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
김광림
나이 예순이며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종삼(宗三)은 덤을 좀만 누리다 떠나갔지만
피카소가 가로챈 많은 덤 때문에
중섭(仲燮)은 진작 가버렸다
가래 끓는 소리로
버티던 지훈(芝薰)도
쉰의 고개턱에 걸려 그만 주저앉았다
덤을 역산(逆算)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빵 부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지친 것이 많다
그들은 일찌감치 숟갈을 놓았다
소월(素月)의 죽사발이나
이상(李箱)의 심줄구이 앞에는
늘 아류들이 득실거린다
누군가 들이키다 만
하다못해 맹물이라도 마시며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시집 『말의 사막에서』, 1989)
[어휘풀이]
-종삼 : 시인 김종삼(金宗三)
-중섭 : 화가 이중섭(李仲燮)
-지훈 : 시인 조지훈(趙芝薰)
[작품해설]
김광림은 50년 시작 활동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향은 이미지에 대한 자각을 통해 언어의 새로운 존재를 만나고자 하는 작업으로, 사물에 대한 새로운 감수성의 개발이나 언어의 명징성, 또는 시적 표현을 통한 조형미의 창조 등의 기법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 같은 노력은 선(禪)의 세계와도 같은 고도의 자기 절제를 통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중⸱후기로 넘어오면서 그의 시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로, 그가 초기부터 일관되게 추구해 오던 주지적 서정을 통한 ‘새로운 서정’의 시도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의 방법을 통해 더욱 심화⸱확대되고 있다. 즉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는 모더니즘적인 시의 세계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시는 기광림의 후기 대표작으로 그 특유의 아이러니와 풍자 수법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는 이 시를 통해서 ‘예순’이란 나이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예순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이보다 더 살면 ‘덤’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있어, 예순이란 나이는 ‘요절’과 ‘덤’의 분기점이 된다. 다시 말해 ‘요절’과 ‘덤’으로 제시된, 삶의 감회와 아쉬움 또는 서글픔과 같은 감정을 다른 때보다 훨씬 더 많이 갖게 되는 때가 예순의 나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예순의 나이에 이른 시인은 자긴의 삶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동시대를 살았던 여러 시인과 예술가들을 회상하게 된다. 누구는 예순을 조금 넘어 살았고, 누구는 예순이 되지 못해 죽었음을 떠올리며 그는 ‘나이’와 ‘삶’의 관계를 생각한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예순을 채우지 못하고 죽은, 소위 ‘요절한 천재’들이 다 이루지 못한 예술 세계를, 혹은 그들이 남긴 위대한 예술 정신을 생각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것들ㅇ르 그는 ‘덤을 역산한 천재들의 밥상에는 / 빵 부스러기 생선 찌꺼기 초친 것 등 / 지친 것이 많다’라는 비유적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이러한 표현은 대단히 강한 풍자적 성격을 동반한 비유로 다음의 시행이 뒤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소월의 죽사발이나 / 이상의 심줄구이는 앞에는 / 늘 아루들이 득실거린다’는 구절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 시단이 안고 있는 모방의 문제점과 정신의 궁핍화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에게 이제부터 사는 것은 모두가 ‘덤’이며, 그 삶 속에서 이루려고 하는 예술 작업을 포함한 모든 것들도 앞 시대의 예술가들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와 같은 자조적 풍자를 통하여 그는 자신의 내면을 독자들에게 솔직히 드러냄으로써 보다 깊은 진실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소개]
김광림(金光林)
본명 : 김충남(金忠南)
1929년 함경남도 원산 출생
국학대학 문학부 졸업
1948년 『연합신문』에 시 「문풍지」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57년 김종삼, 전봉건과 함께 3인 공동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발간
1973년 제5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75년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시집 : 『상심하는 접목』(1959), 『심상의 밝은 그림자』(1962), 『오전의 투망』(1965), 『학의 추락』(1971), 『갈등』(1973), 『한겨울 산책』(1976), 『언어로 만든 새』(1979), 『천상의 꽃』(1985), 『소용돌이』(1985), 『멍청한 사내』(1988), 『말의 사막에서』(1989), 『곧이곧대로』(1993), 『대낮의 등불』(1996), 『앓는 사내』(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