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섬 푸른 바다 수루에 올라
정이녹
“그때는 매미가 더 많았지. 귀가 멍했거든, 아마도 1955년 여름이었을 거야”
“어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기억을 잘하세요”
“막냇동생이 57년생이니까~ 그러고 보니 벌써 65년이 지났구나 ~”
“우리는 여기에 꼭 다시 올 거예요. 35년이 지나기 전에요, 그때는 내 손자들도 데리고 와서 여기 마루에 할머니랑 누웠던 곳이라고 말해 줄 거예요”
우리는 통영 한산섬 제중당 옆 도피랑 언덕 위 정자 수루 마루 위에 나란히 누었다.
두 손녀딸이랑 두 팔 벌리고 누우니 서로 손끝을 닿으려고 가슴이 솟았다.
이렇게 100년의 시간이 이어져 가는 것이구나.
경상남도 ’통영‘ 이 ’충무‘가 되었다가 다시 ’통영‘이 되는 그때 막냇동생이 태어났고, 나는 일곱 살 통영초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 수군들의 훈련장, 세병관을 교실로 쓰는 통영초등학교에 다녔다. 통통배를 타고 한산섬에 자주 왔다. 밥공기 닮은 동그란 섬들이 초록빛 바다 위에 엎어져 있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뭉치고 흩어지면 하얀 구름 덩이를 잡겠다고 발꿈치를 높이 세우고 두 손으로 헤집고 뛰어다녔다.
당시에 아이들 간을 빼 먹으면 한센병이 나을 수 있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골목이 끝나 꺾어지는 모퉁이에서 궁둥이를 뒤로 빼고 코끝만 빼꼼히 내밀고는 아무도 없는지 확인하고 바람처럼 달렸다. 여름 햇살이 머리 꼭대기 정수리 위에 쨍하고, 손바닥만 한 내 그림자만 발목 언저리에서 저 혼자 빙글빙글 돌았다. 텅 빈 골목에 아무도 없었다. 저만큼 큰 기와집 대문이 열려 있었고 마당 한가운데 대나무 평상 위에 기절하듯 쓰러졌는데 “목사님 댁 큰 따님이 더위 먹었나 보다.” 수런거리며 집주인이 얼음 띄운 식혜 한 사발 먹여 주시며 따뜻한 손으로 등을 쓸어 주셨다.
아버님께서 이곳 통영 태평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셨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태평동 성결교회에 아주 젊고 패기만만하고 의욕이 넘치고 외모도 잘생긴 목사님이 부임하여 오셨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호소력 있는 설교로 깊은 감동을 주셨으며 교인들의 가슴을 꿰뚫는 말씀은 사랑과 존경을 일으키고 목사님은 불도저처럼 교인들을 신앙의 길로 밀어붙였다. 목사님은 우리 젊은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지도하셨다.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교회에 모여 성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거의 매일 철야기도 모임을 가졌다. 그곳에 모인 대부분의 학생들은 장래에 목사가 되는 것이 최대의 꿈이었다. 목사님도 우리가 목사가 되는 것을 권유하셨다. 그래서 고등학교 형님들은 아예 대학 진학을 신학교로 정하고 오직 성서만 읽고 온 마음과 정성을 다했다.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책가방을 마루에 내팽개치고 성경을 가지고 교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교회 한쪽 구석에서 새우잠을 잤다. 시커메진 호리병 등잔불 그을음도 닦고, 새벽 시간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예배당을 정리하고 새벽종을 쳤다. 새벽예배 마치고 집에 가서 아침 먹기 바쁘게 허둥지둥 학교로 달려갔다. 수업 시간에 졸기가 일쑤였고 교과서 속에 성경을 숨겨서 읽다가 호되게 야단맞고 그래도 저 녀석은 목사 할 녀석이라고 하시고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셨다.”
( 「내 영혼을 깨우신 정운상 목사님」 -이만규 목사 저서 중에서- )
1호 이만규 목사님을 선두로 박충대, 제정훈, 김용복, 김성도, 김순기…. 여러 청년들이 목사님이 되셨다.
어느 여름 폭우가 쏟아지는 깊은 밤에 한 청년이 찾아왔다고 하셨다.
“어머님이 몹시 아프십니다.”
“그럼 얼른 같이 감세” 따라나서시는데 청년이 말했다.
“우리 집은 첩첩산중이고 이 비바람 속에 목사님 못 가십니다. 지난주 설교 말씀에 우리는 비상약을 언제나 옆에 두고 있어 비바람이 몰아쳐도 겁날 것 없다 하셨으니 비상약만 지어주십시오” 신약에서 한 첩, 구약에서 한 첩, 두 첩을 가슴에 안고 청년은 비바람을 뚫고 달려갔다.
신구약 두 첩의 탁월한 특효 덕분에 다음 주일 찬란한 햇살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기쁨으로 감격의 예배를 드렸다.
당시 제중당은 이순신 장군 영정도 없었고 지붕을 받쳐주는 둥근 네 기둥뿐이었다.
울퉁불퉁 마룻바닥에 누우면 붉은 소나무가 기다란 나뭇가지로 팔베개해 주며 우리 옆에 같이 누었다. 투텁한 나무 냄새에 저절로 눈이 감기고 하늘 땅 가득한 매미 소리 들으며 잠이 들었다. 마룻바닥에 볼 크기만큼 침 자국 흘리며 꿀잠 들었다가 깨어도 매미는 여전히 쉼 없이 울어 재꼈다.
관리소에 문의하니 이 정자는 1976년 박정희 대통령 때 정비 되었다고 했다.
그럼 그렇지~ ! 내 기억이 맞는 거야 ~~!!!
추억은 가슴에 남아 시간을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