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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체
(2)
밤새 여기저기를 헤매고 그것도 모자라 오전 내내 수사본부를 지
킨 뒤, 이명출의 시체가 발견되자 현장을 다녀오던 최반장은 그제
야 시간을 내서 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세준은 최반장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듯이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즉시 만
나자고 했다.
최반장이 세준의 호텔방에 들어갔을 때, 세준은 모든 짐을 싸 놓
고 있는 상태였다.
"출국을 하려고 하십니까?"
세준을 보자 최반장이 인사 대신 말했다.
"어제까지는 그럴 계획이었는데 어쩌면 좀 더 있어야 할지도 모
르겠군요."
"뉴스 보셨죠?"
"예."
"박사님이 다음 피해자를 점찍어 줬는데도 사건을 미리 막지 못
해 볼 낯이 없습니다."
"..."
세준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의 문을 열고 음료수 두
잔을 따라왔다.
"그런데 어떻게 이명출이 목표가 될 것을 아셨습니까?"
"이런 대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길 바랬는데, 정말 유
감이군요."
세준은 말을 하다 말고, 커피를 마시듯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켰
다.
"처음에 범인의 행동을 분석하고 또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놀랐습니다. 그 피해자들이 바로 나의 이상형과 같
았던 겁니다. 내가 범인이라서 성범죄를 저지른다고 가정하면 나
또한 그 연예인들을 택했을 겁니다. 이런 이유로, 살아 있는 연예
인 중 내가 죽이고 싶은 여자를 골랐던 것이 바로 이명출과 두 명
의 여자들이었습니다."
세준은 다시 음료수를 한 모금 들이키고 나서 말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제가 우연히 이 사건을 접하게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저의 전공분야라서 남달리 관심을 보였던 것도 사실입니
다. 그러나 지금은 그래서가 아니라, 범인과 저와의 어떤 유사점
때문에 이렇게 매달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 보다 더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그랬군요."
최반장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수사를 하다 보면 '내가 범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는 식으
로 추리를 하는 방법이 있다죠?"
"기본이죠. 사람의 욕망이나 심리는 비슷하니까..."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했습니다. 범인과 같은 저의
심리는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공통적인 심리로... 그러
나 이번 이명출에 대한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지자 우연이나 공통
심리로 치기에는 너무나 부담이 갑니다."
이번에는 최반장이 세준의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말을 꺼내기에
앞서 음료수를 한 모금 홀짝 들이켰다.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전에 어떤 정신병을 앓은 적이 있습니
까?"
처지가 같으면 생각도 통한다고, 범인과 같은 입장이 되어 본 경
험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바로 지금 제가 하려는 얘기가 그것입니다. 그러자면 제가 양아
버지에게 입양되어 미국으로 건너가던 그 해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야겠지요. 그 전의 이야기는 하라고 해도 할 것이 없고... 어느
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느 날, 세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처음 보는 낯선 거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건물들이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머리가 쓰라려
서 손으로 뒤통수를 만지자 피가 굳어서 생긴 딱지가 머리카락과
함께 엉겨 붙어 있었다. 상처는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낙
석 무더기에라도 깔렸던 것처럼 몸의 여기저기가 멍들고 깨져 있었
다.
꿈을 꾸듯, 그는 알 수 없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가면서 자
신이 누군 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유독 자신의 신상에 관한 것만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구구단, 그리고 연필 한 자루가 얼만지 하는
다른 것들은 모두 생각이 나는데 그 자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
가 몇인지, 부모는 누군지, 집은 어딘지 하는 개인신상에 대한 것
들만 전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거울가게를 지
나치면서 본 자신의 얼굴이 매우 낯설다는 데 또 한번 놀랐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도 없었고 갈 곳도 없었으므로 밤이
되자 길거리에서 쭈그리고 자다가 경찰에게 발견되어 경찰서로 끌
려갔다. 경찰은 몇 시간동안 그에게 집이 어디냐, 이름이 무엇이냐
를 물었다. 그러다 결국은 그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을 알고 무연
고부랑자로 처리해 행려병자 수용소로 넘겼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넘겨졌다.
