ‘뭔가 큰 것’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정말 보내시려면 굉장한 것 하나 주세요. 이 모습 이대로야 어찌 가겠습니까? 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능력’ 같은 것을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의외로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의 대답은 그가 소박하게 지난 몇 십 년 동안 양을 치며 들고 다녔던 지팡이 ― 그것을 번쩍 들고 말합니다. “하나님, 여기 이 지팡이 하나뿐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모세는 이런 생각을 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나 이 광야에서 이 지팡이 들고 양들과 함께 아주 죽어지냈어요. 그 옛날 배웠던 공부들 다 잊어먹었고요. 내 혈기도 용기도 이젠 다 없어졌어요. 이 말라빠진 지팡이와 꼭 같이 된 내 신세잖아요.
그러니 나를 보내시려면 ‘굉장한 무엇’을 주세요. 내가 말을 하면 수만 명이 매혹되는 그런 ‘웅변’을 주시든지, 아니면, 내가 손을 얹기만 하면 병이 척척 낫게 되는 그런 ‘신유의 능력’을 주시든 지요. 아니면 뛰어난 ‘머리’를 주시든 지요. 뭐 그 정도 되어야 남 앞에 나서서 얘기를 하던, 전도를 하던 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이 때 하신 하나님의 대답은 이러합니다. “그 지팡이를 들고 가라!!”
굉장하고 놀라운 것 ― 그 것을 원했지만 그것은 주시지 않고, 오랫동안 늘 가지고 있던 그 지팡이를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사실 어떤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모세는 이 지팡이 때문에 모세가 되었고, 이 지팡이 때문에 모세는 끝났습니다. 모세는 후에 애굽에 가서 ‘열 가지의 이적’을 행하는데, 대개가 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홍해를 건널 때도 지팡이를 사용하였고요. 광야에서 물이 없을 때에도 반석을 지팡이로 내리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먹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백성들에게 진노를 하며 반석을 두 번 내리쳤다고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든 이 지팡이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 지팡이는 결코 ‘요술 방망이’가 아닙니다. 그저 모세가 들고 다녔던, 초라하고 아무 것도 아닌, 흔해빠진 그런 지팡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아닌 그 지팡이였지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가라고 하셨기에, 그 마른 지팡이 하나가 모세에게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되었고, 그것이 모세의 운명에 깊은 관계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오랫동안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는 무엇을 의미한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가 이미 가진 것 ― 말하자만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이미 가지고 있는 ‘소유’, 이미 가지고 있는 ‘경험’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시 기억하고 싶지도 않은 쓰라린 과거, 다시 새겨보기도 싫은 여러 가지 실패했던 지난날의 일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학대할 수밖에 없던 초라한 자기 모습 그대로가 ― 여기 이 하나의 지팡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른 막대기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효과적인 소명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여러분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금 이미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여러분에게 있어서의 지팡이는 무엇인가? ― 이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굉장한 것을 다시 주시려고 하지 않으시며, 또 그 굉장한 것을 통하여 역사 하시지도 않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 내 손에 이미 들려져 있는 보잘것없는 마른 지팡이 그대로를 하나님은 필요로 하십니다!! 그러나 내게 있는 막대기라고 그대로가 다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 막대기가 어떤 효험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지팡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흔한 나무 지팡이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사용할 때, 우리가 전혀 상상도 기대도 못했던,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가 거기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4장 1절 이하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 하실 때 던져서 뱀이 되고, 그리고 계속 ‘꼬리를 잡으라’ 하실 때 꼬리를 잡고, ‘쳐라․가져라’ 하셨을 때 ― 그때마다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던지라’ 하실 때 던지고, ‘잡으라’ 하실 때 잡고, ‘쳐라’ 하실 때 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겸손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쳐야 합니다. ― 바로 여기에 중요한 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보세요.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한다고 해서, 불평 불만 원망 등을 담아서 감정적으로, 격동적으로 반석을 자기 마음대로 두 번 내리친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물론 물은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무슨 신유다 은사다 하면서 이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사람들을 봅니다.
물론 모세가 물을 일단 얻은 것처럼 그 일이 성공하는 것처럼 나타납니다. 그러나 물이 중요합니까, 가나안이 중요합니까?
이 지팡이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순종하여 사용해야 하는데, 자기 뜻대로 지팡이만 의지하여 함부로 휘두르다가 모세의 생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그렇게 되어버리고 맙니다!
지팡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의 순종!! ―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세의 소명장면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굉장한 것이 당장 생기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도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를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또한 쓰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세요. 본문 10절에 보면,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40년간 양만 치다가보니, 혀가 아주 굳어 버렸어요. 그런 나에게 하나님이 부르시고 임무를 맡겨주셨지만, 여전히 그러합니다.”
이미 임무를 주셨지만, 모세에게 무슨 굉장한 것을 손에 들려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사람이 갑자기 백발이 된다든지, 얼굴이 빛이 난다든지 하는 물리적 변화가 없다는 말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히 모세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라 하신 바로 이 시간에도 여전히 말을 더듬습니다. 나아진 여건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전도하라고 하면 “글쎄요. 전도하긴 해야 하는데, 제가 좀 믿음이 성장하면 하겠어요” 하고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핑계하노라면, 몇 십 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전도함으로 믿음이 자라는 것이고, 실천을 함으로 성숙해지는 법인데, ― 성숙한 다음에 실천하겠다고 한다면 어느 세월에 전도하고, 언제 성장해서 나를 닮으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모세는 뭔가 변화를 기다렸는데, 주께서 말씀하신 후에도 여전했습니다. 본래 가진 약점, 허물, 무능, 게으름, 나약함, 그리고 본래 가졌던 성격 그대로였습니다. ― 여기에 모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마술적이고 기적적인 변화를 바랬는데,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명령을 받은 후에도 나는 여전합니다. ― 어떻게 ‘내 모습 이대로’를 가지고 주의 일을 합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것을 주시지도 않고, 특별한 변화를 주시지도 않고, 단지 “너는 이대로 가라!!” 하십니다. ― “너는 이 모습 그대로 내 일을 하라!!” ―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모세는 자기 모습을 잘 알기에 합리적으로 사양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셔서, 변명하고 사양하는 모세에게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냐? 사람의 입을 지은 자가 누구인데 내게 변명을 하느냐?” “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할 말을 가르치리라. 먼저 가라!!”
미리 할 말을 가르쳐 주시지 않고, 가기만 하면 그 현장에서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리라!! ― 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은 능력을 받아서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능력이 언제 주어집니까? 현장에서 주어집니다!!
가야만 능력이 주어지고, 일어서야만 힘이 나고, 말을 해야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에 ‘서로 사랑하라’는 말은 명령형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명령이라는 말입니다. 왜 명령형으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어떤 분은 ‘마음에서 울어나는 사랑’이라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하며, 울어나지 않는 사랑은 억지로 하는 사랑이니 참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가식된 사랑은 할 필요가 없다고요.
어떻게 들으면 참으로 그럴듯한 말입니다만, 그러나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참으로 내가 ‘마음으로 울어나는 사랑이라야 하겠다’고 한다면, 과연 몇 사람에게나 그런 사랑을 여러분이 하실 수 있겠습니까? 고작 여러분의 배우자나, 또는 자녀, 부모님, 또는 친척, 친구… 이런 몇 사람에 불과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의 마음에 울어나서 사랑하라’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이것은 명령입니다.
크리스천이라면 주님의 명령에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단 먼저 사랑하라. 사랑을 베풀어라! 사랑을 이렇게 일단 하노라면, 그러면 자연히 우리의 마음에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테레사 수녀의 전기를 보면 이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녀가 처음부터 마음에서 우러나 그런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이고, 그래서 그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다!! ― 그래서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고 나니, 자연히 그의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계속 넘쳐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의 일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을 기다리고 있다가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합니다.
‘성령 충만’은 바로 ‘환란’과 ‘핍박’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바로 그 현장에 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자란 후에 하겠다’가 아닙니다. 일단 순종하며 실천하는 여기에서 믿음은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또한 생각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로서 일해야 할 모세에게 ‘왜 말을 잘 하게 해 주시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세가 말을 더듬고 잘못한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여 주는 것입니까? ―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음을 잘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자면, 선교사들의 경우를 보면, 그 나라의 토착어를 잘 해야 선교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을 우리는 선교역사를 통하여서 봅니다.
