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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세모의 기타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akdhkd(마왕)
詩노래 '부용산'에 얽힌 이야기
부용산 - 박기동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혹시 이 노래의 애절한 가락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십 수년 전에 한 선배시인이 술자리에서 부르는 걸 귀담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도 눈물이 쑥 빠질 만큼 슬픈 노래여서 그 자리에서 술을 몇 잔이나 더 들이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노래는 작사자가 1947년경에 폐결핵으로 죽은 어린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나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곡자 안성현이 해방 후에 월북을 하고, 후에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근래 들어 가수 이동원, 안치환, 한영애 같은 이들이 음반을 내면서 스러져가던 이 노래응 복원하기에 이르렀지요. 제가 쓰는 문자는 입이 없어서, 당신의 귀에 이 노래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슬픔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맑아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 2 / 안도현 지음 / 태동출판사
부용산
詩 : 박기동
작곡 : 안성현
부용산 오리길(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산 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부용산에서/보성 벌교
- 나천수
보성 벌교 땅 부용산에는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박기성씨의 누이가 누워있다고 하여
길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더니
누워있어야 할 누이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부용산 등산로 입구에
詩碑로 서있구나
1947년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 산허리에 파묻고 되돌아서는
오빠의 발목 부여잡고
홀 남겨두고 가지마란 듯이
산새도 슬피 울었다
살점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다고
恨의 피눈물 쏟아내면서
詩 한 구절 부용산 잔디에 써놓고
누이를 잊은 지
어언 60여년의 세월
부용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은
그때나 지금이나 햇살만 반짝이고 있다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영화필름처럼 돌아가는 동안에
그 시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빨치산이 즐겨 부르는
榮辱의 세월 보낸 지금
누이도 시도 노래도
부용산에 산허리에서 부활하여
세상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 왔다
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용산 노래를
차마 큰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좌우 이념의 강물이 흐르는
강 언덕 저편에서
입술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소리로
부용산 산허리의 잔디만 푸르다고
고장 난 축음기가 반복하듯
내뱉었을 수밖에 없었으니
부용산 산허리는
사람 사는 동네와 접해있어서
마음 답답할 때
바람 쏘이러 가는 언덕배기이다
마치 골고다 언덕처럼
꼭 그 자리 만큼에
예수님의 십자가 서 있듯
부용산 詩碑가 있어서
사람들이 詩碑를 보러 가는지
부용산 누이를 보러 가는지
아니면 恨의 상징인 詩碑가
멀리 여자만 남해바다를 응시하는지
부용산 오리길 산허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 알 것 같다.
2004년 2월12일 벌교에서
가운데 여성은 부용산 작곡자 안성현님의 부인
▲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전남 벌교 부용산을 찾은 박기동 시인(우측)
타계한 `부용산' 작사 박기동옹
“빨치산 노래” 숱한 고초, 93년 호주이민 지난해 귀국
고향 벌교서 연극 등 재조명
자신이 만든 노랫말 `부용산'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핍박을 받으며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아야만 했던 벌교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 국내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부용산의 노랫말과 이데올로기를 조명한 연극이 박 시인의 고향 벌교의 한 무대에 올려지면서 알려졌다..
6일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에 따르면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부용산'의 노랫말을 지은 벌교 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9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 그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원 내 아내 옆에 안장됐다.
박 시인은 지난 93년 가족을 두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시드니에서 주로 생활해오다 지병인 뇌경색이 악화돼 지난해 9월 아들(54^치과의사)이 있는 서울로 들어와 치료를 받아왔다.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은 박 시인의 빈소를 찾아 박씨를 벌교읍내 부용산에 안장하고 장례를 벌교읍민장으로 치르는 문제를 논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산'은 박씨가 1947년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재직하던 안성현이 1년뒤 곡을 붙인 현대판 `제망매가'.
이 노래는 해방과 전쟁 이후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 됐지만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한데다 당시 빨치산이 즐겨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1957년 목포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난 박 시인이 지난 93년 호주로 단신 이민을 떠나게 된 것도 가택수색과 연금^구금 등 가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숱한 고난과 무관치 않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지적이다.
박 시인은 지난 2000년 10월 부용산 노래비가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 세워지고 인기가수들의 음반에 실리는 등 재조명되는 상황 속에서 호주에 머무르며 시로 고국 및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인의 장남은 “아버님의 장례 이후 들춰본 시작 노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들이 적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라는 시구를 유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광주^전남 중견연극단체 보성공연예술촌 `연바람'이 제4회 벌교꼬막축제의 마지막 날인 6일 벌교제일고 운동장에서 부용산의 노랫말에 담긴 시대적인 의미와 아픔을 담아낸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 연극을 연출한 오성환(42)씨는 “지난 해 10월 충남 공주에서 열린 전국 향토연극제에 `부용산'을 무대에 처음 올렸는데 박시인이 숨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남일보 김용재 기자 2005. 11.07
定說 '부용산'
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1998. 3. 28.
호남인의 애창곡 '부용산'의 내력이 소개되자 여러 애창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定曲없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니던 노래의 악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노래가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인기 티비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양희경이 이 노래를 부르더라는 제보도 있었다.
