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
마태오 10,17-22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 마지막 마음
오늘은 한국의 첫 사제이신 김대건 신부님의 신심을 기리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사랑을 느껴보려면 그분이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살펴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신 이후 여러 언어를 배우신 신부님은 총 21통의 편지를 남기셨는데 19통을 라틴어, 1통을 한문, 마지막으로 1통을 한글로 쓰셨습니다.
이 중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신자들에게 쓰신 한글 편지에 김대건 신부님의 신자들에 대한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1. “세상에 한 번 태어나 우리를 만들어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세상 태어난 보람이 없다.”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에게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고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신부님은 먼저 자신을 창조한 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세상 태어난 보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헛되고 헛된 세상 것들이 정신을 빼앗긴 사람들을 볼 때 가장 가슴이 아프다고 하십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강한 열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2. “자기를 만들어내신 하느님을 알아 입교 영세했다 할지라도 주님의 제자답게 살지 못하면 이 또한 세상에 난 보람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은망덕하게 되어 오히려 세례받지 못한 사람보다 못한 처지에 떨어진다.”
신부님은 세례를 받았다 해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주님과 원수가 되어 영원한 벌을 마땅히 받게 된다”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고생하여 농사를 짓는데 열매를 맺지 못하면 농부는 밭을 갈아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이 맺어야 하는 열매는 무엇일까요?
3. “부디 지금의 박해에 굴하지 말고 마음을 단단히 다져 밤낮으로 하느님께 빌어 세속과 육신가 마귀를 대적하고 이 고난을 참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너희의 영혼을 구해라!”
당시 신앙의 목적이 명확하였습니다.
바로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이겨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기도와 말씀, 성사생활을 강조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라오며 온전한 의탁으로 예수님과 일치하여 이미 패배한 세속 마귀를 칠지어다.
이런 시련의 시기를 당하여 여러분은 마음을 다져 힘을 다하고 역량을 다하여 마치 병기(묵주, 성서 그리고 성사생활)를 다 갖춘 건장한 군사처럼 싸워 이길지어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소유욕과 육욕, 그리고 교만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기도록 주님께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열매를 맺지 않는 신앙인은 세례를 받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에 대해 아는 신자가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었습니다.
김 신부님이 순교하신 해가 1846년 병오박해이니 200년도 안 되어 김대건 신부님이 가장 강조하셨던 교리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 교리를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는 젊은 야망의 증권 중개인 조던 벨포트가
만연한 부패와 사기에 가담한 기업 스트래튼 오크몬트의 창업자가 된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영화 내내 조던은 자신의 무모한 행동과 행동의 불법성에 대해 자주 경고받습니다.
그러나 그는 듣지 않습니다.
그는 세속, 육신, 마귀에 있는 그대로 노출되었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가게 되고 그의 제국은 무너지고
부와 가족과 자유를 잃습니다.
조던은 인류가 맞이하게 될 미래입니다. 조던에게는 적어도 세속, 육신, 마귀의 삶이 잘못된 것임을
말해주던 이들이 있기는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내와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버렸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 안에서조차 그것이 잘못임을 말해주지 않습니다.
세속, 육신, 마귀의 교리가 사라진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보낸 당신 유일한 편지에서 그분은 돌아가시기 직전 세속과 육신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만을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이 가르치시려는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로만 김대건 신부님을 존중하지 말고 진심으로 그분을 존경한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계승해야 하지 않을까요?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역대기 24,18-22
로마 5,1-5
마태오 10,17-22
이 시대 순교
순교의 영예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 웃기는 일인데...
젊은 시절, 신앙생활에 푹 빠져 살던 때, 저는 ‘어디 순교할 기회가 없나?’하며 여기저기 샅샅이 살피고 다녔습니다. ㅋㅋㅋ
순교의 기회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왜 내가 ‘병인박해 때 태어나지 않았는가?’하며 아쉬워했습니다.
순교의 영예를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시대가 협조를 해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순교는 그리스도인이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입니다.
순교는 작고 나약한 한 인간이 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하는 축복입니다.
순교는 보잘 것 없는 인간 존재이지만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극점이 하느님임을 엄숙이 선포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결국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완벽히 모방하는 일, 완전한 그분의 제자로 거듭나는 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신앙은 얼마나 확고했는지 주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스물다섯, 참으로 꽃다운 나이이며 아까운 나이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즘 스물다섯들은 아직도 제대로 서지도, 아직 제 앞가림도 하기 힘든 실정입니다.
그런데 스물다섯의 신부님께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남기신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의 부활신앙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관장님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주시기를 빕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저는 죽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한 죽음이기에 절대로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저는 확신합니다.
이제 곧 영원한 생명이 제 안에서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하느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보기만 해도 끔찍한 휘광이의 칼날 앞에서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담대히 하느님의 신앙을 증거하신 김대건 신부님의 신앙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끼는 하루입니다.
아주 작은 시련의 파도 앞에서도 이리저리 갈대처럼 흔들리는 제 나약한 신앙을 크게 반성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 순교자들의 피가 우리 안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놀랍고도 위대한 순교 영성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에 큰 자부심을 지녀야겠습니다.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영예로운 순교영성을 오늘 내 삶의 자리에서 실천해야겠습니다.
오늘 이 시대, 내 삶 안에서 순교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이 시대 순교는 죽을 각오로 현실의 고통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적당히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기 살기로, 목숨 걸고 열심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일상의 비루함과 나 자신의 한계와 작은 고민거리들을 기쁜 마음으로 수용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순교는 매일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더없이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
(2023. 7. 5. 수)(마태 10,17-22)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17-22).”
이 말씀은, ‘무조건’ 박해가 일어날 것이라는 예고도 아니고 예언도 아닙니다.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하다보면 박해를 받을 수도 있고, 순교를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박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마태 10,23).”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하지 말고 받아라.”가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피할 수 있으면 피하여라.”, 즉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가라.” 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피할 수 있는데도 피하지 않고 박해를 받는 것은,
그래서 신앙생활도 못하고 신앙인으로서 살지도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
끈기를 다하여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고 꾸짖고 격려하십시오(2티모 4,2).”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대교회 신자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신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박해를 피해서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는데,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사도들은 숨어 있었을까?
사도들도 돌아다니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냈다(사도 8,14).”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전파한 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사마리아의 많은 마을에 복음을 전하였다(사도 8,25).”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려고 애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라는 말씀은, 신앙을 증언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인간적인 말재주로 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를 받으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로만 하지 말고 ‘성령으로 가득 찬 삶’으로 증언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박해 때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했는데,
더 많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깊은 산골 같은 곳으로 옮겨 갔고, 교우촌을 만들어서 생활했습니다.
그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었는데도, 새 신자가 계속 늘어났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의 삶을 보고 조선의 백성들이 감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박해받고, 헐벗고, 굶주리면서도 ‘기쁨’에 가득 찬 모습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 자체가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 되었고, 복음을 전하는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쁨’ 가득한 모습은 곧 ‘성령’으로 가득 찬 모습입니다.>
가족이 가족을 죽게 하고,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항상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고, 박해 때에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고,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신앙을 버리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가족의 박해는 정말로 참기 힘든 고통이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도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중요한 말은, ‘내 이름 때문에’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 때문에’ 라는 뜻인데,
만일에 신앙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이라면 그런 극심한 고통을 참고 견딜 이유가 없지만, 신앙 때문이라면 감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의 은총’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내하면서 박해의 고통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에서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박해를 막아 주시겠다는 약속도 아니고, 박해를 받더라도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아닙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이 약속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지금의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약속 덕분에, 박해를 감내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