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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룻기 2장 8-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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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당시 시대상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많이 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로마의 충실한 개라고 까지 불릴 정도로 유대인들이 극히 혐오했던 세금징수원이나(세리), 예수님을 적대시 했던 바리새인들의 집에 가서 함께 식사도 하고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또 버림받은 민족으로 여겼던 사마리아인들을 찾아가서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여인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만난 여인들은 온전한 여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은 남편이 여섯 명이나 된 음란한 여인이었습니다. 간음하다 잡힌 여인은 현행범 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며 비참한 지경에 이른 여인들을 찾아가 새로운 희망을 심겨 주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인 여인들을 우대해 주신 사랑과 평등정신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신 사역의 방향,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방식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여성의 이야기는 큰 흔적들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고대 사회는 남성우월주의 사회이기에, 여성들은 한낱 성적인 부속물 정도의 종속적인 신분에 불과했지만, 성경은 이러한 여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이야기의 중심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최초의 여선지자라는 영예를 받았습니다. 드보라는 종교연합공동체 시대에 이스라엘의 네 번째 사사였습니다. 여성들이 성경역사의 중추적인 중심역할은 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여성의 지위와 소임을 무시하거나 누락시키지는 않았습니다. 한 일이 있다면 있는 그대로 역사에 남겼습니다.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족보에도 여성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계보에 라합, 다말, 룻, 우리야의 아내, 그리고 마리아가 포함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족보의 다섯 명 중에, 모압 여인 룻의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 이야기입니다. 룻기는 4장 밖에 안 되는 짧은 분량이지만 성경의 한 책이 오로지 룻이라는 이방 여인의 기록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특별합니다. 왜 룻기가 기록 되었는지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기구한 운명을 보내야 했지만 결국 극적인 인생 역전에 성공한 해피엔딩의 주인공 룻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큽니다. 멸시 천대를 받던 이방 여인 룻의 드라마 같은 일생을 보면서 참 신앙의 의미와,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을 보시고,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올바른 선택이 있어야, 올바른 신앙이 세워집니다.
이유 없는 결과는 없습니다. 어떤 일에든 선택과 결정이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룻의 시아버지인 엘리멜렉은 유다 사람으로 사사시대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의 사사가 누구였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사 시대의 이야기 구조는 4가지 상황이 반복됩니다. 첫째, 평안하고 풍족하다보니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둘째,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다가 이웃 나라를 일으켜서 이스라엘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는 심판과 징계를 내립니다. 셋째, 그제서야 뉘우치고 다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회개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사사를 세워서 이웃나라를 내쫒고 평안의 시대가 오게 합니다. 배반하고-징계하고-회개하고-용서하는 네 가지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 사사시대입니다. 엘리멜렉이 유다 땅을 벗어나 모압으로 간 이유가 그 땅에 흉년이 들어서라고 합니다. 아마도 그 때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이웃나라의 점령을 받는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그 기간을 참지 못하고 생계를 위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간 것입니다.
모압은 어떤 나라입니까? 모압 족속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딸 둘과 소돔성을 빠져나옵니다. 롯이 그 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서 태어난 자식들이 모압과 암몬 족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롯 족속의 후손이 룻입니다. 이름이 비슷하지만 롯은 ‘가리워진’ ‘덮개’라는 뜻이고, 룻은 ‘우정’ ‘친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명기 23장에 기록되기를 모압 자손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나오지 못한다고 규정 하였습니다. 이들은 영원히 이스라엘과는 교류를 하지 못하는 이방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모압 족속의 대표적인 우상은, 사람의 몸통에 황소 머리를 형상을 한 ‘그모스’라는 우상입니다. 모압의 인접 국가인 암몬 족속이 섬기던 ‘몰렉’과 같은 우상입니다. 이 수상숭배의 특징은 어린아이를 산채로 불로 태워 제사들 드리는 인신제사입니다. 모압은 이런 흉악한 제사를 통해 전쟁에서 이기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엘리멜렉의 최대 실수는 자신들이 잘못을 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멀리하여 징계를 받고 있는 기간에 그 자리를 피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민족과는 상종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우상숭배의 본거지인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 악을 멀리하고 회개하여야 할 시점에, 악의 소굴로 찾아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좋게 보지 않으셨을 것은 충분히 짐작이 되고 남습니다. 장소를 피한다고 해서 징계까지 피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더 가혹한 징계를 내리십니다.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 도착하자마자 죽게 됩니다. 아들들은 결혼하지 말아야 할 이방여인들과 결혼합니다. 급기야는 두 아들까지 죽고 맙니다. 그냥 유다 땅에 있었다면, 엘리멜렉 자신과 두 아들이 죽는 참혹한 결과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한 가장의 선택이 전체 가정에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죽은자는 말이 없고, 산자인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의 상심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남편만 믿고 모압 땅으로 왔는데, 남편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그나마 의지하고 지냈던 두 아들 까지 죽었으니,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 이었습니다. 나오미는 지금 닥친 불행이 우연의 일이거나, 아니면 낯선 지방의 풍토병으로 인한 질병 때문에 발생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1장 13절 공동번역에서 나오미가 밝히기를 “나는 이처럼 여호와께 얻어맞은 신세”라고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징계하심으로 이런 고난이 발생한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음에 이른 결국은 자신들의 잘못된 선택이었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크나큰 징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던 자신들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던 것입니다.