이런 반응속에 커다란 볼멘소리가 섞여나왔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 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작사자 박기동 씨가 벌교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고 노래의 주인공은 작사자의 목포 항도여중 제자가 아니라 벌교의 친누이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 곡을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고 한다.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뒷받침으로는 광주에서 발행되는 '예향'이라는 월간지가 94년에 쓴 기사가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그 잡지를 구해 보니 현재 전남 순천 낙안의 금둔사 주지로 있는 知虛스님의 증언을 빌려 '부용산'은 작사자가 16세 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전언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부용산'의 본향을 다시 찾아나설 수 밖에 없다. 5년전 호주로 이민 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동 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와 있었다. 1947년 박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 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 때였다. 30세이던 박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 있었다. 특히 문예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교사를 모셔왔노라 했다. 이 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 속에 넣어둔 박교사의 시작노트를 안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 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교사는 맨 끝 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박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교사는 그 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라는 잡지에는 항도여중 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부용산'의 哀弟子曲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기고도 실려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박교사가 누이를 묻고 읊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은 '향수'의 가수 이동원이 곧 취입을 한다고 하고 벌교에서는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고 한다. '부용산'이 어디 것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만에 살려 널리 불려지게 할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의 내력을 추적하게 된 동기
'부용산' - 최성각
그때 은미가 앵콜을 받아서 노래를 몇 곡 더 부르면서 그 사이에 부용산도 슬그머니 끼어넣어 불렀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무슨 노래야 슬프고 좋은데...'
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수에게 내가 물었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얼렐레 저 녀석 저 노랜 잘 안 부르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은미의 선배인 경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쥑인다 쥑여 앵콜.'
국회의원에 나왔다 떨어진 두엽이 플라스틱 소주 됫병을 들고 버스의 좌석 난간에 걸터앉아서 소리쳤다.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두엽이었다. 앵콜을 외치면서도 두엽은 들고 있던 소주병으로 사람들에게 소주를 따르느라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쳐 은미에게 앵콜을 청했다. 은미는 마지못해 한 곡을 더 불렀다. 이번에도 흘러간 뽕짝이었다. 미아리 고개 어쩌구하는 노래였던 듯싶다. 머리를 뒤로 묶은 은미는 노래를 부르 때에는 목에 가느다란 핏줄이 돋곤 했다. 이상하게도 목의 가느다란 힘줄이 노래 부르는 그녀에게 어울렸다. 어딘가 처연하면서도 그 처연함이 낯설지 않았던 것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청바지에 체크 무늬의 푸른색 나방 그리고 두껍지 않은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던 은미는 어떻게 봐도 서른이 넘은 노처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개 산삼 심기 행사는 1박 2일로 진행되었고 성루을 빠져나갈 즈음 사람 소개가 끝나면 소주잔이 오가고 노래들이 터져나오곤 했는데 그때 강원도 정선 산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농심마니 패들에 합류한 은미에 대한 소개는 면목동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경수가 맡았다.
은미는 경수의 한의과 후배로서 아직 학생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처녀라는 것이 경수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한의과에 다니는 아리따운 노처녀보다도 그녀가 강압에 의해 부르게 된 노래로 인해 은미는 더 시선을 끌었다. 전날 정선으로 내려올 때에도 은미는 앵콜을 받았었다. 은미가 부르던 노래는 한결같이 노래가 생긴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되불려지고 있는 노래 그러니까 흘러간 트로트였다. 비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황성옛터... 는 물론이었고 나중에는 심수봉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뽕짝이 예사로운 뽕짝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어김없이 흐르는 메들리 뽕짝 가수들은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던 게다. 음정과 박자도 정확했고 끌 때에는 끌었고 당길 때에는 당겼고 넘어갈 때에는 꼴가닥 넘어갔으며 알던 가사도 잊어버리는 노래방 시대에 가사도 너무나 정확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배로 부르는지 목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잖아도 노는 일이라면 모두 내로라 하는 농심마니 패들이 은미에게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다.
농심마니란 산에 산삼을 심는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산삼을 캐는 사람들을 뜻하는 심마니와 달리 그 말이 생긴 지 10여년이 조금 넘는 조어였다. 국운 쇠퇴와 참혹한 일제강점 그리고 미증유의 동족상잔 그 후 미완의 혁명을 깔아 뭉갠 5월 쿠데타를 필두로 길고도 긴 군부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가 공교롭게도 산삼의 씨가 마르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는 다소 엉뚱스러운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산삼 심기는 자연을 잡아먹으면서 건강을 사려는 이기적인태도가 아니라, 산삼을 심음으로써 우리 땅의 정기를 되찾고자 하는 취지에서 발상된 작은 문화운동이었다. 독서회 친구들과 가까운 산꾼이 중심이 되어 나 또한 모임의 시작부터 관여하고 있는 농심마니는 산삼의 묘삼을 산에 심되 심은 자가 캐먹지는 않는다는 이타적인 정신을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환쟁이 글쟁이 얼농인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 산악인 농사꾼 장사꾼 전교조 교사 일반 직장인들...로 구성된 모임은 봄 가을 벌이는 두 차례 산삼심기 행사에 한 번이라도 참여하면 그대로 정식 멤버가 되어버리는 말하자면 까다롭지 않은 열린모임이었다. 워낙 모임의 들락거림이 수월해 장안의 내로라 하는 날건달과 술꾼들이 다 기웃거리다 보니 산행 언저리에 술로 인한 잡음도 더러 있었지만 산삼 심기가 어언 10년이 넘도록 지속되자 이제는 단순한 임의 모임이 아니라 산삼을 심는 그 행사가 제법 사회적 의미도 띠게 되었다. 그 동안 스물세 차례의 산삼 심기를 통해 농심마니패들이 전국 골골샅샅에 심은 산삼의 묘삼만도 수만 뿌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는 것은 산삼의 묘삼이지만 보이지 않게 심어지는 것은 그것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은미가 선배를 따라 처음 참여했던 그때의 산삼 심기 장소는 정선 하장의 야산이었다. 숙박과 식사는 동면 몰우대 언저리 숲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강원도 친구가 준비했다. 도착한 날 밤에도 장작에 불을 붙이고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은미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대개는 선배인 경수 옆에 붙어 있었지만 가끔씩은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어둠 속에 가만히 서있곤 했다. 일부러 말을 붙여보지는 않았지만 한마디로 인상이 깨끗한 아가씨 였다. 그러나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 누구나 자세히 보면 의당 느낄 수 있는 그늘도 언뜻언뜻 느껴지는 아가씨였다. 어떤 젊은인들 그늘이 없으랴.
