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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3: 2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 ( 2 ) - 고전 13: 3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④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신 비밀이다. (계 1: 1, 암 3: 7)
계 10: 7에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라고 말씀했다. 계 10: 7의 그 종은 계 1: 1에서 답을 찾을 수 있으니 사도 요한을 말한다. 그러므로 암 3: 7에 그 종과 계 10: 7에 그 종은 계 1: 1에 그 종 사도 요한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그 종 사도 요한에게 자기의 비밀을 보이셔서 요한계시록을 기록하게 하셨으니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비밀이 기록된 책이다.
선지자들에게도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셨다. 선지자들이라 하면 대 선지자 -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다니엘을 말씀하며, 소 선지자 12명 - 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말라기 합하여 16명의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 주셔서 기록하게 하셨다.
천국의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려면 사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알아야 한다. 지금까지 교회가 사 복음서와 바울 서신을 중심으로 목양해 왔다면. 이제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기 위해서는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목양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중심이 바뀌어도 예수님 믿는(예수의 탄생, 십자가, 부활, 승천)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로 우리 신앙 밑바닥에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이지 버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종’ 과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비밀을 보이시고 기록하게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제 어떤 계획을 세우고 계시는가?
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기록해 놓은 비밀이다. (계 1: 1)
하나님의 비밀은 계 1: 1에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 종들은 복수로써 계 7: 1-4에 하나님의 인 맞은 종 14만 4천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하나님의 인 맞은 종 14만 4천 모두에게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눈이 열려 보게 하시고, 사 50: 4-5과 같이 말씀을 들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아침마다 귀를 열으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은 높은 학식이나 지식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영성으로 알아듣게 되는 것이다.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기록해 놓은 비밀이 공개되면, 하나님이 인 맞을 종들을 전국, 전 세계에서 부르시는데 처음에는 적은 수로 돌아와 시작해서 14만 4천 모두가 나오는 역사가 예정된 것이다. 우리는 성경의 예언,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 없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고 그대로 될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⑥ 그 종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신다. (계 10: 11).
하나님의 비밀이 알려져서 인 맞은 종의 수가 14만 4천 다 차게 되면 하시는 일이 있다. 하나님의 비밀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일을 계 10: 11같이 하게 된다. 이것을 다시 예언이라고 하는데 다시 예언이란? 선지자들과 사도 요한이 예언해 놓은 말씀을 한 번 더 전하는 것을 말하며, 다시 예언을 하는 목적은 주의 재림을 알리기 위함이다.
그 종 사도 요한과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을 기록한 사명을 다했다면, 이제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고 나오는 14만 4천 그 종들은 하나님의 비밀을 전 세계에 전할 사명을 다시 예언으로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⑦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시기 위해 근본적인 회복을 주신다.
* 사 1: 25-27 – 25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26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 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완벽한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완벽할 수 없는 세상에서 완벽하게 살아가려고 하니까 부작용이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다 부족과 실수와 허물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좋은 말은 다 잊어버리고, 나쁜 말만 기억하게 된다. 또 잘해 준 것은 잊어버리고 못 해준 것만 기억한다는 것이다.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반대로 나쁜 것은 다 잊어버리고, 좋은 것만 기억해야 마땅하다.
근본적으로 타락한 원인은 우리가 타고 날 때부터 죄인으로 났기 때문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근본적인 회복이란 무엇인가?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노쇠해져 가는 우리의 머리와 몸을 사 1: 25-26같이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회복을 시키시는데, 범죄 전의 사람, 창조 때의 그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 43: 1에서는 지으신(조성)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 사 43: 1 –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
지으신(조성하신)은 말씀으로 재창조하신다는 뜻이다. 머리에는 신을 붓고, 지혜, 총명, 명철, 영감, 통달하는 영을 부어주시고, 머리가 뛰어나게 하시니 나쁜 것들은 다 사라지고, 좋은 것들만 담기게 하시는 역사가 머리가 개조 변화되는 역사이다. 몸 또한 범죄 전의 사람같이 치료해 주시는 것이다. 또,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시고, 회복시키셔서, 마지막 때 하나님의 비밀을 깨달은 종들이 그 일을 잘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결론 : 하나님의 비밀을 알리시기 위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 사 45: 5-8 – 5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6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 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8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2]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이 말씀 역시 위에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라는 말에 비하여 크게 다른 뜻을 가지지 않는다.
