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떨고 있네
이경숙
무슨 차가 좋을까. 남자분이고, 아마도 아침에 커피는 마셨을 수 있고…. 생강레몬차 그것이 좋겠다. ‘생강레몬차’를 주문하고 기다린다.
휴우, 또 실수했구나.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도 일이 쪼이거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성마르게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냉정한 말을 한다. 사람을 잃고 보니 아차! 싶어서 얼른 나 자신을 다잡는다.
작은 단체를 하나 맡으며 일상에서 몰랐던 나를 만난다. 나름대로는 다 이유가 있었지만 ‘이럴 때마다 의욕이 떨어져요. 정말….’ 그런 말을 들었다. 거듭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그렇게 잘못했다는 것은 모르고, 그분의 문제도 있었어 하고는 마음 한켠을 접고 지내는 중이었다.
뒷머리를 된통 얻어맞는 일이 생겼다. 그 친구는 30년 한 일을 퇴직하고 공익적 가치가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노라고, 우리 일에 합류했다. 아이들 학부모나 주변에서 내 또래를 만나기는 쉽지 않은데, 동갑이었다. 처음에 약간의 낯가림을 끝으로 절친이 되었다, 내 생각으로는.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항상 혼자만 하는 일이 익숙했는데, 내가 어딜 가든 동행해 주고 ‘사람들이 알아야 해,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다니는지를’ 이런 말은 꽤 감동스러웠다. 또한 가끔씩 내가 쓴 글들을 보여 주거나, 책을 주면 꼬박꼬박 읽고는 피드백을 해주는 일은 마음 깊이 감사했다. 그 일은 가족도 잘 하지 않는 일이니까. 혼자서 쪼물쪼물 일하다 보니, 버거워도 감당해야 할 몫은 나의 것이었다. 이제 그런 과정을 지켜보고, 북돋워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힘이 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사람처럼 금세 친해졌다.
어느덧 4년여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동안에 그 친구는 논술학원에 강의를 나갔고, 자신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에는 협동조합의 일에 함께했다. 초반에 아주 급격하게 밀착했던 관계는 조금 헐거워진 느낌이 없지 않았다. 다시 혼자 쭈물거리며 ‘다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구나. 그 이상은 자기 시간을 쓰지 않아’ 하는 마음으로 섭섭했다. 가끔 그 친구가 원장을 예찬하는 말을 하면 툭! 툭! 타박을 놓곤 했다. 혹시라도 논술학원으로 전념할까 싶은 염려가 들었다.
모르겠다, 이것이 우리 관계의 끝을 알리는 전조였는지도…. 이렇게 말하면 운명론이 되겠지, 나의 잘못은 하나도 없는…. 그렇지는 않다, 결국 이러한 파국을 만든 나의 행동과 말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내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그녀에 대해 섭섭함이 쌓여 갔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어떤 행위는 그날 그 시간의 일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겹의 감정이 쌓여 그! 날! 폭발하는 것이니까.
기관에서 요구하는 일이 있었다. 우리 조합원 중에 그 조건에 맞는 두 분에게 참여해 주십사 부탁했다. 그 친구가 두 사람 중의 한 명이었는데, 단톡에 올려놓은 공지에 두말없이 ‘못하겠습니다’ 댓글이 올라왔다. 개인 카톡으로 다시 그 일에 대해 설명하고 부탁을 했으나 똑같이 매정한 거부였다. 바로 전화를 걸었는데 이미 나는 뚜껑이 열려 있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맨 처음에 한 소리가 ‘우리가 그렇게 공적인 사이였어?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일이 어떤 일인지 물어봐 줄 수는 없었어? 그렇게 딱 잘라 거절했어야만 했어?’ 이렇게 다다다 쏘아붙였다. 시작된 말은 담을 수가 없어서 저지르면서도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아, 이 친구랑은 끝일 수 있겠구나’하는 느낌이 왔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고 있었으니까. 공무원을 30년 할 정도로 심지가 있는 사람이지만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한번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니까.