'무슨 아가씨가 노랠 저렇게 잘해.'
농심마니 대장이면서 산악인인 박인식 선배가 경수에게 물었다.
'저 솜씨가 하루 이틀을 생긴 게 아니라 그래요.'
경수가 박 선배에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같은 연배인 경수와 나는 같은 독서회 회원이었다. 말하자면 농심마니 창설멤버인 셈이었다.
'아버진 쟤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신 모양이야. 그리곤 꽤나 어렵게 학교를 다닌 모양인데 저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일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에게 매일 밤 뽕짝을 불러 드렸다는 거 아냐.'
'어머니에게 뽕짝을 불러 주다니.'
'그것도 이불 속에서 말야. 나도 맨 처음 그 얘기 들을 때 콧날이 징하더라구. 나중에야 사정을 알게 됐지만...'
경수의 말은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은미는 미아리 고개...에 연이어 으악새 우는 사연...을 한 번 더 뽑고 있었다. 박 선배와 나는 말없이 은미의 노래를 들었다. 더 이상 경수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짐작이 전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산동네 어느 사글세방에서 낮의 막일로 피곤에 지쳐 누운 어머니에게 흘러간 뽕짝을 나직이 불러주는 소녀의 모습이. 딸의 노래를 듣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어느 홀로 된 여인의 모습이... 어머니가 잠든 뒤 다시 공부를 좀더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나인 몇이야.'
'서른둘인가 그럴 거야. 무슨 전문대학에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한의과대학에 다시 시험쳐 들어왔으니깐 보기엔 저레 갸냘퍼 보여도 아주 독족이야 독종.'
'지금은 살기 좀 나아졌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리야까도 끌고 막일도 했는데 이젠 영등포 근처 어느 재래시장에 과일 노점사을 하나 가지게 된 모양이야. 그치만 공분 아마 쟤 혼자 벌어서 하다시피 했을 걸. 이젠 곧 졸업이니까 개업도 개업이지만 결혼을 해야 할 테네 말야.'
경수본디 잔정이 많은 친구였지만 경수의 어투에 은미에 대한 남다른 정이 담겨
있음을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아가씨로군.'
박 선배가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노래와 거듭 돌아가는 소주잔 귀경하는 버스 속이라는 게 늘 그렇긴 하지만 그런 난장판 비슷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은미가 그때 흘러간 뽕짝 사이에 슬며시 끼워 넣듯이 불렀던 그 노래에 대해 더 이상 경수에게 묻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부용산을 듣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다음 농심마니 산행 때였다. 부용산을 들려준 사람은 그 또한 한 사람의 농심마니이면서 한겨레신문사의 논설위원인 김종철 선배였다.
봄 가을 일 년에 두 번 치르어지는 산삼 심기는 지난 번 정선행에 이어 이번에는 정읍 내장산 언저리로 잡혔다. 이번 산삼 심기에는 서울을 들락거리며 10여 년쯤 전 우리 땅에 산삼을 심자고 처음 제창한 울릉도 사람 '고 이덕영'이 발해의 해양활동 탐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뗏목을 타고 부산으로 흘러 내려오다 태풍으로 일본 오끼 섬 근처에서 조난당한 데 대한 위령제도 곁들여졌다. 고인이 서울에 오면 동식서숙하던 패들이 바로 박선배를 포함한 산꾼들이었던 것이다. 나야 산꾼은 아니었지만 10여 년 전 잡지사 시절부터 박 선배와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고 고인 또한 그렇게 흐르던 인연 속에서 마침내는 한겨울 남의 나라 앞 바다에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더욱이 고인이 뗏목의 난간에 한쪽 다리를 묶어 배가 전복될 때 정강이뼈 언저리가 절단되어 두 동강 났다는 뒷이야기는 그 비장함이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바가 있었다. 위령제와 산신제가 함께 올려졌고 지난해에만 해도 같은 산행에 있던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된 분위기 때문에 이번 산삼심기 산행은 전에 없이 무거운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무겁다기보다 지인의 비장한 죽음이 가져온 숙연함으로 인해 타성적으로 살며 켜켜이 쌓인 마땅히 벗겨져 내려야 할 때가 벗겨진 듯한 씻긴 감정도 어쩌면 없지 않았다 해야 할 것이다.
