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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도 안 가르쳐" 짓밟힌 소녀의 꿈
[뉴스펀딩] 60년만에 뿌리 찾는 서경자 어머니
베이비뉴스, 2015-03-03
【베이비뉴스 신화준 기자】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있겠지' 실종아동찾기 집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지난 4화(김태희 실종사건 27년이 사라졌다)의 기사를 보고 댓글을 통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제보를 주신 분이 나타났습니다. 이 제보를 바탕으로 경찰청 실종아동찾기센터 소속 경찰관들이 직접 현장조사에 나섰습니다. 베이비뉴스도 그 현장을 직접 찾았습니다. 현장 조사를 시작한 지 1시간 30분 만에 김태희 추정인물을 찾았는데, 아쉽게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여러분들이 적극적인 제보로 함께해주신다면, 진짜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기사는 당초 프로젝트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우리의 후원 목표인 실종아동 문제를 다룬 연극 'I want to go back'을 소개하는 방향으로 기획됐습니다. 이를 위해 연극의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영화배우이자 신인감독인 현원(본명 신현진·35) 씨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이날 인터뷰 자리에는 뜻 밖에도 현원 감독의 어머니 서경자(63) 씨가 동행하셨습니다. 실로 엄청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경자 씨는 실종아동이었습니다. 6살(추정) 무렵부터 무려 60년에 가까운 세월을 부모님의 생사조차 모른 채 '고아 아닌 고아'로 현재까지 살고계십니다. 현원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 서 씨의 억울했던 삶을 뒤늦게 알게 되고, 실종아동찾기협회(대표 서기원)와의 인연으로 만나게 된 또 다른 실종가족들의 사연들을 접하게 되면서 실종아동 문제를 다룬 작품을 기획하게 것입니다. 이날 현원 감독의 어머니는 부모님이 살아계시지 않더라도 친척을 찾아 자신의 뿌리를 알고 싶다고 하시며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지난 네 번의 기사는 실종아동을 찾고 있는 부모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이번 기사는 실종아동찾기협회 공익극단 드림호프컴퍼니가 준비하는 연극 'I want to go back'(한글 타이틀은 아이 원츄 고우 백)의 모태가 된, 부모와 헤어져 남의 집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현원 감독의 어머니 서경자 씨의 목소리가 아직도 어디선가 애타게 딸을 기다리고 있을 '진짜 가족'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서울역 앞에 홀로 남겨진 6살 소녀
1961년 어느 화창한 봄날 서울역 광장 시계탑에서 여섯 살쯤 된 소녀가 울고 있었다. 고모(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당의 종업원으로 추정)와 함께 길을 나섰다가 수많은 인파 속에서 고모의 손을 놓쳐 길을 잃어버린 이 소녀에게 어느 중학생 언니가 다가와 "우리 집에 가자"며 손을 내밀었다.
낯선 남자어른들 틈에서 무서움을 느꼈던 이 소녀는 친근한 인상의 언니 손을 잡고 길을 따라 나섰다. 하지만 그 때 그 손을 잡지 말았어야했다.
소녀는 현원 감독의 어머니 서경자 씨다. 서 씨가 따라갔던 언니의 집은 용산구 청파동 달동네에 위치해 있었고, 서 씨는 훗날 이 집안 호적에 친자로 이름이 올라 '김○○'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현원 감독의 '외갓집(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외가로 표기)'은 이때부터 서 씨를 몰래 키우게 된다.
외가에서는 처음에 밥을 주면서 집에 가겠다는 아이를 달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미취학 아동인 서 씨에게 나무껍질을 벗겨오라고 시키는 등 차츰 일을 시키기 시작했다. 명문대 법대생이었던 큰 외삼촌이 방학 때 서 씨를 보더니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외할머니는 이를 묵살했다. 당시 외할아버지가 일본에 나가있어서 집에 일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종갓집이었던 현원 감독의 외가는 1년 제사만 30여 차례가 될 정도여서 어린 서 씨는 끊임없는 부엌일부터 손님 접대까지 온갖 집안일과 심부름을 혼자 해내며 살아갔다. 외할머니는 서 씨를 자식으로 대접해준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를 시킨 것이다.
