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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왜 불에 탈까? 라고 물으면 ‘나무니까 타지.’라고 답하거나, ‘타니까 나무지.’라고 말하면 이 질문과 답은 성립되지 않는다.
어리석고 뻔할 것 같은 이 질문은, ‘빛은 입자일까 아닐까?’, ‘우리가 ‘어둠’이라고 말하는 어둠의 정체는 무엇일까?’ ‘원자가 더 쪼게 지면 최종 물질은 무엇이 될까? 진공 안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그러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類의 질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단박에 그 정답을 말하는 사람도 드물다.
2050년이면 이제 30년이 남았다.
세계 선진국들은 지구 온난화에 대비하여 2050년 까지 탄소제로에 도달하겠다고 협약을 맺었고, 문통도 그 화상회의에 참여하여 그런 새빨간 거짓말을 약속했다.
그러나 30년 후면 우리는 더럽게 재수 없는 친구를 빼고는 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서러워하거나 섭섭해 할 필요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30년 후가 아니라 20년 후면 북극의 얼음은 완전히 없어질 것이고, 남극 대륙의 얼음도 지금의 5분의1로 줄어들어서 그저 흔적만 남는 결과가 될 것이다. 해수면은 지금 보다 30cm 이상 높아질 것이고, 열풍, 한발, 홍수, 태풍, 대형 산불 등의 강도와 빈도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나마 자제되던 플라스틱 사용양도 코로나-19로 인하여 마스크 필터나 배달음식 때문에 그 사용양이 통제 불가할 만큼 늘어나고 있다.
이제는 ‘될대로 되라’거나,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것 같다. 정부의 무능과 무대응이 확연히 보인다.
나무는 아시다시피 광합성을 통하여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한다. 즉 이산화탄소로 인한 지구온난화를 막는 최후의 보루요,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일이다.
산에 나무를 가꾸든, 공원에 나무를 심든, 길거리에 가로수를 심는 일도 십시일반으로 지구 온난화를 저지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그러나 산의 나무를 베어내고 태양광을 설치하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내가 위에서 문통을 나무란 첫째 이유다.
탈원전을 달성한다면서 탄소 제로를 지향하는 것은 복지를 확대하면서 세금을 줄인다는 말과 같은 사기다. 내가 새빨간 거짓말이라한 이유다.
문통은 당진 근방에 십여 개의 화력발전소를 집중하고 있다. 모두 석탄, LNG, LPG 발전소다. 모두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화석연료다. 이러고도 탄소제로에 도전할 수 있겠나?
이번 기후협약에서 문통이 발표하는 내용을 듣고 난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름 아니라 해외석탄발전소에 대한 지원을 중단한다는 얘기다. 문통은 그간 한전이나 포철등을 동원하여 베트남, 캄보디아등에 석탄 발전소를 건립하였다. 당연히 이익도 취했을 것이다. 이 일로 국제 환경단체로부터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환경단체에서는 이를 부각시키지 않았다. ‘수출증대와 소득증대’라는 포장에 갇혀서.
그러다가 이제 탄소문제가 부각되니까 거기서 손 떼겠다고? 참 어이없는 일이다. 이제 더 이상 수출이나 증설은 중단해도 기왕에 지어놓은 시설이니 책임지고 AS는 계속해서, 발전은 하되 탄소배출을 저감할 수 있는 매체(媒體)나 기술을 더 엄중하게 지원해야 정상이다. 이익은 빼먹고 아예 발을 뺀다는 것은 왜넘들이나 하는 쌍짓이다. 문통의 절실한 반성을 촉구한다.
이것도 또 하나 문통의 거짓말이다.
지금 강원도 남동해안, 명사 이십리 삼척 맹방에는 포철에서, 강릉 안인진 해변에서는 남동발전이 ‘석탄발전소’를 맹열히 짓고 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조 단위의 돈을 들인 월성 원자력 4,5호기 건설은 중단시켜 놓고 탄소배출이 가장 심한 석탄발전소를 건립한다는 것은 무슨 논리냐? 지금도 해안모래는 유실되고 맹방 이십리 해변은 낭떠러지로 변했다. 앞으로 수 십년은 써먹을 석탄발전소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와 분진은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이것이 내가 문통에게 묻는 세 번째 질문이다.
