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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론 입문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기독론에서 다루어야 하는 2가지 사항
1.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2. 그의 사역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상호 떨어질 수 없다. 요 10: 11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모두에 해당하는 말이다.
구원자라는 이름은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의 사역을 도외시하면서 그의 위격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그의 위격일 제외하면서 그의 사역에 대해서 숙고할 수 없다.
인격으로서 예수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신학자
하르낙: 하나님 아버지만이 복음서에서 위치를 차지하고, 예수는 아들이 아니라, 단지 선포되는 자이다.
-> 하르낙은 가치 판단 만을 중시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의 존재 판단은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이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구원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가지고 있는 구원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러 가지다
1) 예수는 우리의 모범이다 -> 그가 우리보다 먼저 행하신 그 무엇이 중요하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그 무엇이
중요치 않다.
2) 예수는 인간성의 가장 위대한 스승들 중 한 명이다 -> 도덕주의가 지배적일 때
3) 예수는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분 -> 해방신학의 영향, 정치적인 인물로 묘사됨
4) 예수는 위대한 교사 -> 합리주의가 지배적일 때
라피드 ->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인도함을 받는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아들일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말한다면 모든 사람은 예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주의 사상의 영향) -> 그리스도를 인간화함.
마16:15절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계속적으로 대답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이다”라는 대답 외 다른 대답은 용납이 안 된다.
우리는 타키투스와 요세푸스의 기록과 탈무드 속에서도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발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사비평의 문제점?
복음서는 사실성에 대한 자료라기보다는 교회의 신앙 고백의 부산물 -> 그러나 역사에 대한 기술보다도 저자 자신들의 의도가 더욱 중요하다. 복음서의 이 같은 경향성과 관점은 그것의 진정성과 신빙성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1) 예수와 구원자라는 이름들
구원자라는 이름 자체는 이방인들의 언어에서 빌려온 단어이다. 당연히 백성들 가운데 구원에 대한 기대들과 구원자에 대한 표상들이 존재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자’라는 성서적 이름이 예수의 치료의 기적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이름 속에 그의 전 사역을 관계시켜야 한다.
2) 유대인들은 주와 그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동시에 언급되는 부분을 다윗의 위대한 아들인 메시아라고
여겼다. 메시아는 대체로 정치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예수는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실제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은 아니다.
인자(아람어 표현) -> 어떤 지정된 특정한 사람! 존귀한 칭호 (다 7: 13), 인자는 고난 받는 종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의 기대와 신약의 성취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적 전통과 제사장의 취임과 메시아적 왕에 대한 희망이 성취된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동일한 뜻이지만,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신약성서에서 더 많은 내용을 포함한다.
고전적 양식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직책은 삼중직 1. 예언자 2. 제사장 3. 왕
3)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은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할 뿐만 아니라, 신정론의 의미에서 백성의 왕을 지칭하는 것이다(호 11:삼하 7: 14, 시 2:7). 욥기 1장 6절과 38장 7절에서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린다.
메시아라는 개념은 존재론적인 의미이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존재 관계를 드러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하나 됨은 존재 상의 하나 됨이다.요한이(요 1: 18, 요일 4:9)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바울이 하나님 자신의 아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서로 평행을 이룬다(롬 8: 32).
4) ‘주’라는 이름
‘주’라는 이름은 힘, 권위, 전권을 뜻한다. 헬라 세계에서 ‘주’라는 말은 황제 숭배 의식에서 중요한 기능을 가졌던 신성들과 황제들의 명칭이었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주와 신’으로 불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라는 신앙 고백은 이방에 대한 선교적-변증적 율조를 띤다. ‘주’ 큐리오스라는 명칭은 절대 헬라 세계에서 빌려온 무엇이 아니다. 가장 오래된 팔레스타인 교회들 속에서 이미 ‘주’로 그는 인식되고 있었다.
