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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5:3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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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28 05:32
- 원수 사랑의 여정
오늘 신명기 26장 1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주님을 두고 오늘 너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Today you are making this agreement with the LORD.”
이어지는 17절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오늘 너희를 두고 이렇게 선언하셨다.
And today the LORD is making this agreement with you.”
그러니까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각기 선언하는 것이고,
영어 번역대로 한다면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각기 합의하는 것인데,
실은 각기가 아니라 서로 합의(agreement)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주님을 자기들의 하느님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길을 걷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의 말씀을 듣겠다고 합의하면
주님께서도 이스라엘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만들어주시고,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 위에 영광스럽게 해주시겠다고 합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저는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어떤 존재이고,
주님의 길과 계명과 말씀은 어떤 것인지 오늘 복음에 비추어 묵상코자 합니다.
주님의 거룩한 백성이란 하느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이고,
하느님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은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똑같은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은 인간의 선악에 좌우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사실 인간의 조건에 좌우되는 것은 사랑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지 않고,
인간에게 있는 것이기에 인간의 조건과 상관없이 사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 좋아하는 것에 불과하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사랑은 나의 좋고 싫음을 초월해야 합니다.
좋아야지 사랑하는 것은 사랑일지라도 최저급이고,
그러기에 하느님 사랑과 차이가 나도 한참 납니다.
그러므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로
우리가 합의한다고 해도 그 사랑의 실천은 분명 쉽지 않기에
완전할 수는 없을 것이고 첫술에 배부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원수 사랑하기로 마음이라도 먹는 우리가 될 때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기본을 하고 출발을 하는 것임을 알고
그 원수 사랑의 험난한 여정을 오늘 출발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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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우리는 약속의 땅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광야의 시간은 힘겹지만,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탈출기: 자유를 향한 여정
우리는 약속의 땅에 어떻게 이를 것인가?
2026년 2월 27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우리를 믿음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그 길은 불확실성으로 가득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길 위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세월을 돌아볼 때에만, 특히 광야에서 보낸 많은 날들을 되새길 때에만 오직,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아무런 영광도 없어 보였을지 모르지만, 뒤돌아보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셨음을, 그리고 구원의 사랑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정 한가운데 있을 때는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평범하고, 때로는 무의미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어떻게 일하고 계신지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현존을 부정할 만한 이유가 더 많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예언자들, 욥, 그리고 예수님을 보십시오! 믿음의 길은 확실성의 길이 아니라 신뢰의 길입니다.
나는 모세가 때때로 흔들렸으리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정말로 인도하시는지, 아니면 단지 자신의 큰 자만심에 사로잡힌 것인지 망설이며 의심했을 것입니다. 만일 모세가 눈에 보이는 환시나 귀에 들리는 확실한 음성을 통해 절대적인 확신을 얻었다면, 그의 길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 지식의 길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신뢰는 오직 하느님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혜나 전략, 계획, 지위나 재물에 있지 않습니다. 광야에서는 모든 우상이 우리에게서 제거되고, 우리의 안전은 사라집니다. 광야와 어둠은 바로 ‘순종의 학교’이며,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는 법을 배우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종종 고통 한가운데서 믿음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경험합니다. 어릴 적에는 자신을 어떤 영광스러운 순교자로 상상했을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고통을 겪을 때 그것은 결코 영광스럽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부당하며,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고통의 본질입니다. 광야의 체험은 단순히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만일 그 안에서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고,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방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고통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십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슬픔과 기쁨 사이의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2019년, 제 남편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해는 매우 힘든 시간이었고, 그의 죽음은 큰 슬픔이면서도 동시에 안도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세 달 후, 저는 요르단으로 여행을 떠났고, 와디럼(Wadi Rum) 사막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면서도, 거의 황홀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깊은 슬픔 속에서 그런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그 순간, 하느님의 현존이 너무도 깊게 느껴졌고, 저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Christine M.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and Joseph Martos, The Great Themes of Scripture: Old Testament (St. Anthony Messenger Press, 1988), 21–2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Clay Banks, untitled (detail), 2020, photo, US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광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곧 출애굽 자체의 거울이 됩니다—알 수 없는 것을 감수하며, 그 방황 속에서 우리는 자유와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교로 이끄시는 조용하고도 충실한 현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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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소위 황금률("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은 복음 그 자체가 아닙니다. 구글만 검색해도 이 표현이 예수님 이전의 여러 문헌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성경(레위기 19,18)에 기록되어 있으며, 다른 고대 문헌에도 널리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마태 22,39)에 답하실 때, 구약에서 두 구절을 인용하셨고 그 중 하나가 바로 레위기 19,18이었습니다. 이는 모세 율법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으로부터 말씀하실 때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가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아무리 선의로 가득하다 해도 자기애와 자아가 섞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이들이 자신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겠다고 한다면, 오히려 도망치고 싶을 정도일 것입니다. 우리의 자기애는 타인을 사랑하는 올바른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더 높은 차원을 보여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사랑의 정점입니다. 