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가 어디 있는지 모를 정도로 정확히 머리 꼭대기에서 떨어지던 강렬하고 따가운 햇볕. 흔들거리며 걸어가던 검은 발바닥 아래로 푸석거리며 날아오르던 짙은 황토색 먼지. 시골길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주던 낡은 도요타 트럭의 매캐한 연기. 원색의 옷감으로 휘감은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흑인 아낙네들의 눈빛. 무언가를 항상 원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어린아이들. 그런 모든 것들과는 동 떨어져서는 머리에 흰 눈을 얹고, 푸른 하늘에 붕 떠있는 듯한 킬리만자로. 내가 서 있는 이 곳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서 있는 킬리만자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꿈 속 한 장면처럼...
마랑구게이트에서 킬리만자로 최초 등정자 “한스 마이어”의 부조를 만났을 때, 그때서야 나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대의 뒤를 쫓아 여기까지 오게 되었노라”하고...그리고는 여행을 결정하였을 때부터 갖고 있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높은 세계에 대한 두려움에 온몸이 다시금 긴장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산행이 시작되자마자 - 아직 그때까지는 산행이랄 것도 없는, 평지나 다름없는 숲속 트레킹 정도 - 나무와 풀과 바람, 그리고 그 바람에 실려 오는 생소한 냄새, 그리고 사람들 모습만큼이나 전혀 다른 형색의 아름다운 야생화들로 그런 긴장은 멀리 떨어뜨리고 카메라의 셔터 누르는 일에 온 정신을 팔리게 되었습니다. 사진 찍는 일에 금세 집중이 되어서는 일부러 일행과 조금 거리를 두고 뒤쳐져서는 혼자서 풀냄새를 맡아보려 가까이 들이대어 보기도 하고 연분홍빛 어여쁜 야생화 앞에서 한참을 웅크리고 드려다 보기도 하고, 보들보들한 정글의 나무 이끼를 만져보고 또, 가볍게 뺨에 비벼 보기도 하고 그리고는 한 움큼 훑어내어 주머니 속에 넣어가면서 오랫동안 그 부드러움을 혼자서 즐겨보기도 합니다. 아! 커다란 나무들에 얽혀 있는 이끼들이 햇빛을 받아 연녹색의 조명을 반짝이던 모습! 아직도 내 머리 속에 남아있는 환상 같은 그림중의 하나입니다. 아무리 어찌해보아도 내 실력으로는 사진으로 표현이 되질 않습니다. 조그마한 골목길처럼 나있는 길옆에서는 잠시 서서 눈과 머리로 그리고 가슴에 새김질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보게 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산행 첫날은 6,000m나 되는 높은 산에 왔다는 긴장감은 전혀 없이, 마치 수학여행 온 설악산의 여느 여관에서의 그 느낌 그대로였습니다. 2,750m 지구 반대편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은 적당한 두통으로 인해서 세수하기도, 아침 화장실가기도, 모두가 귀찮은 상태이었습니다. 여행 시작하고 처음으로 등을 바닥에 대고 누운 탓에 서울을 떠난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혈압 약을 언제 먹어야하는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약간의 두통과 피곤함으로 시간 계산하는 것도 싫습니다. 그래도 맑은 공기를 쐬러 나온 그날 아침, 나는 깜짝 놀라 얼른 카메라를 챙겨 나옵니다. 그렇게 맑은 하늘과 붉은 여명을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보는 붉은 햇살도 신기할 정도이었지만, 사실은 옆에 서서 같은 하늘을 쳐다보던 다른 선생님의 붉은 얼굴과 우리의 등 뒤에 있던 나무들까지 모두가 검붉은 색으로 변해있을 때에는 마치 영화 속에서나 보던 그런 아프리카의 모습을 잠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이제 점점 나무들이 없어지고 키 낮은 풀들로 주위가 변해갑니다. 멀리까지 내보이는 모습이 시원해지기도 하지만, 저 멀리까지 내가 가야하는 길이 보이면 지레 기가 죽는 것 같아 힘도 그만큼 더 드는 느낌도 생깁니다. 정상을 향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아있는 등산길은 지루하기 조차합니다. 한참을 가도 창밖의 모습이 변하지 않는 그런 기차를 타고 가는 느낌입니다. 나는 열심히 걷고 있는데,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대로고 뒤를 보아도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 똑같은 길을 아무 말도 없이 몇 시간씩 걷다 보면 생각이 많은 사람은 저절로 철학자가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킬리만자로 다녀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동안에 잃어버렸던 내 자신, 내 자아를 찾아....”