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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7일
호주, 사상 최악의 ‘산불’
호주 멜버른 북서쪽
지방에서 발생한 산불 진화 현장.
2009년 2월 7일 발생한 호주 역사상
최악의 화재로 173명이 숨졌다.
9일부터 본격적으로 번지기 시작한
화재는 4일여간 계속됐다.
거리에는 불타 죽은 야생동물 시체가
쌓여 있고, 시민 수천명이 대피시설로
피난한 가운데 화재로 고립된 마을들이
있어서 인명피해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다. 한 주민은 마치 핵폭탄이 투하된
것 같다며 멜버른 북쪽 외곽에서 밀려오는
불길로 인한 피해를 우려했다.
현지 언론들은 구조대원들이 2번째로
큰 도시 멜버른에서 북쪽으로 80㎞에
걸쳐 불에 탄 수백채의 가옥을 중심으로
실종자들을 찾고 있어 희생자가 최대
300명이 될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한편, 경찰은 이번 산불 가운데 일부가
방화일 것으로 추정했다.
▶ 2010년야구선수 임수혁 사망
지난 2000년 경기 중 쓰러져 식물인간 상태로 10년 가까이 투병해 온 프로야구 전 롯데 자이언츠 선수 임수혁(41)씨가 2010년 2월 7일 오전 끝내 세상을 떠났다.
서울 강동구 명일동 요양원에 있던 임씨는 이틀 전 감기 증세로 강동성심병원으로 옮겨졌고 이날 오전 8시 25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병원측은 사인(死因)을 급성 심장마비와 허혈성 뇌손상 합병증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아내 김영주(40)씨와 아들 세현(16)군, 딸 여진(14)양이 있다.
임씨는 2000년 4월 18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LG트윈스와의 경기에서 1루에서 2루로 진루한 뒤 갑자기 쓰러져 의식불명이 됐다. 지병인 부정맥이 원인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에 산소가 통하지 않아 ‘식물인간’ 판정을 받고 9년 10개월간 투병해 왔다.
서울고와 고려대를 졸업한 임씨는 상무를 제대한 뒤 1994년 롯데에 신인 2차 지명으로 통해 입단했다. 입단 때부터 힘이 있는 대형포수로 주목받은 임씨는 2년째부터 주전자리를 꿰차고 공격형 포수로 이름을 날렸다. 주전 첫해인 1996년엔 타율 0.311, 11홈런, 76타점을 기록했다.
1999년에는 삼성과의 플레이오프 7차전에서 극적인 동점 홈런을 터뜨려 야구사에 기억될 만한 극적인 플레이오프전을 만든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2000년까지 7시즌동안 통산 488경기에 출장해 1296타수 345안타, 타율 0.266, 홈런 47개, 257타점을 기록했다. 그러다가 전성기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프로야구계에 선수 안전대책 필요성 논란이 빚어졌고, 그 뒤 구장에구급차가 항상 대기하게 됐다.
롯데구단은 해마다 자선행사를 벌여 임씨 가족에게 성금을 보내왔고 1000명이 넘는 팬들도 후원회를 구성해 병상의 임씨를 응원해왔다.
▶2010년코스타리카 첫 여성 대통령 탄생
▶2009년김연아, 4대륙 선수권 대회 우승
시상대에 오른 김연아와 2위를 한 캐나다의 조아니 로셰트,
3위를 한 일본의 아사다 마오.
▶2007년英축구 리버풀,
美에 팔려 인수총액 4003억원
▶2007년하버드대 30년만에 '교과 대수술
▶'2001년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
언론과의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
▶2000년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사상 첫 여성 대통령에 당선
▶1999년후세인 요르단 국왕 사망
후세인[ Hussein (ibn Talal) ] 1935. 11. 14 트란스요르단 암만~1999. 2. 7 암만.
요르단의 국왕(1953~1999).
온건한 성향의 아랍 지도자로서 정치와 종교의 극단주의가 팽배한 중동 지역의 평화, 안정, 발전, 관용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피난해온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려고 애썼고, 46년 간의 치세 동안 후세인은 아랍 지도자로서는 보기 드물게 서방 국가들, 특히 영국이나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아랍 세계와 유대감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후세인은 예언자 마호메트에게까지 혈통이 이어지는 하심 왕조 아브둘라 국왕의 손자였다. 그는 이집트의 빅토리아대학, 영국의 해로 학교를 거쳐 샌드허스트 영국육군사관학교에 다녔다. 1951년 그는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의 손에 할아버지가 암살되는 것을 목격했으며, 1953년 아버지 탈랄 국왕이 정신질환으로 의회에 의해 폐위되면서 18세 때 왕위를 계승했다. 재위 시절 전반에 걸쳐 후세인은 대부분 난민들로 요르단 국민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에 맞닥뜨렸다. 1950년대에 후세인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쿠데타와 암살 기도를 여러 차례 넘겼다. 1967년 6일전쟁으로 그는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을 이스라엘에게 잃었다. 전쟁 이후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도자 야시르 아라파트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무장 게릴라들은 요르단 영내에 가상의 국가를 세웠다. 1970년 이른바 ' 검은 9월' 동안 후세인의 군대는 요르단 정부를 타도하려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물리쳤다.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에 요르단이 개입하지 않자 1974년 아랍 연맹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대표자 역할을 후세인에서 아라파트에게 넘겼다. 1988년 후세인은 웨스트뱅크와 동예루살렘에 대한 요르단의 권리를 포기했다.