'부용산이라는 노랠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전라도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노래를 거의 다 알지. 오랫동안 빨치산 노래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이 노래를 알게 된것은 쫓겨다닐 때부터였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얼마 전에 한국일보 김정우 선생 칼럼에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으니 서울가면 한번 찾아보도록.'
버스의 앞쪽에 앉아 있던 김 선배였다.
낮고 분명한 목소리도 그렇지만 또박또박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글로 옮겨도 문장이 되는 김 선배 특유의 방식은 언제나 듣는 이들을 새삼스럽게 긴장시키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음씨나 어찌씨조차 그는 매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발음하곤 했는데 사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쫓겨다닐 때부터라는 말은 그의 언론민주화 활동과 그로 인한 수난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순정성이 그들의 이력과 그대로 일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에 문학평론도 한 언론인인 그가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읽겠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게 느껴지곤 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일요일 밤시간이라 귀경하는 밤 버스의 속력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김 선배가 버스의 앞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노래 도중에 간간히 마이크의 잡음이 더러 섞였지만 노래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애상이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틈이 없는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랫말에서는 빨치산 노래라는 노래의 위명과는 달리 뚜렷한 사상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가버렸는데 그의 존재가 안타깝게도 결실을 맺지는 못한 모양이라는 것 그리고 부용산 오리길의 숲과 거기 푸르디푸른 하늘은 노랫말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처연한 비극미가 강조되어 있는 듯했지만 흔들리는 버스에서 들은 김 선배의 딱 한 차례 노랫소리로는 그러나 곡의 이해에 만족할 만큼 가까이 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노래가 왠지 처음 들어 보는 노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노래를 마친 김 선배는 이번 모임에 처음 참여한 뒷자리의 젊은이들에 의해 그가 전날 정읍으로 내려올 때 불렀던 노래 꽃밭에서나 내가 만일 따위의 지정곡 앵콜로 들어갔다. 뒷자리의 젊은이들은 빨치산 노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김 선배는 마지못해 앵콜 곡 중 내가 만일을 한 번 더 부르기 시작했다.
'귀에 익어 왠지.'
옆자리에 있던 세경에게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 번 은민가 그 아가씨가 불렀었잖어. 거 왜 경수 후배 한의과 다닌다는 노처녀 말야. 이번엔 안 왔네 그 아가씨.'
농심마니 산행에 거의 빠지지 않는 출판업을 하는 세경이 말했다.
세경은 은미가 이번 산행에 빠졌음을 이미 확실하게 짚고 있었던 터였다. 그 순간 나는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경수를 찾았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앞쪽으로는 경수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내가 앉은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를 찾는 눈치이자 그 또한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바로 저 노래야.'
경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종이컵속의 소주를 비운 뒤 내가 컵을 건넸다.
'저번에 은미가 불렀던 노래가 저 노래지.'
소주를 받으면서 내가 물었다.
'응 부용산.'
그가 짧게 답했다.
그는 지나 번 산행 때 은미의 노래가 끝난 뒤 내 질문에 답하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놀랍다. 김 선배가 어디서 노랠 배웠는지 거의 원형에 가까운 것 같애. 은미 부용산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구말야. 언젠가 한번 송영 선생 노래를 들었었는데 김 선배 부용산이 송 선생 부용산과 거의 흡사한 것 같군. 사실 나도 원형이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말야.'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의 옆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부용산이라는 빨치산 노래에 내가 전에 없이 흥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이 노래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은미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송영 선생이라면 소설 쓰는.'
경수에게 술을 따르며 내가 물었다.
'응.'
경수가 짧게 대꾸했다.
만나 인사를 드린 적은 없지만 송선생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알만한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었다. 그라면 충분히 부용산을 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어렵잖이 들었다.
'송영 선생 말고도 김지하 선생이나 황석영 선생도 즐겨 불렀다는 소리가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말야. 근데 정곡이 없어 아직. 모두들 악보 없이 입에서 입으로 배웠기 때문일거야.'
경수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러구 보니 부용산을 부를 줄 알 리라고 떠오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로구먼.'
'응 남쪽 사람들은 엔간하면 이 노랠 다 알어. 운동권 애들도 덩달아 따라 부르고...' 경수의 설명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알고 있다는 데에 왠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김 선배가 부른 안치환의 노래가 거의 합창처럼 어우러져 끝나자 함께 노래를 불렀다는 상기된 감정이 김 선배에게 다시 노래를 청하게 했다.
'앵콜 김 선생님 어제 그 노래 있잖아요 정훈희 노래.' 뒷좌석의 젊은이들이 소리지렀다. 어제 그 노래 중의 정훈희 노래라면 '꽃밭에서'였다.
'무슨 앵콜은 앵콜 다른 사람 노랠 듣지 뭘. 경업이 어디 한번 네팔가나 불러 보지.'
