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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2011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태오 7,21-29)
Only the one who
does the will of my Father in heaven.
말씀의 초대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의 여종 하가르를 아브람에게 보내 아이를 갖게 한다. 하가르가 임신을 하자 사라이를 업신여기면서 주인과 여종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사라이가 하가르를 구박하자 하가르는 그를 피해 도망을 간다. 하가르는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주님께서는 늘 약한 편에서 그의 아픔을 들어주신다(제1독서). 아무리 주님을 자주 부르며 기도한다고 해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비바람이 몰아치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신앙은 삶으로 드러내 보일 때 굳건해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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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요즘은 정보 매체의 발달로 지식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전문 지식뿐 아니라 종교 지식도 넘쳐 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훌륭한 강론과 강의를 얼마든지 찾아서 들을 수 있는 좋은 책들이 서점과 도서관에 쌓여 있습니다. 오늘날은 오히려 너무 많은 지식이 넘쳐 나는 것이 문제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아는 것을 사는(生) 것으로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좋은 강의를 쫓아서 몰려다니지만 정녕 삶 속에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모래 알갱이와 같아서 언제든지 물결에 쓸려 내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마저 아는 것으로 깊은 것인 양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는 것이 가슴으로 내려와 마음이 되고 손과 발로 전달되어 행동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됩니다. 몸이 기억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은 죽은 것일 따름입니다. 마치 수영을 하는 이론은 훤히 알고 있지만 정녕 몸으로 익히지 않아서 깊은 물속에서는 헤엄을 치지 못하고 물에 빠져 죽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도 ‘영적 유목민’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목마른 사람처럼 이리저리 좋은 지식을 얻으려고 찾아 나서는 사람은 많지만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이웃과 나누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손에 묵주나 작은 십자가를 ‘쥐고’ 사는 사람은 많지만, 삶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려는 사람은 적습니다. 폭풍이 몰아치고 강물이 불어나는 신앙의 위기가 오면 어떻게 될지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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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말을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섬기지 말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수없이 “주님, 주님!” 하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행동이 뒤따르고 있었는지 이제는 돌아볼 시간입니다.
다급할 때에는 누구나 “주님, 주님!” 하고 부릅니다. 하지만 상황이 좋아지면 서서히 잊어버립니다. 말은 빠르고 행동은 느린 ‘인간의 본질’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는 것을 누구나 조금씩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말에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해하지만 외국인은 잘 모릅니다. 우리만의 독특한 표현입니다. 성당에서도 ‘시원섭섭한’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것은 시원한데 어떤 것은 섭섭한 것이지요. 대부분 사람과 연관된 일입니다.
화끈한 교우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교우들도 있습니다. 무던한 신부님이 계시는가 하면 괴팍한 신부님도 계십니다. 시원한 모임도 있지만 귀찮은 모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섭섭한 모임과 까다로운 사람들에게서도 ‘어떤 순간’ 힘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은총이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말하는 만큼’ 행동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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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아버지의 뜻’이겠습니까? 인생에 대한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생각할수록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작업을 영성 생활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한 사람의 일생에는 ‘아버지의 뜻’이 분명히 숨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생명을 주시면서 동시에 ‘삶의 설계도’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설계도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 작업을 영성 생활이라 합니다.
많은 영성 학자들은 ‘아버지의 뜻’을 ‘기쁨의 생활’에서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설계도는 먼저 인간이 감사와 즐거움으로 살게 되어 있다는 견해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된 인류이기에 감사와 기쁨은 ‘삶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신앙의 길을 걷는 우리가 불안 속에서 살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분명 ‘아버지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인 말입니다. 무엇의 주인이겠습니까? 내 인생과 미래의 주인이며 내 소유와 운명의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고백의 차원입니다. 말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야 삶의 기쁨에 닿을 수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정실부인입니다. 그녀의 옛 이름은 ‘사라이’였는데, 하느님께서 기적의 아들 이사악을 낳게 하시면서 이름을 ‘사라’로 바꾸신 것입니다. 사라이 시절에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지 못해 얼굴을 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보내 아들을 낳게 하였으나 이 일로 걱정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여종을 구박하였습니다.
그러한 그녀를 하느님께서는 새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라가 일찍이 아브라함의 자녀를 낳고 그 아이들이 장성해 있었다면 얼마나 기고만장했겠습니까?
그녀는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이었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이야기하면 자신의 강한 자존심을 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포기를 통하여 겸허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준비 단계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인에서 이사악의 어머니로 바뀔 수 있게 주님께서 마련하신 섭리였던 것입니다.
늑대의 시간을 넘어서
-최대환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언자조차 이리의 얼굴을 하고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영국의 철학자 토마스 홉즈는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세상을 안다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현실인식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때때로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로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는 위선으로 비난받고
조롱받습니다. 어쩌면 많은 신앙인들도 마음 한 편에는 이런 회의와 냉소에
물들어 신앙을 현실에서 실천하기보다는 신앙과 현실은 완전히 분리된
‘두 세계’라는 결론을 오래전에 내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현실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랑과 평화를 갈망하는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알게 됩니다. “얘들아, 내 곁에 와 앉으렴, 여기엔 우리의 평화를
깨뜨릴 사람 아무도 없단다.”라고 괴테가 노래하듯 말입니다. 내면의 깊은
갈망은 그리 되어야 하는 참현실을 일깨웁니다. 신앙은 현실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진정으로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이
“늑대의 시간”에 처해 있다는 현실인식에만 머물기를, 그 안에서 두려워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되어야 할 것이 비로소 현실이 되어 가는 그 과정에
참여하는 신앙인의 길을 용기 있게 걸음으로써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유시찬 신부와 함께하는 수요묵상
오늘 복음처럼 교훈이나 비유 등의 가르침이 주를 이루는 경우에는 묵상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시면서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단순한 이 한 문장이 오늘 기도의 묵상요점이며 기도 주제가 됩니다. 이 한 문장을 제대로 깊게 이해하기 위해 숙고를 거듭하며 깊은 내심 안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거짓 예언자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복음 내용을 해석하고 복음의 원리를 가르치는 데도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는 옥석이 뒤섞여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 말씀이라고 떠들고 있음에도 주님의 본뜻과는 참으로 거리가 먼 가르침들이 허다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오늘날 영성생활이나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식별력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가옵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옳고 좋은 것들 가운데서는 어느 것이 더 좋고 나은지에 대한 식별이 제대로 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영성 또는 신앙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아본다고 하셨지만, 이 말씀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열매 또한 얼핏 봐선 좋은 열매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좋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의 좋고 나쁨을 분별함에 있어서는 더 세심한 주의가 요청됩니다. 그만큼 식별은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이런 면들을 가지고 잘 알아들으려고 기도하면서, 동시에 식별력은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숙고해 봤으면 합니다.