페르시아 만 전쟁(1990~91)중 후세인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반대하는 동맹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그 대신 평화적 해결을 요구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미국과 영국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랍권 국가들까지 자극해 요르단에 절실하게 필요한 재정 원조가 중단되는 사태를 빚었다. 이후 후세인은 이라크와 거리를 두었고 종전 후 아랍-이스라엘 간의 평화 정착을 중재하는 구심점 역할을 맡았다. 1991년 그는 마드리드에서 열린 평화회담에 팔레스타인측이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1994년 오랜 비밀 협상 끝에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1998년 미국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의 메이오 클리닉에서 암 치료를 받던 중 아픈 몸을 이끌고 메릴랜드 주 와이에서 열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당국 간의 정상회담을 중재했다. 죽기 직전 후세인은 예상을 뒤엎고 왕위 계승자를 동생인 하산에서 맏아들인 아브둘라로 바꾸었다. 후세인의 저서로는 〈불안이 통치자를 속인다 Uneasy Lies the Head〉(1962)·〈이스라엘과 나의 전쟁 My War with Israel〉(1969)·〈국왕이라는 나의 천직 Mon Metier de Roi〉(1975) 등이 있다.
▶1999년한국-이스라엘, 투자보장협정 체결
▶1998년일본 나가노에서 제18회 동계올림픽 개막식
▶1997년압달라 부카람 에콰도르 대통령,
비상사태 선포
▶1996년전경련, ‘기업윤리헌장’ 제정
전경련이 1996년 2월 7일 첫 이사회를
열고 정경유착 탈피, 공정경쟁 등을
내용으로 하는 기업윤리헌장을 발표했다.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기업경영 풍토를 조성하기 위한 기업윤리헌장이 제정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7일 오전 전경련회관에서 올 첫 이사회를 열고 기업윤리헌장 심의위원회가 상정한 윤리헌장을 심의, 의결했다. 기업윤리헌장은 오는 15일 전경련 정기총회에서 채택될 예정이다.
윤리헌장은 『우리 기업은 기업가정신을 발휘하여 경영과 기술을 혁신하고 투명한 기업경영을 통해 바람직한 정경문화를 정착시켜나가야 한다』고 밝히고 『자유경제체제를 창달해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기업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헌장은 또 중점 실천항목으로 ▲기업시민으로 사회적 책임 ▲정당한 이윤의 창출 ▲공정경쟁 ▲대기업-중소기업간 협력 ▲소비자와 고객의 권익 증진 ▲기업구성원의 이익 향상 ▲환경친화적 경영 ▲지역사회 발전 기여 등 8개항의 규범을 담았다.
▶1996년정호용, 허삼수, 허화평 의원 12.12및 5.18사건으로 구속기소
▶1995년정명훈, 프랑스에서 94최고음악가상 등 3개상 수상
지휘자 정명훈씨가 프랑스의 권위있는 음악단체로부터 94년 최고의 음악가상 을 비롯, 3개의 상을 한꺼번에 수상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음악단체인 음악의 승리 (빅투아르 드 라 뮤지크)는 7일 정씨를 94년 최고의 음악가 로, 정씨가 지휘한 레이디 맥베드 를 94년 최고의 오페라 로, 역시 정씨 지휘로 녹음된 메시앙의 피안의 빛 을 94년 최고의 음반 으로 선정했다.
올해로 2회째인 음악의 승리 상은 프랑스의 음악평론가 및 음악담당 기자등 2천명의 투표로 수상자를 결정, 음악계의 아카데미상 이라고 할만큼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1992년한국-투르크메니스탄, 국교 수립
▶1992년마스트리히트조약 조인
공식적으로는 유럽 연합에 관련된 조약으로,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유럽 공동체 가입국들이 서명하고 발효된
유럽 연합의 기초가 되는 조약.