'네팔가라면 언젠가 히말라야 트레킹 때 어디로 갈거나로 시작되는 우리 노래를 보지산 봉알봉에 좃씨를...' 어쩌구 하는 네팔가를 발정난 수캐처럼 그러면서도 구성지게 불러제꼈다.
'은미는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지 어린 녀석이.' 내가 물었다. 나는 네팔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어.'
경수가 대답했다.
빨치산이라는 말은 그 말이 쓸데없이 그리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해도 꼭 써야 한다면 스스럼없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는 감도 그리 틀린 감이 아닐진대 그럼에도 지루하고 맥 빠지는 일상의 공기에 갑자기 탄력을 실을 정도의 환기력은 여전히 지나고 있었다.
'아하.'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 같은 것이 베어 나왔다.
버스가 좌우로 흔들렸다. 갑자기 버스가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 인터체인지를 지나는 모양이었다. 그 구간은 공사 때문에 급한 커브가 유난히 많은 구간이었다.
'그치만 어떻게 된 거야 나이가 안 맞잖어.'
한참 있다가 내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은미가 빨치산의 딸이라면 그토록 어릴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전향을 하고 나왔거던. 그러니까 은미는 출소한 뒤에 낳은 자식이지. 그게 첫결혼이기도 했지만 말야.'
경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
나는 지난 해 가을 산행 때 무리에서 좀 떨어진 어둠 속에 그녀가 홀로 서있던 기억을 떠 올렸다.
'부용산은 빨치산 노래라기보다는 더 정확히는 빨치산들도 부르던 노래라 해야 할 거야.'
경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부용'이라면 꽃이름 아닌가.'
세경이 경수에게 물었다.
'음 연꽃이야 연꽃. 그치만 전라도 벌교에 가면 부용산이란 산이 실제 있다나 봐. 그 지방과 관련돤 노래이기도 하구 말야. 목포설 벌교설이 시방 팽팽하지만 말야.'
'도무지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네.'
세경이 말했다.
'경수 형 형도 그 노래 부를 줄 알어.' 가만히 경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좌석의 한 친구가 물었다. 장승을 깎는 명덕이었다.
'알지.'
'근데 넌 왜 그 동안 한 번도 안 불렀어.' 내가 물었다.
'아무데서나 막 불러제낄 노래가 아니었어. 금지곡이었으니까. 나야 여기저기 따라다니다가 배웠지.' 경수가 말했다.
오리발로도 통하는 경수는 크고 작은 시민운동에 꽤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그렇지. 빨치산들이 불렀다고 해서 입에서 절로 나오는 노랠 못 부르게 해 차라리 숨을 못 쉬게 하는 게 낫지.'
'그러니까 빨치산들이 앉았던 소나무 그늘에 앉거나 빨치산들이 쳐다보던 구름도 보면 안된다니깐. 그 사람들이 바라보던 노을도 물론이고 그게 다 죄가 된다니까...' 내가 빈정거렸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손치고 어디 한번 불러 봐라. 되게 궁금하다.'
'아직도 그런 시절 아닌가 모르겠네. 그나저나 김 선배만큼 난 못 부른다. 나중에 부르자구.' 경수가 뒤로 뺐다.
이 땅에 전라도는 그토록 길고도 어처구니없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하는 동안에 그런 은밀한 노래 한 가락을 가슴속 깊이 내장하고 그 노래로 서로를 부축하고 위로하고 더러는 깊은 울화를 삭이고 있었구나. 뜬금없이 그런 다소 신파조의 고즈넉한 생각이 들자 나는 들고 있던 종이잔의 소주를 얼른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버스는 중부고속도로를 버리고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선 듯했다.
서울에 도착한 이래 나는 곧 김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한국일보 기사의 출처를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통신으로 들어가 김성우 에세이를 찾았다. 기사 검색식으로 잠시 헤매다가 어렵지 않게 나는 정설 부용산이라는 칼럼을 화면에 떠올릴 수 있었다.
김성우 논설위원은 부용산과 관련하여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두 개의 에세이를 썼음을 알 수 있었다. 그 하나는 1998년 2월 13일에 게재된 부용산 오리길에이고 다른 하나는 한 달뒤인 3월 27일에 쓴 정설 부용산이라는 에세이였다.
김 논설위원이 부용산을 처음 들은 것은 20년 전, 박성룡 시인이 불렀다고 했다. 노래 끝에 박 시인은 이 노래의 애상의 곡조가 가슴을 찔렀다고 쓰고 있었다. 그 후 노래를 잊고있던 김 논설위원은 우연히 지난 해 목포 출신의 배우 김성옥 씨가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게 된다. 뜻밖이고 반가운 마음에 노래의 출처를 물었더니 김성옥 씨 또한 모른다고 답한다. 자기만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이 없더라는 말과 함께 김성옥 씨는 그런 채로 그러나 호남 지방 특히 전남 지역에서 언제부터인가 오래 전부터 이 노래가 악보도 없이 구전으로 널리 불려온다고 덧붙인다. 그러구 보니 김 논설위원이 20년 전 처음 들었던 박 시인도 해남 사람이었음을 떠올린다.