누구나 자기 열매를 맺는다
-김찬선신부-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제 인생 경험에서 험상궂은 사람이 오히려 착하고
거칠게 구는 사람이 오히려 순수한 사람인 적이 많았습니다.
반대로 말쑥하고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이 알고 보니 악하고,
솔깃한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사기꾼이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험상궂은 사람은 겉꾸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요,
여리고 약한 사람이
그걸 숨기기 위해 일부러 거칠게 굴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대로 말쑥하고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은 겉꾸밈에 신경을 쓴 것이고,
외모나 행동거지나 말이 그럴듯하지 않으면
속일 수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런 사람은 양의 탈을 쓴 이리라고 하시며
열매를 봐야 속내가 드러나는 이런 사람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남에게 속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도 그런 사람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도 존재는 바뀌지 않은 채
겉으로만 괜찮은 사람처럼 처신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분노가 가득한 데도 미소를 지으려고 합니다.
속은 미움이 가득한 채 꽤나 위해주는 척 합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은 미소로 분노를 가릴 수 있고,
한 두 번은 미움을 사랑으로 속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고 끝내는 속내가 드러납니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눈이 증오를 드러내고야 말 것이고,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쓰지만 썩은 미소가 될 것입니다.
소는 물을 먹어 젖을 만들지만
뱀은 같은 물을 마셔도 독을 만들 뿐입니다.
그러므로 존재가 뱀과 같은 존재에서 소와 같은 존재로 바뀌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악을 열매로 맺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은 것이다.”
-양승국신부-
<사제는 새(新)차다>
어제 서품식 미사 후에, 갓 사제가 된 후배가 참석한 모든 분들을 향해 감사인사를 하는데, 요약하니 이랬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하루하루는 제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나가는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제직으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제복에 합당한, 사제복에 부끄럽지 않은, 사제복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겠습니다.”
그 인사말씀을 듣고 저는 참으로 기뻤습니다. 오랜 고생, 오랜 준비 끝에 이제 겸손의 덕까지 잘 갖추었구나, 하는 생각에 제 마음이 정말 기뻤습니다.
부디 그 좋은 마음, 이 세상 마치는 마지막 날까지 간직하고 살아가길 마음 속으로 빌었습니다.
첫 미사 강론을 준비하는데, 한 자매님께 무슨 말을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사제는 새(新)차입니다.
특히 새 사제는 겉도 번쩍거리고, 문 열면 새 차 냄새가 풀풀 나는, 이제 막 공장에서 출고되어 나온 새 차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품질이 좋고, 성능도 좋고, 가격도 비싼 새 차라 할지라도 이것이 떨어지면 차가 굴러가지를 않습니다. 뭐겠습니까?
바로 연료이지요.
연료는 바로 사제를 향한 신자들의 기도입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기도를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제가 아무리 유능하고, 아무리 잘생기고, 아무리 똑똑하다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연료 공급-충실할 영적생활-을 받지 않는다면, 그는 그저 한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연료가 사제의 삶 안으로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 사제생활은 제대로 굴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사제에게서 영적인 삶이 배제된다면 그 삶은 참으로 무의미하고 이중적인 삶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반석 위에 든든한 집을 지으라고 권고하십니다.
든든한 기초, 든든한 반석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다름 아닌 영적 생활일 것입니다. 지속적이고 충실한 기도생활일 것입니다.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과 기도가 일치하는, 일상과 영성이 일치하는, 친교와 봉사가 어우러지는 조화로운 삶일 것입니다.
짝퉁신자의 전성시대
-정명숙 수녀-
짝퉁이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가짜가 마치 진짜인 양 사람들을 속입니다. 비록
짝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명품인 양 보이면 괜찮은 세상입니다. 그래도 좋은가
봅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서로 속아줍니다. 서로 속이고 속는 세상에 사노라니
‘나라는 존재’마저 누구인지 모릅니다. 비싸고 화려한 명품 옷, 명품 신발, 명품
가방 …. 명품으로 둘러싸인 겉모습을 취했다고 내 존재마저 명품이 될까요?
내 존재의 가치와 기준이 온통 명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계명을
마치 겉모습을 치장하는 귀걸이 목걸이인 양 걸치고 살아간다면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헛된 자부심의 옷을 입는 것이지요. 마치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은 당신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짜 명품신자입니다. 명품을 보면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匠人)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그러기에 명품은 요란하지 않습니다.
그 자체로 자기의 진가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도나도 만들어내는 짝퉁을 우리는 누가 만든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명품신자입니까? 아니면 짝퉁신자입니까?
기적의 묘약
- 김현정-
얼마 전 전례력으로 주님 수난 성금요일, 퇴근 후 남편과 20개월 된 딸을 데
리고 용산참사 현장에 다녀왔다. 1월 20일 그곳은 아비규환이었을 것이다. 자
본이라는 마귀에 사로잡힌 이들이 엄동설한에 갈 곳 없는 철거민들을 벼랑으
로 내몰았고, 안타까운 여섯 목숨이 주님 곁으로 떠났다.