신약성경 저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아가페(agapè)]라는 낡은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필리아(philia)]라는 우정의 사랑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아가페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사랑이었습니다. 아가페는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사랑입니다.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이는 오직 하느님의 목소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원수에게 복수를 기도하거나 그들의 고통을 즐거워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적지 않고 오히려 많은 것에 놀라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정적인 것에 정신의 채널을 맞추고 있고, 우리에게 전해지는 소식들이 대개는 나쁜 소식들이어서 이런 놀라운 사랑을 보고 듣고 경험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실제로 이 세상 안에는 이런 놀라운 아가페 사랑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더불어서 '내' 안에도 이런 놀라운 사랑이 미움보다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는 진리도 우리는 부정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일상 안에서 더더욱 깊이 상기하고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믿음의 삶의 모범이 아닐까 합니다.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 때 예수님에 대해 들은 바를 증언할 때 성모님은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고 루카 복음 저자는 전하고 있, 또 예수님께서 소년 시절에 성전에 남아 있었을 때 사흘 후 되찾으신 후 "마리아는(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전합니다. 성모님이 간직하고자 하셨던 이 모든 일의 깊숙한 토대에는 성모님이 예수님을 잉태하실 때 천사로부터 받았던 말씀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 37).
사실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이런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의 불씨가 여전히 타오르고 있음을 우리가 기억하고 새길 수 있다면, 그리고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진리"를 확신하고자 한다면, 먼저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하지만 서서히 깨달아 가게 될 것입니다. 혹시 원수가 없다면, '나'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교적 기도의 확실한 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기억하고 되새겨야 진리가 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 안에 존재하는 '나'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깨달아 받아들이든 그렇지 못하든 상관없이 '남'과 '나'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라는 분에게서 기원을 지니는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덧붙이자면, 황금률은 인류 보편의 윤리적 지침이지만, 예수님의 새 계명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라는 초대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고 '나'를 사랑의 주체요 객체로 이끌어 가시기에 바로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무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복음 저자가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요....
토머스 머튼의 이야기를 한 번 들어봅시다. "우리의 과제는 이제 땅끝까지 여행하여 우리와 가장 다른 원주민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순례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어떤 형태로든 순례가 필요합니다. 단순히 집에 앉아 하느님의 현존을 묵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긴 여정을 마친 끝에서 만나는 낯선 이가 곧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는 곧 그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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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44)
참으로 혁명적인 선언이요 명령입니다.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 해온 이스라엘인들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는 일입니다. 곧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며,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며,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그가 잘 되기를, 그가 구원되기를 바라며,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곧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층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만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요 사랑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나아가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 훗날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당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게 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또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완전해 질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참으로 놀라운 소명입니다. ‘하느님처럼 되라’는 소명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자신의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기의 결핍을 오히려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로 삼는 일이요, 그리하여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되는 일입니다. 곧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고, 우리의 불완전함은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한계와 결함은 우리의 완전함을 가져오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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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스틴 교구에서 신부님이 모금 강론을 왔습니다. 신부님은 텍사스 지역에 청년들을 위한 피정 및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합니다. 열정과 비전은 있는데 재정적으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청년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분명 변합니다. 그것은 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청년이던 때, 오스틴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저는 변했고, 지금 이렇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신부님은 4번 미사를 하였고, 강론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비전은 교우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신부님이 원하시는 목표 이상으로 모금이 되었습니다. 신부님을 보면서 성서의 두 가지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모세와 함께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지치고 배가 고팠을 때입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청하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다른 하나는 며칠씩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군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광야에 있던 군중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가 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열정과 비전이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면 다른 것은 하느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1982년 신학교에 함께 입학했던 신부님들이 달라스에 왔습니다. 신부님들은 이미 군대를 다녀왔기에 저보다 3년 먼저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38년 사제 생활을 하였고, 만 70세가 되어서 ‘성사 전담 사제’가 된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의 모습에서 앞으로 저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저도 달라스에서의 사목을 마치면 ‘성사 전담 사제’를 신청하려고 합니다. 신부님들과 이야기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로움의 화관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날에 의로우신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나에게 그 화관을 주실 것입니다.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애타게 기다린 모든 이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신부님들의 모습에서 ‘연륜’을 보았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신부님들의 모습에서 ‘겸손’을 보았습니다. 두 분 모두 미국에서 교포 사목을 10년씩 하였습니다. 한 분은 성당 신축을 하였습니다. 다른 한 분은 성당 신축을 위한 땅을 마련했습니다. 저도 8년째 미국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5년은 신문사에서 있었고, 지금은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3년째 지내고 있습니다.