정신병원의 의사는 세준을 진찰하고 나서 해리장애(dissociative
disorders)라고 했다. 세준과 같은 증상은 천만명 중에 한두 명 꼴
로 발생하는 아주 희귀한 경우로 이것을 전반성기억상실(total
amnesia)이라고 하며, 아직도 그런 증상이 왜 나타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머리에 어떤 외부적인 충격을 받아서 생기거나 아
니면 커다란 스트레스를 가져다주는 사건을 격은 뒤 과거의 기억으
로부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는 도피적 방어시스템
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의사는, 해리장애로는 심인성 건망증
(psychogenic amnesia), 심인성 둔주(psychogenic fugue), 다중성
격(multiple personality) 등이 있다는 어려운 말과 함께, 세준이
곧 기억을 찾을 수도 있지만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의사는 그때까지 부를 이름이 없던 세준에게 자신의 성인 '김',
그리고 당시 인기영화배우였던 사람의 이름인 '세준'이라는 이름을
임시로 붙여 줬다. 그래서 김세준이란 이름이 탄생한 것이었다.
정신과 의사들은 보상 한푼 없이, 희귀한 기억상실에 걸린 세준
의 기억을 찾아 주려고 갖은 노력을 해댔다. 그러나 성과는 전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다른 의사들이 모두 포기했을 때, 세준
을 치료하기 위해 데려간 사람이 바로 미국에서 건너와 의료활동을
하던 월터 미첼이라는 사람이었다.
월터 미첼은 귀국을 하면서 자신이 맡아서 치료를 하던 세준을
미국으로 데려갔다. 그는 희귀한 증상의 기억상실에 걸린 세준을
양자로 입적시키고 증상을 관찰하며 계속 치료를 해 나갔다. 그러
나 그의 치료도 별 성과가 없었다.
세준을 치료하던 중 미첼은 그에게서 새로운 문제를 하나 더 발
견했다. 세준의 유전자를 검사한 결과 그가 X염색체가 하나 더 많
은 '클리네펠터 증후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 때부터 세준은 중성의 몸을 조금이나마 탈피해 보려고 남성호르
몬을 맞으며 생활해 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준은 성장을 하면서 다중성격과 우울증 같은 장애
가 계속해서 나타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척이나 유능한 정신과
의사였음으로 치료를 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정
신과 의사인 양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다 보니 그 영향을 받았는지
결국은 그도 의대에 지원을 해 그와 비슷한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
다.
"어쩌면 저의 이런 정신병력이 범인의 정신상태나 취향과 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 같은 경우도 정신병적인 문제
들을 치료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싱싱하고 건강한 아름다운 여자들
을 찾아다닌다거나 아니면 미소년들을 찾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
죠. 타고 날 때부터 혜택을 받은 그들과 같이 아름답고 정상적인
몸이 되려고 그들의 피를 빼서 나 자신의 혈관에 주입해 가며 말입
니다."
세준은 말을 마치고 나서 몸을 한번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주스를 또 홀짝거렸다.
"저 같은 문외한이 이렇다 저렇다 얘기를 하기는 다소 무리가 있
군요."
최반장은 남의 아픈 곳을 더 이상 쑤시지 않기 위해 일부러 말을
끊었다.
"이번에 발생한 범죄 얘기나 들어봅시다. 이번에도 저번과 비슷
하던가요?"
세준이 물었다.
"비가 오지 않는 날 범행을 했다든지, 이빨자국을 남기지 않았다
든지 하는 많은 부분들이 틀렸지만 모방범죄는 아닌 것 같았습니
다. 그리고 이번에는 범행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총이 발견되었으
며, 총알이 두 발 발사되었는데 한 발은 이명출과 함께 발견된 남
자의 머리에 박혀 있었고 한 발은 빗나갔는지 두 피해자의 어디에
도 상처를 내지 않은 채 옷장에 박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필
요한 만큼만의 총알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쏘았던 킬러의 다른 수
법들과 이번 수법을 비교해 보면, 이번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라
서 그런지 의문이 남는 부분이죠."
최반장은 여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생각에 잠겨 있는 세준에게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기 시작했
다.
"이명출과 같이 죽어 있던 남자가 과연 공범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동안의 범죄상황, 그리고 어색하게
조작해 놓은 듯한 이번 범행현장을 보면, 그 사람은 우연히 이 사
건에 말려든 피해자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그건 제 생각과 같군요. 범인은 유괴한 그 아이도 죽였을까요?"
"결정적인 목격자라면 오만재처럼 죽였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범인은 성범죄의 대상이 아닌 이상 살인을 많이 자제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런 희박한 가능성에 한 가닥 희망을 거는 수 밖
에요."