언론에서 전하는 뉴스를 보며 아파했는데, 한번은 꼭 그곳에 가야 할 것 같
아 추모미사에 참석하게 된 것이다. 유가족과 철거민, 그들의 외로운 길에 동
행을 자처한 이웃들이 참사의 상처가 뚜렷한 그 길 위에서 투쟁과 추모를 이
어가고 있었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문정현 신부님의
인도로 십자가의 길 기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철거 현장 곳곳을 14처 삼아 이
어지는 기도. 절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흘렀다. 호기심과 흥이 많은 딸
은 신부님과 참례자들의 ‘아멘’ 소리에 조막만한 손을 모아 ‘아-암-’ 하며 고
개를 숙이고, 성가가 나올 땐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었다. 세상이 마냥 신기
하고 재미있다는 듯 몸을 흔들어 대는 모습을 보니 웃음도 나왔지만 한편으
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부자들의 하느님과 서민들의 하느님이 다르지 않을진대, 하느님은 어쩌다
고통 받는 서민들 앞에선 눈이 멀고 부자·권력자들에겐 물질을 축복해주는
물신(物神)이 되셨나. “ ‘나에게 주님, 주님 !’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
지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 어떤 삶인지 날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돌아보며 경
계해야겠다. 소중한 아이들의 미래가 하느님 나라가 되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겠다.
공부의 위험성
-전삼용신부-
신학교 윤리 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거짓말에 대해 가르치면서 우리 신학생들 의견을 물어보셨습니다. 질문은 착한 거짓말을 해도 되느냐 그것도 해서는 안 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예상대로 착한, 혹은 하얀 거짓말은 이웃을 위해서 필요할 때가 있다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 저는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혹 착한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별 생각 없이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분위기가 묘한 것을 느끼고 주위를 둘러보니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의 느낌은 ‘그래, 나라도 소신대로 살자.’였습니다. 그리고 혼자만 올바로 사는 것 같아서 나름 기분이 뿌듯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착한 거짓말, 나쁜 거짓말 나누어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말 것이며, 하느님은 진리이시고 사탄은 거짓의 아버지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이지 착한 것, 나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데레사는 거짓말을 하느니 천 번을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수 신부님은 신학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착한 거짓말이 필요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려 주셨습니다.
저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고 그대로 실천하고 싶습니다. 물론 실천은 많이 못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프란치스코의 영화를 볼 때, 프란치스코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할 때 신발도 지니지 말라는 것을 읽고는 바로 신발을 벗어버리는 장면을 보고 크게 감동 받았습니다. 물론 프란치스코가 성경을 잘못 읽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여벌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지 아예 맨발로 다니라고 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의 단순한 믿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는 다 허물어져가는 다미아노 성당 십자가에서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는 곧 다미아노 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돈과 권력으로 무너져가는 내 교회를 재건하여라.’
실제로 프란치스코는 참된 겸손과 가난이 신앙의 핵심이 되어야함을 중세 부와 권력의 중심이었던 교회에 일깨워주었습니다.
만약 프란치스코가 신학교에 들어와 모든 과정을 이수하였으면 어떠하였을까요? 그 때도 성경의 구절 그대로 실천하는 단순함이 남아있었을까요? 저는 공부의 위험성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광신도라는 말은 우리에게 매우 부정적인 말입니다. 이성적인 판단 없이 현실적 상황을 무시하고 무작정 믿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까지 천주교에서는 광신도를 좀처럼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약 광신도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것저것 재지 않고 그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저는 광신도가 되고 싶습니다.
항상 기도하라면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라면 감사하고, 기뻐하라면 기뻐하고, 또 거짓말하지 말라면 하지 말고, 용서하고 미워하지 말라면 그렇게 하고, 십일조를 내라면 그렇게 하고, 달라는 대로 주라면 또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저도 광신도는 되기는 틀린 것 같습니다.
성경대로 사는 사람이 광신도라면 그 광신도는 성인이겠지요.
그러나 사제가 되어 신학의 최고 과정을 거치고 있는 지금, 가끔은 광신도처럼 살지도 못하면서 혼자 광신도가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마치 신학교 때 혼자만 손을 들고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외로울 때가 있습니다. 다만 다른 한 사람이라도 나와 함께 손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고 싶지만 좀처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때는 내가 뿌듯했지만 지금은 다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나의 잘못이 아닌가하는 혼란한 마음이 오기도 합니다. 마음이 단순하여 있는 그대로 믿고 실천하는 프란치스코와 같은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어린이들을 그렇게 좋아하셨는지도 이해가 갑니다. 그들은 단순히 믿고 실천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배운 사람들 가운데서 그렇게 단순하게 믿는 사람을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물론 나도 그렇게 되어버린 것 같아 두렵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나의 사고가 너무 융통성이 없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예수님의 복음말씀은 저에게 다시 힘을 줍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어린이와 같이 단순하게 믿고 실천하는 이가 하느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못 배운 서민들이 아니라 정치인, 학자, 사제들이었습니다. 믿고 실천하여 반석에 집을 짓는 신앙인들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새벽을 열며
어제는 늦게 잠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있을 음악 피정 준비로 인해서 일찍 잠을 잘 수가 없었지요. 스피커와 앰프를 설치하고, 마이크를 비롯한 음향 테스트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말을 합니다.
“신부님, 내일 비 온다는데 피정하는데 괜찮을까요?”
물론 안 괜찮지요. 많은 것을 준비했는데, 비가 오면 아무래도 사람들의 참석자수가 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떤 분이 이러한 말을 해주셔서 큰 힘을 얻습니다.
“비가 오면 할 것도 없으니까 더 많이 올 거예요.”
지난 성모의 밤 때에는 단순히 미사 만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걱정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준비할 것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릅니다. 오전 10시부터 저녁 5시까지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 합니다. 특히 지난번에는 음향을 음향업체에서 빌려서 사용했지만, 이번에는 우리 성당에서 구입한 음향을 가지고 처음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더욱 더 긴장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첫 피정의 시작 강의를 제가 한다는 것도 큰 걱정으로 다가오네요.
