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신동집(申瞳集)
목숨은 때묻었다
절반은 흙이 된 빛깔
황폐한 얼굴엔 표정(表情)이 없다
나는 무한히 살고 싶더라
너랑 살아 보고 싶더라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
억만 광년(億萬光年)의 현암을 거쳐
나의 목숨 안에 와 닿는
한 개의 별빛
우리는 아직도 포연(砲煙)의 추억 속에서
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
따뜻이 체온(體溫)에 젖어든 이름들
살은 자(者)는 죽은 자를 증언(證言)하라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告發)하라
목숨의 조건(條件)은 고독(孤獨)하다
바라보면 멀리도 왔다마는
나의 뒤 저편으로
어쩌면 신명나게 바람은 불고 있다
어느 하많은 시공(時空)이 지나
모양 없이 지워질 숨자리에
나의 백조(白鳥)는 살아서 돌아오라
(시집 『서정의 유형』, 1954)
[어휘풀이]
-현암 : 검고 어두움
-하많은 : 많고 많은
[작품해설]
신동집은 천(千)을 헤아릴 만큼 방대한 작품과 치열한 시 정신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꾀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의 모색과 전재는 우리 시가 표현성을 증대해 온 과정’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큼 그는 문체와 소재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이고 있다.
휴머니즘의 옹호와 주지적 경향으로 대표되는 그의 초기 시 세계를 대표하는 이 시는 6.25의 비극적 체험을 배경으로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자의 존재론적 갈등을 형상화한다. 주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시적 발상이나 언어 구사에 있어서 생경함이나 난해함이 없으며, 현재 진행의 종결 어미와 구문 도치 등 다양한 구술체 표현이 돋보인다.
1연에서는 전쟁이 가져다 준 목숨의 황폐함을 노래한다.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목숨은 때묻었다 / 절반은 흙이 된 빛깔’이라고 하여 화자는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얼굴에서 죽음보다 못한 삶을 발견한다. 2연에서는 삶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살아서 죽음보다 그리운 것이 되고 싶더라’라는 간절한 소망이 1연의 살아남은 현재의 목숨과 대비되면서 인간의 존재론적 한계를 부각시킨다. 3연에서는 이러한 존재론적 한계에서 갖게 된 우주론적 명상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 준다. ‘한 개의 별빛’이라는 구절 속에는 광막한 우주 속에 실존하는 개인적 생명의 귀중함이 암시되어 있다.
4연에서는 ‘포연의 추억 속에서 / 없어진 이름들’에 대하 연민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으며, 5연에서는 진정한 삶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화자는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삶을 증언하고, 온갖 방법으로 생존을 도모했던 구차한 모습들을 반성할 때에 비로소 진정한 삶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는 ‘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 / 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는 구절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 대한 반성적 자세를 명령형 어조로 촉구한다. 그리고 ‘목숨의 조건은 고독하다’라는 단언적 표현을 통해 반성적 자세를 갖게 된 사람들이 만나게 되는 존재의 고독한 모습을 제시한다.
6.7연에서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통해 참다운 삶의 구현을 소망한다. 화자는 살아 온 세월을 돌아보며 전쟁으로 얼룩진 삶이 신명나게 불어오는 바람처럼 하루 빨리 사라지기를 소망하며, 자신의 생애가 ‘모양없이 지워진’ 먼 훗날, ‘어느 하많은 시공이 지나’ ‘살아서 돌아올’ 한 마리 ‘백조’를 꿈꾼다. ‘나의 백조’는 5연에서 제시한 반성적 자세를 통해 얻어지는 화자 자신의 진정한 삶을 표상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그러한 자세에서 소생할 것으로 확신하는 죽은 자들의 삶,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이 시는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허무적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고 존재론적 갈등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감동적으로 표출한 작품이다.
[작가소개]
신동집(申瞳集)
본명 : 신동집(申東集)
현당(玄堂)
1924년 대구 출생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및 미국 인디애나 대학원 수학
1948년 시집 『대낮』을 발간하여 등단
1954년 시집 『서정의 유형』으로 아시아 자유문학 수상
1980년 한국현대시인상 수상
1981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수상
1982년 대한민국예술원상 수상
시집 : 『대낮』(1948), 『서정(抒情)의 유형(流刑)』(1954), 『제이(第二)의 서시(序詩)』(1958), 『모순(矛盾)의 물』(1963), 『들끓는 모음(母音)』(1965), 『빈 콜라병』(1968), 『새벽녘의 사랑』(1970), 『귀환』(1971), 『송신(送信)』(1973), 『신동집시선』(1974), 『미완(未完)의 밤』(1976), 『장기판』(1980), 『진혼(鎭魂)⸱반격(反擊)』(1981), 『암호』(1983), 『신동집시전집』(1984), 『송별』(1986), 『여로(旅路)』(1987), 『귀환자』(1988), 『누가 묻거든』(1989), 『백조의 노래』(1990), 『고독은 자라』(1990), 『목인의 일기장』(1993), 『시인의 출발』(1993), 『예술가의 삶』(1993), 『그리고 싶어여』(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