이 말씀도 역시 사랑이 없이 하나님의 은사를 취급하는 자는 아무런 효과를 나타내지 못하고 무의미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좋은 것들도 모두 다 사랑을 가지고서야 그 의의(意義)를 성립시킨다.
사도는 비록 성도가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의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지만,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은 참된 믿음의 표이며 열매이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고전 13: 3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
사도는 비록 사람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 구제하는 놀라운 선을 행하고, 또 자기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심에서 행한 것이 아니고, 예를 들어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서나 영웅심으로나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사회적 이념 때문에 행한 것이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구제와 선행, 그런 헌신은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을 만한 의(義)나 선이 되지 못하고 자기에게 아무 유익도 없다.
1]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모든 것은 재물뿐만 아니라 지혜나 지식, 권세나 재능, 등 그 사람에게 부여하신 모든 달란트를 의미한다.
2]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자선 사업과 같은 선한 일이라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여질 때에는 그 행하는 자 자신에게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성도는 남을 위하여 희생할 때에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에게도 유익이 돌아올 줄 아는 자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진정한 사랑이 없이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혹은 무의식적(無意識的)으로 행하고, 혹은 어떤 명예를 위하여 행하고, 혹은 군중 심리(群衆心理)에 이끌려서 행하기도 한다. 그 행하는 일이 선한 일이지마는 진정한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면 그 행동자 자신은 진정한 유익을 보지 못한다.
기독교 사랑의 정의 ( 출처| 이필재 목사 )
지난 한 주간 우리 갈보리교회는 대대적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중고등부는 제주도, 청년들은 일본, 남선교회는 차마고도, 저는 동북아를 다녀왔고 내일부터 영어부는 네팔로 떠납니다.
선교의 열정은 주님의 가장 큰 관심과 부탁이었으므로 늦추지 않고 점점 더 열심히 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선교활동은 기독교의 사랑과 무슨 관계인가를 오늘 한번 말씀에 기초해서 조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는 성경에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거룩하시며 유일한 존재되시며 창조주가 되시고 불변하시고 전능하시며 무소부재하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살아계시고 심판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다.
때로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는 세밀하신 하나님으로 조명되어 있고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시며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지극히 광대하시며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며 온전하신 분이시다.”
이토록 많은 표현이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표현의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가장 적합한 표현 하나를 골라낸다면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사는 사람들은 어찌 되었든 이 사랑의 문제를 잘 처리하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 철학에 대한 기독교적인 진리만 잘 이해한다면 삶은 훨씬 더 풍성해질 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율법 중에서 어떤 계명이 제일 큽니까?”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둘째는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첫째도 둘째도 다 사랑이라고 예수님이 답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항상 있어야 될 것을 결론적으로 세 가지로 방향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 그중의 하나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 삶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머릿돌이 됩니다. 믿음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 구원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삶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없는 것만큼 손해가 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봄이 되면 농부들이 밭에 씨앗을 파종합니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을에 가서 열매가 있을지 누가 아느냐?”하고 믿지 못하면 농사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법, 질서의 믿음을 믿고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믿음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땀 흘려 돈을 벌어서 은행에 갖다 맡깁니다.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요즘에 일본에서는 은행들이 많이 도산이 되니까 은행도 믿지 못하겠다고 해서 돈들을 집안에 쌓아두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국가적 고민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에 우리 주변에는 몸에 좋다는 약품이나 식품들을 많이 선전을 합니다. 이것만 먹으면 만병통치가 될 것 같은 그런 약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누가 먹느냐? 믿는 사람만 먹습니다. 아무리 좋아도 내 믿음이 안가면 절대로 사먹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싸고 먹기가 곤란한 것이라도 믿음만 가면 돈을 많이 지불해서라도 사서 먹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동도 못합니다.
비행기도 못 탑니다.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밤에 잠도 못잡니다. 잠자는 사이에 지진이 나거나 도둑놈이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의사를 믿고 몸에 칼을 대게 하는 것이고 농사를 지은 농부를 믿고 밥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항상 있어야 삽니다.언제나 있어야 삽니다.
☛ 그 다음에 소망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삶에 있어서 절대 필요한 용기의 부분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절망입니다. 우리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성취에 대한 도전과 새로운 희망을 향한 흥분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신앙생활도 마지막 승리를 위해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가는 것 아닙니까?