아무튼 무엇이든 다 걱정꺼리로 다가옵니다. 이것도 저것도 무엇 하나 안심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제 저녁 본당 사목회의에서 상반기 본당 행사 결산을 하면서, 이제까지 계획한 것들 중에서 안 된 것이 하나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미술학부 건물 매입에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더 많은 것들을 할 수가 있었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강한 믿음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그 순간에는 잘 생기지 않습니다. 그 순간에 ‘주님, 주님’이라고 말하고는 있는데, 문제는 머릿속으로는 인간적인 관점으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이 점을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 뜻의 실행은 언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에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지금 실천해야 하는데…….’,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데…….’, ‘믿음을 간직해야 하는데…….’, ‘노력하며 살아야 하는데…….’ 등등의 말들을 머릿속에서 대뇌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 몸뚱이로 바로 이 순간 직접 행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고 있었는지를 반성하여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머릿속의 상상으로만 실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과거에 대한 후회를 반복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정작 해야 할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다 잘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생활하세요. 주님이 함께 하시니까요.
빠다킹신부
아버지의 뜻
-박영봉 신부-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1티모 2,4)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2베드 3,9). 다른 모든 계명을 요약하고 또한 아버지의 뜻을
우리에게 온전히 밝혀주는 그분의 계명은, 당신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결합되고 또한 당신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우리는 아버지께
우리의 의지를 맡기고, 당신 아들이 늘 선택하신 것을 우리도 선택하려고
결단할 수 있으니, 곧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분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인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써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마태 7,21)을
행함으로써 하늘 나라에 들어간다고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깊게 하는 방법
-엄재중-
나같이 신심이 약한 사람은 가끔 하느님께 좀더 강한 신앙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렇지만 아직 그분께서는 이에 대한 소원을 채워주지 않으신다. 이러다 보니 어떤 때는 나야말로 그냥 말로만 신자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다. 이럭저럭 살다 보면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것 외에 내가 과연 믿지 않는 사람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를 지경이다. 나는 왜 반석처럼 강한 그런 신앙을 갖지 못할까? 난 왜 성령 체험했다는 분들처럼 그렇게 강렬한 내면 체험을 하지 못하는지 고민도 많이 했다.
오늘 주님은 당신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지당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말로만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가길 바라겠나? 주님은 심지어 당신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구마를 하고 기적을 행해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 나중에 절대로 아는 체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신앙이란 감성적이거나 심리적인 어떤 상태 이상이라는 것, 그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이다.
주님께 대한 신앙과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서 그분께 대한 신앙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신앙을 깊게 하는 방법! 그것은 먼저 성경 안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고, 그분의 뜻을 오늘 내 삶 안에서 살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실천 없이 오직 내 신심이 약한 것만 한탄하는 것은 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 것과 같다. 실천은 신앙을 깊게 하고, 신앙은 다시 실천을 촉진한다.
체득된 삶
-박근범 신부 -
오늘 복음을 간단히 요약하면 “머리로 아는 지식과 삶에서 나오는 지혜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신의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란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 저렇게 하는 것이 좋은지의 길에서 무엇이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삶인지 찾아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쉽게 결단을 내려서 하느님이 바라시는 삶을 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물어볼 수 있어서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만 그것은 아무런 의식 없이 그저 입으로만 외울 뿐, 정작 자신의 생활 안에서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하느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하고서는 실은 그렇지 않은 때가 허다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쉽게 사람들의 말에 속아 넘어가고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 줄 모릅니다. 저마다 머리로, 입으로, 말로만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보서 2,17)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한낱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서 10,17) 예수님의 말씀은 ‘들음’에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완성됩니다. 서두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오늘 복음 말씀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르십니다.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라고 말입니다. 복음의 끝부분에 드러난 예수님의 말씀이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는 것은’ 그분 친히 말씀하신 대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말의 힘이란 언행일치가 될 때 비로소 그 효력이 나타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이레네오 성인도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살다가 순교하신 참된 목자이십니다.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본받아 살 수 있도록 합시다.
몸에 체득된 삶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축적된 지혜에서 비롯됩니다.
독서 :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사래
-경규봉 신부-
하느님의 거듭된 약속(12,7; 13,15-16; 15,4)에도 불구하고 늙도록 아이를 갖지 못한 사래는 조바심이 났다. 히브리인들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것을 신체적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은 것으로 믿었다(20,17-18).
그래서 사래는 아브람에게 자신의 몸종을 통해서라도 자식을 얻도록 권한다. 자식이 없으면 아내가 자신의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 후사를 보도록 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관습이었다. 이 때 태어난 아기는 여종에게 속하지 않고 아내에게 속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사래의 행동은 당시 관습을 따른 자연스런 행위였다. 그렇지만 신앙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그녀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는 신앙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잉태를 주관하시는 하느님(29,31; 시편 127,3; 이사 66,9)과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느님께서 잉태시켜주실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아브람 역시 사래의 요구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어긋나는 인간적인 방법임을 알면서도 한마디의 반대도 없이 아내의 생각을 따르는 잘못을 범했다.
사래의 명에 따라 아브람의 자식을 잉태한 하갈은 사래를 업신여겼다. 자신의 몸종이었던 하갈로부터 멸시받은 사래는 아브람이 잉태한 하갈을 편애했기 때문에 하갈이 자신을 멸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래는 자신의 잘못을 성찰하지도 않고, 감정에 치우쳐 모든 책임을 아브람에게 미룬다. 결국 하갈은 사래를 피해 도망치다가 주님의 천사를 만나 천사의 지시에 따라 주인 곁으로 돌아가 아들 이스마엘을 낳는다.
이때 아브람은 85세였고, 사라는 75세였다. 그러니 사래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는 도저히 아이를 낳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할만하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들 이삭이 태어난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더 지난 다음의 일이니(21,5)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그분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믿고 기다리는 신앙이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들은 약속의 본질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약속의 성취에만 몰두하였다. 결국 그들이 저지른 실수는 장차 큰 비극의 전조가 되었다.
