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의 경기를 보던 중에 신의 물음을 들은 카인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이는 생각지도 못 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카인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치프와, 치프를 경쟁상대로 보던 사내의 치고 박던 싸움에서 기어이 피가 튀기 시작했다. 퍽, 퍽, 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두 사내의 얼굴을 포함한 곳곳은 부어오르거나 피가 흘러내렸다.
방금 도착한 레몬이 어깨에 앉아 있는 카인. 그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칼리프와 신의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 몇 군데 아는 곳이 있어. 여기 파드너도 하나 정도 있지. 왜? 케이크 좋아하냐?”
“음. 그럼 거기부터 가야겠군.”
“돈은 있고?”
“응?”
칼리프의 물음에 신은 되물은 뒤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고 보니 얼떨결에 고급 레스토랑에서 갖고 있던 10,000G를 냈었다. 쉽게 말해 신 역시 지금은 빈털터리다.
“제길. 카인.”
“음……. 음?”
케이크와 신의 약점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던 카인은 그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만약 치프가 이겨서 500만 G를 갖게 된다면, 내가 요구하는 만큼의 용돈을 부여하도록.”
“…….”
빌어먹을, 이라고 카인은 속으로 욕을 했다. 점점 자신의 모습이 많이 변해가는 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치명타인 약점으로 잡을 예정이었던 케이크가 깨진 것이다. 그래도 카인은 신이 자신을 함장으로서, 그리고 회계사로서 인식을 하고 있다는 느낌은 받았다.
어찌됐건 신이 지금 돈이 한 푼도 없는 이상, 카인 일행에게 기대야하는 건 확정된 것이다. 카인은 일단 거기에 걸기로 했다. 케이크 약점은 일단 보류라고 여기는 카인의 귀에 다이아의 활기찬 외침이 들어왔다.
“와~! 치프 최고!”
“잘 했어!”
“흠. 그 정도는 해야지.”
칼리프와 신 역시 밝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느새 격투대회가 끝난 모양이다.
“끝났어?”
카인의 멍한 물음에 다이아는 다시 오른손에 든 도를 흔들며 높은 음정으로 말했다.
“뭐에요, 카인~! 대회도 제대로 못 본 거예요?”
“아, 예. 뭐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카인은 자신이 다른 곳에 정신을 팔고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이아이지 않은가.
“이야. 천하의 카인이 한 눈을 팔 때도 있냐? 의형제 치프가 울겠다.”
“별 일이군.”
칼리프와 신의 말에 카인은 자신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시상식을 끝낸 치프는 챔피언 벨트를 흔들며 카인 일행에게로 다가왔다. 물론 계단을 타고 내려서. 터진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치프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카인~! 너 계좌번호 알지? 번호 좀 불러줘라.”
이런. 훔친 건데 계좌가 있을 리가 있냐.
카인은 일행을 그곳에 남겨놓고 은행으로 급히 향했다. 주인이 뛰고 있는데도 레몬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에서 떨어진 법이 없다.
카인은 은행에서 새로운 통장을 개설하고 체크카드까지 한 장 발급받았다. 에페루스 전하의 카드는 장지갑 깊숙이 넣어두었다. 편지와 함께 에페루스 국왕께 돌려드릴 생각이다.
물론 주웠지만 돌려드릴 틈이 없었고, 잊고 있는 사이 어느새 출항까지 했다고, 감쪽같이 편지를 쓸 예정까지 짠 그다.
…국왕조차.
통장과 카드를 만든 카인은 얼른 대회장으로 돌아와 대회장 총회장에게 계좌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은행에서 다시 통장정리를 했을 때 500만 G가 입금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보낸 사람은 격투대회장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다.
일단 그는 카드로 150,000G 정도를 찾아서 지갑에 넣은 뒤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가 왔을 때 일행은 여기저기 흩어졌다. 다이아는 치프가 앉아 있는 침대 뒤에서 자고 있고, 칼리프와 신은 상가 쪽에서 기로만 소식을 보내왔다.