교회의 신앙 고백은 인격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바 되고, 저주받았던 사람인 나를 구원하셨던 나의 주이심을 나는 믿습니다……. 나는 그의 소유이며, 그의 나라에서 그의 가운데 살며 그를 섬깁니다.” -> 그분이 우리의 주이실 때, 그는 우리 삶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 모든 것과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가 주께 속하고 그분이 기독교의 주시라는 사실을 말한다.
교회의 교리
사도신경의 발생 역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에 대한 신앙 고백은 이미 2세기에 고백되었다. 사도신경 외에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니케아 신조의 양식과 일치하는 방법으로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을 반박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가장 뛰어난 피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니케아 신앙 고백에는 동의를 했지만 그의 기독론으로 인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 같은 경우가 바로 그리스도는 많은 점에서 인간적이지만,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지 않다고 생각한 아폴리나리우스의 경우다.
아폴리나리우스: 그리스도는 어떤 인간적 영혼이나 정신도 갖지 않고 있다.
유티케스: 두 본성의 혼합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 위격의 일체에 대해서 의심함. -> 교회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음.
또한 어떤 사람들은 지상에서의 예수의 삶은 탈색된 무엇이라고 말했다. 그의 본래의 빛나는 영혼에 비하면 말이다.
니케아 회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육신 속에서 계시하신 신-인 예수의 한 인격의 신비! 신-인이신 한 인격의 신비를 보존하는 것이었다. 한 위격 속에 담긴 두 본성, 그것의 신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칼케돈 공의회의 것은 두 본성론을 강조해서 단성론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2) 종교개혁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는 고대교회의 교리를 성서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고대교회의 교리 전반에 본질적인 위치를 부여함. 종교개혁의 기독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새로운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루터의 신학은 기독론 중심적이다. 루터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이신칭의’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킨다. 예수가 단지 인간에 불과했다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의 참 인간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루터의 성찬론은 그의 기독론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그 반대로 그의 기독론은 그의 성찬론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루터에게는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임재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데 루터는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말씀의 성육신을 통해서 편재성으로 신적 고유성에 참여했다”라는 사상을 변호했다. 그의 개념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본질적으로 신성화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개념 속에는 신성과 인성의 질적 차이를 부정하거나 희석시키는 신비주의적 경향이 내포되어 있다.
-> 그의 이런 개념은 성만찬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찬에서 실제적으로 임재 하지만, 그것은 성령과 은혜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스도의 양성론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었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요한 것으로 제안했지만, 그리스도를 단지 원형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 자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인 것’으로 대치되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신의식’의 계속적 능력이 중요했다.
리츨(A. Ritschl)은 그리스도를 차라리 모범으로 보았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도덕적 가치의 나라로 제정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의지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측 현대 주의자 히어링: 예수는 거룩한 현실성이다. 그의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접근하셨다. 그의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 그는 신성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삼위일체 중 두 번째 위격만을 기억했다.
불트만: 신약과 구속의 역사 모두 신화적이다. 그는 현대인을 위해서 신화들을 제거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화들이 제거되었다기보다 해석되었다. 중요한 것은 케리그마다. 케리그마를 통해서 듣게 되고 결단을 하거나, 말거나를 결정한다. -> 이에 대항하기 위해 신앙고백 운동 ‘복음만’이 일어났다.
베르코프: 예수는 특별히 ‘순종함으로써 사랑받는 계약 파트너로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말해준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는 하나님과 내적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 몇 번만 하나님으로 불린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계약의 합법적 가능성이다. 베르코프에게 있어서 예수는 절대 이중적인 존재가 아님. 즉 예수는 중간 존재인 셈이다. -> 이런 고백을 따른다면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고백이 없어지게 된다. -> 그러나 플레스만은 “하나님의 구원의 결정성은 예수의 선재에 기반한다”라고 말하며 베르코프에 반박한다.