우선 하갈은 아브람의 후처가 되어 자식을 잉태한 후 사래를 업신여겼다. 결국 사래는 자신의 꾀에 넘어가 자신이 비참한 꼴을 당한 셈인데 이는 일부다처주의가 가져온 폐단과 비극의 한 예이다(2사무 16,21-22). 또한 사래는 하갈이 멸시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가했다. 그리하여 하갈은 도망쳤다. 이는 죄악의 악순환이다.
즉 사래의 인간적인 계획에 아브람이 동조하는 죄를 지은 결과 하갈이 교만에 빠져 죄를 지었다. 그로 인하여 사래와 아브람 사이에 불화가 생겨 죄를 지었고, 하갈은 다시 종의 신분으로 격하되었다.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는 죄를 지음으로써 하갈은 주인을 벗어나 도망치는 죄를 지었다. 이처럼 계속되는 죄악은 한 순간의 잘못이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킬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야고 1,14).
신앙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 성취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다. 하느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결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로마 6,1). 하느님의 약속은 어김없이 모두 이루어지며, 그 시기는 인간의 생각과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이루어진다(전도 3,1-2; 이사 55,8-9).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때를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을 갖아야 한다. 인내는 곧 성령의 열매이다(갈라 5,22).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마태 16,24)고 말씀하셨다.
자신의 생각과 뜻을 온전히 버리고, 주어진 십자가를 인내로 지고 가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참된 신앙인이 되자............◆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서철신부-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아라.” 서울대교구 성소지에 실린 주님의 기도에 관한 내용 중의 일부다. 내 뜻대로 되기를 얼마나 많이 기도했던가?
신학생 때 이런 일이 있었다. 하루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중에 ‘만약에 아버지의 뜻이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날부터 한 달간 나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신부가 너무나 되고 싶었고, 신학교에서 나온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신부가 되어야 한다고 한 달간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그렇게 한 달간 버티다가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교수 신부님이나 주교님이 ‘자네의 길은 이 길이 아니네’ 하고 말씀해 주신다면 기꺼이 그 길을 가겠다고 하느님께 말씀드리면서, 그렇지만 ‘지금은 신학교에 있으니 지금 당신의 뜻은 신부가 되는 것이라고 알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하고자 할 때 얼마나 큰 자유를 느끼게 되는지 모른다. 사실 그때까지 나를 쫓아내지는 않을까 하며 얼마나 교수 신부님들의 눈치를 보았는지 모른다. 그런데 그 고백을 하고 난 후, 신부님들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신부님들의 도움을 받아 사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고, 그래서 더 자유로워졌다.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 뜻보다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정말로 ‘하느님 아버지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겠다.
신 쥐들의 회의
-김화석신부-
쥐들이 사는 동네가 있었다. 그 동네 쥐들에게는 한 가지 근심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난폭한 고양이 때문에 겪는 일상과 생명에 대한 위협이었다. 그래서 쥐들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반상회를 열었다. 회의 중에 한 쥐가 ‘흉악한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자’는 획기적인 안건을 내어놓았다. 동네 쥐들은 그 의견을 칭찬하며 마치 이제는 고양이로부터 해방이라도 된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과연 고양이의 목에 방울은 누가 달지요?”라는 반장 쥐의 질문에 분위기는 일시에 찬물을 끼얹은 듯이 가라앉아 버렸다. 이때 희생심이 강한 쥐 한 마리가 나섰다. “문헌에 의하면 이전에 우리들의 조상들도 지금과 똑같은 의견을 제시했지만, 어느 누구도 위험을 무릅쓰고 동료들을 위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우린 결코 옛날을 답습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누군가가 나서야만 이 일이 해결될 수 있기에 제가 동족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동네는 한 마리 용감한 쥐의 희생으로 고양이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말만 무성하고 삶은 없는 세상, 누군가가 삶의 씨앗을 뿌려야 할 때이다. 우리는 더 이상 말만 앞세우는 신앙인이 아닌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자.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7).
-이순규 수녀-
만일 주님을 부르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면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로 하루를 시작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도자가 첫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그만큼 수도자는 주님의 이름을 쉽게 떠올리게 하는 구조적 삶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복음 말씀은 나의 입술과 마음과 행동이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한국 선불교의 가르침인 육조단경에서도 “마음자리에 다만 착하지 않음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착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면 염불하여도 왕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착하면 극락이 가까이 있으나 잘못 살았음에도 아미타의 이름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죽은 후 정토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건 불교건 선행이 뒤따르지 않는 기도로는 천국이나 극락이나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일흔이 넘도록 일을 놓지 않으시면서도 맑은 눈과 잔잔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한 할머니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시냐고 여쭈니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버지, 오늘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구요,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는 ‘아버지, 오늘 제가 당신 마음에 들었나요? 내일은 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아멘’ 하고 자는 게 전부요” 하신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 할머니야말로 진짜 예수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하실 뿐만 아니라 삶과 기도가 하나 되어 사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분이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주기 위해서도 아니다. 선교사들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작은 나눔을 꾸준히 해오시는 그분 말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분 가까이 있노라면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이의 평화를 느끼게 된다.
-최민석신부-
사막에서 목말라 죽어가는 두 사람에게 누군가 앞에 있는 작은 언덕을 넘으면 오아시스가 있다고 한다. 갑은 이 말을 듣고 마지막 힘을 다해 언덕을 넘어간다. 을은 같은 말을 들었지만 헛소리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누워 있다. 결과는 어떻게 될까? 그들이 전해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갑은 살 것이고 을은 죽을 것이다. 갑에게는 믿음이 있고 을에게는 믿음이 없다.
