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고래 - 정일근
저녁에 바다에 혼자 남은 고래를
생각했네 문득 내 오랜 친구인 고래는
이 별에 저녁이 오는 것을 알까
궁금해졌네 가까운 푸른 바다에서
먼 검은 바다까지 서서히 어두워질 때
고래에겐 허허한 바다를 유영하다
돌아가 알전구 밝힐 주소는 있는 것일까
저녁에 사람이 집으로 돌아갈 때
허기에 발걸음이 빨라지듯
고래도 포유류처럼 그리운 쪽으로
등 굽어지며 외로워지는 것일까
나팔꽃이 저녁에 입을 꼭 다문 일과
달맞이꽃이 밤에 피는 이유에 대하여
피멍이 들도록 아프게 고민할 줄 아는지
돌아와 젖은 양말 벗고 발을 씻으며
지구의 하루치를 걸어와 맨발에 새겨진
퉁퉁 부운 상처의 기록을 지우는
사람의 저녁을 고래는 아는 것일까
고래는 알 것이네 저녁에서
밤으로 흐르는 해류를 천천히 거슬러
하나의 뇌가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
잠들지 못하는 눈과 반쪽의 꿈으로
낮에 잠시 스친 시인의 안부로
고래는 저녁의 허기를 견딜 것이네
저녁이 와야 우주의 밤이 오고
밤이 와야 바다의 새벽이 와서
숨 쉬는 하루를 선물 받아
일해야 그 하루를 살 수 있는 사람과
살아야 그 하루를 생존할 수 있는 고래는
다시 저녁이 올 때까지 관절 뚝뚝 꺾으며
사는 일과 살아내야 하는 저녁의 이유를
제 몸 나이테 깊게 새기며 알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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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송하는 詩
저녁의 고래 - 정일근
미선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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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3 0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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