물론 토착어를 잘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잘 한다고 꼭 선교에 성공하지를 못합니다. 오히려 말을 잘 못하는 선교사가 훨씬 더 선교에서 성공하는 이상한 현상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말을 더듬었습니다. 말 때문에 일을 못하겠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고쳐주시지 않고 “그대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전도여행에 파송하실 때 “너희들이 법정에 끌려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눅 12: 11-12)
“먼저 가라. 그러면 그 자리에서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일하는 현장 그곳에서 ‘능력’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좀 더 나아가서, 이 말의 뜻은 곧 ‘하나님이 뒷일을 책임지신다’는 말씀입니다.
“가라. 나머지 책임은 내가 진다.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그런고로 믿고 먼저 가라! 두려워 말라!” ―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지난 날―과거―다 부정하고, 믿고 순종하고 가면 내가 능력을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필요하다면 말 잘하는 너의 형을 동반자로 주리라” ― 너 혼자 힘이 들면 필요한 동반자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말 못하면 말하는 자를 줄 것이요. 약하면 강한 자를 줄 것이고. 지혜가 없으면 지혜로운 자를 동반케 할 것이니 “너는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고로 나로서는 내가 해야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내게 주신 말씀에 내가 직선적으로 응답하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무슨 나약함이 있습니까? 부족함이 있습니까? 무능함이 있습니까? ― 하나님이 먼저 아십니다!!
그러니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너는 이제 가라. 내가 할 말을 가르치리라.”
가기만 하면 필요한 것을 주시고, 필요한 사람도 주시고, 물질도 지혜도 건강도 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도 단순히 부르시고, 그리고는 보내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하고, 능력을 현장에서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아니 이미 받았다고 믿고, 가라고 할 때 가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도리인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팡이를 들고 애굽으로 가는 초라한 모습의 모세를 상상해 보세요. 이 모습은 양을 칠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모세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겉모양은 똑 같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말씀이 함께 하시는 모세였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께 바치고 순종하고, 주의 말씀을 따라 가는 그의 순종과 그 믿음으로 그는 능력의 사람이 되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지금 가진 여러분의 그 모습 그대로를 주님께 바치세요. 그리고 지금 여기서 단순히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이미 가지고 있는 그 보잘것없는 막대기가,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향하여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너는 이제 가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내가 할 말을 가르치리라”고 하나님은 바로 여러분에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순종하고 결단하고 실천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여러분은 넘치도록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반응
출 14:1-14 / 피영민 목사
서론
70명이었던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의 고센 땅에 정착한 이후 430년을 지나면서 200만 명이 넘는, 폭발적인 인구증가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남자 장정만 60만 명이 되었으니 아내와 자녀의 수를 합치면 200만 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그런데 430년을 사는 동안 요셉을 아는 바로가 있을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교적 평안하게 살 수 있었지만, 그를 모르는 바로가 등장하고부터는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400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시고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이스라엘 달력으로 1월을 아빕월이라고 하는데, 출애굽은 아빕월 14일에 시작되었습니다. 정월 14일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는 장자와 백성들의 첫째 아들을 모두 잃는 슬픔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께 항복하고 출애굽을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을 라암셋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라암셋은 오늘날 이집트의 멤피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숙곳이었습니다. 숙곳은 ‘짐승의 우리’라는 의미인데, 숙곳에서 북동쪽으로 걸어가면 불과 10일도 걸리지 않는 가나안 땅과 가까운 지역입니다. 신명기 1장 2절에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하룻 길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출발해도 11일이 걸렸다면 숙곳에서 출발했을 때 10일내에 갈 수 있는 거리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7절에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북동쪽 길은 애굽의 요새들이 있고 블레셋 사람들의 거주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는 도중 전쟁을 치러야 할 가능성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보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까봐 지름길로 인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원래는 숙곳에서 북쪽을 향해 가야 하는데, 남쪽에 있는 에담으로 내려갔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2절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돌쳐서’라는 것은 ‘돌아가라’(Turn)는 의미입니다. 더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것입니다. 바다와 믹돌 사이의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로 가라는 것은 홍해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대륙과 시나이 반도 사이에 홍해가 있는데, 지금은 홍해 끝자락에 ‘빅토르’라는 호수가 있습니다. 원래는 호수가 아니었는데, 물이 줄어서 호수가 된 것입니다. 빅토르 호수가 있는 지점으로 생각됩니다. 거기가 ‘비하히롯’입니다. 비하히롯은 ‘하토르 여신의 신전’이라는 의미이고, 하토르 여신은 바로의 어머니에 해당하는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출애굽 이후 첫 번째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60만 명의 장정 노예를 잃고, 여자까지 포함해서 총 200만 명이 넘는 엄청난 노동력을 잃어버린 바로가 특별병거 600승과 애굽의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로 잡아오기 위해 추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다와 믹돌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믹돌은 바위산이라는 의미입니다. 좌우에 바위산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건널 수 없는 홍해가 있으며, 뒤에서는 특별병거를 몰고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서남북 사방 어느 곳으로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우연히 찾아온 것도 아니고, 길을 잘못 들어서 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오다가 이런 죽음의 위기를 맞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떤 반응이 정상적인 반응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과 모세가 보인 반응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가?”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산전, 수전, 공중전 등 별 위기를 다 겪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에 대처하는 반응은 가지각색입니다. 오늘은 출애굽기 14장의 말씀을 통해 이 주제에 대한 세 가지 진리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Ⅰ.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를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생각과 다를 수 있으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내가 생각한 길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뜻이 너희 뜻과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을 수도 있지만 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을 보존하시고, 통치하시고, 다스리시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으로 오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13장 21절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오다 보니 홍해 앞, 죽을 수밖에 없는 위치로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섭리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출애굽기 6장 8절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북동쪽으로 인도하셔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완전히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련된 대표적인 인물로 요셉을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에게 “너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네게 절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절은 고사하고 17세에 구덩이에 빠졌고, 노예로 팔려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구덩이에서 노예로, 노예에서 감옥으로, 17세부터 30세까지 13년의 젊은 청춘을 허비하게 되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현실은 노예와 옥살이로 전전긍긍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섭리가 어긋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삶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요셉의 결국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30세가 되었을 때, 애굽 왕 바로를 만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토록 험난했던 요셉의 인생 여정이 총리가 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북동쪽 지름길이 최상의 선택은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지 지름길로만 가려다 보면 갖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돈을 투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자를 준다는 것은 약점과 위험부담이 있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지름길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 갑자기 6학년이 되거나 중・고등학교를 뛰어 넘어 대학생활을 한다면 그가 인생을 바르게 살거나, 올바른 인격을 소유할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무조건 빠른 것이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록 빠르게 잘 하지 못하더라도 학교를 다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출세를 강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급한 마음으로 교회를 빨리 부흥시키려는 사람은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적지로 가는 과정입니다. 천국에 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천국에 가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 굉장히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지름길이 아닌 먼 길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로 홍해 앞으로 가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가 아직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굽 백성들과 바로는 장자를 잃는 재앙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대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는 “아직도 내게는 막강한 군대가 있다”고 건방을 떨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내 백성을 가게 하라고 하셨을 때, “여호와가 누구관대 그의 말을 듣겠느냐?”고 하나님께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의 능력을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버티고 서 있는 바로를 향해 “너의 군대를 전멸시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로 인도하신 이유입니다.
출애굽기 14장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돌쳐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아득하여 광야에 갇힌바 되었다 할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을 잘못 들어 사방이 가로막힌 곳으로 갔기 때문에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바로의 판단이 상식적으로는 옳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빨리 가서 다시 잡아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의 군대를 유인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홍해에 빠뜨려 죽이려고 유인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앞에 서 있고, 바로의 군대도 홍해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했고, 바로는 애굽 군대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에는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겉보기에는 약하고 초라합니다. 모세 역시 가진 것이 막대기 하나밖에 없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십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상황은 계산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홍해 앞으로 쫓아간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두 가지 반응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과 모세의 반응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반응을 한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 반응(By Sight)하거나, 믿음을 따라 행하는 것(By Faith)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일을 오감으로 반응합니다. 눈으로 보는 것(시각), 소리를 듣는 것(청각), 냄새를 맡는 것(후각), 음식을 먹는 것(미각), 만져 보는 것(촉각)입니다. 사람들은 오감만 가지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오감을 가지고 판단합니다.
출애굽기 14장 10절에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각을 가지고 판단하니 좌우측에는 바위산이 보이고, 앞에는 홍해가 보이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는 것이 보이니까 스스로 살아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오감만 가지고 판단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로 반응을 보입니다.
