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보배 창고는 무엇인가.
무엇을 물 들음이라 하는가.
생사심(生死心)으로 작위와 지향이 있게 되면 모두가 물 들음이다.
그 도를 당장 알려고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도이다.
무엇을 평상심이라고 하는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取捨)가 없고, 단상(斷常)이 없으며,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이 없는 것이다.
<馬祖錄>
달은 항상 둥글다. 다만 저마다의 시각에 따라 초승달, 반달, 보름달로 달리 보일 뿐이다.
사람들이 초승달로 보든 반달로 보든 보름달로 보든, 달은 항상 둥글다.
초승달을 억지로 보름달로 보이려 조작하거나, 달이 이지러졌다고 시비하거나,
어떤 달이 더 좋고 나쁘다고 취사하거나 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달은 사라지지도 않고 항상 같은 모습도 아니지만, 범부(凡夫)와 성인에게 차별 없이 빛을 비추고 있다.
둥근 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도(道) 또한 마찬가지이다.
도는 본래 완전하다.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수행이라는 인(因)을 통해서 깨달음이라는 과(果)를 얻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깨달음은 태초에 완성되어 있다. 닦아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에 관한 마조 스님의 일화는 유명하다.
부처가 되고자 좌선 수행에 몰두하고 있는 마조 스님 앞에서 스승인 남악 회양 선사는 벽돌을 갈았다.
이를 의아히 여긴 마조(馬祖)가 묻자, 남악은 답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한다.”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습니까?”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없다면, 좌선(坐禪)한다고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깨달음은 본래 완성돼 있어 ‘각자의 보배 창고’ 잘 살펴야 평상시의 우리 마음은 시비분별을 떠나있다.
비록 시시각각으로 안팎의 역순경계(逆順境界)에 흔들리고 있는 듯하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평온을 기저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안팎의 경계에 부딪혀 홀연 분간하고 선택할 따름인 것이다.
결국 평상심은 무분별심(無分別心)이고, 자성(自性)이며, 본마음 참 나이다.
자성은 본래 완전하다.
그러므로 이에 입각한 수행이란, 결코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며,
단지 지켜나갈 따름인 것이다.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된 상태를 지키고 써나가면 된다.
공(空)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공(空)으로부터 출발하는 수행인 것이다.
이것은 구름만 걷히면 그대로 맑은 하늘인 것과도 같다.
또한 구름이 잔뜩 끼어있다고 해서 하늘이 이지러지는 것도 아니다.
평상심이 도라고 하는 말처럼 안심(安心)을 주는 말이 또 있을까?
진리를 더 이상 밖에서 찾을 것도 없으며, 완벽해지고자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나’ 자신 평상시의 마음 그대로를 유지해 나가기만 하면 될 따름이다.
오직 한 생각 망념이 삼계 생사의 근본이니, 이 한 생각 망념(妄念)만 없으면
즉시 생사의 근본이 없어지며 부처님의 위없는 진귀한 보배를 얻게 된다.
무엇이 자기의 보배 창고인가.
바로 지금, 이 글을 쓰고 읽는 이것이 각자의 보배 창고인 것이다.
- 월호 스님 [불교신문 2398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