현대신학의 문제점은 예수의 신성을 “신적인 것”으로 대치한다. 예수를 신적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은 그분을 중간존재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중간 존재에 의해서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구속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
인간들 가운데 인간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에 대한 문제는 가현설과 관련이 되었다. 보통 인간에게 속하는 모든 것이 예수에게는 생소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는 인간들 중에 한 인간 이상이시다. 그는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한 방법으로 그와 아버지와 연합을 이루어 사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참’ 인간이라고 말하는데 이 ‘참’ 것은 가현설과 단성론을 배격하는 것이다. 마르시온을 비롯한 이단들은 천상적인 것과 지상적인 것의 연합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재세례파를 통해 가현설의 새로운 형태를 볼 수 있다. 16세기 재세례파들의 경우 기독론은 ‘자연과 은총’, ‘창조와 재창조’라는 이원론을 통해 영향을 받았다. 재세례파들의 관점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마리아에게서 어떤 인간성을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인간성은 죄적 인간성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개혁교회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성은 그것을 하늘로부터 가져온 것이 아니라,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탄생을 통해 그녀에게 받았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모든 면에서 그의 형제들과 같지만, 다만 죄가 없으신 분이다.
현대의 가현설도 존재한다. 불트만은 예수의 삶과 인격성에 대해서 그렇게 좋게 더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그 예수는 육체에 따라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관계하시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고후 5장 16절을 사용한다. 그러나 바울의 ‘육체대로 안다’는 순전히 인간적 기준으로 알고 판단한다는 뜻이다.
베르코프: 나사렛 목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계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인간 예수는 그의 ‘죽음에까지 이르는 완전한 순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삶과 주권에 참여’하는 좋은 역사를 이뤘다. 베르코프는 양자설과 단성론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적 동일성에 주목했다. -> 이는 개혁교회의 신앙 고백, 성서와도 모순된다. 베르코프의 주장은 인간 예수를 점진적으로 신성화시킨 것이다.
참되고 의로운 인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에게 인간성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 이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콜브루케: 육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전적으로 소외된 상태 속에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부패되었고,저주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은 무죄하고 결점이 없는 어린양이 되었다. -> 죄는 그의 육신 속에서 소화되었고, 진멸되었다. -> 콜브루케는 예수의 무죄성을 주장하긴 했다. 그러나 받아들일 수 없는 강력한 표현들이 있다. 예수에게 비록 죄를 지은 실재성은 없을지라도 죄를 지을 가능성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말해야 한다.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되는데 어떻게 그러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같은 사실이 예수께서 계속적으로 받은 시험들의 심각성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죄에 대한 그의 싸움은 강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의 하나 되심
루터 | 개혁교회 | 카톨릭 교회 |
신성과 인간성 속성들이 그리스도의 한 위격에 속함. 신적 속성들은 인간성에,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성은 전능하고 편재하게 된다. -> 속성의 교류를 주장. 루터파와 로마카톨릭은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상호 침투함을 지지한다. | 그리스도가 고통을 받은 것은 그분의 인간성이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루터의 이러한 주장 속에서 가현설적 요소를 발견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의 고유한 속성은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즉 개혁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간성을 강조하여 구별한 것이다. | 루터와 비슷하게 신성과 인성의 상호 속성들이 서로 침투함. 신성화 속에 참여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예수의 어머니이다. |
결과: 인간성의 고양, 인간성의 영화, 인간성의 신성화 이론 가능 | 하나님의 아들의 인간성은 인간성의 피조적 한계를 넘지 않는다. 속성 교환론, 속성 침투론 반대 | 마리아 승귀론으로 연결 |
개혁교회는 아타나시우스의 표현처럼 도덕적 영혼과 육체가 한 사람을 이러고 있듯이, 하나님과 인간이 한 그리스도를 이루고 있다. 개혁주의의 입장은 두 인격들이 로마 카톨릭과 루터의 개념이 인간성에 대한 인격 존재성을 빼앗아 버린다고 보았다. 이 같은 개념은 그들에게 있어서 비인격적인 것이다. 최윤배 교수는 이 같은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엔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적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결핍되지 않아서 가현설을 피할 수 있는 동시에 이 인간성을 독립시키지 않는 것이다. 인간성을 독립시키지 않음으로 네스토리우스적 경향성에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자신의 실존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성을 비인격적으로, 보편적으로 또는 추상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비독립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즉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비독립적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어떤 순간에도 자체적으로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불린다. 중보자라는 표현은 메워져야 할 간격과 구속되어야 할 죄와 폐기되어야 할 원수가 존재함을 전제한다.
