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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http://cafe.daum.net/Europa/1AT/23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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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중해를 휩쓰는 장티푸스와 천연두」
1284년부터 1285년 초까지 아르메니아는 평온한 상태였다.
엄밀히 말하면, 동쪽 페르시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서쪽의 지중해 세계는 유럽과 이집트에서 역병이 돌아 고통받았지만 그 사이에 낀 레반트와 아르메니아는 별 일 없이 조용했다.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한 베네치아가 역병에 큰 피해를 입으면서 아르메니아 안티옥의 무역과 관세 수입이 줄긴 했지만 역병이 그치면 곧 정상화되리라고 여겨졌다.
비잔티움 제국이 다니슈멘드 왕조를 포함한 룸 셀주크를 공격하는 것을 지원해준 뒤 레오는 자신의 찬탈 행위로 혼란스러워진 국내 행정을 정리했다.
두 차례에 걸친 대 아르메니아 반란 진압이 잘 이뤄지면서 대 아르메니아인들도 조금은 고분고분해졌고 로리 지역의 메잘린파는 소탕 작업이 계속 이뤄졌다.
왕국의 상태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한 레오는 귀족들을 초대해 마상 경기를 열었다.
대회는 잘 끝났지만 안타깝게도 경기 중 부러진 창이 대 아르메니아 공작의 목에 박히면서 헤툼 파크라두니가 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터졌다.
그 사건만 빼곤 잘 끝났다.
「사고로 사건 많은 일생을 끝낸 대 아르메니아 헤툼 파크라두니」
1285년 여름이 끝날 무렵, 로마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5세가 아르메니아 왕국에 은밀히 서신을 보냈다.
이베리아 기독교 왕국들간의 전쟁은 프로방스 공작 에스테파니아가 한창 우세하던 중 병사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프로방스가 아라곤 왕 곰바우에게 무릎 꿇자 곰바우는 그대로 교황을 자신이 미는 대립교황으로 교체하려고 했다.
아나스타시우스 5세를 지지하던 나바라 왕국을 제압하기 위해 곰바우는 프랑스와 포르투갈을 동맹으로 끌어들였지만 나바라의 명장, 비스카야 공작 디에고 드 하로에게 대패했다.
어쩔 수 없이 곰바우는 나바라 여왕 마리아,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5세와 평화 조약을 맺고 교황 교체 시도를 포기하기로 했다.
「교황의 든든한 지지자, 나바라 여왕 마리아」
이베리아 문제를 대강 끝낸 교황은 동방에서 실적을 쌓고자 했다.
교황은 레오에게 약속을 지킬 시간이 왔다고 전했다.
아나스타시우스가 시행하려는 것은 십자군이 아니었다.
조지아 왕을 가톨릭교도로 바꾸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왕족이자 성당기사단원인 아버지와 조지아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보에몽 드 앙주는 모험가 기질이 넘치는 자였다.
그의 조상은 위대한 프리드리히 2세와 함께 예루살렘을 수복했던 예루살렘 왕 ‘파괴자’ 아모리 2세로 올라가는데, 아모리 2세의 아들이었던 제스퍼가 예루살렘 왕이 되자 동생 보두앵은 자식들을 낳은 뒤 성당기사단에 입단했다.
보두앵의 아들들 또한 아버지를 따라 자식을 낳은 다음 성당기사단에 들어갔다.
보두앵의 둘째 아들 아모리 역시 보에몽을 낳고 성당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보에몽은 성당기사로 인생을 마치고 싶지 않았다.
예루살렘 왕족으로 좋은 교육을 받아 자랄 수 있었던 그는 유럽으로 넘어가 용병 생활을 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명성을 높인 보에몽은 교황의 눈에 띠었다.
교황 아나스타시우스 5세가 보에몽의 출생 신분에 흥미를 가져 그를 고용했다.
보에몽은 이베리아로 넘어가 교황이 지지하는 군대를 지휘했다.
아라곤 내전이 끝나고 아라곤과 나바라의 전투에서 비스카야 공작 디에고와 함께 아라곤 군대를 물리친 보에몽은 그에서 전리품을 받고 이탈리아로 복귀했다.
아나스타시우스는 그런 그를 위해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교황의 계획은 이러했다.