아침이면 하루에 대한 소망이 있는 것이고 새해가 되면 일 년에 대한 소망을 누구나 가지고 출발합니다. 우리는 평생 소망 중에 즐거워합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가 나는 소망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삶이 끝난 것입니다. 그저 밥 먹고 숨을 쉴 뿐이지 삶의 가치는 이미 없어진 것입니다.
목표는 다 다르지만 각자 자기 소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라서 소망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70, 80대가 되었어도 신바람 나게 사는 소망이 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20대, 30대가 되었는데도 맥없이 쳐져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감기만 들어도 세상 살 맛 안 난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망은 항상 필요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의학 잡지에서 본 이야기인데 병원 간호사들은 언제나 몸단장을 정확하고 깨끗하고 예쁘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환자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간호사들이 머리가 흐트러졌다든지 옷을 아무렇게나 입었다든지 청바지 입고 슬리퍼나 끌고 다니는 것 보셨습니까? 항상 단정합니다. 그런데 거기 도움말이 나왔습니다. 간호사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환자는 살아날 확률이 아주 높다고 나왔습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나도 저렇게 건강하고 예쁘게 살아서 희망 있게 살아야지!’ 간호사들을 보고 희망을 갖고 애정을 느낍니다. 그런 환자들은 빨리 낫고 그런 사람들은 오래 산다고 그럽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셨습니다. 믿음과 소망은 그래서 항상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 제일인가? 믿음과 소망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다 하여도 믿음도 무엇을 믿느냐 믿음 나름입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분명히 내가 믿고 했는데도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왜 그런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기초하지 않은 믿음은 맹목적이거나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일이 많이 있기 때문에 믿었는데도 안 되는 것입니다. 소망도 크고 믿음도 커서 세상을 한번 흔들어봤는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이 땅에 평화가 깨지고 불행의 인간 고난이 찾아오게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랬을 때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소망은 훌륭한 것인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역할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몸을 불살라 버리면서 무엇인가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불사름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공연히 사람 하나만 불타 죽은 것뿐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란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최종적으로 꽃을 피우고 향기를 발산하는 재료가 되기 때문에 사랑이 제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15가지 항목으로 발표를 했는데 이것을 셋으로 묶어 분류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함께 나누는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준 사람도 받는 사람도 같이 행복해야 사랑입니다. 한쪽만 행복하고 한쪽은 불쾌할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저는 과거에 북한 동포를 위한 일종의 구제 헌금을 교회에서 실시해서 5년 동안 열심히 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호응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는데 북한의 주민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너무 많이 먹어서 병이 나는 그런 문화에 살고 있으니 이거 되겠느냐? 오늘부터 우리가 북한 동포에게 쌀 보내기, 밀가루 보내기를 하자.” 그래서 제가 교인들에게 제목을 주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가족들이 하는 것이 좋으냐?”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가족이나 자신들이 소비하는 식량 정도로 하자. 만약 우리 가정이 한 달에 쌀 한 포대를 소비한다면 한 달에 쌀 한 포대를 보내주고 일 년에 20포대 소비하면 우리 가정에서 일 년에 20포대를 보내자. 그런 식으로 우리가 한번 해보자.” 그랬더니 얼마나 많이들 하는지 어떤 가정은 “우리는100포대 하겠습니다.” 막 보내는 겁니다.
그래서 아주 훌륭한 성과를 본 적이 있는데 문제가 어디서 발생했느냐? 북한의 주민들이 즐겁게 받아들여야 이것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가끔 신문에 발표하지 않습니까? “남한이 주는 식량 안 받겠다.” 굶어 죽으면서도 자존심 내세우는 경우 많이 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랑을 잘못하면 나는 행복하고 상대방은 괴로움이 될 수가 있어서 오늘 성경 말씀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아니하고 또 사랑이라고 무례히 행지 않는 이것이 사랑이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라고 나온 겁니다.
“얘들아! 너희들 배고프니? 굶어죽냐? 먹어라!” 갖다 주었습니다. 거지들도 자존심을 건드리면 돈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은 함께 행복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 어떤 남자와 여자가 있다고 합시다. 한쪽에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당신을 위해서는 내 몸을 불살라 버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랑을 고백했는데 그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 감격을 불러왔다면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내가 제일 고통스러운 소리는 그 소리입니다. 제발 나를 보고 그런 말을 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되었을 때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겠습니까? 함께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은 믿음과 소망도 사랑에 기초하지 아니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래서 제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위한다고 했을 때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 아무 유익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구분해야 합니다. 이 좋아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의 유익보다 함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혹시 교인 가정에 그런 가정이 있으면 제가 그것을 지적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니까 영향을 받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때 새장에다 새를 기를 수가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일입니다. 예쁜 새를 갖다 새장에다 놓고 기릅니다. 날마다 밥을 줍니다. 그러나 새는 좋아하겠습니까?