치프의 도를 손에 들고 마구 흔들며 응원에 응원을 거듭했던 다이아다. 몸에 힘이 빠져 엎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물론 아침을 걸렀다는 것도 일조를 하리라. 격투대회는 9시에 시작하고, 일행은 푹 퍼져서 자다가 8시 30분이 넘어서 일어났으니. 대회장을 찾아간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됐어. 500만 들어왔어. 고생했어, 치프.”
“?”
인상을 찡그린 채 콧구멍에 휴지를 꽂고, 몸 곳곳에 난 상처에 밴드와 반창고 등을 붙이던 치프. 그는 카인이 자신을 보며 살짝 웃고 있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씨익 웃었다.
“응! 당연하지!”
그는 허리에 찬 챔피언 벨트를 손으로 슥슥 매만졌다. 상처는 쓰리고 아팠지만 카인의 인사가 있어 괜찮았다.
“어쨌든 빚은 갚았다?”
어제 저녁에 과욕을 부렸던 고급 레스토랑 얘기였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레몬 발목의 편지를 풀어 읽었다. 하지만 답장은 생각보다 짧았다.
『스플린터 해적단을 조심하도록.』
“풉!”
카인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아버지다운 어투였고 짧은 편지였다. 변하지 않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카인, 왔군.”
칼리프와 신. 둘은 어딘가를 다녀온 듯 이마가 땀에 젖어 있었다. 신은 이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케이크 사먹을 돈 20,000G를 내놓거라.”
“음? 음-.”
황태자의 명에 잠시 머리를 굴리던 카인은 지갑에서 70,000G를 꺼내, 50,000G는 칼리프에게 주고 20,000G는 신에게 건넸다.
“케이크 집 찾았어?”
“응.”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제일 큰 케이크로 두 개 사와. 오늘 저녁은 그것으로 대신하자. 둘이서 충분하지?”
“음. 다녀오지.”
“치프, 치료 잘 하고 있어.”
칼리프와 신은 방 안의 치프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치프는 말없이 손을 흔들어 칼리프와 신을 배웅했다. 피가 흐르기는 했어도 겉으로 봐서는 치프보다, 붓기가 꽤 빠졌어도 얼굴이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중인 칼리프가 조금 더 다쳤다.
치프는 치료를 끝내고 구급약 상자를 정리한 뒤 침대에 엎어졌고, 카인 역시 침대 하나를 잡고 검을 풀어 기대놓은 뒤 자리에 누웠다. 신이 침대 6개가 모여 있는 방을 빌린 덕에 따로 자지 않게 된 것이었다.
케이크 집. 정확히는 빵집이다. 둘은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케이크 둘을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난 이거.”
“난 이거요, 저하. 이게 더 커요.”
“이게 더 크다.”
“이게 더 크다니까요, 신 저하?”
“어허.”
크기 갖고 싸우는 두 사내의 촌극 아닌 촌극을 보던 계산대의 직원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직원은 두 사람 중 키도 작고, 몸집도 꽤 마른 청년의 신분이 더 높다는 것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크기 같은 건데요?”
실랑이가 멈췄다.
“모두 몇 명이 드실 거죠?”
“5명이요.”
칼리프가 대답했다. 퉁퉁 부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직원은 당황하지 않았다. 조금 전 격투대회가 있었음을 아는 그다.
“그럼 두 개는 사야 할 텐데요?”
직원의 대꾸를 들은 칼리프와 신은 카인이 제일 큰 케이크 2개를 주문했음을 알아차렸다. 실랑이 하느라 잠깐 까먹은 것이다.
“2개 얼마지?”
윽. 말투 한 번 건방지다. 하지만 저하라고 불리는 걸 보면 내가 참아야지 별 수 있나. 라고 여긴 직원은 미소를 잃지 않고 설명했다.
“초록색은 녹차와 안에 땅콩이 들어갔고, 생크림은 안에 밤이 박혀 있어요. 둘 다 생과일이 골고루 들어갔기 때문에 녹차케이크는 25,000G, 밤이 들어간 건 23,000G에요. 합이 48,000G지요.”
맛과 건강을 동시에 챙기는 고급 케이크다.