엘리멜렉의 경우처럼, 우리에게도 신앙의 여정 가운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선택의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이고 강제적으로 끌어가시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자신의 인생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크고 작은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진학하는 것, 취업하는 것, 결혼하는 것 등 굵직한 선택들이 있었습니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식사 시간이 되면 뭐 먹을까? 고민합니다. 옷, 신발, 헤어스타일 새롭게 하는 것들을 고민 합니다. 할까? 말까? 고민 되는 것들을 매초 매분마다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어떻습니까? 좋은 선택을 많이 하시고 지내오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후회 되는 선택이 많습니까? 저의 경우를 본다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기억하고 싶지 않고, 숨기고 싶은 부끄러운 선택들이 거의 대부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선택의 연속이지만,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고 변하지 않는 선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 가라고 하는 것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나열해 놓고 보니 하나님을 배제한 어떤 선택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과 함께하는 선택을 한다면 확실하게 복을 누리며 사는 후회 없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선택을 한다면, 나오미와 같이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하나님께 얻어맞은 신세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남자들만 죽음으로 몰아갔을까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선택의 결정의 주범이 남자이기 때문에 징계의 직접 대상자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에는 개인이든, 가정이든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것이 징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기고, 잃게 됩니다. 그리고 징계가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징계 대상자가 죄의 심각성을 느끼고 돌이키는 순간 까지 계속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은 회개와 회복에 있습니다. 이제 나오미를 중심으로 신앙의 회복이 일어납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당한 슬픔을 이기고, 더 이상의 징계를 피하기 위해 고향 땅으로 향하려 합니다. 나오미가 유다 땅으로 다시 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집안이 망한 상황에서 고향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을 견디어 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가기를 선택한 것은 늦은 일이지만 제대로 방향을 잡은 선택입니다. 고향에서는 나오미를 보기 위해 온 성읍이 떠들었다고 합니다.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모여서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애 돌아온 나오미와, 그녀의 집안이 겪은 일에 대해 수군거리고 웅성 거렸습니다. 여자들은 저게 정말 옛날 그 나오미인가?라고 초라한 행색의 나오미를 보고 놀랍니다. 나오미는 지금 만인 앞에서 발가벗기는 듯한 수치를 당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 상황에서 담담하게 자신의 신앙고백을 합니다. 1장 20절, 21절을 우리말 성경으로 읽어드립니다.“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이제 마라라고 부르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내 인생을 고달프게 만드셨으니 말입니다. 내가 나갈 때는 풍족했는데 이제 여호와께서 나를 빈털터리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오미라 부르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나를 치셨고 전능하신 분께서 내게 고난을 주셨으니 말입니다.”