*
두 시간마다 찾아오는 근무 교대시간이 되자 J경찰서 출입문의
양옆에 서 있던 입초근무자들도 교대를 시작했다.
"수고하십시오."
형식적인 교대절차가 끝나자 새로 근무를 서기 시작한 고참들에
게 밑에 기수의 졸병들이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깐만!"
한 고참이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는 의경들을 불러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저기 있는 커다란 가방 말이야, 어제부터 저기 있었지?"
S은행 앞의 동상 밑에 놓여 있는 가방을 가리키며 고참이 물었
다.
"어제 어떤 늘씬한 미녀가 놓고 갔는데 아직도 찾아가지 않고 있
습니다."
"그래.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직도 안 찾아가는
거지?"
"훔쳐 가기는요. 경찰서 앞에 놓여 있는 물건, 그것도 이렇게 밤
낮으로 의경들이 두 명씩이나 지키고 있는데 감히 누가 넘보겠어
요."
"하긴. 어쩌면 가방 주인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 일부러 경찰서
앞에 가방을 갖다 놓아 맡겨 놓다시피 하고 이렇게 여유를 부리는
지도 모르지..."
그때 가방이 조금 움직였다.
"앗, 가방 움직이는 것 봤어?"
졸병들을 불러 세웠던 고참근무자가 외쳤다. 그러나 그가 소리를
지르고 나서 다른 사람들이 다시 가방을 쳐다봤을 때는 아무런 움
직임도 없었다. 졸병들은 한동안 가방을 쳐다보다가 고참이 장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냥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가방이 움직였는데..."
"가방에 귀신이라도 붙었나? 어떻게 스스로 움직여."
다른 의경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서며 말했다.
"분명히 내가 봤단 말야. 내가 가서 가방을 조사하고 올 테니까
순시나 순찰이 지나가는지 잘 보고 있어."
말을 마친 의경은 골목길을 건너서 S은행으로 뛰어갔다.
가방을 향해 다가간 의경은, 개가 낯선 물건을 놓고 탐색이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그것을 살피기 시작했다. 곧 그는 가방을 손으로
툭툭 건드려 봤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때서야 그는 가방의 지
퍼에 붙여 놓은 테이프를 떼어 내기 위해 손을 댔다. 바로 그 순
간, 다시 가방이 움직였다. 의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가방에서 급
히 손을 떼었다.
"음음-"
가방 안에서 신음소리가 들려 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로 멀찍
이 물러 서 있던 의경은 직감적으로 안에 들은 것이 무엇인지를 파
악하고 급히 가방으로 다가갔다. 그는 빠른 동작으로 지퍼에 붙어
있던 테이프를 떼어 내며 가방을 활짝 열어 젖혔다.
*
여관집 아이 강진규가 살아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수
많은 보도진들이 그가 치료를 받고 있는 병원으로 몰려들었다. 그
러나 경찰은 증인보호라는 이유로 누구도 접근을 못하게 병실을 철
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저녁 무렵, 아이가 탈진상태에서 회복되자 기다리고 있던 몇 명
의 경찰관들과 의사, 아이의 고모만이 입회한 가운데 심문이 시작
되었다.
"어제 너와 함께 있었던 그 여자의 얼굴이 생각나니?"
수사본부장인 한충희가 직접 나서서 질문을 했다.
"예."
아이의 목소리는 아직도 힘이 없었다.
"혹시 그 여자의 이름은 아니?"
"강 뭐라고 했는데... 나와 성이 똑같았어요. 강현... 아니, 강
선... 강선미, 맞아요!"
아이의 말에 형사들은 각자의 수첩을 꺼내 그 이름을 적어 넣었
다. 본부장이 어느 형사에게 눈짓을 하자 그는 그 이름을 가지고
병실을 나갔다. 연예인 중에 그런 이름이 있는지 아이가 안 보는
장소에서 전화를 걸어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너는 머리가 좋구나! 잘했어."
수사본부장은 과장된 목소리로 아이를 칭찬하고 나서 다른 질문
을 시작했다.
"혹시, 그 아줌마가 어디 아픈 것 같지 않데? 다리를 전다든지?"
"다리는 괜찮았는데 이 손을 잘 못썼어요."
아이는 자신의 왼팔을 들어 보였다.
"왼손 말이구나?"