첫째는 두려워 합니다. “바로가 가까워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 뒤에 미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출 14:10).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다섯 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런데 옆에서 아들이 계속 아버지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점심을 거르실 까봐 걱정됩니다”, “오늘 밤 잠자리가 없을 까봐 걱정이 됩니다”, “자동차 사고가 날까봐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에는 “그래, 괜찮아. 걱정하지 말아라!”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 걱정을 하면 나중에는 “야! 임마! 걱정하지 마!”라고 소리칠 일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들의 할 일이 아닙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둘째는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출 14:11~12).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말을 합니다. 그들은 지금 모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노예들은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책임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배 고픈 이유는 네가 배 부르기 때문이고, 내가 공부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네가 공부를 잘 하기 때문이고, 내가 못 생긴 것은 네가 잘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책임을 남에게 미룹니다. 이런 논리는 노예의 논리입니다.
제가 한 번은 기도원의 강사로 간 적이 있었는데, 주차구역에 주차를 잘 해 둔 제 차에 어떤 사람의 차가 와서 부딪혔습니다. 그런데 나와서 저를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가는 길에 왜 이 차를 세워두었느냐?”는 논리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논리가 없는 것이고, 책임전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책임을 전가하며 원망, 불평한 것은 그들이 오감을 가지고 판단했기 때문에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질 올바른 반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17세부터 30세까지 단 한 번이라도 누구를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책임을 돌리려 한 적이 없었습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섭리를 똑바로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고작 그 정도 밖에 못하시나?”하며 하나님을 꾸짖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 도대체 나를 돌볼 능력도 없으시면서 왜 구원하셨습니까?” “내가 언제 하나님보고 구원해 달라고 했습니까?” “그냥 지옥 가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원망은 하나님을 꾸짖는 것이고, 두려움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원망과 불평, 그리고 두려움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고 경험하게 된 일 가운데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내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는 확신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응답해 주시고, 때로는 능력도 주시고,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증거로 보여주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오감만을 근거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모세는 오감만으로 반응하지 않고 ‘육감’(Sixth sense)으로 반응하였습니다. 여섯 번째 감각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늘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 안에 성령이 내주하신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말씀도 주시고, 우리의 예배도 받아주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놀라운 말을 합니다.
뒤에서는 애굽의 군대가 먼지를 내며 달려오는데 모세는 두려워 벌벌 떨며 원망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만히 서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오늘 너희가 본 애굽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현세에서도 보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보지 못하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주 멋진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싸우실 것이니, 너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을 똑똑히 보라고 말했습니다.
출애굽기 14장 15절에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뇨 이스라엘 자손을 명하여 앞으로 나가게 하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앞에 홍해가 있는데도 앞으로 나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지고 반응하고, 믿음의 말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앞으로 나가라고 했습니다. 시편 46편 10절에도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열방과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되심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삶에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일어나는 것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우연히 빠지는 법이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우연히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생각에 참 고통스러운 일, 두려워할만 한 일, 낙심될 일들이 있어도 모두 하나님이 섭리 가운데 행하시는 일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연’은 통계학자들을 위한 일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감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반응하고, 믿음을 따라 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출애굽기 14장의 가장 중요한 교훈입니다.
Ⅲ. 하나님의 섭리는 반드시 그 목적하신 바를 이루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앞으로 인도하신 두 가지 목적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의 군대를 멸절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가 군대를 믿고 설치니 멸절시키시려는 것입니다. 이 세상 권세를 좀 가졌다고 하나님 앞에서 목을 굳게 하면 바로처럼 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는 군대를 믿고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가르신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내민 순간 동풍이 불어와 바다를 가르고 마른 땅이 나오게 하였습니다.
학자들은 200만 명이 하룻밤에 홍해를 건넜다면 최소 6km이상 갈라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홍해가 6km나 갈라져서 물벽을 세우고 있는데, 200만 명이 캄캄한 밤길에 어떻게 그 길을 어떻게 건널 수 있었겠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9~20절에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성육신하시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계시다가 예수님이 이스라엘과 애굽 군대 사이로 옮겨오시면서 구름기둥도 옮겨옵니다. 애굽의 군대는 캄캄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명이 있었습니다. 한 밤중인데도 환해서 길이 다 보이고, 웃으면서 200만 명이 홍해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애굽의 군대도 병거를 몰고 홍해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병거의 바퀴가 빠지고, 뒤에 있던 병거와 전복이 되고 걸려 넘어지기 시작하더니 애굽의 군대가 모두 홍해로 진입하였을 때, 양쪽에 서 있는 물벽이 무너져 홍해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다 죽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때 건넜던 홍해는 깊은 바다가 아니라 갈대숲이었는데, 물이 말라서 건너갈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같대 밭에 물이 마른 것이면 애굽 군대는 어디에 빠져 죽습니까? 그런 소리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만일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건너간 것보다 애굽의 군대가 빠져 죽은 것이 더 큰 기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목적은 고린도전서 10장 1~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홍해를 건너게 하신 목적은 침례를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홍해를 건넌 것의 참 의미가 침례라는 것입니다.
침례는 물속에 들어감으로 예수와 합하여 옛 사람에 대해서는 죽고, 물속에서 일어남으로 예수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 사람이 되어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사건을 침례라고 말했습니다. 이제껏 찌들었던 노예근성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어 살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홍해가 합쳐져서 더 이상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기 전의 옛 생활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지옥가기는 다 틀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4장의 모세처럼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
모세가 “가만히 있으라!”고 명한 것은 수동적인 자세를 갖고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운명론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해 놓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일이 없다”는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슬람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기독교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모세가 홍해를 향해 앞으로 가라하시면 믿음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운명론은 눈을 감고 믿는 것이고, 섭리론은 눈을 뜨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 정해 놓으셨는데 할 일이 무엇이 있겠느냐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살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우리 앞에 홍해와 같은 어려움이 놓였을지라도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섭리론을 믿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고 홍해를 건너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는 애굽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출 4:1-9 / 이윤재 목사
부활절 지나 두 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이후 여러분은 어떤 목적을 향해 인생을 사십니까? 부활절 이전에 우리는 “누구를 믿을 것인가?”에 관심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절 이후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지난 주 말씀드린대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 만났습니다. 그때 두 마디 말을 했습니다. 첫째 “주여, 누구십니까?”, 두 번째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주여, 누구십니까” 하는 질문은 믿음의 질문입니다.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하는 질문은 행동의 질문입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부활절 이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주에 세 가지 일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해야 할 일. 이 중에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인생으로 태어나서 해야 할 일을 발견할 때 사람은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생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느낍니까? 그 일이 무엇입니까? 미국의 베리 마르타라는 여인이 그런 꿈을 가졌답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이 여인은 자기가 비록 가난하지만 반드시 좋은 학교를 세워 자기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자기는 돈도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어느날 기도하다가 자동차 왕 헨리 포드에게 편지를 썻답니다. “포드님, 동전 몇 닢만 빌려 주세요“. 이런 요청은 세계적인 갑부에게는 모욕적인 요청이었습니다. 비서를 통해 작은 돈을 받은 이 여인은 그 돈으로 꽃씨를 샀답니다. 그것으로 그는 빈공터에 꽃을 심었고 꽃은 자라고 또 피고 그것을 팔고, 또 심고 해서 결국 그 돈으로 작고 아담한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를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포드님, 당신이 뿌린 씨를 보십시오”. 헨리 포드가 감동받고 그 자리에서 100만불 기부했답니다. 그때부터 그 학교가 큰 학교가 되었답니다.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에게 세 가지를 깨닫게 합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언젠가 그 꿈을 이룬다. 그러나 그 꿈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꿈은 많은 고난과 신앙의 성숙과 함께 이루어진다. 신약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울이라면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구약을 대표하는 세 인물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한 모세,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다윗, 이 세 인물이 다 위대하지만 그 중에 한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스라엘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일생 세 시기를 거쳤습니다. 40년간 왕궁에서 살고, 40년간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모세>란 책을 쓴 챨스 스윈돌은 모세의 세 시기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첫째 somebody. 모세는 왕궁에 있을 때 자기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둘째 nobody, 그러다가 사람 죽이고 호렙산으로 피신한 후 40년간 처갓집 양을 키우며 낮아질대로 낮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anybody, 하나님이 그를 떨기나무에서 부른 이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40년 광야를 건너 가나안땅까지 인도해서 anybody, 모두가 인정하는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세가 인물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somebody 였던 모세는 nobody를 통해 anybody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이 쓰시는 인물이 되었을까요? 바울을 위대하게 쓰신 하나님은 어떻게 모세를 위대하게 쓰셨을까요?
모세는 부름받았습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께 부름받았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일생의 분기점은 그가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가 호렙산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 떨기나무에 타는 불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불에 타는 데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상하다 하고 가까이 갔는 데 음성이 들립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그리고 또 말씀합니다. “너는 바로에게 가라. 가서 내 백성을 내어놓으라고 하라. 그리고 그 백성과 함께 홍해를 건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라“.