새는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날짐승의 본능이란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이 지구의 모든 대기권을 다 자기 공간으로 삼기 원합니다. 철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겨울철에는 어디론가 날아가서 다른 나라의 남쪽 지방에 가서 살다가 또 봄이 오면 새로이 찾아옵니다. 온 세상을 자기 공간으로 날아다니는 것이 새의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한 동물을 나의 유익을 위해서 조그만 철장에 가두어놓고 내가 새를 사랑한다고 하면 말이 되겠습니까?
이 사랑은 자기의 유익보다도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유익만을 구하기 위해서 무례히 행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해야 사랑입니다. 어떤 경우 믿음과 소망이 엉뚱하게 불의한 것으로 얼마든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나라와 국민을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쓰는 사람이 독재자들입니다. “어휴! 제발 그만 사랑했으면 살만 하겠는데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죽겠도다.” 이게 사랑이냐 말입니까? 함께 유익을 구하는, 그리고 불우하지 않은 건강한 사회, 건강한 교회, 함께 살아가고 함께 행복할 수 있도록 피차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나라는 노사의 문제, 요즘에는 대형 마트와 소자본의 재래시장 상인들 간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잖아요? 아마 정부도 이런 문제가 무척 골치 아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인가? 이 노사의 문제를 아주 훌륭하게 잘 처리해서 성공한 나라가 독일이고 이 문제를 잘 처리하지 못한 나라가 아르헨티나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 수가 있을까? 이것 때문에 우리 사회가 많은 진통을 겪고 아픔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도 이런 일에는 신경을 많이 써야 합니다. 우리 갈보리교회가 좀 도와주고 있는 50명도 안 모이는 조그만 소형교회 목사님이 저에게 부흥회를 해달라고 해서 우리 교우들과 함께 가서 부흥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 시간에 그 지역에서 목회하시는 교회 목사님들의 모임 그룹에서 목사님들이 많이 오셔서 저와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저한테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도 그렇게 오랫동안 목회를 하셨고 경험도 많으신데 지금 한국에 오셨으니까 한국의 60퍼센트 이상은 소형교회들입니다. 소형교회들이 행복하게 잘 목회가 될 수 있는 길을 세미나도 좀 하시고 발언도 좀 하시고 글도 쓰시고 우리 소형교회 목사들 모아놓고 용기도 좀 주시는 것을 목사님이 나서서 해주십시오.” 이런 요청을 저한테 하셨습니다.
“우리 소형교회들은 경비가 없어서 대형교회들이 하는 그 화려한 프로그램을 하나도 못합니다. 우리 지역에도 아주 몇 만 명 모이는 큰 대형교회가 하나 있는데 그 교회는 헌금이 많으니까 온갖 프로그램을 다 하니까 이 주변에 있는 교인들이 그곳으로만 갑니다. 그래서 우리 소형교회 목사들은 주일마다 송별회 예배만 드립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소형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을 목사님이 모색하시고 길도 좀 여십시오.” 그러시는 겁니다.