호남인이라야 아는 노래가 따로 있다니. 왜 이 아까운 곡조의 노래가 전국적으로 유행하지 않았을까. 이런 고운 노래를 왜 어느 가수도 취입하지 않았을까. 도대체 이 노래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부활의 노래 '부용산 오리길에'
글-최성환 1999. 12. 목포문화사랑. 특집
'부용산'은 48년 목포지역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로 작곡자가 월북하고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우리 곁에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던 이 노래가 50여 년이 흐른 지금 다시 부활하게 되기까지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정리해본다.
'부용산'은 어디에 있는가?
부용산은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조그만한 산이다.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이 곳 부용산에 그를 묻었다. 그날 부용산 오리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의 출발이다.
작사가 박기동은 어떤 인물일까?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은 한의사였던 아버지 박준태의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시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다. 80년대에까지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6년째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7평 남짓한 임대주택과 호주정부로부터 받는 월 연금40만원이 전부인 그의 가난한 삶에는 아직 희망찬 두 가지 미래가 남겨져 있다. 하나는 죽기 전에 개인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해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버린 조국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겠다는 신념이다. 다음은 그의 주요 경력이다.
44년 벌교초등학교(교가작사)에 부임. 교편생활을 시작.
46년 광주서석초등학교 근무 6개월 후 전근
46년 벌교중학교 부임, 교가를 작사
47년 순천사범학교 부임.「남조선 교육자협회」가입이 문제가 되어 순천경찰서에 끌려가 고초를 받고, 6개월 정직 처분을 받음.
47년 누이 박영애 폐결핵으로 사망. 추도시 '부용산'을 지음
48년 2월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 전신)으로 부임.
천재소녀 김정희와 음악교사 안성현을 만남.
48년 10월 제자 김정희 폐결핵으로 사망
50년 광주동중에서 다시 교편을 잡음. 결혼 후 한달 만에 6.25발발
53년 군산해운회사근무
57년 목포사범학교에서 마지막 교편을 잡음.
61년 서울의 한 출판사에 근무. 번역일을 맡아 '빙점' 등 일본소설을 주로 번역.
82년 부인 문행자 작고. 이후 지속되는 감시와 얽매임을 벗어나고자 이민을 결심함.
현재 호주 시드니 거주. 생식과 요가를 통해 건강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리스 신화에 관한 글을 정리하고 있으며, 시와 수필 등을 집필하고 있다.
노래로 만들어진 '부용산'
당시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에는 김정희(1931.10.1∼1948. 10.10)라는 학생이 있었다.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을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다. 또한「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다. 그가 요절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작노트 중 '부용산'을 보고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곡은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비슷한 정서를 가지고 있는 벌교에서까지 애창되었다.
작사가 박기동은 원래 시에는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분이 다르게 표현되어 있었는데, 노래로 만들면서 약간의 수정을 직접 하였다고 한다. 또 곡의 뒷부분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게 처리하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작곡자 안성현의 행방
노래를 만든 안성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동경음악학교를 나왔으며,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는데 당시의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다. 합창단을 직접 지도하며, 노래 집을 만들고 1년에 두 차례씩 발표회를 갖기도 했던 안성현은 제자 김정희의 장례가 있은 지 얼마 안돼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자신의 누이동생의 죽음에 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라고 박기동은 회고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이 곡이 어느 순간 잠잠해지기 시작한데는 작곡가 안성현이 월북했다는 데 중요한 원인이 있다. 그는 동경유학시절 만났던 무용가 최승희의 "북은 예술인의 천국이다" 라는 말을 듣고 그를 따라 북으로 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국립교향악단장을 지냈다는 소문이 있을 뿐 현재로서 그의 행방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당시에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이 전해오는데,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어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젊은 학생들의 불타오르는 음악 열에 알맞는 곡을 만들어주느냐 하는 것이 해방 후 나의 과제였다.…(생략)"
부용산은 금지곡이었나?
한동안 '부용산은 금지곡이다'라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이 노래가 금지곡 명단에 들어간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노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가 심각했던 우리사회에서 좌익계열의 음악으로 주목받게 되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을 것이다.
실제 빨치산들이 불렀었나?
빨치산의 음악은 아니지만, 빨치산들이 애창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51년만의 2절 가사 탄생
애절한 가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이 노래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작사자 박기동씨를 직접 찾아 간 연극인 김성옥(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가 2절 작사를 제의, 그가 수락함으로써 2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기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사라지는 슬픔을 소재로 2절의 가사를 지었으며, 마지막은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80평생에 단 두 번 밖에 울어 본 적이 없다는 그도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에 서 있으니' 부분을 지으면서 30여분 책상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다시 불리워질 부용산
가수 안치환에 의해 97년 처음 음반으로 정식 발표된 이 노래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와 상당부분의 가사와 박자가 변형되어 있었는데, 항도여중 출신 경기대 김효자 교수(93년 동국대 철학과 정교수로부터 동문회모임을 통해 건너받게 되었다고 함.)가 작곡집을 보관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원곡의 악보와 가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또 지난 5월 29일 목포에서 열린 부용산 음악회를 시작으로 벌교에서도 6월 26일에 부용산 음악발표회를 가졌으며, 9월에는 부용산에 기념비와 기념누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에서의 이러한 노력을 필두로 부용산은 다시 대중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몇몇 지역의 노래가 아닌 같은 시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국인 모두의 노래로 발전되어 가기를 바래본다.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kbs라디오, 서해안시대 서해안 인물열전(04.07.1)
서해안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에 대해서 살펴보는 서해안 인물열전, 오늘은 광복후 전라도 일대에서 크게 유행했던 노래 '부용산'과 그 노랫말을 만든 시인 박기동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제20회 부용산의 시인 박기동
진행: 최성환
시를 쓴 박기동은 어떤 분인가?