문제는 모세는 하나님의 이 부름이 있기 전에 자기가 먼저 움직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7:23절입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에 관한 사도행전의 기록입니다. 모세가 아직 애굽의 왕궁에 있을 때 그가 어느날 자기 민족을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왜 모세는 자기 민족을 돌아보고 싶은 생각이 났을까요? 가장 가까운 추론은 그의 어머니 요게벳이 그를 키우면서 “너는 애굽 사람이 아니야. 이는 이스라엘 사람이야” 하고 말했을 가능성입니다. 모세가 핏덩어리로 나일강에서 구출되어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입적되었지만 실제 그를 키운 사람은 친어머니인 요게벳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가슴에 품고 그가 애굽에서 자칫 잊어버릴 수 있는 민족의식을 깨우쳐 주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가 일찍이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아직 그를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보다 앞서간 모세는 젊음의 혈기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람 두 명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동족이고, 다른 하나는 애굽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세는 살인자가 되어 호렙산으로 도피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하나님의 부름받을 때까지 기나긴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모세를 통해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목적과 동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면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이 없이 먼저 움직이면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학대받는 민족의 입장에서 애굽 사람과 다퉜지만 그것도 육신적 방법이었지 하나님의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민족의식으로 불타서 저질은 일은 고작 사람 두 명 죽인 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받지 않아도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름받지 않아도 교회 직분 받을 수 있고, 심지어 하나님의 부름받지 않아도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름이 없으면 결국은 실패합니다. 하나님의 부름받지 않고 일하면 자기 생각대로 할 수 밖에 없고, 하나님의 부름받지 않고 일하면 자기 감정, 자기 판단, 자기 주관을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챨스 스윈돌 목사님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모세의 문제는 실패했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부름없이 앞서가면서 겪은 실패로부터 충분히 배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는 이 실수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됩니다. 척박한 호렙산으로 도피하여 40년을 보내게 됩니다. 거기서 모세는 온갖 고난을 받게 됩니다. 왕궁에서 호의호식하다가 졸지에 집도 절도 없는 방랑자가 됩니다. 그가 거기서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와로운 방랑자로 사막에서 살뻔 했습니다. 그는 외로웠습니다. 누구 한 사람 그를 찾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불편했고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났습니다. 어느날 모세가 양을 몰고 광야를 지나는 데 갑자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출3:10입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불타는 가시나무에서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또 하나 벌어 집니다. 하나님이 불렀는 데 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없이 실패했으면 하나님이 불렀으면 “예”하고 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막상 불렀는 데 이제는 못가겠다고 합니다. 출3;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참 희안합니다. 하나님의 부름보다 먼저 가고, 막상 부르면 안가고. 그래서 뭐라고 변명합니까? “나는 말을 못해요. 누가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이 있을까요? 바로는 절대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바로가 어떤 사람입니까? 거기다가 저는 살인자예요. 제가 나타나는 순간, 저는 잡히게 되어 있어요. 아직도 공소시효가 남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세 가지를기억해야 합니다. 먼저 모든 일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시작한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예“하고 응답하자. 셋째. 하나님의 불러 주신 그 일이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를 때 우리가 할 일은 “기꺼이” 순종하는 일입니다. 스윈돌목사님이 모세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 저는 기꺼이 하고 싶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이 허락지 않으신 것은 기꺼이 없이 지내겠습니다. 주님이 취하신 것을 기꺼이 포기하겠습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고통은 기꺼이 받겠습니다”. 제목은 “기꺼이”입니다. 주님이 부를 때 우리는 “기꺼이” 응답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이유는 주님이 부르신 그 일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우리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일을 해야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름은 1차 부름과 2차부름이 있다고 지난 주에 말씀드렸습니다. 1차 부름은 하나님을 향한 부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일로 부르시기 전에 하나님과 관계로 부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것으로, 그의 소유로, 그의 자녀로 불렀습니다. 2차적 부름은 하나님의 일에 관한 부름입니다. 하나님께 부름받으면 다음 하나님의 일로 부름받습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이 불러 시킨 일이기 때문에 내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가 <여름날>이라는 시를 썻습니다. “결국엔 모든 것이 죽지 않는가? 그것을 빨리 내게 말해 보라.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이 거칠고 소중한 삶을 걸고 당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소명입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에서 모세를 불렀을 때 모세는 주저하며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2절에서 묻습니다. 출4:2, “여호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그리고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뱀의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 지팡이로 나일강을 치니 나일강이 피로 변하고 지팡이로 하늘을 향해 쳐들었더니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로 홍해를 치니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민17:17-26에는 아론의 지팡이에 꽃이 피어 아몬드가 맺힌 이야기가 나오고 민20장에는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생수가 솟아났습니다.
사실 지팡이가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시나이광야에 흔한 쉿팀나무 가지입니다(사진1). 우리 말로 조각목으로 번역된 쉿팀나무는 튼튼하기는 합니다. 물이 없는 광야에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뿌리를 깊히 내리고 광야의 더위와 추위에 연단되어 강하고 단단한 나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막, 법궤, 떡상 이런 것을 쉿팀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쉿팀나무가 있는 곳에 어디나 있고 또 잘려나갔기 때문에 생명도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나뭇가지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예, 지팡입니다” 한 것은 모세가 하찮은 것, 흔한 것, 누구나 가진 것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혔을 때 놀라운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출4:19-20이 중요합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20절을 자세히 보면 그냥 지팡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지팡이가 달라진 것입니까? 모세가 든 지팡이가 순간적으로 다른 지팡이가 된 것입니까? 20절의 지팡이는 2절의 지팡이입니다. 이 지팡이는 처음부터 모세가 들고 있었던 나뭇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를 부른 순간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지팡이가 능력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평범한 지팡이가 던지면 뱀이 되고 휘두르면 우박이 내리고 생수가 나오고 홍해바다가 갈라졌습니다. 지팡이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지팡이를 잡은 분이 바뀌어서 그런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일 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지팡이는 우리나 이스라엘이나 어디서나 약한 것의 상징입니다. 지팡이는 힘없고 나이많은 사람들이 집고 다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이 지팡이 집고 다닙니까? 개그 콘서트에서나 그렇게 합니다. 젊은 사람은 줘도 안가지고 다닙니다. 지팡이는 목자가 약한 양을 인도할 때 쓰는 도구입니다. 시23:4,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양을 치지 않으면 지팡이도 필요없습니다. 약한 양을 돕기 위해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여행할 때 가지고 필요합니다. 막6:8,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는 나그네가 들고 다닙니다. 길을 갈 때 위험한 일을 막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집에 편히 있는 사람은 지팡이가 필요없습니다. 창32:10에서 야곱이 말합니다.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르단을 건넜으나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야곱이 자기 생을 돌아보며 힘들고 약할 때 때 지팡이집고 다녔다고 회고합니다. 누구나 집에서는 지팡이가 필요없습니다. 멀리 다니고 모르는 데 다니고 여행하고, 힘이 없고, 다리를 절 때 지팡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팡이는 약한 것의 대명사, 하찮은 것, 누구나 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모세가 대답한 것이 지팡이입니다. 이 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가진 것은 겨우 지팡이 하나예요. 다른 것은 없어요. 지팡이 하나 겨우 있어요. 이것이 하나님께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아니야. 하찮은 게 아니야, 가지고 와봐”. 그리고 하나님이 잡으시자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일강이 피가 되고 생수가 나오고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일하실 때 우리가 가진 것을 가지고 일하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이 비록 작고 보잘 것이 없어도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면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아십니까? 다윗이 물맷돌 5개로 무장한 골리앗을 이긴 것을 아십니까?(그림2) 삼손이 나귀뼈로 막강한 블레셋을 이긴 것을 아십니까? 소년이 점심 먹으려고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를 두 마리로 5천명 먹이고 12광주리 거둔 것을 아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도움이 없이도 얼마든지 골리앗도 이길 수 있고 불레셋도 이길 수 있고 5천명 아니라 5만명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작은 것을 사용하셔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가장 큰 은혜는 우리의 도움없이 일으키시는 기적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도움으로,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것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해서 일으키시는 기적임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가진 몇 가지를 사용하셔서 일합니다. 먼저 우리의 소원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중의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물 속에 진주를 빠뜨렸답니다. 이 사람이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큰 바가지로 바닷물을 퍼내기 시작했답니다. 사흘 동안을 열심히 물을 퍼냈더니 물속에 살던 거북이가 답답해서 물었답니다. “왜 물을 퍼내고 있나요?” 사람이 말했습니다. “바닷속에 빠뜨린 진주를 찾으려고 물을 퍼내고 있소”. 거북이가 물었습니다. “언제까지 퍼낼 생각이요?” “진주를 찾을 때까지”. 거북이가 성질이 급해서 “내가 찾고야 말겠소”하고 들어가 진주를 찾아왔답니다. 간절한 소원을 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합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시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마15:38,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품으면 반드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간절한 소원을 품고 그 소원이 나쁜 소원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그 손에 붑잡으사 기적을 일으키실 줄 믿습니까?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기질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독특한 기질과 성품을 주셨습니다. 기질은 비교되지 않습니다. 각자 특징이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입니다. 항상 적극적이고 자신감이 있으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아무때나 화를 내기 쉽습니다. 대신 책임감이 강하고 친화력이 뛰어납니다. 베드로를 조직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담즙질입니다. 담즙질은 의지가 강하고 개척적입니다. 집요하고 목표지향적입니다. 