“이 두 개로 하죠, 저하.”
“음. 이 두 개로 줘.”
“예. 생일 초와 칼은 몇 개 드릴까요?”
직원의 말에 칼리프는 고개를 저었다.
“초는 필요 없고 칼은 각 하나씩 주세요.”
“예-. 우유 1.5리터짜리 하나 서비스로 드릴게요.”
“고맙군.”
“감사합니다.”
케이크를 포장 상자에 넣는 사이 칼리프는 카인에게서 받은 50,000G를 건넸다. 직원은 그 돈을 받고 2,000G를 건네준 뒤 케이크 포장을 마무리했다. 우유는 봉지에 따로 넣어주었다. 가게를 나온 둘. 칼리프는 양 손에 케이크 두 개를, 신은 우유를 들고 여관을 향해 걸었다. 가면서 신이 말했다.
“이제 보니 얼굴 붓기가 꽤 빠졌군.”
“그렇지? 며칠만 더 있으면 다 빠질 것 같아.”
“뒤늦지만 사과하지. 그날은 실수였다.”
“내 실수이기도 해.”
그 사건을 계기로 둘은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여관을 찾아 방으로 올라갔을 때. 칼리프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카인의 레몬이 안 보임을 알 수 있었다. 동시에 카인과 치프, 다이아는 각자의 침대를 잡고 자는 모습도.
“우리 왔어-!”
“다 자는군.”
칼리프가 손에 대고 노크를 하며 인기척을 했고, 신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 기척에 놀란 카인이 벌떡 일어났다.
“왔어?”
“응, 다녀왔어. 근데 케이크가 꽤 비싸더라. 5만을 안 받았으면 큰일날 뻔 했어. 레몬은 또 배달 갔어?”
“응. 전하 카드 돌려드리러. 어머니와 두 동생의 안부도 여쭐 겸.”
“그럼 빨리 오겠군.”
신이 답에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중류보다는 가까운 편이니까.”
침대에서 내려온 카인은 안쪽에서 자고 있는 다이아를 깨웠다.
“다이아 마마. 다이아 마마. 일어나십시오, 다이아 마마.”
“응?”
“저녁 드셔야 할 시간입니다, 다이아 마마.”
카인이 다이아를 깨우는 모습을 보며 칼리프는 식탁 위에 케이크 둘을 모두 내려두었다. 신은 그 옆에 봉지에서 꺼낸 우유를 옆에 두었다.
“그렇게 자고도 잠이 쏟아지다니, 역시 공주 마마셔.”
“흥.”
칼리프의 말에 신은 콧방귀를 살짝 끼었다. 칼리프는 담배를 입에만 물고 치프를 깨웠다.
“치프. 치프? 저녁 먹자, 치프.”
“음- 응. 졸려.”
“먹고 자. 너 지금 출혈이 조금 있어서, 당분과 단백질 섭취가 중요하잖아.”
“특별히 몸에 좋은 녹차와 밤과 땅콩이 들어있는 케이크다. 생크림도 많지만 영양분도 만점이지.”
“우유도 공짜로 얻어왔어.”
“오, 그래? 그 집 서비스 괜찮네.”
칼리프의 덧붙임에 카인은 연하게 웃었다. 어느 말에 반응을 했는지는 몰라도, 다이아와 치프는 벌떡 벌떡 일어났다.
“아.”
그러고 보니 접시가 없다, 참. 1층 홀에 있으려나? 내려가서 먹을까? 식탁이 여기 있으니까 상관없으려나?
“치프. 케이크 정리 좀 하고 있어. 접시…….”
“녀석 잔다.”
황태자의 말처럼 치프는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린 카인은 방을 나섰다. 정신을 차린 다이아가 치프를 깨우는 사이, 칼리프가 탁자에 케이크 두 개를 상자에서 꺼내 올려놓았다.
“참. 카인이 음료수 잔도 갖고 온다고 했던가?”
“알아서 하겠지.”
신의 대답을 들으며, 칼리프는 담배를 입에서 빼어 담배 케이스에 다시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