시인이자 번역문학가로 활동했던 분이라고 하겠는데, 서해안 인물열전에서 소개하는 인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분이다. 지난 시간에 소청 조희관 선생을 소개하면서 조희관 선생이 항도여중(지금의 목포여고 전신)에 교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을 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잠시 언급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구전가요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노래인데, 그 부용산이라는 노래에 나오는 원 가사를 시로 만든 분이 바로 박기동 선생입니다. 부용산이라는 노래와 함께 참 우여곡절이 많은 생을 사셨고, 현재 호주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 노래의 작사가인 셈인데, 선생의 간단한 약력부터 살펴보죠?
1917년 11월 28일생인 박기동 선생은 전남 벌교가 고향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작은 섬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박준태) 덕에 비교적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유학을 가게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는데 이때 우리말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되어 시인이 되기로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귀국 후 교편을 잡으며 문학적 감성을 후학들에 가르치는데 열성을 쏟지만, 공교롭게도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좌경계열의 노래로 낙인찍히면서 한 곳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곡의 연속인 삶을 살게되었습니다. 80년대까지도 가택수사 등 감시와 얽매임을 받았던 그는 결국 한 많은 조국을 등지고, 1993년 호주로 이민을 떠나 현재 호주 시드니 거주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부용산이라는 노래는 다시 빛을 보기 시작했는데, 어떤 곡인지 소개?
부용산은 1948년에 목포에서 만들어졌고, 이후 널리 애창되었던 곡입니다. 작곡을 했던 안성현이라는 분이 월북하고 나중에 빨치산이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 아니 금지곡이 되어 공개적으로 부르지 못했던 노래입니다. 그러나 노래 자체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 매우 강해서, 단절되지 않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가요로 지금까지 전해 내려져 왔습니다. 구전으로만 전하다 보니 노래에 얽힌 여러 가지 사연과 추측들이 생겨났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부용산 노래 원본이 발견되고, 실제 작사가인 박기동 선생이 호주에 살고 계신다는 것 등이 밝혀지면서 노래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 둘 확인되기 시작하였고, 지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면서, 부용산 시비와 노래비가 세워지고, 음악회가 열리고, 관련 책도 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목포에서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탄생하게 된 남다른 배경이 있다는데?
당시 목포항도여중(현 목포여고의 전신)에는 김정희(1931.10.1∼1948. 10.10)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는 경성사범학교에 입학했던 수재로 해방이 되자 고향인 목포로 전학을 왔으며, 당시 교장이었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 김정희학생을 가르킬 만한 사람이 없어서 박기동 선생을 항도여중으로 불러왔다고 자주 이야기했을 정도의 천재적인 소녀였습니다. 김정희라는 학생은「감화원 설계」라는 글로 전국글짓기 대회 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도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이 요절하게되자 전교생이 슬퍼하였으며, 음악담당이었던 안성현 선생이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곡을 붙여 노래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구전상으로는 학생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박기동 선생이 시를 지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 이전에 본인의 누이동생을 위해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구전되어 오는 내용과는 달리 박기동 선생이 부용산이라는 시를 지은 것은 누이동생 때문이라고 하셨는데, 어떤 사연이 있습니까?
노래의 가사는 원래 박기동선생이 쓴 '부용산'이라는 시였습니다. 부용산은 실제 전남 벌교에 있는 해발 95M의 조그만한 산의 이름인데, '부용산'이라는 시(詩)를 쓴 박기동은 그의 나이 10세 때 여수에서 벌교로 이사와서 살게되었습니다. 1947년에 이르러 그의 친누이인 박영애가 24세의 꽃다운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자, 박영애의 시댁 식구 몇명과 함께 곳 부용산에 그를 묻고, 그날 부용산길을 내려오면서, 살아남은 오빠의 애절한 마음을 시(詩로) 만든 것이 '부용산'노래의 출발이라고 하겠습니다.
시가 만들어진 배경은 벌교이고, 노래로 만들어지고 불려지게 된 것은 목포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 노래가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생명력은 어디에 있을까?
김정희라는 학생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불려진 이 노래는 학교 교정을 넘어 목포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 빠르게 전파되었으며 잔잔한 멜로디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면서 널리 애창되었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 참변을 당한 고 김선일씨 문제로 온 국민이 원통한 심정일텐데, 그 추모곡으로도 가장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좌우익의 갈등이 심한 혼돈시기에 빨치산 투쟁을 하던 사람들이 고향을 생각하면서 이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했고, 민주화 운동의 시기에는 운동권 학생들의 민중가요로도 애창이 되었습니다. 실제 박기동 선생을 만나서 여쭤본 적이 있는데, 노래말중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이란 부분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 같고, 곡의 뒷부분 '푸르러 푸르러'로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마치 "상여 나가는 소리"처럼 들리게 처리되어 있어서, 그런 부분이 남도민의 한이 서린 정서에 잘 부합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구전으로만 전하던 부용산 노래가 대중에게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은 98년 한국일보에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소개하면서부터입니다. 이를 계기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고 있던 부용산 노래가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했고, 고향인 목포와 벌교를 중심으로 추모행사가 이어지면서 화제를 모았습니다. 99년 목포에서 부용산 살롱음악회를 시작으로 고향인 벌교의 부용산에 정자와 시비(99년 9월)가 세워졌고, 부용산 노래가 만들어진 목포여고 교정에는 부용산 노래비(02년 4월 24일)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방송에서는 다큐멘타리가 제작되어 부용산에 얽힌 사연들이 하나둘 알려졌습니다.