삼중직
중요한 것은 중보자의 한 사역의 세 가지 측면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겸비와 고양 상태 속에 있을 때에도 항상 제사장, 예언자, 왕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도 예언자 이셨고, 부활 이후에도 이 사역을 계속하신다.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지만, 그분이 지금도 하늘에 계시는 보좌 우편에서 제사장적 사역을 감당한다. 왕의 역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론의 삼중론직은 변증적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에 대항하여 논쟁될 수 있다. ‘우리의 유일한 대제사장’의 유일한 이라는 단어는 로마카톨릭교회의 사제직론과 미사론을 거부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또한 우리는 이를 통해 교황의 그리스도 대리권에 반대한다. 교황의 대리권은 그리스도의 왕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께서 직분자들에게 해야 할 일을 위임한 것이지, 그리스도 자신을 위임하지 않았다.
루터파 신학자들은 속성의 교류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러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상호의 것들이 서로 교류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육체 역시 하나님처럼 편재성을 띨 수 있다는 가정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삼가고 계셨다고 말한다. 그때 그리스도는 겸비 또는 비움의 상태 속에 계셨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육신 자체는 비움이 아니라 신적 속성들을 사용하지 않음이다. 즉 비사용인 것이다. 이 같은 루터적 이론 속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세기에는 루터적 사상을 밑바닥에 깔고, 이와는 반대 형태, 즉 신성의 인간화를 지향하는 신학 이론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겸비 기독론(Kenotic Chrstology)’이다. 처음에는 독일, 나중에는 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료되었다. 네덜란드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매료되었다. 이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성육신을 통해서 신적 속성들을 전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내려놓으시거나 그것들만을 단지 잠정적으로 보존하셨다.
이 같은 기독론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동기는 아래와 같다.
1)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신을 주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둔다. 자기 자신을 제한시키기를 원하는 신적 사랑이 동기이다.
2) 예수의 지성적 삶을 순전히 인간적 삶으로 간주하는 노력이다.
-> 수용하기 힘들다. 이 기독론의 경우 하나님의 아들을 원래 하나님의 아들과 전적으로 다르게 만든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적 존재성이 부분적으로 제거되거나, 그리스도의 신적 실존이 시간적으로 폐기된다.
-> 코르프의 반박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실제적으로 오셨다는 사실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은 그 오심 속에서 계속적으로 실제적인 하나님으로 계심을 더욱 필요로 한다”.
-> 개혁파 신학자들은 말씀의 성육신을 신적 영광을 내려놓으심 또는 숨기심으로 이해했다.
‘비움’이라는 뜻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어떤 것을 자신들의 장점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그것을 갖지 않는 것,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멀리하는 뜻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종의 형체를 받아들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자기로부터 벗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가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이중 상태론에 대한 비판
불트만은 이중 상태론을 비판하기 위해 빌립보서 2장 속에서 구속자에 대한 영지주의적 신화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최윤배 교수는 이것이 영지주의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주장한다.
바르트에 의한 이중 상태론의 변화
화해는 하나님의 낮아짐과 인간의 높아짐 속에 존재한다. “화해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자신을 낮춤으로 화해하는 참 하나님이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고양되므로 화해된 참 인간이시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 속에서 화해의 보증인과 증인이시다”. -> 바르트의 경우 그리스도의 이중 상태에 대한 위치는 화해의 두 가지 국면들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이 같은 변증 속에서는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강조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이 훨씬 더 많이 강조된다.
겸비 상태와 고양 상태스타투스라는(Status) 말은 상태뿐만 아니라 법적 위치를 가리킨다. 겸비상태에서는 그는 백성을 위해서 의를 성취하셨고, 고양상태에서는 그는 성취하신 의를 백성에게 적용시키신다.