이 믿음은 귀로 듣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귀로 듣는다 해서 곧장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귀로 듣고 몸으로 실행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명사가 아니라 몸으로 실행해야 하는 동사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동의가 아니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실천이다. 언덕을 다 넘을 때까지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불확실한 약속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은 어쩌면 공연한 헛소리가 떠돌아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괜히 힘들여 언덕을 넘다가 거기서 맥없이 죽어가는 꼴이 될지 모른다는 얘기다. 믿음의 길이란 어디로 갈지 모른 채 단지 하느님의 말씀에 몸을 맡기고 무작정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여정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믿음은 온 생애를 걸고 뛰어드는 행위 그 자체이다. 그것은 산의 정상을 가리키는 팻말을 믿고 그대로 오르는 산행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두드려 보고 건너가는 돌다리는 신앙인의 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자신의 생애를 걸고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김명선신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 모두에게 당신께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주님! 주님! 하며 당신을 찾기만 한다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 기도를 할 때, 예수님께서 게세마니 동산에서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태 26, 39)” 하고 기도하신 모습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어려운 처지나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 자신의 개인적인 원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표현으로는 “아버지,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하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마음속으로는 자신의 바람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주님! 저는 다른 것은 잘 모릅니다. 제가 단지 원하는 것은 “당신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해주이소!” 이번에도 제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제부터는 기도고 뭐고 다 그만 둘랍니더(기도든 신앙생활이든 모두 그만 둘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느님께 협박성 거래를 하여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는 실천적 행동도 없이 말로만 믿음의 자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내 이름으로 마귀를 좋고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했다고 할지 모르나 나에 대한 믿음도 가르침에 따르는 행동도 없는 너희는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바람과 폭풍우가 쳐도 안전한 반석위에 집을 짓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사람이지만, 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비바람이 치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는 모래위에 집을 짓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서게 될 때에 당신에 대해서 배워서 알고 있다거나, 당신의 이름으로 불렀고, 기적을 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매일의 생활 속에서 당신의 뜻을 얼마나 실천했는지?
그리고 자신과 가족들 안에서, 이웃 형제들과 직장동료들 안에서, 세상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행을 했느냐가 구원의 열쇠라고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본질이신 사랑을 찾고 실천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이 싫어하는 일들을 한 가지라도 내가 먼저 실천하는 행동을 보여 드릴 수 있다면, 주님께서는 “나의 귀한 아이들아! 너의 그 모습을 통하여 나의 사랑이 드러났으니 너희에게 멋진 선물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아멘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양승국신부-
<산다는 것은 어제의 일들과 결별하는 일>
오늘 복음은 참으로 제 가슴을 치게 만드는군요. 다급할 때만 ‘주님, 주님’하고 외쳐 불렀지, 상황이 조금만 완화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원상복귀하고 마는 제 지난 삶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매일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나름대로 연구하지만, 거기까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눈만 떴다하면 버려라, 낮아져라, 내려가라, 포기하라, 크게 마음먹어라...별의 별 말을 다 떠들어대지만, 제가 선포하는 그 말씀의 내용, 그 어느 것 하나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말로는 뭐든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말로는 뭐든 다 이루어낼 것 같습니다. 말도 자꾸 하다 보니 슬슬 늘고, 그에 따라 실속 없는 말, 거짓말, 속보이는 말도 점점 늘어만 갑니다.
고백성사 보기도 점점 부담스럽고 창피스럽습니다. 신자 여러분들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10년 전에 가슴 치며, 부끄러움에 치를 떨며 고백했던 똑같은 유형의 죄를 아직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이제 더 이상 똑같은 악습을 없다, 수천 번도 다짐하지만,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기가 막힙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부끄럽게, 지지부진하게, 진보 없이 살아갈 것인가 두렵기도 합니다. 아마도 우리는 한 평생 후회하며, 가슴 치며 그렇게 살아가겠지요.
사도 바오로께서 체험하셨던 것처럼 한 순간의 급격한 변화, 어제와의 확연한 단절을 원하지만, 우리 인간의 본성상 그런 변화나 단절을 힘든가봅니다.
아마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우리는 비참함에서 약간 덜 비참함, 하느님 앞에서 아주 부족함에서 약간 덜 부족함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러다 이 세상을 하직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인생인가 봅니다.
언젠가 존경하는 소설가 신경숙씨가 한 신문에 기고한 글을 오려두었는데, 그 글이 오늘 유난히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산다는 일은 바로 어제의 일들과 헤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과 헤어지고는 그것을 잃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일을 도리 없이 견디고 도리 없이 지나오는 동안 견고해진 얼굴은 때로 징그럽다.
이런 봄날에 산에서 노란 산수유 꽃이나 분홍 진달래 속에서 문득 무릎이 꿇어지려고 하는 것은 이 봄날의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소멸이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아름다움이 한 순간이라는 것을, 이 순간이 곧 지나가리라는 것을, 곧 이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비록 우리가 매일 스스로의 나약함으로 인해 악습을 거듭하고 수시로 죄에 떨어진다 하더라고, 그래서 정말 괴롭다하더라도 희망까지 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지금은 비록 캄캄해 보이지만, 지금은 비록 한심스러워 보이지만, 주님과의 끈을 끝까지 놓지 않고 살아간다면, 세월이 흐르고 흐른 그 어느 날, 나이 어렸기 때문에, 부족했기 때문에,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던 지난날을 흐뭇한 미소와 함께 회상을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라 저는 확신합니다.
주연과 조연, 주인과 종
-김찬선신부-
지난달에는 오늘의 복음 말씀을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하였습니다.
나누기를 하는 중에 젊은 형제 중의 하나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主從關係的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
자기는 거부감이 있다고 토로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복음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얘기를 하려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저도 그 나이 때 비슷한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도 30대 초반까지는 주님이라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주님'하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주님’이라고 하느님을 부르기보다는
‘하느님’이라고 부르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그것은 신학을 배우면서
하느님은 벌주시는 무서운 하느님, 가부장적인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 위해 돌아가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크게 자리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제가 신학을 배우면서 시건방져졌기 때문이고
제가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믿느니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떠벌리듯이
남자들은 자기가 최고라는 의식이 알게 모르게 있기에
하느님을 믿기가 여자보다 어렵고
하느님을 주님으로 섬기기는 더 어렵습니다.