나오미의 고백에는 단 한미다의 변명도 없습니다. 원망도 없습니다. 이 고백에는 하나님은 100% 공의로우십니다. 나와 내 가족은 100% 죄인입니다. 이런 처지가 된 것은 당연합니다. 나는 전에는 희락이라는 나오미의 이름 이었는데, 이제는 괴로움 이라는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그렇게 불리을 만큼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웃는 사람 앞에서 이 정도로 자신을 낮추어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자가 아니면 하기 힘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잘못된 선택, 즉 죄를 짓게 되면 세 가지를 꼭 해야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야 하고, 둘째는 하나님 앞에 일대일로 회개를 하여야 하고, 셋째는 사람들 앞에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개인이 하나님 앞에 하는 것이지만, 셋째는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쉽지 않습니다. 이 세 번째 단계를 간증이라고 볼 수도 있고, 자기부인의 단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고향 사람들 앞에 선 것은 바로 이 세 번째 단계를 통과하는 시간입이다.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우리의 죄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옷이 벗겨지듯 드러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좋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죄는 드러내면 욕을 먹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아니라, 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도 선택을 하고 살았습니다. 아마도 하루 중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이 예배에 참석한 선택일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만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징계를 통해 회복을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날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회개와 용서와 회복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진실한 고백을 드리는 사람에게는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룻은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우상숭배의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적으로 생각하며 자라온 처녀였습니다. 룻은 자신이 결혼할 남자는 당연히 모압 청년일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외국 사람, 특히 대적국가인 이스라엘 청년하고 결혼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외국인 청년인 기룐과 결혼을 합니다. 룻이 결혼하여 10년도 되기 전에, 그의 남편 기룐과 시아주버니인 말론이 죽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이 다 과부가 되어 세 명의 여인들만 남았습니다. 가혹하고 처절한 고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두 아들과 남편을 잃은 당장의 슬픔도 잠시, 나오미와 오르바 그리고 룻, 세 여인은 현실적인 생계 문제에 직면합니다. 남자 없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 때 나오미는 고향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다로 돌아가기로 합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젊은 두 며느리에게 자유롭게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합니다. 여기서 두 며느리의 엇갈린 선택이 나옵니다. 큰 며느리인 오르바는 처음에는 거절하고 망설입니다. 계속되는 시어머니의 권고로 결국 집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고 자기 민족과 자기 신, 곧 그모스를 섬기는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룻은 결코 친정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누구라도 이 상황이 되면 오르바의 선택도 할 수 있고, 룻의 선택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극명하게 갈린 이유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깊이에서 차이나 났습니다. 두 사람은 결혼 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결혼 후에야 시댁 식구들이 믿는 하나님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섬기던 그모스 우상처럼, 하나님도 여러 신들 중에 하나 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0년의 결혼 생황 중에는 오르바나 룻, 두 며느리 중 누구의 신앙이 하나님 앞에 진실 되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에 큰 불행이 일어나자 중요한 선택의 시간이 되었을 때,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이렇게 신앙의 본 모습은 위기의 상황에 참인지 거짓인지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잘 되는 집은 초상이 나면 힘을 모으지만, 안 되는 집은 초상이 나면 가족끼리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정도는 평안할 때는 숨겨져 있지만,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어김없이 그 숨은 실태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큰 며느리 오르바는 인정으로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고향을 떠나 하나님만을 믿는 외국에 가서 사는 것은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가 오르바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10년 동안 시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게 되었고, 나름대로의 체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룻이 어머니를 따라가겠다고 하는 신앙 고백은 참으로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1장 16-17절입니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의 고백은 세 가지입니다. 어머니와 숙식을 같이 하겠다, 완전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개종 하겠다, 죽음을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룻의 고백은 단순하게 인륜 때문에 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것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외국 땅에서 뼈를 묻겠다는 것은 결코 돌이키지 않을 확고한 결단의 의지입니다. 룻은 자신의 고백이 사실이 아닐 경우에 하나님이 벌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결단의 배경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감정이나 혹은 어머니의 눈치를 보는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닙니다. 룻은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신앙이 이 만큼이 됨을 보여 주었습니다. 신앙은 가장 어려운 순간에, 가장 고난의 순간에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을 보고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크게 칭찬하셨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룻의 고백을 현장에서 들으셨다면 “내가 만난 사람 중에 이만한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칭찬하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룻의 고백이 어머니에게만 들려 진 것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에 정착하자 사람들이 며느리 룻에 대해 나오미에게 물었을 것입니다. “저 젊은 처녀는 누구야? 유다 백성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오게 되었어?” 나오미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하면서 “우리 둘째 며느리가 이런 신앙고백을 하면서 죽어도 나를 따라오겠다고 했다”소개했을 것입니다. 룻은 어느 날 유다 지방의 재력가인 보아스의 농토에서 추수하는 곡식의 이삭을 줍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아스가 이삭 줍는 룻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2장 8-9절을 표준새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여보시오, 새댁,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시오. 이삭을 주우려고 다른 밭으로 가지 마시오. 여기를 떠나지 말고, 우리 밭에서 일하는 여자들을 바싹 따라다니도록 하시오. 우리 일꾼들이 곡식을 거두는 밭에서 눈길을 돌리지 말고, 여자들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이삭을 줍도록 하시오. 젊은 남자 일꾼들에게는 댁을 건드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겠소. 목이 마르거든 주저하지 말고 물단지에 가서, 젊은 남자 일꾼들이 길어다가 둔 물을 마시도록 하시오.”
