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史는 경주 김씨 金正喜인데 금석학의 대가요, 詩, 書, 藝의 삼절로서 중국과 일본에서 더 잘 알려진 인물 입니다.
阮堂과 秋史라는 호를 즐겨 사용했지만 그 외에도 200여개의 호를 작품에 사용했답니다.경주김씨는 金柱臣의 딸이 장희빈에게 쫓겨났던 仁賢왕후에 이어 숙종의 제3왕비에 간택됨으로써 빛을 보았으나 仁元왕후 김씨도 원자생산을 못하고 장희빈 소생이 경종에 즉위하니 경주김씨 추사의 가문은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숙종부터 경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 때의 원자가 없다는 사실은 종묘사직을 흔들리게 하고, 왕권의 불확실성은 극심한 사색당쟁과 줄서기 권력투쟁으로 수 많은 비극이 벌어지고 척신들이 희생되었으며 그것이 드라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숙종 - 원비 광산김씨 김만기의 딸, 계비 민유중의 딸, 제3비 경주김씨 金柱臣의 딸이 왕자생산을 못하고, 장희빈이 경종을 낳음으로써 장희재가 빛을 본다. 숙종은 왕권보위를 위하여 환국정치를 한다. 남인을 중용했다 내치고 서인을 중용하고, 서인을 내치고 남인을 중용하고......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희빈을 왕후로 올렸다가 장희빈을 내쳐 사사하고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그럴 때 마다 수 많은 원혼들이 양산되었다.
경종 - 숙종의 제1 서왕자로 장희빈의 소생인데 14살에 생모의 사약 장면에서 하초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평생을 병석에서 살다가 재위 4년 2개월만에 36세로 승하한다. 단의왕후 沈씨와 계비 선의왕후 魚씨도 자식이 없어, 숙종의 제2 서왕자 연잉군이 제21대 영조가 된다.
영조 - 숙종은 살아서 보위를 경종에게 이양하고, 경종이 자리에 누워 정사를 돌보지 못하니 연잉군으로 대리청정하게 한다. 숙종이 죽고나니 권력은 경종에게 붙은 현실파와 연잉군에 희망을 거는 미래파로 갈리게 된다. 그리하여 연잉군은 현실파에 의해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역모로 고변을 당하여 구사일생의 위기에서 사저를 탈출하여 경복궁 담을 넘어 할머니 인원왕후 처소에 잠입했고, 할머니 인원왕후의 적극적인 보호로 목숨믈 부지하는 행운을 잡는다. 다행히 경종이 재위 4년 2개월만에 죽으니 비로소 제21대 영조가 탄생한다.
정조 - 영조의 손자이며 장헌세자의 아들이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달성徐씨가 64세까지 살았지만 무자였다. 원자 생산을 바라던 영조는 남인세력과 교류하는 사도세자의 비극을 초래하고 65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 김씨를 맞아드려 원자생산을 갈망했으니 실패하고 83세에 승하한다. 왕위는 손자에게 넘어가니 정조시대가 탄생한다.
순조 - 정조는 51년 8개월이나 장기집권한 영조의 권신들과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의 무대에 제22대왕으로 등장하여 끝 없는 견제를 당한다. 영조는 서왕자 2명(효장세자, 장헌세자)과 7옹주를 두었다. 그 중 화완옹주가 추사의 증조모가 된다. 이는 영조의 목숨을 구해준 할머니 순원왕후 경주김씨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영조의 척신들과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세력에 의한 정조독살 설이 등장하는 이유도 그런 것이다.
정조 또한 이런 왕권 보위를 위해서 이복동생인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은언군, 은전군과 그 자식들을 유배시켜 죽이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고, 원비 효의왕후 청풍김씨가 무자였고 의빈성씨 소생 문효세자가 10살에 요절하니, 수빈 박씨 소생이 순조가 된다. 정조가 48세에 급사하니 정순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퍼졌다.
순조 - 정조가 48세에 급서하자 11세의 순조가 보위를 잇고 할머니 정순왕후가 수렴첨정을 한다. 이로써 정약용 등 남인 개혁세력은 철퇴를 맞게 되고 정권은 영조시대의 노론에게로 넘어간다. 정순왕후를 비롯한 안동김씨의 전횡과 11살의 서왕자의 등극은 "왕후장상"이 따로 있나? 하는 풍조를 가져오고 홍경래의 란을 위시하여 천주교 대박해로 많은 신자가 희생되었으며 게다가 19년간이나 홍수가 일어나 민심이 흉흉하고 전국에서 민란이 120여 차례나 발생하였다.
헌종 - 순조는 청풍김씨 순원왕후에게서 원자 효명세자를 낳았다. 효명세자는 조만영의 딸을 맞아 헌종을 낳고 순조의 대리청정을 잘 수행하여 기대를 모았으나 22세에 요절한다. 그래서 순조의 보위는 8살 짜리 손자에게 넘어갔고 할머니 순조비 순원왕후 김씨가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헌종은 무자로 22세에 하세하니 후사가 완전히 끊겼다. 헌종의 모후 조대비가 옹립할 왕족의 근친이 없어(정조때 이복동생을 다 죽였으니) 인조의 아들 인평대군의 후손이며 헌종의 7촌 당숙벌인 강화도령을 원범(19세)를 옹립하니 제23대 철종이 된다. 철종은 철인왕후가 원자를, 후궁 4명이 서왕자를 4명이나 낳았지만 모두 죽고 영혜옹주 하나만 장성하여 박영효에게 출가했는데 출가 후 3개월 만에 죽었으니 완전히 절손되었다.