요즘은 그런 어머니들이 거의 없지만
옛날에는 어머니들이 당신 남편을 “우리 주인”
또는 “쥔 양반”이라고 흔히 불렀습니다.
이렇게 가부장적인 사회 안에서
그렇게 불리며 살아온 가부장적인 남자들이
가부장적인 하느님을 받아들이기는 여자보다 힘들기 마련이지요.
내가 내 삶의 주인이고
우리 집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하늘에 두 태양이 없듯이 또 다른 주인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통해
자기의 보잘 것 없음을 깨닫기 전에는
하느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고
우리 가정의 주인임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기 마련일 것입니다.
저도 대한민국의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여서
이렇게 하느님을 주님으로 부르기 힘들어 하다가
나이를 더 먹어서야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신 하느님!!!
그러나 하느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은 하지만
실제 삶을 하느님 위주로 사는 것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제 세자 요한에 대해 얘기할 때 얘기한 것처럼
모든 것에서 하느님이 주연이고 나는 조연으로 겸손히 머물지 못하였고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을 받들어 무엇을 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처럼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지만 실천은 내가 주인인 양 하기에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실천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저에게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주님을 부르는 것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지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일종의 치부책 같은 것을 가지고 계셔서
거기에 우리의 실천 여부를 일일이 기록해 놓으시고
우리가 죽어 당신 나라에 가면 그것을 보고
실천을 어느 정도 이상 했으면 당신 나라에 들어오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내 쫓으신다는 뜻일까요?
제 생각에 하느님은 그렇게 한가하지도,
그렇게 옹졸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철조망도 문도 없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있습니다.
온 천지가 다 하느님의 나라인데
하느님을 떠나 우리가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러니 실천 없는 신앙생활을 할 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하심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못 들어오게 하시거나
밀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여
하느님과 단절되고 고립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하시면
우리는 그것을 간섭으로 느끼고
심하게는 그런 말 하려면 우리 집에 오지도 마시라고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간섭 정도로 생각하거나 아예 무심함으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와는 어떤 소통도 두절된 채
나의 세계에 빠져 살게 됨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일 겁니다.
이런 사람을 주님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 생각은 행동이 아니다.†
박상대 신부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眞髓)는 각각 산상설교(마태 5,1-7,29)와 평지설교(루가 6,17-47)에 담겨있다. 물론 산상설교가 평지설교보다 내용도 풍부하고 복음서 전체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흥미로운 점은 둘 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집 짓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를 마무리짓고 있다는 것이다.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에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고,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아무도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지을 사람은 없겠지만,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로 인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줄곧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를 요구하셨다.
이 정의를 가지지 않고는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새롭고, 더 나은 정의는 설교를 경청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경청한 내용을 실제로 행함으로써 예수님이 바라시는 정의가 만들어진다.
들은 것, 아는 것을 실행에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다짐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래도 다짐해야 한다. 다짐은 출발점이고, 이는 길을 열어준다. 많은 것을 한꺼번에 다짐하지 말자. "1%의 법칙"을 잊어서는 안 된다. 1%의 변화와 전진과 개선 없이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으며, 완성은 꿈도 못 꾼다.
"생각을 바꾸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바뀌면 습관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면 운명이 달라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행동은 아니라 할지라도 행동의 기반이 된다. 실수가 잦으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실력이 되어버리듯이 조그만 것이라도 빈도(頻度)가 많아지면 습관이 되는 법이다. 조그맣고 대단하지 않더라도 좋은 생각과 좋은 다짐으로 좋은 습관을 들이는 연습을 하자.
말은 행동이 아니니 "주님, 주님" 하지 말고, 주님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설교의 내용을 행동에 옮김으로써 반석 위에 나의 집이 설 수 있도록 기초를 놓자.............◆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산상수훈의 결론 : 믿음과 행위로 천국백성화 †
하느님은 산상수훈이라는 복되신 설교에서 우리에 대한 강한 사랑이라는 주제의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고 계십니다. 이제 막바지에 접어드는 산상설교를 들으면서 과연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에 어떻게 사랑으로 답할 수 있을까를 묵상해 봅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전달합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테오 7.21)...예수님의 이 말씀이 지금 내 가슴에 뿌리 깊이 내려져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의 자녀인 우리 각자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 -신성하고 상상할 수 없고 아주 풍요로운 계획-에 투신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귀중한 진주와 같습니다. 여기에 누구나 하느님과 같은 품성의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누구나, 어느 곳에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어느 신분의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이것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하는 것, 이는 모든 이가 성덕에 나아갈 수 있는 입장권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오늘복음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처럼 "체념을 주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가이드입니다. 물론 모험이기도 하고요, 왜냐하면 자신의 뜻이 아닌 것 -이는 자신의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계획이 아니라는 뜻인데-을 따르는 것은 세상에서는 모험이라고 하기에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오늘복음은 산상수훈의 결론이며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는 모든 말씀의 골자입니다. 이 복음의 깊은 내용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많이 듣고 또 배워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牛耳讀經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성서의 표현으로 빌리면, 입으로만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해서 천국의 시민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천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 2장 26절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극대화해서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속담대로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산상수훈을 통해서 진주빛과 같은 거룩하고 정결하고 아름다운 복음들을 많이 듣었습니다. 그러나 들을 때뿐이지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들의 습성인 것 같습니다. 사람의 성실성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는 것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아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말 다르고 행동 다른 것이 우리들의 병폐인 것 같습니다. 특히 사랑은 행동이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렇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의 고백은 모래 위의 집짓기라는 것이 따라오는 말씀입니다. 砂上樓閣은 비가 오면 쉽게 쓸려 내려가고 맙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실천에 옮기지 않는 신앙은 쉽게 냉담하고, 쉽게 배신하고, 쉽게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게 만듭니다. 오늘의 말씀은 말씀으로 끝내서는 안 되고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임을 일깨워주는 말씀입니다.