무참히 부서진 소녀의 꿈과 인생
밝고 호기심 많은 소녀였던 서 씨는 학교에도 가지 못했다. 서 씨는 집안에서 학교에 보내주지 않자 글을 배우고 싶어 교회에서 하는 주일학교에 몰래 갔다가 들켜 외할머니에게 폭행을 당한 적도 있었다.
이후 주말이면 증조외할머니까지 가세해 매를 드는 등 집안 어른들은 어린 서 씨에게 폭력과 가혹행위를 일삼았다. 남들에게 서 씨의 존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 이웃과의 교류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남들 눈은 신경 써 호적에 양자가 아닌 친자로 입적시켰다. 그렇게 서 씨는 자신의 삶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채 하루하루 희망 없이 살아갔다.
"언니 오빠들이 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은 제가 다 챙겨주고 했어요. 정작 저는 학교 문턱도 넘지 못했지만 그 때는 그냥 그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만 했던 것 같아요. 지속적으로 세뇌를 받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아무리 남의 자식을 데려다 키웠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글씨는 읽을 수 있게 공부를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요? 버스 번호라도 읽고 쓸 줄 알아야 세상을 살아가잖아요. 언니 오빠들은 좋은 대학 나오고 학교 선생님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일만 했었죠. 친부모에게 자랐다면 학교에 다니고 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워요."
훗날 현원 감독이 뒤늦게 이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고 군대 가기 전 외갓집에 찾아가 큰 외삼촌에게 항의했더니 "근본도 없는 것을 데려다 키웠더니 대든다"며 "성공해서 복수해라. 고소해봐라"는 참담한 대답을 들어야했다. 서 씨의 어린 시절은 타의에 의해서 철저히 부서지고 망가졌던 것이다.
결혼을 하고서도 불안감 속에 살아
결혼은 서 씨에게 해방구였다. 결혼은 새로운, 온전한 진짜 자신의 가족이 생기는, 진짜 인생의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서 씨가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한 때는 27살.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에 결혼한 셈이다. 이 역시 '친정'이라고 부르는 곳에서 신랑감을 찾아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을 해 서 씨에게 가족이 생기면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날까 두려워 결혼을 시키는 걸 미뤄왔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가정을 이뤘지만 자신의 친정이 진짜가 아님을 시댁에 들킬까 두려워 처음에는 불안한 나날을 이어갔다. 첫째(현원 감독의 형)가 태어나고 남편이 중동에 건설 일을 하러 떠날 때, 남편은 하루씩 걸러 편지를 써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서 씨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일은 고사하고, 읽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그 당시만 하더라도 서 씨의 친정이 진짜인 줄로만 알았고, 위에 처남과 처형이 제대로 학교를 다녔기에 당연히 막내인 서 씨도 공부를 했으리라 믿고 있었다. 이를 들키기 싫었던 서 씨는 갓난아이를 키우면서 시어머니·시동생을 돌보는 와중에, 매일 밤을 꼬박 새며 남편에게 보낼 편지를 만들어냈다.
한글은 어느 정도 읽을 수는 있었기에 집에 있었던 대중가요 가사책을 뒤적이며 밤새 남몰래 한 자 한 자 그리듯 베껴나가며 편지를 썼다. 편지내용도 1979년 당시 가수 현숙이 중동 근로자들을 위해 취입했던 노래인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 가사를 인용하는 일도 있었다. 겉봉투의 영어 주소는 이웃 여고생에서 부탁해 미리 수십 장을 준비했다.
"시집가기 전 제 처지를 절대로 말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러면 쫓겨나게 된다고 계속 저한테 말했거든요. 그래서 결혼 초창기에는 들키지 않으려고 그렇게 편지도 쓰고 하면서 불안감에 살아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심장병도 생기지 않았나 생각해요. 이후 결혼하고 10년이 지난 뒤 남편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어요. 당시 남편과 두 아들 모두 충격을 받았지만 진짜 가족들은 제 처지를 이해해주고 온전한 제 편이 되어 주었어요."