문통의 이야기는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의 취임사처럼.
교언(巧言; 교묘한 말장난)으로 백성을 속이는 못된 행위다.
나무는 주지하는대로 그 몸통에 탄소를 간직하고 있다. 고체 형태로. 이 탄소 때문에 나무는 불에 탄다.
탄소가 없는 돌이나 철, 유리는 불에 타지 않는다.
플라스틱이 불에 잘 타는 것은 역시 석유화학물질이기 때문에 많은 탄소를 간직하고 있어서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한 없이 유익하기만 한 나무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그러나 나무도 늙는다. 늙은 나무는 호흡이 약하다.
따라서 목재로 쓸 것은 따로 보존하고 주기적으로 간벌을 해서 숲을 젊게 만들어야한다.
아마존의 숲을 보존하고 인도네시아의 삼림도 경작지로 변환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호주나 미국 러시아 같은 광대한 지역에서의 산불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도 필요하다.
한 가지 나무 처리에 관한 팁!
나무는 불에 타니까 펠렛으로 만들거나 푸나무 또는 장작으로 해서 연료로 쓴다?
아서라, 그건 나무를 통해서 애써 저장해 놓은 탄소를 다시 공기 중으로 돌려보내는 허망한 짓이다.
나무는 펠렛 형태로 가공해서 땅에 깔거나 땅 속에 묻거나 썩혀서 거름으로 해야 한다. 이젠 나무를 태우지 말자.
아, 그러나, 늦게라도 하는 게 안하는 것 보다는 낫다(Better late than never.)고는 하지만, 이제 다시 꽁꽁 언 개울물의 얼음을 깨고 빨래하는 장면은 볼 수가 없다. 호수위의 얼음 낚시도 힘들다. 한강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60년대의 기억은 흑백 사진으로만 남았다.
너무 늦은 것이다.
내가 이 글의 부제(副題)를 ‘After 20 years..’라 한 이유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지구는 이제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플라스틱, 특히 미세플라스틱은 이제 처리 용량을 넘어섰다.
우리야 가고 없을 테지만, 2040년이면 2,3십대가 돼는 내 손자의 삶은 암담하기만 하다.
과거 수 천 년의 삶은, 그 변화는, 우리가 살아온 70년의 변화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필름이 없는 카메라, 엔진이 없는 자동차, 우표만한 크기에 머리카락 백분의 일도 안 되는 선을 깔아서 8억개의 트란지스터를 배열하고 그걸 다시 수십 단으로 쌓아올리는 세상!!!
그만큼 시계바늘을 빨리 돌린 결과로 지금 우리는 종말을 앞당기고 있는 것이다.
컴퓨터도 이제는 한계에 가까워졌다. 양자컴퓨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 더 이상 편해지고 쉬워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올해만 해도 벚꽃이 예년 보다 보름 이상이 앞당겨졌다.
거기에 더하여 진달래, 벚꽃, 목련, 산수유, 사과꽃, 배꽃, 복숭아 등등 봄꽃의 개화 시기도 엉망이다. 순서가 없다.
그 결과 사월의 날씨가 오히려 낮아져서(북쪽의 냉기가 확산되어) 꽃이 얼어 죽고 결실이 맺히지 못하는 과수가 많이 생겨나고 있다.
나의 결론은 그래도 사는 날까지 나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문통 처럼 무식한 지도자를 빨리 퇴출시켜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을 하루 빨리 제거해야한다는 것이다.
또 술시가 되었다.
술은 주(酒)라고 쓰는 바, 닭(酉)이 물(水)을 마시 듯, 조금씩 조금씩 마시라 한다. 그래서 중국술 잔은 아주 작다 작은 것은 엄지 손톱 만하다. 그런 걸로 일배 일배 부일배(一杯一杯 復一杯)하란다.
좋은 안주에 말이 통하는 친구, 향기로운 술!
내가 평생을 사랑해야하는 삼우(三友)이다.
辛丑 穀雨 候
豊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