그래서 등장하는 왕이 흥선군의 차남 12살의 고종이고 흥선대원군의 시대가 열린다.
이렇게 국운이 쇄망하고 권력이 불안한 시기에 숙종의 국구로 등장한 김주신과 영조의 사돈으로 화완옹주를 며느리로 맞이한 영의정 金興慶 그리고 그의 고손인 추사 김정희의 잊혀진 권력으로서의 기나긴 유배생활 속의 비통함을 서예로 승화시킨 신례원 용궁리 추사고택 현장을 찾아보니 그 절제되고 아름다운 검소함이 오히려 추사가문의 품격을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였다.
특히 산책로를 따라 능선 길을 15분쯤 걸러가서 만나는 추사의 별채(서재-작업실-공부방-서예와 불경연구한던 곳) 華巖寺는 글자 그대로 어떻게 이 흙으로된 육산 숲속에 갑자기 병풍을 두른 듯한 암석이 둘려쳐진 기상천외한 하늘이 내려준 선경이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본 추사의 안목에 기가 막힌다. 이곳을 보지 않고 추사고택을 보았다고 떠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헛깨비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단언하고 싶다. 화암사 별채! 꼭 보시면 유익합니다.!
* 용궁리 묻힌 사람
1. 영의정 金興慶 - 영조 때 영의정, 추사 김정희의 고조이며 이곳에 낙향한 입향조 , 24세의 추사가 생부를 따라 연경(북경)에 갔을 때 갖여다 뿌린 백송이 있어 산소의 품격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2. 월성위 김한신(金漢藎)과 화완옹주 - 추사의 증조부, 영조의 사위, 38세에 부군이 죽자 식음을 전폐하고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근을 따라간 이조왕실에서 전무후무한 열녀로 정조가 정려문을 하사하였습니다.
3. 秋史 金正喜, 한산이씨와 예안이씨 -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 ·충청우도 암행어사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 묘는 과천 선영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추사 직계 선조
김이주(金毗柱) - 추사의 조부, 우참찬
양부 김노영(金魯永) - 대사헌
생부 김노경(金魯敬) - 이조판서, 거금도 유배중 사사, 묘는 과천에.
예산군 신례원 용궁리 뒷산이 烏石山이랍니다. 가장 높은 봉우리가 250미터쯤 되어보이고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뻗어내리고 있습니다. 그 중 동에서 서로 1500미터 까지에 500미터 간격으로 뚝뚝 떨어져 추사유적이 분포되어 있습니다.
오석산 가장 높은 봉우리 밑 8부 능선 울창한 숲속에 난데없는 병풍같은 바위 절벽이 있고 그 앞 자리에 華巖寺라는 별채를 지어 놓고 추사가 불경을 연구하고 붓글씨도 쓰고 저술도 하며 찾아오는 선비들과 담소를 하던 아주 멋진 별장이 있었습니다. 청량산의 퇴계서당을 연상게 되는데 이곳은 절경입니다. 본시 이 華巖寺는 삼국시대부터 있던 절이라는데 폐사되고 집터만 남아있던 것을, 증조부 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별사전으로 받은 전토에 들어 있어 추사가 집을 짓고 별채로 쓰게 되었답니다.
여기서 오솔길로 산길을 15분쯤 걸어내려가면 추사의 묘와 고택 그리고 기념관이 있고, 추사고택에서 500미터 더 서쪽으로 가면 월성위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총 묘가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데, 그 묘자락 우측에 화순옹조가 살았던 정려각이 솟을 대문과 행랑만 남아 있고 안채는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화순옹주 집터를 끼고 돌면서 작은 구릉에다가 백송공원을 조성하고 산책로를 만들어 저 멀리 화암사까지 숲속으로 걸어가 볼수 있도록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참으로 시원하고 아름다운 숲 속 산책로 입니다.
이 백송공원은 추사의 글씨를 그대로 넣어서 한눈에 볼수있도록 석조로 조각을 만들어 띄엄띄엄 배치해 놓았는데 구경할 만 합니다. 추사가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9년만에 풀려 과천시 생부 (이조판서를 하다가 당쟁의 희생물이 되어 고금도에 유배되었다가 사사된 金魯敬 ) 묘하에 초막을 짓고 10년간을 지내다가 돌아갔기 때문에 과천시문화원에 가면 추사의 일대기와 추사체 글씨 탁본을 왠만큼 다 갖추어 놓고 있습니다마는 이것을 돌로 삭여서 보기 좋게 야외공원을 만들어 전시해 놓으니 더욱 바라보기 좋고 근사했습니다.
첫댓글 민병철 교장선생님은 영어 잘 하는 민병철님 도 계시는데 동명 이인 인가요 퇴직을 하시고 국사연구와 현장을 답사 하시고 정리하여 카페에 글을 올리는 정성 보통 사람이 할수 없는 일을 하고 계시네요, 풍산 형님과 민교장선생님께 감사 드림니다.
민교장님도 영어전공을 하였는데 국사에도 식견이 대단하십니다.............풍산
민교장 선생님,국사 식견은 보통 수준이 아닙니다..아주 자세하고...공부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