하는 말을 하게 되나 봅니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밖에는 생각할, 다른 꺼리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푸른 보리밭 같은 풀들이 끝없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까이서 보면 보리밭보다는 훨씬 부드러운 느낌을 줍니다. 야영을 하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나마 조금 색다른 풍경이라 길에서 벗어나 낮은 풀숲에서 사진도 찍고, 앉아서 누워서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잠시 여유를 부려봅니다. 누런 흙먼지 풀풀거리는 산행 길을 적당히 터벅거리며 걷는 것이 벌써 이틀째입니다. 드디어 코 안이 말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부터 말라붙기 시작한 코 속은 산행이 다 끝나고 그리고도 이틀이 훨씬 지나 홍콩에 가서야 그야말로 뻥하고 뚫려서 이 세상의 공기의 신선함을 받게 됩니다. 지루할 정도로 똑같은 길을 한참을 걷고 난 후에 일행은 푸른 녹색의 커다란 나무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게 됩니다. 커다란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세네시오 킬리만자리” 이곳에만 있다는 마치 선인장처럼 생긴 나무입니다. 커다란 녹색의 나뭇잎 같은 것이 꽃잎이라는데 도저히 꽃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짙푸른 하늘과 누런 들판, 그리고 멀리에서 흰 눈을 살짝 머리에 이고 점잖게 서 있는 킬리만자로...이들은 여태껏 내 머릿속에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습니다. 키네시오가 군락을 이루어 장관을 보여주던 계곡의 나무다리를 지나면 곧 또 다른 산장에 도달합니다. 3,750m 이 산장에서 나는 실수를 합니다. 하루 종일 걸어오느라 피곤하고 땀도 제법 흘렸던 터라 수돗가를 보고서는 아무 생각 없이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누를 잡던 내 손바닥에는 이것이 비누인지 무엇인지를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정말 아무런 느낌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순간적으로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른 숙소로 들어가서 타이레놀을 먹고 오리털 파커와 털모자를 뒤집어쓰고 슬리핑백에 들어갔지만 몸에서는 열이 나기 시작했고, 떨리던 몸은 이제는 흔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체온은 39도까지 오르고 온 몸이 근육통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수면제 한알을 털어넣고.... 그리고는 잠시 후에 조금씩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콧속이 마치 플라스틱 파이프 같은 느낌이 오는 것이 아마도 공기가 점점 더 메말라가는 가 봅니다. 심지어는 아프기도 합니다. 콧속이 말라가는 것처럼 내 머리 속도 그리고 아마도 내 폐 속도 가뭄 때의 논바닥처럼 말라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아무런 생각이 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등산화 색깔 같은 황토빛 흙먼지를 터벅거리며 걸어야 한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점심 도시락으로 여러 가지가 들어있었다는 기억은 있지만, 그냥 오렌지 주스를 옆 사람 것까지 두개를 마신 것이 전부였습니다. 살찐 닭다리 튀김이 있었지만 도저히 찐득거리는 살코기를 씹을 입맛이 없어서 어디선가 날아온 까마귀처럼 생긴 새에게 던져주고 말았습니다. 이때쯤부터는 동료들이 모여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을 때, 약간은 짜증이 나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숨을 잠시 잠깐 멈추어야 하는데, 서서히 그것조차 힘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출발 전에 인터넷에서 읽은 것 중에 고소에서 숨을 멈추지 말고 사진 찍는 연습을 하라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를 않고, 이런 정도로 영향을 줄지도 몰랐었습니다. 4750미터. 키보 산장에 들어가서 내 잠자리를 정리해 놓고 밖에 나와 본다. 높은 곳에 올라야만 느낄 수 있는 벅찬 감동. 멀리 발밑으로 깔려있는 구름들과 그 사이로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세상의 불빛들...