정확히 2주 후, 그 친구가 만나자고 했고 조합 운영위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비굴할 정도로 매달렸다. ‘네가 그만두면 내가 참 힘들 거 같아, 좀 도와줘.’ 그 친구는 ‘조합에서 내가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서 그만두는 거야’ 말은 부드럽게 했지만 이미 결심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이 단호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금세 티가 났다. 어떤 행사를 할 때, 누구보다 먼저 나와서 챙겨 주던 사람, 각자 자기의 수업으로 바쁜 선생님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서로를 연결해 주는 딱풀 같은 사람이었다. 수업 끝나고 집안일을 챙기려 종종걸음을 하는 선생님들이 모두 모이기는 쉽지 않았다. 그럴 때, 싱글인 장점을 활용해 자신의 집으로 불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사람. 그 친구의 빈 자리는 차고도 넘쳤다. 사회적협동조합이라는 일이 돈이 되는 일도 아니고, 그 정도만 해주었어도 큰 힘이 되었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다.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내 마음이 닿지 않았다.
4개월여의 시간이 지났다. 이 미련은 무엇일까. 계속 그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주 큰 나의 편을 잃어버린 것이 너무 아깝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나중에는 관계가 헐거워졌다고 해도 그 정도도 감사한 일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다. 한두 번 톡을 보내고 만나자고 했는데 부드러운 거절이 돌아왔다. 더 다가가면 그나마 조합원으로 있는 것만도 튕겨 나갈까 봐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에게 ‘우리 친구 아니었나?’ 그래서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이 섭섭했고, 그 친구 역시 ‘우리 친구 아니었어? 그렇게 나를 몰라?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해’ 이렇게 나는 ‘친구’라는 착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말았다. 취향이 같고 좋은 사람들이라 나이가 들어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구나! 자신도 놀라웠다.
우리는 서로를 꽤 괜찮게 생각했으나 내가 그려놓은 이상형과 다른 점을 발견했을 때, 급격히 무너져 내리는 그렇게 허약한 지반이었던 것이다. 아닌 척하지만 자만했던 내가 민망할 뿐이다. 누군가 ‘시선’으로라도 나를 불편하게 여기면 신경 쓰는 타입이라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밀려났다는 감정은 꽤 힘들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는 이미 알고 있지만 마음을 주고받은 사람을 잃었다는 것은 뼈아픈 고통이다.
나의 성마른 말로 기분 나빴을 십년지기 선생님에게 참으로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 말대로 꼭 그 일이 아니었어도 결국 그 친구는 떠날 사람이었던 걸까? 이렇게 불쑥 나를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오늘 행사를 하나 진행하면서 바쁜 일정이었다. 문구점에도 들러야 했고, 복사집에도, 다이소에서도 살 것이 있었다. 복사집 아저씨가 다른 손님을 상대하느라 나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 ‘이것 좀 해주시라고요’ 딱딱하게 한 말에 복사집 사장님은 얼굴이 굳었다. 그 얼굴을 뒤로 하고 ‘일단 다이소 먼저 다녀올게요’ 가게를 나왔다.
다이소에 가는 동안 계속 생각했다. 또 성마르게 행동했구나. 고쳐 나가자, 급한 일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진가를 알아본다고…. 아니 진가까지도 아니고 나로 인해 누군가가 또 기분이 나빠지는 건 아니지. 죄송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카페에 들어가 따뜻한 차 한 잔을 주문한다. 데스크에 슬쩍 들이밀고, 뭐라고 말을 할까. ‘제가 일이 바빠서 말을 함부로 한 거 같네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할까? 아니 다르게 말해야 할까?
아주 매운 맛을 보고 나니, 나의 행동과 사고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는 것은 확실하다.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이미 엎질러져 깨진 일을 다시 재조합하고, 나를 변명하고 있다. 다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 하고 말이다, 미련스럽게. 한때는 친구였지만 차가운 태도에 아, 그래서 별명이 ‘얼음공주’였구나. 이제야 지나가듯이 했던 그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