"죽기 전에 꼭 뿌리를 찾고 싶어요"
이제 서 씨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어린 시절 엄마의 살아온 날들에 대해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어긋나지 않고 잘 자라준 두 아들, 누가 뭐래도 오로지 자신의 편이 되어 준 남편이 있는 온전한 가정을 이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 씨는 시댁식구들과의 관계에서 맏며느리이자 큰 형수이기 때문에 시동생들로부터 가장 큰 어른 대접을 받고 있다.
지금은 왕래를 끊은 '친정' 쪽은 마지막 모습도 깔끔하지 못했다. 친자로 호적에 올렸기 때문에 상속권이 서 씨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집 어른들이 돌아가시자 형제자매로 살아온 이들이 상속포기각서를 들고 찾아왔다. 재산을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동산별로 개인당 무려 9장이나 되는 상속포기각서들. 서 씨는 호적상 친자였기에 정상적으로 상속을 받아도 아무런 법적 문제가 없었다. 법적으로 조카였기에 외삼촌은 현원 감독과 형에게도 상속포기각서를 요구했다. 굳이 협조할 필요는 없었다. 서 씨의 평생을 꼬이게 만든 이들에게 앙갚음을 할 기회였다.
그러나 서 씨는 포기각서를 써줬다. 아무리 자신에게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이라도 유년기와 젊은 날을 함께 한 정이 있었다. 원래 성품도 감정을 쉬이 드러내거나 남을 미워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용서하기로 했다. 그걸로 인연을 정리할 수 있으면 족했다. 이제는 자신의 뿌리를 찾는 일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근본 없는 자식', '고아', '사생아'라는 말을 들을 때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됐어요. '내가 부모가 돌아가시거나 내가 뿌리가 없는 사람이 아닌데,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나'라는 생각에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이젠 꼭 진짜 가족을 찾고 싶어요. 뿌리를 찾고 싶어요. 제가 나이가 있기 때문에 친부모님이 살아 계시리라는 기대는 하지 못해요. 그래도 만약 살아계신다면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고 싶어요. 아니면 친척들이라도 찾아 부모님 산소도 찾고, 두 아들에게 엄마가 진짜 외갓집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두 아들도 장성하고, 집안 살림도 넉넉해진 최근 서 씨는 스스로 실종아동찾기협회를 찾아갔다. 그렇게 서기원 대표와 만나게 되면서, 경찰청 실종아동찾기센터에 유전자 정보를 등록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뿌리를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실종아동찾기협회 공익극단 드림호프컴퍼니가 만들어지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서 씨인 것이다.
현원 감독의 어머니 서경자 씨의 이름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본명이다. 서 씨가 기억하는 고향은 전라도 광주이며 친아버지 성함은 서종열(렬) 씨다. 친어머니의 고향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고향은 광주지만, 서 씨는 어렸을 적 서울에서 살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실종되기 전 서울 종로예식장 건너편에서 부모가 식당을 운영했으며 아버지와 자주 사직공원에 놀러 다닌 기억도 있다고 했다. 서 씨가 서울역에서 길을 잃은 당시는 1961년 봄으로, 5.16군사정변이 일어나기 얼마 전이다. 서 씨는 바로 전해 일어난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에 대한 기억을 어렴풋이 갖고 있었다.
서 씨는 어린 시절 자신의 거주지가 일정치 않았던 것 같다고 했다. 부모가 운영하던 식당이 어려워지자 경남 마산에서 해군 직업군인으로 근무하던 작은 아버지 집에 잠시 맡겨진 적이 있다. 이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상경해 서울 청계천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 집에서 잠시 거주했다. 아버지의 친구의 성은 박 씨였으며 3~4살 정도 되는 딸이 있었는데, 이름은 박명순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실종 당일 서 씨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그의 딸 박명순과 함께 놀고 있었는데, 유치원에 다니려면 서울에 있으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생각에 따라 고모(아버지 식당 종업원으로 추정)라고 부르던 여성을 따라 큰고모와 삼촌이 있는 고향 광주에 가기위해 서울역에 갔다가 변을 당했다. 형제가 없는 외동딸이었고, 어릴 적부터 피부가 유난히 하얀 편이었다.