좋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초면에 젊은 여인을 보고 이렇게 말을 하고 있으니 사심이 실린 말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룻은 땅에 엎드리고 경계하면서 말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그러자 보아스가 말하기를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고 합니다. 보아스도 룻이 시어머니 앞에서 고백한 내용을 소문을 듣고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의 저 말이 꼭 하나님이 룻에게 하시고 싶은 마음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는 느낌입니다. 그리고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 속에 하나님이 얼마나 후하게 대우를 해 주시려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칭찬 하십니다. 상 주십니다. 원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은혜를 주십니다. 룻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위기 상황에서 피를 토하듯 간절하게 고백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 고백은 진심이었고, 진실 된 고백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진실함의 고백을 듣고 지나치니 않으십니다. 룻이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실 것입니다.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곧 우리가 믿는 하나님 이십니다. 진실함을 담은 단 한 번의 고백도 하나님은 허투루 들으시지 아니하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온전한 상을 주십니다. 룻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고백을 받은 만큼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룻의 고백에 제 자신을 대입해 봅니다. 저는 현재의 믿음으로 룻 만큼의 고백을 해 왔던 기억이 없습니다. 룻 정도는 고사하고 그 고백의 십분의 일 정도 조차도 기억이 없습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것이 저의 모습입니다. 앞으로도 룻의 고백만큼 진실 된 고백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온전한 상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상 받기 위해 고백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백을 계속 쌓아가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 칭찬의 고백, 격려의 고백, 겸손의 고백, 회개의 고백, 용서의 고백, 결단의 고백....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고백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위기가 닥쳐왔을 때 흔들리지 않는 신앙고백을 하기를 원한다면, 지금 평안할 때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룻과 같은 고백을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교회가 믿음의 고백을 드림으로 온전한 상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선하고 복된 길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룻의 이야기는 대하드라마 같은 반전과 감동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개가 우연일까요? 한 가정이 다른 국가로 이민 하는 것은 인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일입니다. 이민을 가는 나라가 전혀 다른 종교를 가진 국가를 선택하는 일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일입니다. 타국에 가서 정착과정에서 힘든 일을 많이 겪게 되지만, 사고가 아닌데도 가장이 죽고, 아들이 둘씩이나 죽는 일이 일어난 것은 확률적으로 극히 드문 일입니다. 그런 험한 일이 있었는데도, 시댁이 믿고 있던 하나님 이라는 신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과부가 된 며느리가 하나님을 더 믿고 따르겠다는 것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졸지에 가장이 된 과부는, 이민 와서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라,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고, 재산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고향에 돌아간다는 결정을 합니다. 고향에 돌아와서 온갖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지만 대항하거나 적대시 하지 않고 망신을 감수하면서 최대한 자신을 낮추며 살아갑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박해 받을 것 같은 고향에서 뜻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 10년 넘게 벌어진 이런 일련의 일들은 실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 합니다. 우연의 일이라고 보기에는 잘 짜여진 파란만장한 인생 극장 스토리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주관자이시기에 이 모든 과정의 연출자가 되십니다. 엘리멜렉으로 인해 하나님의 의도와는 반대로 돌아가려는 이야기를, 나오미를 축으로 하여 다시 되돌려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돌리신 것입니다. 거기에 숨겨진 주인공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룻입니다. 룻은 하나님께서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시려는 계획에서 주인공으로 발탁된 것입니다. 룻은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토록 짧은 순간에 남편이 죽을 줄 몰랐고, 자신이 하나님을 믿게 될 줄 몰랐고, 외국에 가서 살게 될 줄은 몰랐고, 지역의 재력가와 재혼하게 될 줄은 몰랐고, 자신의 후손이 다윗 왕과 메시아의 계보를 잇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장대한 시나리오를 짜신 분이 바로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불행의 선택을 선하고 복된 길로 바꾸기 위해 강권적으로 역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우리의 인생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면서 씨줄과 날줄로 정교하게 우리의 하루하루를 짜고 계십니다. 룻은 자신의 일생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그녀는 하나님을 믿었고, 믿음대로 살아가기로 결단하고, 그대로 행동에 옮겼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예비해 놓으셨고, 그들을 통해 역사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역사는 항상 위대한 결과로 기록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곁에는 그에 걸맞는 동반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룻의 믿음이 자라나게 하고, 바로 잡아주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길로 인도해 주는 안내자가 바로 나오미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가 들에 나가서 보아스를 만난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2장 20절입니다 “그가 여호와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하고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와 가까우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의 하나이니라 하니라”