십자군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선 현지 기독교 왕국들의 협력이 불가분하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갈라져 싸우느라 성지에 관심도 없고 예루살렘 왕국은 너무 쪼그라들어 별 힘이 없다.
아르메니아는 강성하지만 아르메니아만으로 파티마 왕조를 상대하긴 부담스럽다.
그러니 조지아 왕국까지 끌어들이자.
하지만 조지아 왕국은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있었고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 토후, 북쪽의 유목민들과 다투는 환경 때문에 십자군엔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교황이 참가를 여러 번 독촉했지만 조지아는 계속 무시했고 이를 교황이 괘씸하게 여겨도 어찌 간섭할 방도가 없었다.
그러나 왕위계승권이 있는 보에몽과 아르메니아의 지원이라면 조지아 왕을 가톨릭교도로 교체할 수 있다고 본 아나스타시우스 5세는 적극적으로 나섰다.
교황은 조지아의 정세를 유심히 살폈고, 기회가 왔다.
1280년 조지아 왕 바그라트 5세가 죽고 어린 왕자 무크란이 후계를 이었다.
무크란이 어렸기에 실권은 아키텐 공주 출신인 왕대비 마우드가 가졌다.
마우드는 자기 애인인 바체를 신뢰했는데, 조지아 귀족들은 한미한 출신의 바체를 꺼림칙하게 여겼다.
사교적이고 성격이 좋아 백성들에겐 인기가 좋았지만 영주들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자 바체는 크리미아를 정복해 귀족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폴로비치족(킵차크인)에게 패배하고 초라하게 돌아와야 했다.
타오 백작 샨세 바그라티오니까지 포로로 잡혀 몸값으로 실랑이를 하는 추태까지 보이자 불만을 가진 카르틀리 여백작과 구리아 백작이 음모를 꾸몄다가 덜미를 잡혀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두 왕족을 체포한 직후엔 이스칸데르 이난지가 이끄는 몽골군이 조지아를 침공해왔다.
선왕 바그라트 5세가 셀주크 왕조에게 아제르바이잔을 빼앗긴 후부터 나라가 계속 뒤숭숭하자 외세를 개입시켜 판을 뒤집으려고 하는 이들도 생겼다.
아나스타시우스 5세는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전에 내부의 아군을 만들어놓고자 했다.
무크란의 누나인 조지아 공주 타플로는 예루살렘 왕의 조카인 파얜 왕자에게 시집와 있었다.
예루살렘 왕 부샤르의 아버지인 제스퍼가 죽기 직전 내린 칙령에 의해 부샤르와 첫째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왕위계승권을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제스퍼의 동생인 조프루아가 후계자로 확실시 되었고 조프루아의 장남인 파얜도 왕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장차 예루살렘 왕비가 될 타플로는 예루살렘 왕국뿐만 아니라 모국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나라꼴이 말이 아니자 조지아에 개입하려고 했다.
태후 마우드와 섭정 바체는 타플로 공주의 행위를 간섭이라고 여기고 거부했다.
이에 타플로 공주는 불만을 가지고 교황에게 지원을 부탁했다.
교황은 지원을 약속했고 보에몽을 군대와 함께 레반트로 파견했다.
「보에몽의 함대」
교황은 예루살렘 왕국, 아르메니아에 협조를 원했다.
부샤르는 자기 조카를 조지아 왕으로 세우겠다는 교황의 계획에 찬성했고 레오는 이미 약속한 바가 있었으니 도와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지아와 사이가 나빠지고 싶지 않았던 레오는 그가 흔히 그랬듯 자신은 아무 관련 없는 척 하려고 노력했다.
일단 형식상으론 조지아 공주 타플로가 예루살렘 왕자 보에몽의 도움을 받아 사악한 섭정과 태후를 몰아내고 소년왕을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주장했고 조지아인들도 찬동하는 이들이 많았다.
1285년 겨울,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트리폴리에 상륙한 보에몽은 보급과 군대 지원을 받은 뒤 조지아로 출발했다.
아르메니아는 보에몽의 행군로에 식량을 쌓아놓고 길안내에 나섰다.