이 이유로 바울이 아무도 예수믿지 않는 불모지의 땅에 들어가 처음으로 교회를 세우고 신학의 기초를 놓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질을 사용하여서 일합니다. 모세는 우울질, 아브라함은 점액질입니다. 어느 것도 좋고 나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기질, 성격을 활용하여 그 시대마다 필요한 사람을 사용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용하실 수 있고 누구나 사용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의 기도를 사용하십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아뢰는 통로이면서 하나님이 그 뜻을 펼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지팡이처럼 손에 잡으시고 일하십니다. 기도하면 모세의 지팡이가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영국의 어느 마을에 마리엔느라는 할머니가 살았답니다. 이 분이 병에 걸려 병원에 수년간 누어 있었는 데 마침 미국에서 무디 목사가 와서 부흥회를 했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마을 사람들 300여명이 다 구원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는 데 그 비밀은 곧 밝혀졌습니다. 마리안느가 병원에서 죽은 후 그 시트에서 마을 사람 300여명의 이름이 빽빽이 쓰인 이름표를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안느는 몸이 아파 전도할 수 없었지만 대신 병상에서 이름을 부르며 수년동안 마을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시고 무디를 보내사 마을을 구원한 것입니다. 시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말미암아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깃발을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가진 작은 것을 사용하십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예. 지팡이입니다”. “이리 가져오라”. 그 순간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네 혈액형이 무엇이냐?” “예 0형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형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이지“. ”오만하고 이기적이고 지랄같은, 오이지“. 그래도 하나님은 O형을 사용합니다. 저도 O 형입니다. ”네 기질이 무엇이냐?“ ”예, 다혈질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혈질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무지,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랄같은 단무지“. 그래도 하나님은 다혈질을 사용합니다. 베드로가 다혈질입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예, 공부 좀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적인 일에 그를 사용합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예, 아무 것도 없고요. 기도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사용하여 일하십니다. 우리의 작은 것을 하나도 무시하지 않으시고 존중하시고 사용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작은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하나님의 지팡이“가 됩니다. 아멘.
가시나무에 불이 임하소서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쓰실 때 주시는 것은 시내산의 떨기나무에 붙은 불입니다. 지금도 이집트 시나이반도에 가면 “스네”라고 불리우는 가시나무가 많습니다(사진3). 이 나무는 붉은 꽃과 붉은 열매를 맺고 있어서 멀리서 보면 불이 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키는 보통은 2미터, 큰 것은 5미터쯤 됩니다. 나무는 구불구불하고 줄기는 잘아서 건축자재나 화목으로도 쓸 수 없습니다. 더구나 보기만 해도 끔찍한 가시가 여기 저기 붙어 있어서 누구나 가까이 다가가기를 무서워하는 나무입니다. 모세가 그 나무에 가까이 갔을 때 소리가 들렸습니다. 출3:5, “이리도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여기서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출3:2,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참 이상합니다. 나무에 불에 붙었으면 나무가 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가 보았던 나무는 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나무를 자세히 보면 가시가 밖에서 안으로 굽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무에 손을 넣을 때는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을 뺄때는 반드시 상처를 입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는 이 나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가시나무는 곧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고난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 들어갈 때는 아무런 고생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올 때 많은 고난과 상처를 받았다”. 가시나무는 곧 고난받는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리고 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고난은 겪습니다. 핍박도 당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백향목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가 없기 때문에 망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처럼 우리는 사람을 자주 죽입니다. 누구에게나 가시가 있습니다. 우리안에 있는 죄악성, 한계성, 연약함, 상처의 가시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시련, 역경의 가시입니다. 그것은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성경에 사라지지 않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시입니다. 고후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에게 가시가 있었듯이 우리 모두에게도 가시가 있습니다. 도덕적인 가시는 죄의 가시입니다. 존재론적인 가시는 연약성의 가시입니다. 육체적인 가시는 질병입니다. 환경적 가시는 고난이요 본질적인 가시는 죽음의 가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한 이 가시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이 가시들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가시에 하늘의 불을 받는 것입니다. 가시는 그대로 두고 사라지지 않은 불을 받는 것입니다. 가시보다 불이 세면 됩니다. 가시가 문제가 아니라 불이 문제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가시지만 우리를 승리하게 하는 것은 불입니다. 불에서 열정이 나오고 불에서 인내가 나오고 불에서 비전이 나옵니다. 제 인생을 돌아봐도 저를 여기까지 있게 한 힘은 가슴속에 타는 불이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후 중학교 들어가기 직전에 고향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불을 만났습니다. 사춘기때 방황했지만 25살 때 기도원에서 또 흐늘의 불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갔습니다. 삶의 모진 가시는 변함없이 저를 괴롭혔지만 하나님의 불은 변함없이 저를 지켰습니다. 지금도 자나 깨나 한결같은 기도는 “주여, 제 가슴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가시보다 강한 하나님의 불이 제속에서 타오르게 하옵소서. 주여, 제가 일생 가시와 싸우지 말고 성령의 불을 더 의지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이 묻습니다.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이냐?” “네 손에 가진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입니다. 약하지만 건강한 몸입니다. 작지만 간절한 기도입니다. 부족하지만 나름 성실하게 살아온 삶입니다. 모자라지만 조금 공부한 지식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우리의 가족입니다. 그래? 가져오라. 내가 가자고 있으면 모세의 지팡이, 주님이 붙잡으면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그가 우리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내는 사명의 사람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팡이 손에 들고
출애굽기 4:1-5 / 이은규 목사
스물여섯의 한 젊은 여성이 커다란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녀는 이미 이혼녀였고요...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머물 곳이 없어서 거처를 찾아서 떠돌아다니는 홈리스 신세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이런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도무지 앞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고통과 암흑뿐이라고 할 수 있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그녀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척 하기를 그만둔 것입니다. 동시에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일을 헤아려서 그것에 집중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나빠 질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았지만... 자기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가지 마음을 뜨겁게 만드는 요소들이 있었는데요... 무엇보다도 아직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자기 곁에는 사랑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자신에겐 누구보다도 멋진 이야기를 끄집어 낼 수 있는 상상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요... 그런 상상력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아주 오래된 타자기가 있다는 것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자기 나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여성이 되었고... 그의 작품은 전 세계에서 큰 선풍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누구에 대한 이야기인줄... 아마 아시는 분들은 아신다고 생각합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쓰는 영국의 조앤 롤링의 이야기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세의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모세가 양을 치러 호렙산에 올라갔다가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시던 하나님을 경험하는... 출애굽기 3장부터 이어지는 이른 바 모세의 소명 이야기 중의 한 부분입니다. 오늘의 모세는 전성기를 지나서 내리막길로 접어들었고... 한 때 이집트의 왕실의 한 가족이었던 그의 화려했던 이력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과거에 그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깃발을 내걸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당시 그 지방에서 마주칠 수 있는 목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세의 마음이 편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직 이집트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는 동족들을 생각 만해도 마음이 아프고... 이젠 늙고 무기력해진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도 아신다고... 이스라엘이 바로의 압제 밑에서 겪고 있는 고통을 눈으로 보고...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귀로 들어서 잘 알고 있다고... 이제는 그들을 더 이상 내버려 둘 수가 없다고... 그들을 구출해 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갈 때가 되었다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 일에 나서야 하는데... 그 일을 맡을 사람이 바로 모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다...’(출3:9)
그 때부터 하나님과 모세 사이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나서야 한다.’고 하시고... 모세는 그럴 때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이렇게 자기의 무능하고 자격 없음을 핑계 삼기도 하고...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v.1) 오늘 읽은 말씀처럼 또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할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저는 본래 말 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v.10) 이런 핑계를 대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그를 달래보시고 설득하시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v.13) 이렇게... 자기는 그런 깜이 아니라고... 자구만 뒤로 빼다가 하나님께 혼이 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 할 일이 노예로 죽어가는 이스라엘을 살리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이젠 때가 되었으니 네가 나서 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만 거절하며 몸을 사리는 모세를 우리는 비난 할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여도... 그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어떻게 서슬이 시퍼런 바로와 담판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바로의 마음을 돌이킨다고 해도... 이스라엘을 이끌고 새로운 땅으로 가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엄두가 나지 않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문제는 모세 자신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겐 이미 실패와 좌절의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벌써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모세는 자꾸만 그 일이 마음에 걸리는 거죠. 거의 사십 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의 나이가 사십 쯤 되어서... 이제는 그가 뜻한 바를 펼칠만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비록 바로의 왕실에서 자랐지만... 자기에게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는 것을 잊지 않았고... 때가 되면 히브리인을 위해서 나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이 찾아 왔습니다. 히브리인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를 맞는 것을 보고서는 이집트 사람을 죽여 버렸습니다.