"예, 그래요. 물건을 들을 때도 왼손을 쓰려다가 밥 먹는 손을
쓰곤 했어요."
경찰들은 아이의 말을 수첩에 적어 넣으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 한 발의 총알이 누구를 향해 발사된 것인지 이제야 알 것 같
군."
본부장은 혼잣말을 하고 나서 계속 질문을 했다.
"그래 역시 머리가 좋구나. 어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차근차근 말해 보렴."
"어제 그저께 어떤 아줌마가 색안경을 끼고 우리 집으로 왔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책에 나와 있던 예쁜 아줌마였어요. 그래서 어제
아침에 아줌마가 방에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사인을 받으려
고 책을 들고 갔었어요."
"잠깐만! 그 아줌마가 책에 나와 있었다고? 그 책 어디 있지?"
수사본부장이 아이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몰라요. 아줌마네 집에 갔을 때 컴퓨터 옆에 놨었는데..."
"아줌마네 집? 거기가 어딘데?"
"몰라요. 꽤 멀어요."
"그 책이름이 뭐였지?"
"몰라요."
"그럼 책의 겉표지에 어떤 그림이 있었지?"
"몰라요."
그때 진규의 고모가 끼여들었다.
"그 잡지책은 오래 전에 어느 손님이 객실에 놓고 간 것인데 겉
껍데기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어요."
"아주머니도 그 잡지책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
까?"
"오래 전에 그냥 한번 떠들어 봤을 뿐, 그 뒤로는 그 책이 어디
에 처박혀 있었는지 본 기억도 없는데요. 여성잡지 같았는데..."
여관주인에게서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수사본
부장은 다시 진규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그 책에 나온 아줌마가 어떻게 하고 있었지? 어떤 폼을 잡고 있
었냐고?"
"그냥 웃으며 서 있었어요."
수사본부장은 아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서 뒤에 서 있는 경찰
들을 쳐다봤다.
"역시, 범인은 연예인이 틀림없군. 빨리 연예인들의 사진을 모두
구해 오시오."
"모든 연예인들의 사진을 구해서 이 아이에게 일일이 확인을 시
키려면 오늘 하루로는 부족 하겠는데요."
뒤에 서 있던 어느 간부였다.
"모든 연애인들의 사진을 다 구해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갑자기 끼여든 건 최반장이었다.
"범인은 바로 모델인 것 같습니다. 전에 수사상황이 실린 신문기
사가 나가고 나서 일어난 우희완의 사건 아시죠? 놈이 자신의 인
상착의를 목격한 오만재를 죽이고 나서 어떤 이유 때문인지 TV의
채널을 돌렸다는 단서를 잡은 경찰은 놈이 숨기려던 방송이 무엇인
지 조사하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놈은 보란듯이 우희완을 죽여
수사가 '옴니버스 극장'으로 집중되게 했었던 일 말입니다. 우리는
오만재의 사건에서 얻은 단서, 그리고 놈의 눈가림에 넘어가 엉뚱
하게도 '옴니버스 극장'의 출연진을 집중적으로 수사했었는데, 지
금 생각해 보니 텔레비전에서 오만재가 보고 있던 것은 '옴니버스
극장'이 아니라 그 프로를 시작하기 전의 광고를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점차 목을 조여 오는 경찰에 불안을 느낀 놈은 바로 그
것을 숨기기 위해 송은혜의 사건이 일어난지 며칠이 지나지도 않아
한번의 살인을 더 했던 것이죠. 물론,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수
사력을 집중시키려는 '옴니버스 극장'의 출연진 중 자신의 구미에
맞는 여자를 골라서... 하지만 한정된 범위에서 고르다 보니, 신선
하다고 표현할 수 있는 다른 피해자들과는 달리 접대부와 같은 여
자를 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죠. 그리고 놈의 예상과는 달리,
살해한 시체가 쉽게 발견되지 않자 결국 편지를 보내어 스스로 제
보를 했던 거구요."
"그 생각을 못했었군. 하지만 그렇다 해도, TV나 잡지의 광고모
델은 전문모델보다 인기연예인들이 더 많이 하고 있지 않나?"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목격자들이 범인의 얼굴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보아 영화배우나 탤런트보다는 확실히 유명
하지 않은 모델일 겁니다."
