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ver.me/5LHetUQR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은 실존한다
하나와 둘의 관계,
나이의 양 극단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하에서 그림자들은 존재가 아니라 실존의 증거가 된다. 무엇이 실존과 존재를 구분할까?
바디우는 <비미학>에서 실존은 더 나빠질 여지가 있는 것들의 유적 속성이라 말한다.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은 실존한다. “더 나빠지기”는 크게 감은 눈으로 보기와 말의 스며 나옴 앞에 드러난 모든 것의 능동적 양상이다. 이 드러남이 실존이다. 또는 보다 근본적으로 만날 수 있는 것은 실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존재는 만남이라는 모습 안에 있을 때 실존한다.
바디우는 “더 나빠지기”와 관련하여 베케트에 대한 글을 쓴다. 사뮈엘 베케트의 <가장 나쁜 쪽으로>에 대해서이다. 이 글은 1983년에 출간되는데, 국역판은 <최악을 향하여>(워크룸)이다. 베케트가 거의 70대 후반의 말년에 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베케트 자신이 불어로 번역하지 않았다고 한다. 번역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하지 않았다고. 바디우는 이 글을 ‘존재 물음의 속기술’로 간주한다. 일종의 철학 소논문이라는 것. 철저히 의도적인, 어떤 추상적인 건조함을 유지하고 있고, 사유의 짜임새보다는 사유의 리듬을 자유롭게 풀어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베케트는 문장들을 주술구조 없이 몇 개의 단어들로 마치 타자치듯이 극히 짧게 쓴다. 이런 식이다.
“계속. 계속이라고 말하기. 계속이라고 말해지기. 어떻게든 계속. 도저히 안 될 때까지 계속. 말하자면 도저히 계속할 수 없을 때까지. // 말하기는 곧 말해지기. 잘못 말해지기. 이제부터 말하기는 잘못 말해지기.// 어떤 몸을 말하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떤 정신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최소한 그것. 어떤 장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몸을 위해. 존재하는 그곳. 움직이는 그곳. 벗어나는 그곳. 되돌아오는 그곳. 아니. 나가는 건 없다. 돌아오는 건 없다. 그저 거기 있을 뿐. 거기 머무르기. 거기서 다시. 움직이지 않고.”
On. Say on. Be said on. Somehow on. Till nohow on. Said nohow on. // Say for be said. Missaid. From now say for missaid. // Say a body. Where none. No mind. Where none. That at least. A place. Where none. For the body. To be in. Move in. Out of. Back into. No. No out. No back. Only in. Stay in. On in. Still.
말하기의 명령처럼 보이는 글쓰기. 순수 존재, 여기 있음 그 자체의 글쓰기. ‘여기 있음’에는 두 개의 이름이 있다. 1) 공백(the void)과 *공허
2) 어둑함(the dim)이다. *흐릿함
국역본에는 void가 공허로, dim이 흐릿함으로 번역된다. 원문에서 세어 보니 void는 53회가 쓰였고, dim은 dimly 등의 변화형을 포함하여 무려 110회나 쓰였다. 공백이나 공허에 대한, 흐릿함이나 어둑함에 대한 베케트의 취향을 짐작하게 한다. 바디우는 공백이 어둑함에 종속된다고 본다. 그 준칙은 “공백은 사라질 수 없음, 어둑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러면 모든 것이 사라짐”이다.
세상에 어둑함이나 흐릿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공허나 공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라지기라는 결정적인 시험을 받을 때 공백에게는 자율성이 없다. 공백은 모든 것의 사라짐에 의존하고 있으며, 모든 것의 사라짐은 그 자체로 어둑함의 사라짐이다. 모든 것의 사라짐으로 사유된 “여기 있음”을 어둑함이라 한다면, 공백은 필연적으로 종속된 이름이다. “여기 있음”이 자신의 무의 시험 가운데 여기 있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사라지기가 어둑함의 사라지기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어둑함”은 존재의 탁월한 이름이 된다.
공백과 어둑함은 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반면에 존재 안에 새겨진 것은 셀 수가 있다. 존재 속에 새겨진 그림자들은 셀 수 있다. 그림자들의 수의 학문은 베케트의 근본적인 테마이다.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것, 하지만 존재 안에서 내보여지거나 존재 안에 새겨진 것은 셀 수 있게 된 것, 복수성 가운데에 있는 것, 수와 관련된 것이다. 이때 존재 안에 새겨진 것은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더 나쁘게 만들기(worsen).” 이것은 이미 말해진 것보다 더 나쁘게 말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든 것들 아래에는 “그림자들”이라는 유적인 이름이 있다. 그림자들이란 어둑함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기 있음”이 복수로 드러나는 것이다.
말하기의 명령과, 눈에 보이는 인류의 순환인 그림자들의 변화가 동시에 주어지는 곳인 사유의 관점에서 볼 때, “여기 있음”으로서의 사유는 “잘못 보이고 잘못 말해진 것”이다. 그로 인해 머리는 한편으로는 눈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말들이 스며 나오는 뇌수로 환원된다. 뇌수 위에 뚫린 두 개의 구멍, 그것이 사유이다. 그로부터 눈이라는 테마와 뇌수라는 부드러운 물질로부터 말들이 스며 나오는 테마가 있게 되는데, 그것이 정신의 물질적인 모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두개골이 덧붙여진 그림자라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다.
물음이란 무엇일까? 물음이 있게 하기 위한 조건은 순수 존재가, 공백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가진 존재가 있어야 한다. 또 있어야 할 것은 존재의 드러남이다. 존재 그 자체로서의 존재, 자기 자신의 존재에 따라 드러난 존재, 자기의 존재 안에 무엇인가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나타나기의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의 이름은 어둑함이다. 어둑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있는 상태의 존재이다. 나타나기를 존재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물음 앞에 드러난 존재가 어둑함이다. 바로 이런 까닭에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공백과 어둑함. 물음이 있기 위해서는 존재에 두 개의 이름이 있어야 한다.
공백도 어둑함도 만날 수 있는 어떤 것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모든 만남의 조건은 공백이 만나는 것을 떼어내는 간격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드러난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하는 어둑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날 수 있는 것은 그림자들이다. 만날 수 있다는 것과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같은 것이며, 이는 그림자들의 실존을 지칭한다. 존재인 이름인 공백과 어둑함은 실존하지 않는다. 존재와 사유, 실존이라는 형상들, 이것들을 위한 말, 베케트식으로 말해 이것들을 잘못 말하기 위한 말들을 가지게 되면, 물음들
을 짜 맞출 수 있고, 뱃머리를 정할 수 있다. <가장 나쁜 쪽으로>나 <최악을 향하여>는 뱃머리를 잘못된 방향으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영어의 제목이 그래서 “Worstward Ho”이다.
<존재의 이름-공백과 어둑함>
*공백 - 떼어내는 간격
*어둑함 - 드러냄
<실존-그림자>
*그림자(인류의 순환)는 실존한다.
- 잘못 말하기 위한 말들, 더 나빠질 수 있다는 것, 만날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