보에몽의 조지아 원정 이야기가 동방에 퍼져나갔지만 섭정 바체는 신경 쓸 틈이 없었는데, 이스칸데르의 몽골군과 혈전을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이 트빌리시를 포위하자 쿠타이시에 주둔 중이던 조지아군이 불리한 자연환경을 무릎 쓰고 트빌리시에 진격해 포위를 풀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몽골군의 트빌리시 포위」
가까스로 조지아군이 몽골군을 물리친 1286년 초 보에몽의 군대가 조지아에 들이닥쳤다.
전쟁은 이 년 넘게 지속되었는데, 처음엔 모든 것이 조지아군에 불리하게 돌아갔다.
계속된 전쟁으로 조지아의 금고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병사들에게 줄 자금도 없었다.
그를 벌충하기 위해 교회 재산을 썼다가 조지아 정교회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하지만 16살이었던 조지아 왕 무크란이 직접 활동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상황이 변했다.
무크란은 폴로비치족에게 포로로 잡혀 불만이 있었던 타오 백작의 딸 마리아미와 결혼했고 오직 마리아미가 낳은 자식만을 후계로 지정하겠다고 맹세해 그를 아군으로 끌어들였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무크란과 섭정 바체의 관계는 원만했다.
둘이 싸우고 있는 동안 아르메니아는 강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자기 조카를 왕으로 만드는데 적극적이었던 부샤르와 달리 아르메니아의 레오는 보에몽의 진군을 도운 것만으로 교황과 한 약속은 다 지켰다고 생각했다.
보에몽은 레오의 책임지기 싫어하는 태도를 혐오했고 둘은 사이가 벌어졌다.
반해 조지아군은 조지아 영주들 상당수가 눈치를 보는 형국에서도 똘똘 뭉쳐 외국에서 온 모험가와 맞서 싸웠다.
레오는 보에몽의 전쟁이 알아서 진행되도록 내버려두고 비잔티움 제국에 신경을 썼다.
바실리오스 3세는 다니슈멘드 왕조에게서 대승을 거두고 멜리테네를 수복했다.
반토막이 난 다니슈멘드 왕조는 그제야 룸 술탄에게 굴종을 맹세하고 보호를 약속받았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대공세에 아나톨리아 북동부로 밀려난 룸 셀주크는 언제 끝장나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실리오스 3세는 군사 활동을 계속 하면서도 군부에 강한 압박을 주면서 견제했다.
내전으로 세가 크게 불어난 군부를 위험하다고 느낀 것이다.
반발한 군부는 선황제 마미아의 아들인 알란족의 군주 겸 알바니아와 카이세리아의 절도사인 알렉산드레 바크바키슈빌리와 합세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의 우두머리는 파플라고니아 절도사 미카엘 콤네노스였는데, 미카엘의 아버지는 콤네노스 왕조를 배신했던 동부군 총사령관 트라이폰 콤네노스(트리폰 콤네노스)였다.
반역자의 아들이 다시 반역자가 되었고 바실리오스 3세는 룸 셀주크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다.
「미카엘 콤네노스의 아나톨리아 반란군」
「반란군 우두머리 미카엘 콤네노스(콤네노스의 방계 가문)」
레오는 비잔티움의 반란 진압에 적극 동참하여 바실리오스 3세에게 지원군을 보내주고 알렉산드레를 공격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레오의 이런 태도가 특수한 건 아니었다.
레오 입장에선 아르메니아의 전통이 된 균형 외교를 실천하는 중이었는데, 가톨릭과 정교회 사이에서 양측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 적당히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었다.
아나스타시우스 5세에게 순순히 협조하면서 가톨릭 세력과의 관계를 원상복귀 시키면서도 아베디스의 총애를 믿고 날뛰던 가톨릭 인사들 몇몇은 시범 삼아 처형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의 반가톨릭 심리가 강해지자 레오는 이를 약화시키려고 노력했다.
가톨릭교도들이 아르메니아인은 아니었지만 아르메니아에 도움이 되었던 건 사실이었다.
당장 이탈리아 상인들이 아르메니아 항구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가장 큰 타격을 입는 것은 안티옥에서 큰 수입을 얻고 있는 예르반드 왕가였다.
그와 동시에 정교회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의 눈치도 살펴야했다.
내전으로 반쪽이 나고도 비잔티움 제국은 아르메니아를 짓밟을 수 있는 힘이 남아있었다.
