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이번 주 결혼하는 박경분 시인의 장녀 이지연과 신랑 이기상 결혼에 대하여/ 정호승
만남에 대하여 진정으로 기도해온 사람과 결혼하라 봄날 들녘에 나가 쑥과 냉이를 캐어본 추억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된장을 풀어 쑥국을 끓이고 스스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일주일 동안 야근을 하느라 미처 채 깍지 못한 손톱을 다정스레 깎아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콧등에 땀을 흘리며 고추장에 보리밥을 맛있게 비벼먹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어미를 그리워하는 어린 강아지의 똥을 더러워하지 않고 치울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과 결혼하라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라 가끔은 전깃불을 끄고 촛불 아래서 한권의 시집을 읽을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오면 땅의 벌레 소리에 귀기울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밤이 깊으면 가끔은 사랑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일 줄 아는 사람과 결혼하라 결혼이 사랑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사랑도 결혼이 필요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며 결혼도 때로는 외로운 것이다.
- 시집『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열림원,1998) .............................................................................
어제는 직접 축하해야 마땅한 지인의 결혼식에 가지 못했다. 메시지에 계좌번호가 있어 망설이는 시간이 짧았다. 돌아오는 일요일엔 서울에서 결혼식이 또 있다. 오랫동안 함께 문학 활동을 해오면서 도움을 받아온 분의 혼사다. 피치 못할 사정이 없는 한 가서 축하하기로 약속한 터라 모처럼 서울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내게도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자식이 하나 있다. 결혼 문제로 상의해온 바가 아직 없다. 그런데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결혼식은 안하겠다는 뜻인지 아무튼 결혼식은 하지 않겠노라는 통보를 최근에 받았다. 나도 신경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따로 사는 서른일곱의 사내가 어떤 결정을 하든지 내가 개입할 사안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결혼에 관한 가치관이나 신념이 따로 있어서가 아니라 양가부모 모시고 비까번쩍하게 결혼식을 치룰 능력이 안 되거나 어쩌면 이 시에 열거한 그런 상대를 만나 아비를 흡족하게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란 사람이 결혼에 실패한 이력을 가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일 수 있겠다. 그 생각이 미치면 아이들 엄마도 세상에 없는 마당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회한이 떠나질 않는다. 참 철없고 무모한 결혼이었다. 뱃속에 아이가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에 둘레의 친구들이 하나둘 장가가는 걸 보고, 에라 모르겠다며 개념 없이 후다닥 해치운 결혼이었다. 그렇게 한 결혼일지라도 탈 없이 잘 살면 다행이겠는데 그러질 못했다. 사람의 기본 품성이나 감성, 인생관이나 가치관은 결혼 전에 이미 결정된다는 것을 간과했다. 네모를 동그랗게 만든답시고 십여 년을 허우적거렸다. 이 시에 적힌 많은 항목들이 실은 나부터 감당키 버거운 것들이다. 그럼에도 ‘책갈피 속에 노란 은행잎 한 장쯤은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처음부터 인연으로 만났어야 했는데 나는 불운했고 현명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 비슷한 여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용기 없는 내가 그녀를 차버린 꼴이어서 회한의 상처가 더욱 쓰라리다. 결혼은 인류의 존속을 희망하며 디자인한 신의 뜻에 대한 순종을 의미한다. 그 우주적 의미에 나는 순종을 넘어 너무나 쉽게 굴복해버린 것이다. 내 인생을 책임질 사람은 친구나 부모, 신도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깊이 성찰하지 못했다. ‘남자 26세, 여자 23세가 되면 호주의 승낙 없이 결혼할 수 있다'는 민법 조항을 적령기이고 권고사항인줄로만 이해했다. ‘가끔 나무를 껴안고 나무가 되는 사람’ ‘나뭇가지들이 밤마다 별들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 ‘고단한 별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가슴의 단추를 열어주는 사람’과 결혼하여, 그 사람과 50년 동안 숲길을 산책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형이 아니더라도 기왕 선택한 배필을 충분히 이해하고 긍정했다면 사정이 달라질 수도 있었으리라.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고, 이해하다보면 사랑할 수도 있었을 것을. 오래전 장동건 고소영 결혼식에서 이어령 박사가 주례사를 통해 소개한 ‘황금잔' 전설이 있다. 로마시대 한 제사장이 집에 도둑이 들어 은수저를 도둑맞았다. 그 말을 들은 황제가 위로를 하자 제사장은 오히려 싱글벙글했다. 도둑이 딴 집에서 훔친 황금잔을 깜박하고 은수저가 있던 자리에 놓고 갔다는 것이다. 도둑이 들어 잃은 게 아니라 오히려 횡제를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제사장은 “결혼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황제에게 말했다. 남녀가 결혼하면 자유와 시간 등 잃는 것이 적지 않지만 대신 평생의 반려인 ‘황금잔'을 얻게 된다는 말이다. 조금 잃고 더 큰 것을 얻는 ‘결혼'을 축복하기 위해 이 예화를 든 것이다. 이 가을에 결혼하는 모든 신랑 신부에게 그 배필이 황금잔이기를 기원한다. 결혼식을 하든 말든 작은아이에게도 황금잔 같은 여자가 어디서 굴러들어오기를 기대한다.
권순진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