다음날 모세는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는 말리려 하였지만, 잘못한 사람은 모세의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날 모세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일을 들먹이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모세에겐 이제 머무를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집트 사람에겐 모세는 살인범이 되었고... 히브리인들도 모세를 지도자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세는 이집트인들 틈에서도...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서도 자기가 설 자리를 찾자 못하고... 제 3의 지대인 미디안 광야로 도망을 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그곳까지 모세를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모세는 르우엘이라고도 하고 이드로라고 불리기도 했던 미디안 제사장의 집에 몸을 의탁하였고... 그의 딸 십보라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그는 처갓집에 얹혀살면서 그 집의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비로소 안정된 삶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모세는 이렇게 미디안으로 도피한 삶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십보라와 사이에 아들을 낳았을 때... 그는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고 지었는데요... ‘내가 낯선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구나!’(출2:22) 나그네라는 의미가 아들의 이름 속엔 담겨 있습니다.
그로부터 사십 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오늘처럼 모세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대략 모세의 나이가 80이었는데요.. 비록 늙기는 했어도 모세에겐 기다리던 순간이기도 합니다. 40년 전에 혼자서 할 수 있다고 섣불리 덤비다가 실패했는데요... 이번에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선뜻 모세는 나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일에 알맞지 않은 이유를 자꾸만 댑니다...
하지만... 이토록 하나님의 요청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모세에겐 지난 시간... 그가 겪었던 실패의 상처가 너무나 생생한 거죠. 하나님도 그것을 모르실 리가 없었습니다. 처음엔 그런 줄을 몰랐지만... 모세의 거절이 거듭되면서... 그가 말하지 않는... 말하기엔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아픔이 모세에겐 있구나... 그 날의 아픔을 여전히 모세는 가지고 있구나... 아마 하나님도 눈치 채지 않으셨을까요?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v.2) 모세에겐 그가 목자가 되었을 때부터 지녔을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이렇게 대답하자 하나님은 ‘그것을 땅에 던져 보아라.’ 말씀하셨습니다. 놀랍게도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놀라서 피하려 하니까...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게 하셨고... 뱀은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렇게 해서 이적을 보여 주면, 주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너에게 나타난 것을 믿을 것이다.’(v.5)
물론 이 일은 사람들이 모세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 그들이 모세를 신뢰하는 방편으로 행하라고 하신 일이지만... 이 일은 냉담하고... 소심해져 있는 모세에겐 ‘아... 하나님이 정말로 나와 함께 하시는 구나... 하나님이 다시 나를 부르시는 구나...’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통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물으신 것 가운데는 참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능력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나이도 굉장히 많아졌습니다. 말 주변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그 소중한 일로 부르셨을 때... 모세는 자기 자신에겐 그런 일을 감당할만한 자질이나 조건이 전혀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지난 40년 전에 있었던 실패에 대한 상처가 여전히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도 너에겐 충분하다고... 지금의 너의 모습이라면... 얼마든지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그에게 말씀하시는 거죠.
지팡이 하나면 충분하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지팡이는 아주 평범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입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요... 터키의 이스탄불에 가면 토카프 궁전이라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슬람 왕들의 거처가 있는데요... 그들의 영화로운 삶을 드러내는 보석들이 많기로 유명합니다. 그 중에 한 곳에 박물관이 있는데요... 거기에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 의심이 좀 많은 편이라서... 그게 진짜라고는 말하기 힘들겠지만... 그 지팡이를 보고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를 많은 목사님들이 설교도 하시고... 이런 제목으로 설교집을 내신 분들도 많은데요... 마치 요술방망이처럼 변해 있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내려치기만 하면 뭐든지 다 되는 도깨비 방망이같이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박물관으로 들어가면서 도대체 어떤 지팡이가 전시 되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저는 아마 대단히 크고 굉장한 것을 구해다가 전시해놓았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동네 사람들이 워낙 크고 웅장한 것을 좋아 하니까요. 그런데요... 그 곳에 전시된 지팡이는 마치 대나무 줄기처럼 가늘고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게 진짜 모세의 지팡이라는 것에는 의문이 있지만... 모세의 지팡이가 바로 저런 모습일 거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모세가 가진 지팡이는 바로 지금의 모세 자신을 상징한다고도 하겠습니다. 옛날엔 어떠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모세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물론이고... 사람들 앞에서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게 없습니다. 그는 단지 마른 막대기 같은 빈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거듭해서 자기는 아니라고... 거기에 어울리는... 손에 가진 것 많고... 자랑할게 많아서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모두가 존중하는... 그 일에 걸 맞는 보낼만한 사람을 찾아서 보내야 한다고 말씀드렸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을 때... 그에겐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바로의 손길에서 벗어나서 자유의 행진을 시작한 이스라엘이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앞에는 홍해가 그들을 막고 있고, 뒤에서는 바로의 군사들이 그들을 쫓아옵니다. 겁에 질린 이스라엘은 모세를 향해서 온갖 욕을 해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손에 들고 홍해 바다가 갈라지게 하십니다. ‘너는 지팡이를 손에 들고 바다 위로 너의 팔을 내밀어, 바다가 갈라지게 하여라.’(출14:16)
이스라엘이 광야로 접어들어서 물이 없을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들게 하십니다. ‘나일강을 친 그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거라...’(출17:5) 그리고는 호렙 산의 한 바위를 치게 하십니다. 그랬더니 모든 이스라엘과 그들이 키우는 가축들이 다 먹을 수 있는 물이 나오게 됩니다. 광야로 접어든 이스라엘이 아말렉이라는 아주 포악한 종족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모세의 손에는 지팡이가 들려 있습니다.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들고 서 있겠소...’(출17:9) 그들의 첫 번째 싸움의 작전은 참 이상했습니다. 군사들의 지휘는 여호수아의 손에 맡기고는 모세 자신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진짜 싸움은 거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모세가 손을 들고 있으면 이스라엘이 기세를 올리고... 모세가 힘들어서 손을 내리면 이번엔 이스라엘은 아말렉에게 맥을 못 춥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싸워서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 중요한 표현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어느덧 자기가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처음엔 단지 지팡이였습니다. 그가 목자라면 누구나 다 들고 있을... 그런 지팡이인거죠... 그런데 모세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고 일이 거듭되면서... 그 평범하던 지팡이가 아주 특별하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지팡이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들수록 그는 더 담대하게... 자신 있게... 주어진 현실에 대면하게 되는 거죠.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십니다. 우리가 주어진 삶에 대해서 용기 있게 도전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하고 있을 때...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가고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고... 때론 과거에 겪었던 실패에 대한 아픈 상처들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을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난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 어떻게 저 사람은 저렇게 좋은 것을 가졌을까?’아마 이게 우리가 스스로를 대하는 마음이겠지요. 내게 없는 것에 얽매이지 말고... 내겐 무엇이 있을까?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 더위가 계속되고 있기는 해도... 닫혔던 학교의 문은 열리게 되고... 가을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와 있는데요... 우리에겐 이 물음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겐 무엇이 있지?’ 내게 없는 것을 헤아려 보는 게 아니라... 지금 내게 있는 게 무엇인지... 우린 이런 물음으로부터 새로운 계절을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험한 세상에 우리를 내 보내실 땐... 그냥 맨 손으로 보내시진 않았겠지요. 우리에게 뭔가 있으니까...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으시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런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지팡이 하나 들려서 세상에 보내셨을 거야...’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거죠. 우리가 세상을 사는 일이란... 하나님께서 내 손에 들려주신 소중한 지팡이를 찾고 발견해 나가는 여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직 가지지 못한 것... 우리에게 없는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구해서 찾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오늘 모세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것...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귀한 것을 주셨는데요... 아직 우리가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것들을 찾으려하고 발견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는지... 오늘 모세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말해 줍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잘 아는 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가진 장점이라든지 매력이라든지... 소중한 가치를 스스로는 알지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럴 때... 옆에서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해 주는 한 마디는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하는 신비한 힘을 가지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저의 대학 동기 하나가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던 친구들을 회고하며 모든 동기들마다 하나씩 특징을 언급한 글을 썼는데요... 물론 저도 동기이니까요... 저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는데요...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옷 잘 입는 친구’라고 소개 하였습니다. 많이 황당하기는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전혀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였지만 말입니다. 그 얘길 들은 후부터는 얼마 동안은 옷 입는게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습니다.