교회는 전례에 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대한 초는 부활 성야에 밝히는 ‘부활초’입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축성하면서 그해의 연도를 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며 마침임을 표시합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들고 행진하며 성당 안에 있는 교우들은 모두 부활초에서 불을 얻어 초를 밝힙니다. 전례에서 초를 사용하는 이유는 초가 가지는 3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서품식에 초를 드는 것도, 종신서원에 초를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희생의 삶을 위한 다짐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조직 때문에 2000년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2000년 역사를 이어온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초는 아낌없이 자신의 불을 다른 초에 전해줍니다. 그래도 초의 빛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부활초에서 전해지는 불은 성당 안을 환하게 하지만 부활초는 그대로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지만, 물고기와 빵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세포가 자신의 양분을 나누지 못하면 암세포로 변하게 됩니다. 세포는 자신의 양분을 나눌 때 건강한 몸이 됩니다. 셋째는 빛입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작은 촛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촛불이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고, 이 빛은 희망을 주고, 이 빛은 지혜가 되었습니다. 풍랑에 휘말리는 배가 멀리 빛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희망의 빛, 사랑의 빛, 믿음의 빛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청년 사목을 위해서 헌신하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세상을 비추는 빛을 보았습니다. 38년 사목의 현장을 지켜온 신부님들의 모습에서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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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원수 사랑의 달인, 구엔 반 투안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추기경!
오늘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베트남의 가경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은 원수 사랑 잘하기로 유명했던 분입니다. 그분은 아무런 설명도 재판도 없이 갑자기 체포되고 독방에 수감되었지만, 독방을 주교좌 성당으로 여기고, 동료 수감자들과 교도관들을 자신의 양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기쁘게 사셨습니다.
추기경님은 ‘지금 이 순간을 살며’(바오로딸)에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지만 감명깊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푸칸의 감옥에서 병이 나 앓던 어느날 밤, 나는 지나가는 교도관에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제가 몹시 아픕니다. 좋은 일 하는 셈치고 제발 약 좀 주십시오.” 돌아온 대답은 이랬습니다. “여기서는 친절도 사랑도 없습니다. 책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제가 몸담고 있던 교도소의 분위기였습니다.
제가 독방에 감금되었을 때, 교도관 5명이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고 했으나 그들은 아예 대화를 원천 차단했습니다.
어느 밤, 문득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프랜시스야, 너는 여전히 부자다. 너는 가슴속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예수님이 너를 사랑하듯이 그들을 사랑하여라.”
다음 날부터 저는 그들을 더 깊이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소를 띠고 친절히 말하면서 그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미국이나 캐나다, 프랑스 독일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경제와 자유와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조금씩 친구가 되어갔습니다.
그들은 제게 불어, 영어 등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했습니다. 여러 교도관들이 제 학생이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우리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나중에는 교도소장까지 제게 우호적으로 바뀌어 더 많은 교도관들이 외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제게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사람들은 기쁨과 평화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것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제복을 입고 사랑이라는 단 하나의 언어를 말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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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성모님을 많이 많이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앞서 올린 글에서 어떤 분을 흠모해보신 적이 있는가 하는 내용으로 글을 올렸습니다. 그 글에서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내용을 더 연결하면 너무 길어질 수 있어서 다시 글을 올려 내용을 전개하려고 했습니다. 그 글만 보시면 조금 이상한 점도 있을 겁니다. 왜 굳이 사람을 흠모하는 걸 마치 자랑이라도 하는 듯 이야기를 할까 하고 의아해하실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드리고 싶습니다. 성모님을 많이 사랑하고 그냥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듯이 그렇게 성모님을 사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은 이게 무슨 뜻인지 감이 오실 것입니다. 그냥 성모님을 직접 대상으로 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되지 왜 굳이 그렇게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겁니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설명해드리겠습니다.
