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특전 / 수필가 유사唯史 이경희
불꽃처럼 얼음처럼
- 시대를 이끈 종합예술인, 수필가 이경희 선생
/정진희
하안 국화꽃에 파묻힌 선생이 환하게 웃고 계신다. 언제나 첫인사로 "별 일 없지요?잘 지냈어요?"라며 활짝 웃어주시던 모습 그대로다.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마워." 라는 선생의 끝인사를 이번엔 첫인사로 듣는다. 국화꽃 한 송이를 제대에 올리고 고개를 숙인다. 선생과의 15년 세월이 필름처럼 지나간다. 따뜻함이나 다정다감함보다는 늘 정확한 판단과 이해로 정답을 알려주시던 분이었다. 가족보다는 먼, 이웃보다는 가까운, 가까이하기엔 멀고 멀리하기엔 가까운, 그 중간쯤에 선생과 나는 자리했던 것 같다. 향년 93세, 만수를 누린 호상이라고 여긴 건지 가족들도 문상객들도 애통한 표정이 없다. 가족들 얼굴도 어둡지 않다. 최선을 다한 사람의 얼굴에 보이는 달관과 편안이다. 나만 더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것이 죄송스럽고 다시는 뵐 수 없다는 것이 슬퍼진다 식당에 자리하고 보니 벽 한 면에 걸린 큰 터브이를 통해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선생의 지나온 발자취와 가족들과의 화기애애한 만남의 사진들이다. 그 속엔 문단의 여러 선생들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선생의 죽음을 온 가족이 준비하며 맞이했다는 느낌이다. 사실 선생은 90세 되던 해에 별점 보는 분을 통해 자신이 92세에 죽을 거라는 것을 예시받았다. 올해는 선생이 만으로 92세다. 나는 선생이 90세셨던 2021년 10월 19일에 마지막으로 찾아뵈었다. 처음으로 립스틱을 바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을 단풍이 곱던 날, 함께 중식을 먹고 테라스 벤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때 선생은 일생을 돌아보는 듯, 자기 자신의 감정에 정직하게 살라고 충고해 주셨다.
그리고 이젠 만나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전화나 자주 하라고 하셨다. 이젠 사람을 만나러 나오기 힘들어지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와 줘서 고마워."를 마지막으로 들은 날이었다.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2009년 4월 광화문 자택 '경희궁의 아침' 아파트에서다. 제3회 조경희수필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선생을 급히 인터뷰 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인터뷰이로 결정된 사람이 있었는데 급한 사정이 있다고 내게 부탁을 해왔다. 이런 것이 운명인가 보다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것.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각별했다. 엄마와 딸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한국신문 행사는 물론, 선생이 동행을 부탁하는 곳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모시고 다녔다.
덕분에 백남준 행사에 여러 차례 초대받았다. 세계적인 천재 예술가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이자 훗날 예술적 동지였으며 영원한 연인이었던 선생은, 백남준 사후 백남준을 기리는 사람들인 '백기사'를 창립하고 황병기 선생과 공동대표가 되었다. 이후 [백남준 이야기] 나의 유치원 친구 백남준 등의 저서를 통해 백남준의 삶과 예술세계를 알리는 최전선에 있었다.
그중 포항국립미술관에서 선생이 보관 중인 백남준 그림 특별 전시가 있었다. 포항에서 미술관 관람 후 호미곳과 적산 가옥 등을 돌며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항상 꼿꼿한 자세로 맨 앞에서 경청하는 선생의 모습에 감동받았다. 내게 선생을 정성껏 모신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분의 사회적 업적에 대한 대접이라기보다. 이렇게 소소한 장면들 속에 담긴 '삶의 자세'에 대한 감동과 존경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선생의 은발에 대한 사연은 가슴 뭉클한 감동이다. 남편을 병간호하면서부터 염색을 하지 않았고 돌아가실 때까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직접 남편을 간호했다는 것에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평생 바깥활동이 많았던 선생을 아껴준 남편에 대한 보답이었고 예의였으며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키는 일임을 느끼게 했다. "글에는 생명이 있어요. 반드시 읽힐 사람한테 도달하는 유기체예요." ''봉사는 한 민큼 남고 쌓이니 기회가 오면 하는게 맞아요." 라는 말씀으로 글 쓰고 봉사하는 나를 항상 격려해 주셨던 분께서 2019년 88세 미수를 맞이하셨다. 문학의집:서울 측에서 '이 작가를 말 한다' 행사에 선생을 초대했고 그 대담자로 선생은 나를 지목하셨다.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행사에 한국산문 회원 50여 명이 참석했고 그 외 수필문단 작가들이 참여했다. 선생의 만족스런 표정을 통해 비로소 나는 선생으로부터 받은 관심과 배려와 사랑에 대해 약간의 빛을 갚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을 인터뷰할 때도 느꼈지만 그의 일생을 들여다보면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세상은 이런 천재적인 분들로 인해 진화되는 것이라 믿는다.
한마디로 유사唯史 이경희 선생은 종합예술인이다. 섬세한 감성으로 포착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일상의 언어로 이야기하듯 풀어내는 수필가이며, 국제적인 행사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한국의 문화를 앞장서 세계에 알린 예술 운동가이다. 20대부터 KBS 라디오 퀴즈 프로그램 [스무고개] 와 <재치문답>에 고정 패널로 출연하면서 '이경희 박사'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39세에 첫 수필집 <산귀래>를 내놓으며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선생의 수필에 대해 당대 대문호들은 "불갈비나 비프스테이크의 기름기에 식상한 이에게 야채샐러드 한 접시의 산뜻한 미각"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문화예술 운동가로서의 선생의 역할은 다양하고도 광범위하다. 1966년부터 국제회의. 국제 도서전 등에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 대사 혹은 인터뷰어로 참가하면서 세계 기행을 시작했다 한국출판협회 대표로 참가한 국제도서박람회에서는 재치와 당당함으로 벨기에 보드웽 국왕에게 한국을 각인시켰으며 스페인 마요르카에 10년 동안 묻혀 있던 안익태 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모셔 오는 결정적인 역활을 한 것도 선생 이시다. 특히 우리의 전통 꼭두극 공연 예술이 거의 불모지였던 시절. 국제기구인 유니마UNIMA에 한국을 가입시킴으로써 현대 꼭두극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명석한 두뇌와 대담한 용기, 여성스런 감성과 탁월한 기획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선생의 업적들은 그를 당대 최고의 종합 예술인 중 한 명이라 칭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인터뷰 이후 한국산문 편집고문으로 10여 년을 함께해 주신 선생은 고관절 수술을 마치고 용인의 실버타운으로 거처를 옮기신 후에도 왕성한 집필과 강의를 이어가시며 문화예술인의 위력을 보여주셨다 사람에게나 조직에서나 성실한 자세로 최선을 다했던 선생이 이제 모든걸 내려놓고 웃고 계신다. 불꽃처럼 뜨거운 가슴을 지녔지만 얼음처럼 냉철한 지성으로 한 세기를 꽃피우신 분, 선생은 영면에 드셨지만 그를 기억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우리들 가슴 속에 살아있으리라.
정진희
윤오영수필문학상, 남촌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신인상, 한국산문문학상 박종화문학상 수상 대담집 외로운 영혼들의 우체국. 수필집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 떠나온 곳에 남겨진 것들. dipper2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