‘누군가와 같은 시대를 함께 한다는 것은 단 한 번뿐인 삶이기에 더욱 귀중합니다.’ 이렇게 멋진 말을 한 사람은 영화배우 이경영씨입니다. 그가 최근에 어떤 시상식에서 조연상을 타고는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그 인터뷰에서 유해진씨나 조진웅씨... 그리고 몇몇 배우들을 언급하면서 그들만이 가진 매력을 거의 극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하는 행복함과 즐거움을 담아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제 마음도 덩달아서 따스해졌습니다. 서로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할 텐데요... 약점을 들먹거리면서 깎아내리려는 일들은 얼마나 많은 것입니까? 그런데요...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너의 매력을 말해주고 칭찬해 주는 일은 참 멋있게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어떤 사람들 하고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어떤 사람들하고는 같은 주님을 믿는 이유로 가까워지고 한 가족처럼 지낸다는 것은 구지 이경영씨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참 아름답고 소중한 일입니다. 게다가 우리들...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집의 한 가족’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한 몸’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제 서로를 향해서 해 줄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네게 맡겨 두신 지팡이를 찾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지팡이란 네가 가진 남다른 장점일 수도 있고... 개성일 수도 있고... 매력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막연하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서 해 주는 칭찬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내가 너를 오래 지켜보니까... 너에겐 이런 장점이 있어... 이건 네가 가진 남다른 매력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해... 이건 네가 아니면 도무지 생각할 수도 없는 모습이야...’ 좀 구체적으로 이렇게 서로를 향해서 자기가 알지 못하는... 때론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확신이 없는 너의 장점을 일깨우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 주신 소중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이렇게 너를 세워주기 보다는 깎아 내리고... 흠을 끄집어내고... 그래서 멀쩡하던 사람들도 바보를 만들어야 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는데요... 인터넷의 발달은 여기에 기름을 붓는 겪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서로를 세워주고... 숨어 있는 장점이나 매력을 찾아 줄 수 있다면... 그것처럼 소중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잘 지켜보면서... ‘하나님께서 너에겐 이런 좋은 점을 주신 것 같아...’ 자녀들이나 부모들이나 형제들 사이에 이렇게 서로의 멋진 점을 끄집어내어 준다면... 그 가정은 참 건강하고 행복해지겠지요. 우리는 교회생활을 할 때에 서로에게 이런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하는 대로 약점을 드러내거나 꼬집기보다는... 서로가 가진 매력을 발견해주고 장점을 일깨워 주는 일들이 우리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많이 일어나기를 우리 주님께서 간절히 원하신다는 걸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잘 살아가도록 누구에게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 나서면서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한 순간은 참 중요합니다.
그 지팡이라는 게... 처음엔 그냥 우연히... 모세가 양을 치기 위해서 길을 가다 주웠을 수도 있고... 그의 장인에게서 받는 지팡이 일수도 있겠죠. 아니면 그가 나뭇가지를 다듬어서 만든 지팡이 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모세는 그 지팡이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요... 시간이 거듭되면서... 그 지팡이로 홍해를 건너고... 그 지팡이로 어렵고 힘든 현실을 헤쳐 오다 보니까요...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참으로 소중한 선물이라는 걸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걸 알았을 때... 모세에겐 이젠 두려운 게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것... 나의 기질이나... 나의 모습이나... 내가 가진 독특함들... 이 모든 것들이 때론 맘에 들지 않기도 하고... 때론 그냥 감추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자기의 모습을 맘에 들어 하지 않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임을 알게 될 때에... 단점이나 아니라 매력이고... 나만의 독특함임을 알게 될 때에... 그 순간이 우리에겐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거듭남의 시간이요 은총의 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믿음만 있으면... 이렇게 하나님 주신 지팡이 하나만 손에 있으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린 충분합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지팡이 하나 손에 들고서... 우린 언제 어디서든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우리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게 됩니다.
모세의 지팡이 vs 하나님의 지팡이
출 4:1~9,18~20 / 홍문수 목사
여러분, 성경 인물 가운데 모세를 생각하면 무엇이 오릅니까? 지팡이입니다. 지팡이를 들지 않은 모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듭니다. 지팡이는 모세의 트레이드마크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의 지팡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의미가 무엇일까 굉장히 궁금합니다.
먼저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죠. 연대는 B.C. 15세기입니다. 당시 애굽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그들이 애굽 이민을 갔을 때는 노예가 아니었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의 초청으로 갔고, 바로 왕으로부터 특별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대우가 달라지더니 급기야 이스라엘이 노예로 전락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계획을 세우십니다. 이를 위해 모세를 준비시키죠. 당시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번식을 견제하려고 남아산아제한법을 공포했는데, 그래도 계속 번식하니까 아예 남아살해법을 공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일 강에 띄워진 아기 모세를 바로 왕의 공주(하셉수트 Hashepsut)가 발견하도록 역사하셨고, 공주는 모세를 양자로 삼습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공주라 남아살해법에 대해 초법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공주에게 남자 형제가 없어서 그녀의 남편(투트모스 2세 Thutmose II)이 왕위를 이었는데, 자신도 남자 아이를 낳지 못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일 강에서 모세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모세는 애굽의 왕자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그런데 수년 후 그녀의 남편 투트모스 2세가 궁녀를 통해 아들을 얻게 됩니다.(그가 후일 왕위를 잇게 될 투트모스 3세Thutmose III) 그러니까 모세와 투트모스 3세가 정적 관계가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을 학대하는 애굽 사람을 살인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투트모스 3세로서는 모세를 제거할 좋은 구실을 잡게 된 겁니다. 궁지에 몰린 모세는 하는 수 없이 미디안 광야로 도피하게 되는데, 그 때 나이가 40세였습니다. 그 후 40년이 지난 80세 때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그런데 광야에 묻혀 야인으로 살았던 모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속 변명을 늘어놓으며 거절합니다.
1. 모세의 지팡이 : 인간의 연약한 모습
하나님과 모세가 밀고 당기는 가운데 지팡이 이야기가 등장하는 겁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는 목자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는 그의 비천한 형편을 처지를 나타냅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모세는 연약한 중에 하나님께 계속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1절. “모세가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죠? 2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목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 비천한 마른 막대기에 불과한데, 모세 자신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왕궁에서 40년 있을 때는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우고 자신이 꽤 잘 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미디안 광야 40년을 통해서는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존재임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이 맡겨주시는 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자신의 연약함을 알게 되었기에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죠. “국어를 잘 하려면 주제 파악을 잘 해야 되고, 수학을 잘 하려면 분수를 잘 알아야 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주제(허물 많은 죄인이란 사실)를 파악하고 분수(연약한 인간이란 사실)를 알아야 겸손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게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래, 누가 뭐래? 너는 마른 막대기 지팡이 같은 존재야. 맞아! 그런데 말이야, 나 여호와 전능자 하나님이 있잖아!”
2. 하나님의 지팡이 :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신만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그 지팡이가 이제 앞으로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면 하나님의 권세와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굳이 지팡이를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함께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거든요. 출3:11~12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 ” 이러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합니까?