20년 전에 읽은 책에서 저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심리학 이론입니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 친자식처럼 과연 될 수 있을까 하는 논점에서 연구한 자료였던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결과가 있습니다.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지 일단 먼저 결과를 전제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단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 먼저 실제로 낳은 자식보다도 더 애정을 쏟으면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없으면 가슴으로 낳은 자식은 그냥 가슴으로 낳은 자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 말은 결코 친자식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걸 이론이 아니라 현실에서 실제 간접 체험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 친구 어머니 부고가 왔습니다. 고등학교 친구이고 전체 동창회에서 온 것입니다. 이걸 관리하는 친구가 중학교 동창이기도 합니다. 제가 부고장을 문자로 본 후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전에 분명히 친구 모친상에 제가 갔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큰엄마였던 것입니다. 낳아준 어머니 말고 키워준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저도 친구 가정사이고 해서 자세하게 물어볼 수 없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친구가 언급한 내용을 보고 대략 짐작을 할 뿐이었습니다. 생모는 친구 돌 지나고 나서 그만 재가를 했던 모양입니다. 이런 사정을 보고 너무 딱한 나머지 어떻게 이분이 친구 엄마 노릇을 해 줬던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중3 때 이분이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친구 집안에서는 친구의 정서를 위해서 거짓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친엄마는 친구 돌 지나서 그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입니다. 친엄마가 친구를 버렸다고 하면 심한 충격이 될 수 있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듯 친구가 스물여덟 됐을 때 우연히 생모가 친구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근 27년 만에 친구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친구 아버지는 이미 벌써 돌아가신 지 오래됐습니다. 자신이 친구 생모라는 것입니다. 친구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길러준 엄마 큰엄마에게 여쭤보고 실제 어떻게 된 것인지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신 게 아니고 재가를 해서 큰엄마가 자신을 길러줬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처음엔 친구가 혼란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생모를 받아들여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재가했으면 그냥 끝까지 친구에게 나타나지 않아야 친구를 위해서도 좋은 일인데 그렇게 하지 못할 일이 있었습니다. 생모는 그당시 이혼을 한 상태였고 재가한 곳에서는 딸만 둘인데 자신이 병이 있고 딸이 거둘 처지가 안 돼 친구한테 나타난 것입니다.
친구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였지만 그래도 엄마가 불쌍했는지 그런 엄마를 돌봐드렸습니다. 그렇게 돌봐주면서 친구는 선을 확실히 그엇습니다. 핏줄로는 내 친엄마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지금 보살펴주는 건 그래도 낳아준 부모라 외면할 수 없어서 받아주는 거지 엄마로 인정할 수 없다고 확실히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길러준 어머니께도 확실히 말했습니다. 자기 엄마는 길러준 엄마가 진짜 자기 엄마라고 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길러준 엄마는 친구를 위해 많은 것을 희생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 생모가 나타났을 때 조금 불안해했습니다. 혹시 친구가 생모에게로 가지 않을까 하고 말입니다.
근데 자신을 진짜 엄마라고 생각한다고 하니 마음 한켠에는 감동이었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주체를 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이걸 보면서 친구가 이분을 친모로 생각할 정도로 각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친엄마가 재가를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습니다. 길러준 엄마가 얼마나 친아들처럼 키웠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친아들 이상으로 키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친구가 그런 결정을 했을 겁니다. 그래도 친구는 길러준 엄마를 생각해서 친엄마를 외면하려고 했는데 길러준 엄마가 생모를 받아들여 보살펴준 것입니다. 마음씨가 참 고운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연을 제가 천주교로 개종을 한 후 몇 년이 지난 시점에서 알게 된 친구의 가정사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때 모정이라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친구가 대단한 것은 자신이 길러준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 후에 처음엔 방황 같은 걸 했지만 오히려 알기 전보다도 더 잘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지냈다는 사실입니다. 근 15년 가까이 길러줬고 또 한 번도 친엄마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잘 키워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누가 친아들도 아닌데 그렇게 해 줄 수 있겠는가 하고 생각해보면 친구에게는 정말 감사한 분이기 때문에 친엄마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두 분의 발인 때 함께했는데 제 기억으로는 친모 발인 때는 그냥 슬픈 표정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근데 길러준 어머니 발인 때는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는 걸 봤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모정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길러준 모정이 정말 대단하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안 후에도 오히려 친엄마처럼 생각했던 친구의 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땐 제가 천주교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구가 친엄마보다도 더 슬픈 눈물을 흘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길러준 엄마에 대한 사랑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때 당시 어떻게 하면 나도 내 영혼을 낳아주신 성모님을 이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해봤습니다. 방법이 있다면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도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나름 생각한 방법은 성모님을 아주 많이 항상 흠모하는 것입니다. 그냥 흠모를 한다고 해서 흠모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모님을
우리가 실제로 뵙고 해서 아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인지 상상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심리학의 이론을 적용한 것입니다. 실제 대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간접적인 대상을 통해서 마치 성모님처럼은 아니지만 성모님이 여성의 이미지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어떤 여성분의 이미지를 통해 흠모를 하기만 한다면 그 열정 에너지를 성모님을 향한 에너지로 방향만 바꾸면 성모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도 비록 세상의 여인이지만 제가 신앙 안에서도 흠모하면 그게 나중에 성모님을 사랑하는 데에 좋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흠모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저만의 방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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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5,43–48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 안에서 밝히십니다.