"우리 어머니는 신데렐라입니다"
현원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 서경자 씨를 '신데렐라'로 표현했다. 동화와 동요 속 이야기처럼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는 존재를 떠올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어머니를 공주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의지도 담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외갓집에서 오라고 해서 엄마와 형과 함께 간 적이 있는데 식구들이 우리만 남겨놓고 모두 펜션으로 여행을 떠나버렸어요. 집을 보라고 불렀던 것이에요. 뒤늦게 엄마의 이야기를 듣게 된 후, 그제야 그때의 상황이 이해가 되었어요. 엄마와 같은 실종아동들이 얼마나 큰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지 영화와 연극을 통해서 널리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현원 감독은 자신의 재능은 노래를 좋아하고 소녀 같은 감성을 가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연극영화학을 공부했으며 배우로는 지난 2006년 KBS 드라마 '성장드라마 반올림# 3'로 데뷔했다. 이후 수많은 영화에서 단역 등을 맡았고 현재도 꾸준히 연기를 펼치고 있다.
지난 2005년 개봉한 영화 '종려나무숲'에서 미술 스태프 활약을 시작으로 직접 각본을 쓰며 단편영화 '우주인', '시티오브엔젤', '사랑온도 섭씨 999도' 등 3편의 주연과 연출을 맡았다. 그의 첫 시나리오는 어머니의 사연을 모티브로 만든 '엄마 찾기'(가제)였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I want to go back'(아이 원츄 고우 백)의 원작인 셈이다.
당초 연극은 자신의 어머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해서 주인공을 남자아이로 바꿔 부모를 찾아나서는 내용이었다. 지금의 연극은 실종아동찾기협회 서기원 대표의 사연을 큰 줄기로 어머니와 다른 실종가족들의 이야기 등을 종합해 보다 보편적인 내용으로 바꿨다.
현원 감독은 "어머니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원작이 있지만 실종아동가족들의 더 많은 사연을 알게 되면서 시나리오의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한 방향으로 감정이 치우치는 내용보다는 어린이들까지 함께 즐길 수 있는 동화 같은 구성으로 준비해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연극은 현재 무대만 마련된다면 언제라도 공연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쳤다. 최근에는 실력파 배우들이 출연을 약속해 더욱 기대를 높이고 있다.
연일 이슈를 만들어 내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 고모부역을 맡은 배우 홍석연, 영화 '해적' 등에 출연했던 배우 임성배, 여배우 백진희의 데뷔작인 독립영화 '사람을 찾습니다'에서 주연을 맡았던 배우 김규남 등이 출연을 확정했다.
이들 모두 실종가족의 아픔을 알리는 연극의 취지에 공감해 상업적 작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흔쾌하게 출연을 약속해주었다. 이제 연극은 관객들을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다.
현원 감독은 "제 예명은 어머니께서 '현진이가 넘버원이다'라고 말해주셔서 탄생했습니다. 그 이름처럼 더욱 열심히 해서 어머니와 같은 실종자나 그 가족들의 아픔을 연극을 통해 널리 알리고 싶고, 많은 분들이 공연에 함께해서 공감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현원 감독의 어머니 서경자 씨는 만나 뵐수록 따뜻하신 분이었습니다. 가족과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고 학교 공부의 기회도 누리지 못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유쾌한 기운을 전해주시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이번 기사를 통해 서경자 어머니의 진짜 가족을 찾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현재로서는 가장 확실해 보이는 실마리는 해군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는 작은아버지에 대한 정보입니다.
1960년 당시 경남 마산에서 장교인지 부사관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직업군인으로서 해군에서 복무했다는 사실입니다. 성은 '서' 씨이며 항렬이 아버지와 같은 가운데가 '종'자였기 때문에 성함을 '서종○'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현재 서경자 어머니는 주민등록상 다른 이름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로 인해 진짜 가족들이 찾고 싶어도 못 찾았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신다면 서경자 어머니가 60여년 만에 가족을 만나는 '기적'이 만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적극적인 제보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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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같이 현감독과 일하면서도 자세한 내용은 몰랐는데..
어머니와 현감독에게 기다리는 소식 꼭 있기를 바랍니다.
현감독에게 좋은 소식이 전해오길 바랍니다.
가슴 아픈 사연이네요.
가족 상봉으로 응어리진 한이 풀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