나오미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듣자 보아스가 자신의 며느리에게 사람을 붙여주셨음을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뭇 남자들과 가까이 지내지 말고 보아스 곁에 지내라고 몸단속을 시킵니다. 그리고 룻을 자연스럽게 보아스에게 연결시켜서 결혼에 이르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유다 땅으로 불러들인 것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나오미의 영적 감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심대로 모든 일이 되어가도록 길잡이가 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아스라는 인물은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로 하나님이 미리 배정해 놓으셨습니다. 보아스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 20절에, “나오미의 남편이 살아있었을 때나, 지금 죽었을 때나 한결같이 은혜를 베푸는 자”라고 말합니다. 보아스는 사람의 형편과 처지를 보고 대우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람을 대하는 위인 이었습니다. 사랑을 품은 사람, 공의로운 사람, 생각의 중심이 바른 사람,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바로 보아스 였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룻과 믿음의 조력자 나오미와 믿음의 중심을 지키는 보아스를 통해 구원자의 후손을 잉태하는 연결고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룻의 결말은 해피엔딩입니다.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불신앙을 순종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을 믿음의 표본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심판과 징계가 끝이 아니라, 회복과 새로움의 시작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비난과 조롱은 존경과 부러움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은 룻 이야기를 통해서 가장 비참한 인생일지라도, 믿음 하나로 영광의 가문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룻에게만 적용 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룻과 같은 믿음을 고백하는 주인공이 되려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내게 닥친 현실이 어려움과 고난 속에 있다 하여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에 바쁘다고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피곤하고 덥고 짜증난다고 기도를 쉬어서는 안 됩니다. 되는 일이 없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해서는 안 됩니다. 언젠가부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식어져 있는데도 무감각하게 지내서는 안 됩니다. 내게 주어진 사명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늑장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옳지 못한 일인데도 권력에 편승해서 못 본체 하면 안 됩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은 금물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겨내지 못하고 수시로 어기게 되면 당장은 괜찮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쌓이면서 우리의 몸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서서히 병들게 됩니다. 병든 우리의 몸은 결국 위기에 처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배반 하는데 까지 이르면 그 징계는 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룻의 이야기를 통해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셔서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를 세워 주시는 하나님, 나에게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교회에게 주신 사명들이 있습니다. 맡겨진 일들을 인내함으로 끝까지 감당하여서, 하나님이 상 주시는 그날까지 헌신과 충성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살펴볼 것은 나만 믿음의 경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가 한 몸으로 뛴다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합니다. 내가 좀 늦게 가더라도 넘어지고 지쳐 있는 지체들을 이끌어 주고 함께 해주어야 합니다. 격려해 주고, 칭찬해 주어서 한 사람도 믿음의 경주를 포기하는 낙오자가 없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주신 세 가지를 기억하십시오. 첫째,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옳은 선택을 하십시오. 넘어져 있어도 실망하지 말고 쓰러진 신앙을 세워 가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둘째, 믿음의 고백을 드림으로 온전한 상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감사한 고백만 드려도 넘치는 복을 받습니다. 셋째, 선하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만 따라가십시오. 따라가려면 먼저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들린 대로 순종하여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우리의 삶에서 지켜짐으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가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우리의 후손들이 룻의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명문가문이 다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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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말씀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과 결단을 갖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심을 고백하오니, 우리가 언제나 옳은 선택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나쁜 선택으로 넘어지고 쓰러졌다 하여도, 다시 손잡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어나도록 도와주옵소서. 우리의 입술에서는 감사와 믿음의 고백이 끊이지 않게 하옵소서. 그리고 고백된 것은 반드시 이루도록 노력하는 의지가 식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나 선하고 복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인생의 시간 시간들을 주님 손에 맡기게 하여 주옵소서.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말씀의 능력을 믿고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성령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이요, 능력이요, 소망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 나이다. 아멘
첫댓글 설교가 참 좋네요 저는 목사님의 설교대지를 참고해서 조금 바꾸어 보았습니다. 1.고난중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면 더큰 고난이 다가온다. 2. 고난이 다가왔을 때 바른신앙은 변함없이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3.고난중에도 변함없이 신앙고백을 하면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죄송하지만 설교를 가져 갈수 없을까요?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대지내용이 구체적이고 적용력이 좋은 것 같습니다. 스크랩 허용해 놓았습니다. 평안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