그런데 객관성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소리에 우리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실 대형교회는 머리만 쓰면 교인들이 올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효과 있게 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LA에서 목회할 때 전도사님 아들이 장애인이셨습니다. 그 아이를 바라볼 때마다 마음의 찔림이 있습니다. ‘저런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목회를 어떻게 할 수가 없을까?’ 그래서 4명의 아이들이 모였습니다. 4명을 데리고 교역자 한 사람에게 “당신은 이 네 아이만 데리고 목회를 해도 괜찮다.” 열심히 사역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런 반을 만드니까 어디서 모였는지 와글와글 수백 명이 왔습니다. 부모님들까지 모이니까 특수반이 삽시간에 최고 부흥이 된 겁니다. 그래서 거기서 시작해서 캘리포니아에서 장애인 사역이 활성화 되어서 다 같이 모여서 “사랑의 한마당”을 저희 교회에서 제일 먼저 하고 그 면에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제가 시작을 해서 교회마다 잘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흥분해서 ‘이야! 이렇게 잘 되는 목회! 그러면 다른 프로그램을 또 개발하자!’ 그래서 농아인 교회, 수화예배를 생각해 냈습니다. 농아인들은 못 들으시니까 수화로 예배드리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수화 잘하는 사람을 전도사님으로 오라고 해서 다 준비해 놓고 “이제 언제부터 농아교회를 시작합니다. LA농아인들은 다 오십시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전화가 왔습니다. “이필재 목사님! 지금 LA교계에 농아인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담임 목사입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 능력이 없어서 몇 십 명 안 모입니다. 그런데 목사님 교회 같은 대형교회에서 그런 프로그램을 그렇게 화려하게 간판을 걸고 사람을 모으면 많이 올 것입니다. 제가 분명히 아는 것은 몇 십 명의 저희 교회 교인들도 틀림없이 한 달이면 다 목사님의 교회로 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전화를 하시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실제로 살펴보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아! 이 프로그램 하지 말자.’ 다 준비했다가 무산시켜 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다른 교인이 우리 교회로 올 수 있는 프로그램은 일체 하지 말라. 다른 데서 하지 못하는 것들을 주로 개발해서 하자.” 이렇게 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아! 교회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나도 너도 다 좋아할 일이 하나 있다. 세계 선교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피해가 가지 않고 누구든지 다 좋아하고 찬양할 수 있고 박수하고 주님도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세계 선교 쪽으로 모든 정력과 힘을 써서 선교 사역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뭐라고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네팔에 가서 뭐하는 데 누가 뭐라 그럽니까? “왜 너희들 네팔 가서 하느냐?” 그러는 사람 한명도 없습니다. 우리가 아프리카 가서 선교 열심히 하는데 “왜 아프리카 가서 선교 열심히 하느냐?”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사랑입니다.
미우라아야코(三浦綾子)는 일본이 자랑하는 기독교 여류 작가이죠?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돈이 많이 생겼는데 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자기 상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 장사가 안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아야코는 남편과 함께 의논했습니다. “여보! 우리 상점은 이렇게 잘 되어서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 지금 행복한가요?” “글세, 우리 때문에 다른 사람이 안 되니 행복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상점의 물건의 종류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손님들이 찾아오면 “아, 그 물건이 우리 집에 없습니다. 저쪽 집에 가보세요.” 그래서 다 잘되었습니다. 그는 수입이 좀 적어지면서 마음이 기뻐지는 진리를 가지고 글을 하나 쓴 것이 “빙점”이라는 책입니다.
☛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은 자기 극복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너무나도 어려워서 참고 견디는 자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성령이 충만한 자가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값싼 사랑을 기독교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 자기의 욕심을 부리면서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라. 사랑은 쉬운 게 아니다.” 어느 유행가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데 기억이 납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라는 노래입니다. 세상에서 연애하는 것도 사실 능력 있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어렵습니다. 자기 극복을 하지 못하면 사랑을 못합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무슨 말입니까? “철없을 때 사랑이 뭔지도 몰랐을 때 나는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지만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난 지금은 내가 어른과 같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만 기억하는 유명한 미국 교수 한 분을 알고 있는데 그분이 요 근래 한국에 오셔서 강연을 하셨습니다. 저는 언론을 통해서 봤습니다. 한국 프레스 센터에서 강연을 했는데 하도 사람이 많이 와서 한300명 이상이 복도에 앉아서 그분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렇게 그분의 강의에 많이 오는가? 그분이 연구해서 발표하는 제목이 이겁니다.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사실 세계적인 석학들의 이야기는 의미가 있습니다. 잘 들으면 참 유익하잖아요? 칙센미하이 교수입니다.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에서 특별히 유명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인가? 세계적인 교수인 이분의 결론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너무 종교적인 색채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다른 종교 이야기도 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것이 존재할 때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중에서도 사랑이 행복의 극치라고 말하는데 왜 그런가? 이타적으로 남을 돕는 행위가 곧 사랑이요 인류의 행복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인류는 불행하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설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자기 극복을 하라.” 지금 우리 갈보리교회가 온 세계인을 향하여 선교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십시오. 행복해 집니다. 열심히 주는 사랑!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함께 나누는 사랑! 인류의 행복은 결국 이것이다. 이것을 놓치면 인류는 불행에 빠진다.” 칙센미하이교수의 말은 곧 바울의 말을 인용한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한 토막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중심에 내가 서 있다는 기쁨! 그러므로 내가 받은 이 사랑을 또 다른 사람에게 이타적으로 돕는 행위!이 사랑만이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은 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곧 행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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