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 25-26
아담이 다시
1. 본문 25절은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추론하기를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자기의 자식 가운데 하나가 죽임을 당하자 그들의 자손들을 완전히 박탈당했다고 했으니 그 이유는 하나는 죽고 하나는 멀리 부모를 떠나 방황하는 자로 사라져야 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번식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니고 있는 때에도 아담과 하와가 많은 세월이 지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그냥 지나게 되었다고 하는 말은 전적으로 신빙성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아벨이 죽기 이전에 계속적인 자손의 출산으로 이미 아담의 가문을 번성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담 자신과 그의 아내 안에서 특별히 그 선언의 효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야 했으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고 하는 복을 그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연 모세가 그 말을 기록함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정말로 우리의 최초의 조상들은 그런 불신적인 살인사건에 무척 충격을 받고 공포에 사로잡혔으며 그러는 동안 당분간은 부부생활을 삼갔을 것이 뻔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선 그 배신이 초래하고 있는 이 엄청나게 슬프고 비통한 열매를 거두면서 그들은 무기력하게 맥을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이제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이유는 셋의 계열을 통하여 번성한 경건한 후손들의 세대를 밟아서 찾아보려는 의도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장에서 그가 말하기를 “아담이 자녀를 낳으며” 라고 하는데 거기서 그는 틀림없이 셋 이전에 태어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수효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많은 무리에게는 거의 관심이 주어지지 않고 있으니 그들은 모두가 경건하게 하나님을 경배하는 가문과는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건하게 경배하는 그 가문이 하나님의 교회로 진정하게 작정되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하와가 말했습니다.
하와는 여기서 어떤 특이한 자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아벨이 죽기 전에도 다른 자식들이 출생하고 또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악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아니 거의 그녀의 모든 가족들이 여러 가지로 그 가문을 부패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새로운 자손을 일으켜주실 때까지 나머지 무리들에 대하여 다소의 희망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손에 대하여 보다 나은 기대를 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와는 자신을 한 아들만을 여윈 어머니가 아니라 아벨의 인격 안에서 가문 전체를 잃어버린 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2. 본문 26절은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입니다.
‘부르다’ 라는 동사에는 ‘제유법’이 있습니다. 그 말이 일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전체적인 예배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종교는 원래 그것의 주요한 부분을 형성하는 것으로 지정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경건과 믿음의 예배를 모든 제사보다 더 좋아하시기 때문입니다(시50:14). 이것이야말로 믿음으로만이 드릴 수가 있는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특별히 우리가 주의해 볼 가치가 있으니 그 이유는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면서 사단은 다른 것은 전혀 손대지 않고 우리가 순수하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타락시키는 데에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으며 또한 피조물들의 기원을 들어주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지게 하려고 백방으로 날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이 돌을 움직여서 가련한 인간들이 불합리하게 드리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그들 자신들이 허탈감에 빠져 지치게 하려고 끊임없이 날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예배하는 이 주요한 점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으면 우리가 제 아무리 무더기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찬양을 드린다고 해도 전혀 무가치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이 말씀이 그 당시에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불려지고 축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려고 보다 간략하게 실시되고 있는 듯하지만 우리는 전자의 의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다 완전하며 유용한 교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성경의 익숙한 어법에도 그 말이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비로소 다른 명칭으로 불려지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공상입니다.
모세는 여기서 타락한 미신들을 비난하지 않고 다만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종교가 부패되고 소멸되고 있는 때에 경건하고 그리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예배하였던 한 가문의 경건한 사람들을 칭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 몇 명과 함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경배하는 자들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당시에는 세상의 불경건한 자들의 세도가 굉장히 비대해져서 마치 대홍수처럼 팽배해 있었으므로 종교는 급격하게 파멸로 줄달음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종교가 오직 몇 사람에게만 그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단 한 가문에서도 종교가 번성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속하게 결론을 지을 수가 있으니 즉 셋은 하나님의 정직하고 신실한 종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셋이 자기와 같은 아들을 낳고 올바른 가정을 확립한 후에야 교회의 면모가 눈에 띄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자손들에게 계속될 수 있도록 확립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종교의 재흥은 우리 시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종교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부르며 자신의 신분을 분명히 밝히는 자는 없었으며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나 순수한 종교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실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것은 인간들의 엄청난 경향을 볼 수가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지독하게 멸시하는 것이 아니면 미신으로 치우치는 잘못된 경향입니다. 그 이유는 그 두 가지 죄악들이 어느 곳에서나 팽배했으며 지배적인 기세를 떨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런 와중 가운데서도 작은 한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활이 일어나게 하신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