▶1991년수서택지 특혜분양사건 조사
▶1986년필리핀 17년 만에 대통령선거
▶1981년소련 군용기 추락, 장성 등 70여 명 사망
▶1980년미국 대 이란 경제제재를 동결
▶1980년남북직통전화 3년 만에 재개
▶1979년근현대 동양화단 채색화의 대가 김은호 사망
▶1977년정부 스페인과 문화협정 체결
▶1974년입시부정으로 인책된 김주만 전 경북교육감 자살
▶1971년스위스 국민투표, 여성참정권 인정
▶1968년경전선 개통(진주-순천 80.5km)
▶1967년신민당 창당
신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된
윤보선(오른쪽)씨와 당수로 선출된
유진오씨가 당원들의 환호속에 악수하고 있다.
▶1966년박정희대통령 동남아순방 등정
▶1965년미국, 베트남 `북폭` 개시
▶1965년한국, 브라질 문화협정 조인
▶1964년한국-케냐 국교 수립
▶1964년비틀즈 미국 상륙, ‘비틀즈 열풍’ 시작
비틀즈의 첫 미국 발매 앨범
'Introducing The Beatles (US)'
비틀즈의 첫 미국 발매 앨범 'Introducing The Beatles (US)'
1964년 2월 7일 낮 1시 30분, 미국 케네디 공항에서 영국의 4인조 그룹 비틀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20세기 청춘문화의 상징이 된 비틀스가 미국 정벌에 나선 것이다. 공항에는 비틀즈를 보기위해 3,000여 명의 소녀들이 몰렸으며 9일 밤 비틀즈가 출연한 TV 프로그램 ‘에드 설리번쇼’ 는 7,300만 명의 미국인이 시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뤘다.
포크송과 트위스트에 식상해 하고 케네디 암살 후 새로운 영웅을 원하던 미국은 비틀즈에 열광했다. 영국 가수는 미국에서 성공 할 수 없다는 징크스를 깨며 2월 첫 주에 전미 히트 차트 1위에 오른 비틀즈는 4월 4일의 빌보드 차트 랭킹에서는 1위부터 5위까지 모두 차지할 정도로 인기를 누렸다. 미국에 상륙한 1964년에만 18주동안 전미 차트 1위를 독점한 비틀즈는 미국 싱글 레코드 판매의 60%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헤어스타일, 인형, 기타 등을 유행시켰다.
비틀즈는 1956년 고등학생인 존 레넌이 ‘퀴리멘’ 이라는 록그룹을 조직하면서 시작됐다. 존 레넌은 곧 폴 매카트니(1957년), 조지 해리슨(1958년)을 합류시켜 영국 리버풀과 독일 함부르크를 오가며 명성을 쌓았고, 마지막으로 링고 스타가 합류해 멤버가 갖춰졌다. 19~22살의 더벅머리 4인조는 1962년 EMI사와 계약을 맺고 비틀스라는 이름으로 데뷔 싱글 ‘Love Me Do’ 를 발표하며 등장했다. 1970년 4월 10일 해체하기까지 9년간 공식적으로 211곡을 발표하며 전 세계의 팬들을 열광과 흥분으로 몰아간 비틀즈는 해체와 함께 전설로 남게 됐다. 앨범 판매량은 20세기 최대 음반판매 기록인 1억 6,000만장이었다.
▶1962년미국의 대 쿠바 전면금수 발효
▶1946년남조선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창설
▶1944년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파크 사망
▶1929년한국 동양화가 서세옥 출생
▶1919년송진우 최린 등 비종교계와
종교계 합동으로 독립운동 불멸계획 추진
▶1906년중국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 출생
▶ 1905년 오늘
오늘 한국야구가 시작됐다. 황성YMCA야구단이 국내 최초로 만들어졌창설된 데 연유한다. 한국인에게 야구를 본격적으로 가르친 사람은 선교사 필립 질레트. 낯선 한국인들과 친해지기 위해 이름까지 길례태(吉禮泰)로 고친 열성 선교사였다. 그는 야구가 선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 인사동 태화관 앞마당에서 슬금슬금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모시적삼에 갓을 쓴 사람들’은 야구를 ‘서양격구’ ‘서양타구’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용기를 얻은 질레트는 1905년 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전신) 회원들에게 야구 장비를 지급하고 팀을 만든다. 최초 야구팀의 탄생이다. 2002년 개봉된 영화 'YMCA 야구단'은 바로 이 황성YMCA야구단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이듬해인 1906년 오늘 황성YMCA야구단과 덕어(德語)학교(독일어학교)간 첫 경기가 펼쳐졌다.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있는 훈련원(訓練院) 자리였다. 결과는 YMCA팀의 3점차 패. 다크호스를 만난 셈이다. YMCA팀은 1912년 사상 첫 해외 원정에 나서 화제를 모으기도 하지만 주전들의 해외유학 등으로 이듬해 해체된다.
100년 전통의 한국야구가 국민들에게 도전과 성취의 기쁨을 선사해줄 것을 기대해 본다.