겸비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1. 말씀의 성육신
1) 약속의 성취
2) 그리스도 탄생의 기적
하나님께 속했고, 하나님 자신이었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약함, 문제성, 일시성으로 특징짓는 새로운 실존 방식을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 참여하지 아니하시고 약하고, 일시적인 인간적 상태로 오셨다.”
동정녀 탄생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신학자들은 합리주의와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마리아 숭배 사상 같은 오해가 발생했다. 사도신경에 있는 구절을 오해해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단지 표적의 의미를 지닐 뿐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동반하는 표적인 것이다. 이는 철저히 그분의 성육신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다.
성육신의 동기와 목적
어떤 사람은 비록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성육신은 사실로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 사람들은 죄로부터의 구속과 부패로부터의 구원 속에서 중요치 않은 부차적인 동기를 보게 된다. 성육신이라는 구원의 사실로부터 우주적 원리로써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의 합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교회 속에서 성육신이 계속된다고 생각하는 사고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사됨과 음부에 내려가심
신학자 뽀쁘는(Pop)는 “예수의 무덤은 그가 죽으신 바 됨에 대한 설득력 있는 표적과 인장이며, 다른 한편으로 예수의 무덤은 죽음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부활시킴으로써 하나님이 개입하셨던 역사적-지질학적 장소다.”라고 말했다. 장사됨 역시 그분의 겸비의 한 단계에 속한다.
음부에 내려가심
1) 죽은자들이 있는 장소로 가셨다
2) 죽음 이후에도 회개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을 함축한다 (카톨릭 지지, 개혁교회 반대)
-> 이 본문이 해석하기 분명 어렵지만 보편주의 사상은 배격되어야 한다.
(3) 마귀를 이기셨고, 지옥의 힘을 멸절시키셨다. 마귀로부터 모든 힘을 빼앗았다. -> 고양의 시작을 의미
(4) 그리스도의 버려짐의 깊이를 상징한다! 하나님에 의해 버려진 그는 그의 영혼이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그의 버려짐의 깊이가 너무 거대했음을 문학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5)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의 장소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처하셨던 죽음의 상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고양, 승귀, 현양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심과 연결됨. 부활을 부정적으로 보는 신학자들 역시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을 사실로 간주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활은 쉽게 말해서 증인들의 증언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그렇지 않을 것인가로 갈린다. 판넨베르크는 무덤이 비었다는 것이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로 확정되지 않았을 경우, 부활 선포는 어떤 날에도 어느 순간에도 예루살렘에서 유지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비교 연구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복음서는 “배후로부터 볼 때, 짜서 맞춘 작품이 아니다. 그 큰 사건을 통해서 놀란 사람들의 일차적인 손을 통해 주어진 증언이다!”.
부활의 의미
1)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빛 속에 있는 새 생명
2) 그리스도의 부활은 중보자의 사역에 대한 신적 인정이다. ‘아들의 완성’에 대한 아버지의 인정을 듣는다.
3) 사람들을 위해서 길을 자유롭게 만든 선구자라는 확신. 그분은 죽음의 길에서 방향을 내신 한 명의 선구자
4)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에 대한 위대한 도래
5) 우리도 장차 몸의 부활에 참여해 하나님과 영생을 누릴 것이다
6) 교회가 부활을 증언하는 장소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교회의 탄생은 수수께끼 그 자체이다.
7)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미래가 시작되었음을 믿는다. 우리는 부활에 근거한 기다림을 가지고 산다.
느낀점
책이 약 240페이지가량이고,글씨가 작지 않아서 책의 내용이 빈약할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에 입문서라고 나와 있길래 그냥 간단하고, 평이한 내용으로만 가득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나의 잘못된 오해와 달리 기독론에 대한 진액이 농축된 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고 얇은 책이지만 다른 어떤 책 보다 더 진지하고, 고민하면서 읽혀야 하는 책인 것 같다. 우리는 쉽게 기독론에 대해 다 잘 알고 있다고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 하지만 이 책을 한 챕터씩 차근차근 곰 씹으면서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 물론 나도 학기 중에 이 책을 읽어서 그렇게 읽진 못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받았다. 좋은 책이라서 꼭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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