아르메니아 왕국이 비잔티움 제국령이었음을 감안하면 비잔티움 황제들이 아르메니아를 흡수하려고 시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레오는 가톨릭의 비위를 충분히 맞춰줬으니 이제 비잔티움 제국에게도 선을 만들어 놓겠다는 생각이었다.
레오는 외국에서 터지고 있는 전쟁과 역병이 아르메니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왕국을 운영해갔다.
네스토리우스교를 통제하는 것도 고민거리였다.
레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면서 네스토리우스 교회는 권력이 매우 강해졌다.
더 이상 아르메니아 왕들이 마음대로 이용해먹을 수 있는 예전의 교회가 아니었다.
동방 총대주교가 어디로 행차하나 왕만큼이나 호화스런 대우를 받았고 아르메니아인들도 사브리소 3세를 왕과 동격으로 모셨다.
예르반드 가문이 안티옥을 관리하도록 보냈던 귀족들도 토착화되고 자유도시의 분위기에 익숙해지면서 왕보다 총대주교에게 복종하려는 징조를 보였다.
레오는 왕이 될 때엔 교회의 도움을 받았지만, 왕이 된 이후엔 교회의 권한을 축소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강력해진 교회와 사브리소 3세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은 도의적으로나 여론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레오는 안티옥 주위에 추가로 요새들을 건설했는데, 투르크 유목민과 이슬람 이교도의 침략을 방지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타당한 이유였으며 요새가 건설되고 군대가 추가적으로 배치되면서 총대주교측에 붙으려던 안티옥 관리와 호족들이 왕의 태도를 살폈다.
당장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생각한 레오는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사브리소 3세는 레오보다 27살이나 많고 레오는 이제 20대 후반이었다.
지금의 총대주교가 죽을 때까진 기다릴 수 있었다.
「안티옥 주위로 새로 건설되는 요새들」
또 선왕들이 노력했던 중 아르메니아 개발도 다시 시작했다.
몽골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중 아르메니아 도시들을 재건하거나 신설했다.
알 자지라는 철저하게 파괴되었기 때문에 레오는 도시를 재건하기보다 더 나은 입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했다.
하사카라는 마을이 신도시 건설지로 지정되었다.
알 자지라 서남쪽인 유프라테스 강변의 조그만 마을인 하사카는 고대 도시인 마가리수로 추정되는 곳이었다.
마가리수는 아시리아인들에게 기록된 곳으로, 아시리아 왕 아슈르 벨 칼라에게 침공받은 아람인 도시였다.
하지만 아람인들은 오래전에 이미 사라졌고 쇠락할 대로 쇠락한 도시는 몇몇 쿠르드족과 아시리아인들이 모여 살던 깡촌이 되어 있었다.
그대로두면 모래 속에 파뭍힐 곳이었겠지만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해 있고 입지도 괜찮다고 본 레오에겐 규모와 인구가 적다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알 자지라를 비롯해 몽골인에게 약탈당해 집을 잃은 이들을 하사카로 이주시켰고 도시가 건설되었다.
하사카 외에도 대 아르메니아 주민들을 꾸준히 중 아르메니아로 이주시키는 등 레오는 왕의 책무를 다했다.
「신도시 하사카」
1231년 아르메니아가 중 아르메니아(당시는 알 자지라 공작령)를 정복한 지 50년이 지나 중 아르메니아와 모술 지역에 아르메니아 인구가 대다수를 이루면서 급속도로 동화가 이루어졌다.
여러 왕들의 꾸준한 노력이 발한 것이었다.
물론 그를 위해선 수많은 이슬람교도들을 학대하고 징용을 시키고 강제 개종을 요구해야 했지만 말이다.
1대 왕 스테파노스가 티그라노케르타 건설을 시작한 이래로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 정부에 의해 무급노동을 강요받거나 개종을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토지와 재산을 포기하고 떠나도록 요구받았다.
예르반드 왕가와 아르메니아인들이 이슬람교도들에게 뜯은 재산와 토지는 나라가 발전하는데 잘 쓰였다.
이슬람교도들의 이주로 토지가 황폐화되기도 했지만 수십년에 걸친 개발로 중 아르메니아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번창하고 있었다.