그런데도 계속 변명하고 거부하니까 그를 설득하고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이리저리 애쓰시는 겁니다. 모세가 구시렁거리니까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3절~7절 보면, 두 가지 이적입니다. 지팡이를 던지라고 하니까 뱀이 되고, 뱀을 잡으라고 하니까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뱀은 애굽의 우상 신과 바로 왕의 권세를 상징합니다. 그게 아무리 강해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겁니다. 또 손을 품에 넣으라고 하니까 나병에 생기고, 다시 넣었다 빼니까 원상대로 회복됩니다. 나병은 이스라엘이 속박 가운데 고통 받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이적(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적)을 보여주신 후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8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만일 그들이 너를 믿지 아니하며 그 처음 표적의 표징(mirakdlous sign)을 받지 아니하여도 나중 표적의 표징은 믿으리라” 표적은 이적을 의미하고, 표징은 가시적인 증거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증거를 보고 승리를 확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모세가 머뭇거리니까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9절. “그들이 이 두 이적을 믿지 아니하며 네 말을 듣지 아니하거든 너는 나일 강 물을 조금 떠다가 땅에 부으라 네가 떠온 나일 강 물이 땅에서 피가 되리라” 나일 강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숭배하는 강이며 풍요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이게 피로 변하면 그들의 신이 아무 것도 아님을 선포하는 겁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임을 증거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 놀라우신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표로 지팡이를 주십니다. 출4: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miraculous signs)을 행할지니라” 물론 이 지팡이는 원래 모세가 들고 있던 것이고, 이적을 행했지만 전혀 달라진 게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금으로 변했다든지 ... 모양이 확 달라졌다든지 ... 그런 게 아닙니다. 여전히 마른 막대기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중요합니까? 새롭게 부여된 의미가 중요합니다.
연인 둘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링 반지를 끼워 줍니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합니다.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항상 당신과 함께 할 겁니다.” 그러면 그 링 반지는 금은방에 있는 똑같은 링 반지들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그대가 끼워 준 반지’거든요. 그 반지를 볼 때마다 연인의 약속을 기억하며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질이나 모양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이제 그 의미가 바뀌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이 모세의 하나님이 되셔서 늘 함께 해 주십니다. 그 약속의 증표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20절 보면, 이스라엘 구원의 사명을 위해 애굽으로 출발하는 모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겉으로 보면 초라한 모습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위대한 모습니다. 그가 왕궁에서 혹시 바로 왕이 되었더라면 그 손에 황금 홀을 들고 있었겠죠. 그래봤자 세상나라 왕의 권세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영적 권세를 갖게 된 위대한 모습입니다. 왜요?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지팡이 들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모세를 붙잡고 있는 겁니다.
다윗의 예를 생각해 보시죠. 사무엘상 17장을 보면, 소년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떤 복장으로 나아갑니까? 상대는 기골이 장대하고 강력한 무기를 들고 있는 장수였지만, 그는 달랑 막대기와 물매, 돌 5개만 들고 나섭니다. 사울 왕이 준 갑옷도 투구도 무기도 다 두고 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외칩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노라!” 평소에 사용하던 보잘 것 없는 도구들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 약속을 확신 한 겁니다. 결과는 완승! 한 방에 골리앗을 때려눕혔습니다.
이제 모세는 혼자 몸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를 통해 무한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가 지팡이를 들면 홍해가 갈라지고 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생수가 터져 나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숫자로 표현하면, 인간은 1과 같은 존재입니다. 조금 잘 났으면 2 혹은 3 정도이고, 아주 잘나봤자 10 정도 되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대)입니다. 1플러스 ∞도 ∞이고, 10 플러스 ∞도 ∞입니다. 반면 1 마이너스 ∞도 -∞이고, 10 마이너스 ∞도 -∞입니다. 인간의 능력이 별다른 변수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느냐 아니냐 하는 겁니다. 거듭 말씀드리거니와 모세가 위대한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고, 모세 자신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인간적은 능력과 장점을 얼마나 갖고 있습니까? 그것을 자랑합니까? 아니면 부족해서 위축되어 있습니까? 인간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잘나 봤자, 못나 봤자 별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굳게 붙잡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험악한 세상을 살지라도 반드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 :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인생
하나님의 지팡이를 든 모세처럼 우리가 전능자 하나님을 굳게 믿으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부족해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신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대단해도 하나님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고, 인간이 부족해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시면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장애가 있어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존 밀턴이 불후의 명작 「실낙원」을 쓴 것은 놀랍게도 실명한 이후였습니다. 눈이 멀어 절망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으니까 불가능이 가능케 된 겁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인물이 있죠. ‘하늘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명희 시인입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입니다. 말 한 마디를 하려고 해도 옴 몸이 뒤틀리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서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예수님을 통한 그 큰 사랑을 체험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영감 있는 시들을 쓰는지 저도 개인적으로 그분의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 저미는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중증 장애의 몸을 가지고 어떻게 그런 시를 쓸까 정말 놀랍죠. 그 비결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증거합니다. 고전1:27~29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부족해도 심지어 약점 투성이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 출신 바이올린의 귀재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의 유명한 일화입니다. 한번은 그가 당대 저명인사들이 대거 모인 연주회에서 연주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연주 도중 줄이 하나 끊어졌습니다. 하지만 파가니니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연주해 나아갔습니다. 잠시 후 또 한 줄, 잠시 후 또 한 줄이 끊어졌습니다. 이젠 한 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바라봅니다. 파가니니는 잠시 연주를 멈추고 조용히 청중을 바라보더니, 남은 한 줄로 완벽한 음악을 만들어 내며 연주를 마쳤습니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기적 같은 연주를 해낸 겁니다.
■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파가니니의 일화를 소개하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마치 악기와 같습니다. 물론 악기도 좋아야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주자입니다. 우리 인생의 연주자는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면 얼마든지 아름답고 위대한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안질로 오랜 세월 고생만 하고 기도해도 치유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 연약함 때문에 주님을 더욱 의지함으로 큰 능력을 나타낼 수 있었다는 간증입니다. 심지어 바울은 감옥에 갇혀서도 당당히 외칩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헨리에타 미어즈는 모세의 생애를 이렇게 분석했습니다. 120년 생애를 3단계로 설명합니다. 1단계 40년은 모세가 자신을 과신한 시기였습니다.(I am somebody.) 2단계 40년은 자신감을 잃고 위축된 시기였습니다.(I am nobody.) 그리고 3단계 40년은 자신이 부족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임을 확신하게 된 시기였습니다.(I am somebody in God.)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됐을 때 비로소 위대한 인생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을까요?
① 믿음으로 순종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순종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성경을 잘 보면 모세가 행한 기적들은 모세 자신에게서 나온 게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랬습니다.
3절~4절.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지팡이를 던지라고 할 때는 순종하기 쉬웠을 겁니다. 하지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할 때 순종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땅꾼들은 어떻게 하죠? 뱀의 목을 잡지 절대로 꼬리를 잡지 않습니다. 잘못 하면 뱀에게 물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 40년을 경험한 모세도 그런 사실을 잘 알았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그가 순종한 것은 대단한 믿음입니다.
또 6절~7절을 보세요. “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나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7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 그가 순종하는 대로 놀라운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도 모세가 한 것은 그저 믿음으로 순종한 것밖에 없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놀라운 기적이 나타난 겁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람의 제2인자였지만 나병에 걸렸습니다. 소문을 듣고 엘리사를 찾아가죠. 그런데 엘리사가 만나주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을 7번 씻으라는 겁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냥 돌아가려고 합니다. 다행히 신하가 설득해서 작은 믿음으로 순종했는데,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마치 어린 아이 피부처럼 깨끗이 치유됐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들으면 깨달은 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대충 하지 말고 온전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줄로 믿습니다.
② 믿음으로 기도 :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보면 모세에 관한 기록이 많죠. 연구해 보면 모세가 지팡이를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많이 나타납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기도로 구체화됩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스라엘이 뒤에서 공격을 당한데다 군사력도 열세입니다. 그러나 대승합니다. 물론 전장에 나가 여호수아와 군인들이 나아가 싸웠지만, 결정적으로 모세의 기도가 승부를 갈랐습니다. 출17:9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 서리라”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기도할 때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됐습니다.
국교회사에서 유명한 성경학자요 목회자였던 고 박윤선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학적이면서도 영감 있는 신구약 전권 주석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사에서는 물론이고 세계교회사 가운데도 몇 안 되는 위대한 업적입니다. 그는 그 일이 기도를 통해 이뤄졌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숭실전문에 다닐 때부터 산 기도와 골방 기도를 실천했습니다. 특히 1941년~1944년 만주에 있을 때에는 새벽마다 사명을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해방이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써 주시라고 눈물로 간구했습니다. 정말 해방이 된 후 그가 부산 고려신학교 교수로 15년 봉직하게 됐는데,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 많은 체험 가운데 은혜를 주셨다고 합니다. 그에게 학문적 능력도 있었지만 기도로 얻은 영감이 주석 집필에 기초가 됐다는 간증입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고 기도할 때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험한 세상 살면서 과연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지팡이가 대단하면, 좋은 조건이 있으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가 승리한 것은 애굽의 궁궐에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광야에 있을 때 초라했지만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승리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조건들로 승리할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눈물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팡이를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