▶1898년한국 독립운동가 민필호 출생
▶ 1896년 오늘,
명성황후 시해사건 등으로 일본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몰래 궁궐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날이다. 이름하여 아관파천(俄館播遷). 비록 러시아 병사들의 호위를 받았지만, 행여 일본군이 따라올까 걱정하면서 새벽 바람에 길을 나서야 했던 고종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고종은 러시아의 영향에서 벗어나라는 내외의 압력에 따라 이듬해 2월 25일 경운궁으로 환궁한다.
▶1894년벨리에의 악기 제조인 아돌프 삭스 사망
▶1887년영국 군함, 거문도에서 철수
▶1885년미국 작가 싱클레어 루이스 출생
▶1870년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트 아들러 출생
▶1814년미국 마취전문의 콜턴 출생
▶1812년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 출생
▶1799년중국 청나라의 4번째 황제 건륭제 사망
청나라의 가장 높은 전성기의 끝판왕. 그의 죽음으로 청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위키백과]
건륭제(乾隆帝)는 청 제국의 제6대 황제이다. 어릴 때부터 제왕이 지녀야 할 자질이 보여 할아버지 강희제와 아버지 옹정제에게 인정을 받았다. 1735년(옹정 13년), 옹정제가 급사하자 황위에 올라 먼저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갈등을 조정하며 내치를 다진 후 대규모 정복 사업과 문화 사업을 펼쳤다. 문화 사업으로는 옹정제 때 마카오로 추방된 로마가톨릭교회 산하 예수회 선교사들을 다시 불러들여 북경에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허락한 것과 특히 예수회 수도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에게 서양식 궁전인 원명원을 개·보수를 감독하게 한 것이 있다. 그 자신 역시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아 시와 서화를 즐겼고 각지의 시인과 화가들을 독려하였다. 특히 10년의 세월을 들여 고금의 도서를 수집하여 중국 역사상 최대의 대편찬 사업인 《사고전서》를 편찬함으로써 고서적들을 많이 발굴케 하였으나 문자의 옥도 단행하여 청 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책들은 모두 금서로 만들었다.
또한, 10차례에 걸친 정복 사업을 펼쳐 준가르와 위구르를 복속시키고 티베트, 버마, 베트남, 네팔까지 진출하는 등 현재 중국 영토의 틀을 만들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책을 내놓고 여기에 사치, 반란, 서방과의 부실한 외교, 그리고 희대의 탐관오리로 평가받는 화신을 20여 년간 총애하여 말년엔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빈번히 일어나고 국고가 비어 결국 청 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796년(건륭 60년) 말, 자신은 감히 할아버지인 강희제의 재위 기간을 넘을 수 없다며 재위 60년째에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막후에서 정책 최고 결정권을 행사하여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재위기간 60년에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장악한 4년까지 합치면 건륭제는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실권을 장악한 황제였다. 스스로 십전노인(十全老人, 열 번의 원정을 모두 승리로 이끈 노인)이라 칭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였으며,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강건성세(康乾盛世;강희제부터 건륭제까지의 번성한 시기라는 뜻)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로 그의 생모와 신분, 즉 한족의 피가 흐르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가장 민간의 전설이 많은 황제이기도 하다.
현대 중국의 영토와 비교하면 청나라의 영토가 어마무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영토를 건륭제가 만들었다. [ZUM 학습백과]
건륭제는 1799년 2월7일 89세의 나이로 자금성 양심전에서 붕하였다. 이후 청나라는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청나라의 가장 높고 화려한 시절의 끝을 알리는 죽음이었다.
▶1477년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마스 모어 출생
▶1410년태종10년 주자소에서 서적 출판토록함
▶1151년`삼국사기` 저자 김부식 사망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 `삼국사기`를 편찬한 고려시대 대학자 뇌천 김부식(1075∼1151)이 1151년 2월 7일 사망했다. 경주가 본관인 김부식은 예종·인종 조에서 재상을 지내고 유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시인으로도 이름 높은 당대의 정치가·학자·문인이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을 진압해 고려왕조 안정에도 기여했다. 인종 때 신진관료 8명과 함께 `삼국사기` 50권을 편찬해 한민족 고대사를 후세에 전하는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가 1925년 사론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을 발표, 묘청과 김부식의 대립을 독립사상 대 사대주의의 결전으로 해석한 이래 김부식은사대주의의 대표격으로 비난받아 왔다.
또 일본 제국주의 사학자들은 한민족의 국가기원을 낮춰 잡느라 고의로 `삼국사기`를 믿지 못할 사서, 김부식을 역사왜곡자로 매도해왔다. 그 결과 김부식은 오랫동안 사학계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다가 최근 몇 년새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인정되면서 김부식 자신도 새로 조명을 받게 됐다.
https://youtu.be/ypGz2OmLeHo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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