일반 개신교와 우리 가톨릭과의 신학적 논쟁중의 하나가 믿음과 행동의 문제이다. 일반 개신교에서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면서 ‘믿습니다. 주님’을 열렬히 외쳐댑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에서는 두 가지가 다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난번에 교황님께서도 타종파와의 화해를 주창하시면서 이 논쟁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다. 믿음이 구원의 우선 순위이지만 믿음과 동시에 주님을 섬기는 행위를 실천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을 섬기는 행위는 다름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나왔듯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라도 매우 소중하고 따뜻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무슨 물난리나 큰 재난이 있을 때 희생된 사람들에게 줄서서 성금을 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평소에 스치는 모든 이웃에게 친절하고 정답게 다정한 미소로써 인사를 나누는 것도 위대한 사랑입니다.
무뚜뚝하고 냉정하게 자기와 상관이 없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 행위는 다분히 비 그리스도교적입니다. 성당에서는 열심히 빌고 기도하고 ‘믿습니다, 알렐루야’를 외치다가 성당 밖으로 나와서는 냉정하고 쌀쌀한 무심함과 침묵만이 흐른다면 바로 그것이 ‘주님, 주님’ 하고 입으로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실제의 행동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반 모임이나 구역미사 참여의 마음도 바로 실천적인 신앙의 한 테마입니다. 가장 가까이 사는 이웃들과 성경 이야기를 나누고 주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나누는 모임이 반 모임이며 구역미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예수님께서 누누이 가르쳐 주신대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주문입니다. 내 몸 하나 사랑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남의 몸도 나의 몸처럼 사랑하란 말씀이신가...? 그러나 우리가 자기 자식을 아끼고 자기 부모를 섬기듯이 이웃의 자식도 아껴주고 이웃의 어른들도 공경할 줄 알면 가능한 것입니다. 내 자식 귀한 줄만 알고 남의 자식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두 다 그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남을 업신여기거나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과의 관계를 서로 서로 소중한 인격체로 또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 결국 우리와 영적으로 한 형제자매임을 느낄 때 비로소 사랑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세상은 아름다운 지상의 낙원이 되는 것이고, ‘지상에서 영원으로’의 아름다운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요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진면목입니다.
종말론적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는 모두가 "주님, 주님!' 하면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한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복음을 잘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십니다. 다시말하면 종말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다음과 같은 본질적인 삶의 태도들을 가지도록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늘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항상 깨어 기다림, 희망, 회개를 하며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다리는 태도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특징을 이루는데, 왜냐하면 계시의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에게 당신의 신실함을 드러내신 약속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구역시대 히브리안에게 약속된 약속된 메시아를 기다리는 히브리인들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종말적인 실제 차원에서, 그 약속의 결정적 구현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합니다. "지금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듯' 보고 있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굴을 맞대고' 바라다볼 날이 올 것입니다(1 고린 13,12)". 교회는 깨어 있으면서 기쁨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따라서 교회는 "마라나타. 오소서, 주 예수여"(묵시 22,17.20)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재림은 '희망의 하느님'(로마 15,13)을 기념하며 기쁨에 찬 희망을 체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로마 8,24-25 참조). 시편 24편입니다: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우러러 뵙나이다. 내 하느님, 당신께 굳이 바라오니, 이 바람을 헛되이 마시옵소서. 원수들이 나를 두고 좋아라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당신께 바라는 자는 부끄러울리 없으리이다(시편 24, 1-3)."
2000년전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신 하느님은 우리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오신 하느님은 인간에게 끊임없는 회개를 요청했습니다. 복음의 새로움이란 꿈에서 결정적으로 깨어나도록 하는 빛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특히 세례자 요한의 선포를 통해서 메시야의 오심, 주의 길을 준비하고 곧 오실 주님을 맞을 수 있도록 회개하라는 초대의 시기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 주님하고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행동으로는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일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겸손한 이, 온순한 이, '야훼의 가난한 이'의 대열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바오로딸수도회의 이순규 수녀의 글로 묵상을 마무리합니다.
만일 주님을 부르는 것으로 하늘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면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로 하루를 시작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비나이다’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수도자가 첫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수도자는 주님의 이름을 쉽게 떠올리게 하는 구조적 삶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복음 말씀은 나의 입술과 마음과 행동이 하나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불교의 육조단경에서도 “마음자리에 다만 착하지 않음이 없으면 서쪽 나라가 여기서 멀지 않고, 착하지 않은 생각을 가지면 염불하여도 왕생하여 이르기 어렵느니라”고 하였는데 이는 마음이 착하면 극락이 가까이 있으나 잘못 살았음에도 아미타의 이름을 외우는 것만으로는 죽은 후 정토에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교건 불교건 선행이 뒤따르지 않는 기도로는 천국이나 극락이나 어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일흔이 넘도록 일을 놓지 않으시면서도 맑은 눈과 잔잔한 미소로 주위 사람들을 대하는 한 할머니에게 기도를 어떻게 하시냐고 여쭈니 “아침에 일어나서는 ‘아버지, 오늘도 당신 뜻대로 하소서’ 하구요, 밤에 잠자리에 들면서는 ‘아버지, 오늘 제가 당신 마음에 들었나요? 내일은 더 아버지의 뜻대로 살겠습니다. 아멘’ 하고 자는 게 전부요” 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 할머니야말로 진짜 예수님 마음에 드는 기도를 하실 뿐만 아니라 삶과 기도가 하나 되어 사는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분이 일을 하는 것은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서도 아니고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주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선교사들이나 가난한 이웃에게 작은 나눔을 꾸준히 해오시는 그분 말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바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그분 가까이 있노라면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는 이의 평화를 느끼게 됩니다...............◆
[두올묵상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