그때, 강선미라는 이름을 확인하러 밖으로 나갔던 형사가 실망스
럽다는 표정을 하고 들어와 본부장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
러나 수사본부장은 그 형사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
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던 말을 해 나갔다.
"모델이던, 탤런트던, 영화배우던,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
니, '옴니버스 극장'이 시작되기 전에 나갔던 광고부터 구해다 이
아이에게 보여주시오. 우리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소. 범인이 도
주를 하기 전에 빨리 신원을 파악하고 잡던지 아니면 사살을 하던
지 해야 합니다."
수사본부장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 있던 경찰들이 각자의 휴대폰
과 무전기를 이용해 여기저기에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다.
두 시간쯤 지나서 두 명의 정복경찰이 비디오테이프 하나와 비디
오기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들은 비디오기계를 텔레비전에 연결
하고 나서 비디오테이프를 찔러 넣었다. 비디오테이프에는 M방송사
에서 '옴니버스 극장'을 방송하기 전에 내보낸 15초 짜리 광고가
16개나 들어 있었다.
광고 하나하나가 끝날 때마다 경찰들은 아이와 텔레비전을 번갈
아 가며 쳐다봤다.
광고가 열 개쯤 나왔을 때였다.
"앗, 바로 저 아줌마에요!"
"확실히 저 여자가 맞아?"
"틀림없어요."
비디오테이프는 다시 뒤로 감겨지고 같은 광고가 몇 번이나 반복
되었다. 그것은 어느 생소한 모델이 세숫비누를 광고하는 부분이었
다. 뒤돌아 앉아 있는 모델이 자신의 어깨와 다리에 비누를 칠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다가 곧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져 나와
비누의 거품을 말끔히 씻어 냈다. 장면이 바뀌면 흰색을 배경으로
'내 여자의 노을 빛 피부'라는 진한 분홍색의 카피 문구가 떴다가
다시 장면이 바뀌며, 모델이 홍조를 띠고 있는 자신의 탐스러운 볼
에 진한 분홍색의 비누를 대고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그
리고 나서 화면 전체가 온통 비누색으로 변하며 '세면보다 더 좋은
미용은 없다, 나의 비누 핑크레이디'라는 멘트로 끝을 맺었다.
"누구지?"
"모델 강진숙입니다."
"모두들 빨리 움직이시오."
*
영장도 없이 사복경찰들과 형사기동대가 가은의 집을 급습한 것
은 한밤중이었다. 가은이 현관문을 열어 주자 권총을 든 수많은 형
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신발을 신은 채 이방 저방의 문을 열어
보고 또 옷장과 베란다까지 살피고 나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가은
에게 다가와 질문을 퍼부었다.
"빌어먹을, 강진숙 어디 갔어?"
"떠났어요."
"언제?"
"몰라요, 제가 어젯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보니 화장대 위에 이
런 게 놓여 있었어요."
가은이 떨리는 손으로 진숙이 남긴 메모지를 경찰들에게 건네주
자 가장 계급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 들고 소리내어 읽
었다.
"젠장, 한 발 늦었어!"
수사본부장은 부하 경찰들에게 빠른 말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서둘러서, 강진숙이 해외로 도피했는지 알아봐. 아직 못 빠져나
갔다면 출국금지를 시키고, 또 모든 경찰력을 공항과 항구에 투입
해!"
경찰들은 휴대폰과 무전기를 써서 여기저기에 연락을 시작했다.
그러나 본부장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TV에 즉시 범인의 사진을 공개하고, 협조를 요청해. 집 안은 감
식반이 올 때까지 철저히 봉쇄시키고 집 주위에 무장경찰을 배치
해!"
본부장은 화난 것 같은 목소리로 세세한 것까지 모든 지시를 내
리고 나서 다시 가은을 쳐다봤다.
"아가씨는 우리와 함께 가 줘야겠소."
"진숙이 무슨 죄를 졌죠?"
가은의 질문에 본부장이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가서 얘기해 주겠소."
"집에 전화를 하면 안될까요?"
그녀가 말하는 집이란 가족들이 사는 오스트레일리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것도 가서 하시오."
가은은 텔레비전에서 본대로 영장이 있느냐, 소속은 어디냐, 피
의자의 권리를 왜 무시하느냐 하고 따지려다가 그만두었다. 떼강도
같이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총을 뽑아 들고 집 안을 왔다갔다하
다가 여차하면 그녀를 향해 총을 난사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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