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1월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 아베 피에르는 '위대한 프랑스인', '가장 존경받는 프랑스인' 설문조사를 하면 샤를 드골과 함께 늘 첫 손에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홈리스 등 빈민 구제 운동에 앞장섰고 한때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하는 등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1970년부터 2005년까지 7명의 여성을 성폭행하거나 성희롱했다는 의혹이 사후 17년 만에 제기돼 프랑스가 충격에 빠졌다고 영국 BBC가 18일 보도했다.
고인이 창립한 빈곤 퇴치 운동조직 엠마우스 재단은 홈페이지에 올린 성명을 통해 7명의 피해 여성들 증언을 들었으며 그들의 말이 진실임을 믿는다고 밝혔다. 재단은 "이번 폭로는 아베 피에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우리 조직을 흔들었다"면서 "우리 모두는 그의 이야기와 그의 메시지를 알고 있다. 이런 행동들은 빈곤과 결핍, 배제에 맞서 싸운 그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게 한다"고 덧붙였다.
가톨릭 성직자의 사후 이런 스캔들이 불거져 명예가 추락하는 일은 아주 예외적이다. 그의 운동은 국제적으로도 파급 효과가 있어 20여개국에 엠마우스 호스텔이 들어서게 했다. 그의 사망 직후 당시 자크 시라크 대통령은 프랑스가 "엄청난 인물, 양심이며, 선의의 화신을 잃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엠마우스가 성추문 조사에 착수한 것은 1년 전의 일이었다. 피에르 신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여성의 신고를 받은 것이 계기였다. 그 뒤 공정한 조사를 위해 외부 회사에 위탁했는데 다른 6명의 여성이 연루된 사건들이 폭로됐다. 그 중 한 피해 여성은 당시 18세가 안 된 미성년자였다.
엠마우스는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재기 힘들지만 다른 사람들도 더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과감히 앞으로 나서 관련 내용을 고백한 여성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날 프랑스 신문들의 1면에는 이 스캔들 폭로 기사가 도배돼 있었다고 방송은 전했다. 르파리지앵은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받던 인물이 대좌(臺座)에서 추락했다며 평론가들이 경악했다고 전했다. 좌파 성향의 일간 리베라시옹은 이번 스캔들을 성적 유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오랜 침묵 서약" 일소의 일환으로 보고 있으며, 미투(MeToo)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라 이 여성들의 의혹은 귀기울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엠마우스는 나아가 피에르 신부의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체험했거나 목격한 이들로부터 진술을 모으기 위해 비밀 보호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앞으로 나서 달라고 촉구했다.
피에르 신부는 직물 상인의 여덟 자녀 가운데 다섯 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앙리 그루에였다. 1930년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 "필립"이란 이름으로 수도사 생활을 했다. 1938년 8월 24일 소속을 바꾸어 그로노블 교구 프란치스코회 재속 사제로 서품을 받고, 그르노블 대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에 가담하면서 아베 피에르란 이름으로 불렸다. 유대인들을 스위스로 피신시키는 일에도 앞장섰다. 1945년 하원의원으로 당선돼 의원 세비 전액을 빈민 구제에 썼고, 1954년 홈리스들의 숙소를 짓기 위해 엠마우스 재단을 세워 종교를 초월한 빈민, 노숙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구제하는 사회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88년 엠마우스 운동을 더 확산시키기 위해 본인의 이름을 딴 '아베 피에르 재단'을 설립했다.
전후 드골이나 기독교민주주의 정당과 함께 하기도 했다. 반핵, 반민족주의 운동을 하기도 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반대하고 해방신학 계열 사제들과 교류하며 말년에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등 기본적으로 중도 좌파 성향이었다. 이렇게 적극적인 정치 활동 및 사회 활동을 벌인 탓에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고위직이나 교황청으로부터 "오만함을 경계하라"는 조언을 듣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세상에 있는 돈을 가지고 사람을 만들지는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나 '굶주린 자는 빵을 갖게 하고, 빵을 가진 자는 정의와 사랑에 굶주리게 하라'는 명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