아직 자정도 되지 않은 시각. 마지막 정상 공격을 위하여 잠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전혀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망치로 맞은 듯이 아프고 무거운 머리, 그 아픈 머리를 더 조이는 헤드 랜턴. 도저히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기기가 힘들어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넣지 않은 텅 빈 뱃속. 화장실을 지금이라도 다녀 와야하는 건지 그냥 가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아 참, 혈압 약은 언제 먹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얇은 것 하나, 두꺼운 것 하나 두 개나 낀 장갑덕분에 스틱잡기가 영 불편하다, 그저 그냥 집어 던지고 싶은 생각뿐... 카메라와 물, 그리고 먹을 것 약간뿐인 배낭은 왜 이렇게 무겁고 덜렁거리는 것인지...서울에 가면 다시 좋은 것으로 새로 하나 사야지.. 고소내의를 입고 오리털 파커를 위에 고어 텍스 자켓을 입은 탓에 서커스단의 곰처럼 둔한 몸. 두 겹이나 신은 양말 덕에 조금 빡빡한 느낌을 받는 왼쪽 새끼발가락. 날이 조금 밝아져서 화산재로 뒤 덮힌 달 표면같이 생긴 기묘한 모양의 킬리만자로 능선에 서 있었을 때에 받은 나의 느낌은 이제 막 달에 착륙한 아폴로 우주선에서 내린 우주인의 모습이라고 할까... 두 걸음을 딛고 올라서면 한걸음은 미끄러져 내려오는 빌어먹을 이놈의 화산재.... 중간에 목이 말라 물이라도 마실라치면 두꺼운 장갑 탓에 배낭끈을 풀어헤치는 것도, 물통잡고 뚜껑 여닫는 것도 모든 것이 다 귀찮고 짜증스럽다. 물이 왈칵 쏟아져 옷섶사이로 흘러 들어와 속살이 조금 젖었을 때에는 정말로 미치는 줄 알았다. 캄캄한 한밤중에 머리에 밝힌 불빛들이 줄지어 꼭대기를 향하는 모습은 지금 생각하여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이다. 저 멀리 한참 위에 있는 불빛은 최소한 내가 따라 올라가야만 하는 높이이기 때문이다. “하쿠나 마타타?” 다 잘 될꺼라구? 잘 되기는 무슨.... 그냥 저절로 잘 되는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능선에 가까이 다가서고 옆 사람의 얼굴이 누구인지 조금씩 구분이 되기 시작했을 때 급기야 길섶에 처음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의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다리의 힘이 빠져 산행을 포기한 적은 있어도 어지럽고 의식이 혼미해지는 것은 처음으로 겪는 경험입니다. 이십하고도 수년전 시골 하숙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강릉 동인병원 응급실까지 실려가 겨우 살아났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래도 두 다리는 아직도 정상을 향해서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마치 마지막 태엽이 풀리기 직전의 시계처럼... 길만스 포인트를 지나 마차메 루트와 만나는 길목 즈음에서는 이미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손과 발은 차갑고, 햇볕이 쪼이는 얼굴은 따갑고... 아니, 그보다는 얼굴에 탄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받았습니다. 내려쬐는 햇볕의 방향 때문에 커다란 바위에 드리운 명암이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동물 모양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깨비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이미 절반 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 한참이나 밑으로 보이는 분화구 아래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냥 저냥 휘익 하고 두 팔 벌려 날아갈 수 있을 만큼으로만 보입니다. 그렇게 두 눈이 퉁 퉁 분채로 머리를 감싸 안고 아무렇게나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을 때, 나는 내 생명의 구세주를 만납니다. 북한산 만경대 릿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금 더 뒤에서 올라오던 친구가 나를 발견하고는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채고는 같이 하산할 것을 권합니다. 그런... 그만 내려가자는 그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만년설을 지나 우후르 피크가 손에 잡힐 듯 보이는 그곳에서 돌아선 것은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정신이 반쯤 나가고 숨소리에서 약간의 가래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때 돌아선 것은 또 다른 기회를 위해서도 제대로 된 선택이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쩌면 나는 지구 반대편 엉뚱한 곳에서 딴 세상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니까요... 화산재가 뒤덮인 경사진 비탈을 이리 저리 넘어져 내려 오면서 춥고, 졸리고, 그리고 완전히 탈진한 상태에서 집과 가족들 생각으로 속으로 찔끔거리기도 하면서 다짐에 다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다시는 높은 데는 가지 않을 테다......“
5,800미터 이상은.... 그게 내 한계이니깐....
글. 사진 : 우일신/신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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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행의 여행이였군요 허나 불빛들이 줄지어 꼭대기를 향하는 모습이 진절머리가 나셨겠지만 사진으로 탄생하면 멋질 것같습니다
ㅎㅎㅎ 엄청 재미있습니다. (죄송) 악전고투 하셨는데.. 읽으면서 웃음이 계속나오니... 원 참
오래 전에 독일 라인강 주변 공단에서 강과 마을을 다 담아 보겠다고
무거운 카메라 둘러매고 스파이더맨처럼(계단이 없었습니다) 전봇대 오르 듯 수십미터 공장 굴뚝을 올라간 적이 있었는에...
2/3쯤 올라가서야 알았습니다. 올라가지 말었어야 한다는 것을 ...
거의 죽는 줄 알았습니다. 몸이 굳고 뇌 속이 정지되어 올라가지도 내려 올 수 도 없었거든요.
그때 우일신님처럼 다짐했죠
다시는 높은데 올라가지 않겠다고...
근데 킬리만자로 무지 올라가고 싶네요...
킬리만자로, 마추피추, 호도협 트래킹하기 위해
우선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가려고 합니다.
좀더 구체적인 계획이 서면 파전에 막걸리(그게 싫으시면 와인에 좋은 안주) 준비하고, 모시겠습니다
표범을 만나러 갑니까 왜 사람들은 기를 쓰고 오르려고 하는 것일까요 전문 산악인도 힘든 고지대를 ... 전 자신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