호주에 살고 계신다고 했는데,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있군요. 박기동 선생을 직접 뵙고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운 좋게도 세 차례 정도 그분을 직접 뵐 기회가 있었습니다. 박기동 선생은 건강을 위해 생식과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어서 인지, 87세의 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고, 옛날 일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정확하게 기억을 하고 계셨습니다. 부용산이라는 시 한편으로 인해서 뜻하지 않은 불행한 삶을 살았지만, 정작 본인이 이 곡이 빨치산이나 민주화 운동 세력의 애창가요로 널리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시를 쓴지 51년이 지난 뒤 호주에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연극인 김성옥씨의 부탁으로 실로 50여 년 만에 부용산 노래가사 2절을 만들면서 옛 감회에 젖어서 끝없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혹시 박기동 선생으로부터 직접 부용산 노래를 들어보신 적은 있는지?
마지막으로 뵌 것은 지난 2002년에 5월 20일 <부용산>이라는 이름으로 박기동 산문집이 발간이 되었는데, 그때 목포에서 몇몇 지인들이 모여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
박기동 선생도 잠시 귀국을 해서 함께 참석을 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부용산이라는 시를 낭독하셨고, 자리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여했던 사람들이 제각기 돌아가면서 자신만의 스타일로 부용산 노래를 열창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참석자들의 요청에 따라 박기동 선생도 직접 노래를 불러주셨는데,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부용산 노래는 1997년에 가수 안치환이 정식으로 음반에 취입을 했었는데, 그때 만 해도 구전 가요 작자미상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멜로디도 원곡과는 좀 다른 부분이 있었죠. 후에 박기동 선생의 제자인 김효자씨가 원곡 악보를 가지고 있어서, 최근에 원곡의 멜로디가 복원되기도 했습니다.
박기동 선생과 부용산에 얽힌 사연을 듣고 있다보니까, 그러면 이 노래를 만든 작곡자는 어떤 분이였을까 궁금해지는데, 알려진 바가 있습니까?
노래를 만든 분은 당시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1920∼?) 선생으로 또 하나의 천재적인 예술인이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월북했다는 것 외에는 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는 나주 남평 출신으로 동경음악학교를 나왔으며, 성악가이자 작곡가였는데 당시의 제자들은 낭만적이고 인간미가 넘치는 미남선생님으로 피아노를 매우 잘 쳤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 있는 소식들이 최근에 들려오고 있는데, 그동안에 그가 만들었던 11곡의 음악이 담긴 작곡집만 전해왔는데, 두 번째 작곡집이 발견이 되어서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안성현 선생의 처조카 성경래 씨(49, 광주시 북구 연제동)가 발굴했는데, “고모부의 음악적 행적을 찾기 위해 10여 년 동안 백방으로 뛰어다닌 결과 어렵사리 작곡집을 구해 간직해 왔다”고합니다. 이 작곡집을 통해‘안성현’의 올바른 재평가 작업이 이뤄지길 바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작곡집은 일제 강점기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전국민들이 애창했던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詩)를 비롯해 ‘부용산’(박기동 詩), ‘낙엽’(안성현 작사작곡), ‘앞날의 꿈’(조희관 詩), ‘진달래’(박기동 詩), ‘내 고향’(조희관 詩) 등 암울했던 민족의 슬픔을 희망으로 승화시켜 노래한 2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 작품집에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미공개 된 조희관 선생의 시, 박기동 선생의 시들이 담겨 있어 문학적으로도 소중한 자료가 됩니다. 또한 최근에 광주 쪽에서 부용산을 주제로 하고, 작곡작인 안성현 선생의 삶을 모태로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다는 기쁜 소식도 있는데, 고향 쪽에서도 부용산과 그 곡을 만든 박기동시인, 작곡자 안성현 선생에 대한 추모사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첫댓글 여귀산님의 연주 '부용산' 을 듣고 이 기사를 옮깁니다.
어디서 이 많은 기사들을 스크랩하셨나요?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벌교 옆 동네(순천)에 살면서도 아직 시비가 있는 곳을 가보지 못했네요. 제가 어렸을 적 들려준 누나의 이야기로는 해수욕장에서 죽은 여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오빠가 지었다고 하더군요. 가사 중 병든 장미로 미루어 생각컨데 병으로 죽은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 어릴 적 이야기가 왜 아직도 잊혀지지 않을까요. 감사합니다.
엣 고향을 한번 휘돌아본 것같은 시간이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아는 기타 카페의 마왕님이라는 분이 쓰신 글을 제가 허락을 받아 옮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