하느님은 해를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이에게도 불의한 이에게도 내려 주신다고.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인의 완전함은 “상대가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자비를 닮아 가는 데 있다고 가르칩니다.
즉 사랑은 “보상”이 아니라 “닮음”입니다.
하느님을 닮고 싶어서 사랑하는 것,
그것이 복음의 길입니다.
원수 사랑은 감정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좋아하라고 말하지 않고,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기도는 미움의 고리를 끊는 첫걸음입니다.
기도는 상대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폭력에 붙들리지 않도록
하느님께 다시 맡기는 행위입니다.
“너희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완전해져라.”
이 완전함은 흠 없는 상태가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끝까지 열려 있는 상태입니다.
닫히려는 마음을 다시 여는 것,
그 반복이 성령의 열매를 익힙니다.
오늘 사랑/기쁨 주간의 복음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사랑을 “나와 같은 사람”에게만 허락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이미 “비인간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오늘 그 경계를 넘으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제가 사랑의 기준을 제 상처로 정하지 않게 하소서.
미움이 올라올 때
그 사람을 축복으로 바꾸진 못해도
적어도 기도로 맡기게 하시고,
제 마음이 당신의 자비를 닮아
조금이라도 넓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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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1차 게시 이후 공유할 묵상글(강론글)로 07시 이후 09시 사이
또는 더 늦게 추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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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28.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25 추가
사랑 실천의 목적은 ‘선의 실현’입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1) 스테파노 순교자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신앙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모범이 되는 신앙인입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스테파노는,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잠들었다(사도 7,59-60).”
여기서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는, “박해자들을 처벌하지 마십시오.”인데, 그들이 회개한다면 구원해 달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박해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한 것, 그것이
스테파노 순교자가 실천한 ‘원수에 대한 사랑’입니다.>
‘박해자 사울’에게 세례를 준 ‘하나니아스’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신앙인입니다.
“하나니아스는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 집에 들어가 사울에게 안수하고 나서 말하였다.
‘사울 형제, 당신이 다시 보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주님께서, 곧 당신이 이리 오는 길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사도 9,17-19).”
<혹시라도, “주님께서 명령하시니까 어쩔 수 없이
사울에게 가서, ‘억지로’ 세례를 준 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나니아스가 사울을 ‘사울 형제’ 라고 부른 것을 보면, ‘억지로’ 한 것은 아니고, ‘진심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 형제’ 라는 말은, 박해자 사울을 ‘형제’로
받아들였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음을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인 초대교회 신자들과 사도들도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실천한 이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도 9,26-28).
2) ‘착한 사마리아인’도 원수를 사랑한 사람입니다.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강도당한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루카 10,33-34).”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원수 사이였는데,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억압하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이 품고 있는 원한과 증오심이 더 컸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와준 일은, 원수를 사랑한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원래는 ‘이웃 사랑 실천’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그 비유는, ‘이웃 사랑’에는 ‘원수에 대한 사랑’도 포함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원수도 이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과 똑같이 실천해야 한다.”
“그러면 이웃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에 있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라는 말도 중요한데, 그가 마음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어서 가엾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기도 하고, 가엾다고 느꼈기 때문에 사랑을 실천하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평소에 항상 사랑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도 잘하게 됩니다.
반대로, 평소에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평소에 사랑 실천을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입니다.>
3)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원수를 좋아하여라.’가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은 ‘감정’일 뿐이지만, ‘사랑’은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덕’입니다.
그리고 ‘사랑 실천’의 목적은 ‘선의 실현’입니다.
원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구원’이라는 ‘하느님 선’의 실현을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무턱대고 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함께’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죄를 꾸짖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악’을 내버려 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악인의 악행을
내버려 두는 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쳐야 하고, 악행을 막아야 하고,
악인들을 회개시켜야 합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안 되는 경우라면, 교회 전체가 나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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