아마 이 지방을 중심지로 한 국가는 고대 아르메니아 이후론 장기 왕조와 예르반드의 아르메니아 왕국뿐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대부분의 국가는 이 지역을 평정하면 메소포타미아 중남부 지역을 중심지로 삼고 상대적으로 척박하고 산악 지형도 많은 북부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인들에겐 달랐다.
아르메니아인들의 정신적, 민족적 고향인 대 아르메니아는 너무 산세가 험하고 토지가 메말랐다.
그에 비하면 메소포타미아 북부는 그들에게 기름지고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러면서도 대 아르메니아에서 가까운 곳이라 그들이 이주에 부담을 느끼지 않기도 했다.
고대 아르메니아 왕국이 이 곳에 신수도를 건설했었던 이유가 중세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었던 것이다.
어느덧 티그라노케르타부터 모술에 이르는 영역은 대 아르메니아보다도 더 아르메니아스러운 곳이 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문화가 대세가 된 중 아르메니아와 모술」
국가가 평화로워지자 레오는 외부 정세에 눈을 떼지 않으면서 국내 귀족들과의 사교 활동을 늘렸다.
쇠퇴한 왕권과 높아진 교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귀족들의 지지를 필요로 했다.
배교자 아스 살리흐 3세가 추방된 이후 시리아 왕은 주장하는 사람이 없어 명목상의 왕좌가 될 뻔 했으나 레오가 스스로 시리아 왕을 자처했다.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왕을 자처한 레오는 자신의 시리아 지배를 정당화하고 파티마 왕조를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 놓았다.
시리아 왕가에 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던 레오가 시리아 왕을 자처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모술 공작 야사르였다.
술을 마시고 싶어서 기독교를 믿었다는 얘기가 들릴 정도로 소문난 술고래이자 왕국 내 사교가로 명성이 높았던 야사르는 자신의 도시 모술에서 자주 연회와 마상 경기로 열었다.
레오는 야사르의 연회에 자주 참석하면서 귀족들과 자주 만나 교류했다.
야사르는 레오의 정치적 동반자 역할을 스스로 맡아 했고 레오는 야사르를 재상으로 임명하는 등 야사르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야사르의 알코올 중독이 갈수록 심해져 때때로 왕에게 무례를 범하기도 했지만 레오는 용서해주었다.
다비트 헤툼은 여전히 국정 운영에 참가했지만 자신의 사생아 아들의 아내와 바람을 핀 것 때문에 교회의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해 예전처럼 내각의 관직을 차지해 공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진 못했다.
그러나 레오와 사사건건 다투는 귀족이 딱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시리아 공작 타차트 바크탄기안이었다.
「레오의 경쟁자, 시리아 공작 타차트 바크탄기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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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카는 실제로 있는 도시인데 위에서 서술했듯이 오랜 역사를 자랑하지만 천천히 몰락하다가 15세기 경 사실상 소멸합니다.
그후 19세기 프랑스군이 이곳을 발견해 유물을 발굴하고 군부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군부대 주둔 덕에 그냥저냥 마을로 돌아가던 하사카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추방으로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여 성장했습니다.
현재 하사카는 쿠르드족과 아랍인, 아시리아인과 소수의 아르메니아인이 섞여 사는 도시로 인구가 약 28만 정도 되는 중소 도시입니다.
레오는 대체로 전쟁 없이 조용히 지내는 시대였는데, 일부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좀 정리 되면 세력 확장하려고 했는데 동쪽에서 그게 오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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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몽골:신나게 아르메니아를 약탈하자!마침 아르메니아가 개발도 잘했으니 약탈할것도 많겠지!
고기 방패 쿠만, 조지아와 이슬람 삼돌이가 있는한 아르메니아는 안전합니다!
헤툼은 장님인데 마상시합에 참가해서 죽었군요?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죽고 싶었는데 자살은 하기 싫었던건지...
우울증 장님 할배가 드디어 맛이 간 것 같습니다. 쯧쯧.
크킹 게임 내에서 장님캐가 마상 경기에 참가했다고 하면 당혹스럽더군요. 참가 못하도록 설정할 수도 있었을텐데 단돌로 때문에 역설사에서 그냥 냅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