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짝퉁의 이름은 '애니캣(Anycat)'. 애니콜(Anycall)과 혼동되도록 한 이 제품을 삼성이 수거해 분석한 결과,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중국 해적폰은 성능과 기술 면에서 '옴니아'에 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품의 ⅓~��의 파격적인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깜짝 놀란 삼성은 해적폰 추적에 나서, 광동성(廣東省) 심천(深�q)의 한 생산업체를 찾아냈다.
삼성은 이 업체를 지적재산권 침해로 제소하기보다 협력을 제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이 업체는 삼성과의 협력을 거절하고, '해적폰 생산업체'로 남는 길을 택했다. 정규업체로 전환할 경우 인허가와 세금, 사후관리(A/S) 책임을 지는 것을 꺼린 것이다.
이에 앞서 미국의 애플사는 더 기막힌 일을 당했다. 애플사의 히트 상품인 '아이폰(iPhone)'을 모방한 중국 짝퉁 '하이폰(HIPHONE)'과 '마이폰(MYPHONE)'이 '원조(元祖)'의 외관만 닮은 것이 아니라 기능까지 비슷한 데다, 일부 기능에서는 오히려 원조를 능가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일본 소니도 자사의 PSP(Play Station Portable)를 모방한 중국 앙다(昻達)의 VX767이 디자인과 영상 면에서 원조와 비슷하지만, 연속 사용시간에서는 원조를 추월한 것에 깜짝 놀랐다.
짝퉁 휴대전화는 지금까지 약 1억5000만대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토종 휴대전화 업체인 '아모이'와 '버드' 등은 문을 닫거나, 스스로 산짜이 대열에 합류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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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①자동차를 본뜬 독특한 디자인의 휴대전화. ②삼성전자의 차세대 터치폰 '옴니아(SGH-i900)'를 모방한 애니캣(Anycat). ③망원렌즈가 달린 휴대전화. ④손목시계형 휴대전화. ⑤화질이 뛰어나 정품 못지않은 산짜이 DMB폰.
■'산짜이'와 '짝퉁'의 차이점
세계 최고 기업들을 긴장시킬 정도의 기술력을 갖춘 요즘의 짝퉁은 기존의 '가짜-저질 짝퉁'과는 다르다. 유명 상품을 모방한다는 점에서는 짝퉁과 같지만, 공개된 기술과 자체 노하우를 활용하여 정품에 버금가는 제품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짝퉁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이런 제품을 '산짜이(山寨·산채)'라 부른다. '산짜이'는 원래 수호전(水滸傳)의 양산박 같은 산적들의 소굴을 뜻한다. 중국의 무명 기업이 세계적 브랜드에 대항하는 양상이 옛날의 '산채'를 연상시킨다는 데서 이 용어가 유래했다.
산짜이는 품질 검사와 세금 납부를 거치지 않은 무적(無籍)제품이긴 하지만, 일반 판매업소에서 정품과 당당히 경쟁한다. 이런 점에서 산짜이는 짝퉁이 한 단계 진화(進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짜이는 작년부터 휴대전화에서 꽃을 피우고 있지만 컴퓨터와 디지털카메라, 컬러액정TV, 자동차, 탱크, 심지어 비행기까지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지난 1월 11일 중국 심천시 보안구(�d安區)의 복원(福園)호텔에서 특이한 행사가 열렸다. 행사의 명칭은 '2009년 초대 심천 노트북 교류회'. 하지만 실상은 '산짜이 노트북 컴퓨터 제작자 단합대회'였다. 참석자는 60여명으로, 15개 노트북 조립회사와 부품생산업체 대표들이었다. 주최자 궈타이링(郭太�B) 사장은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짜이 노트북 시대가 이제 열렸습니다. 우리 모두 자신감을 갖고 전심전력으로 단결하여 새로운 미래를 개척합시다. 산짜이 휴대폰 시대가 왔던 것처럼 산짜이 노트북 시대도 올 것으로 확신합니다."
업체 대표들은 ▲아기자기하고 다양한 외관(巧妙多變的外觀) ▲낮은 가격(低廉的價格) ▲품질의 안정성(産品的穩定性)으로 정품과 경쟁할 것을 다짐했다. 이들은 "우리 제품이 과거의 가짜나 사기성 제품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가 하면 산짜이 액정 TV의 경우 가격이 워낙 싸 중소 호텔·노래방·가라오케·사우나 등에서 폭발적인 인기다.
산짜이의 시발점은 중국 토종 체리자동차의 '큐큐'이다. 2000년대 초반 등장한 큐큐는 GM대우의 '마티즈' 외관을 모방하면서, 외국 합작사와 공동 개발한 엔진을 장착해 중국 시장에서 대히트를 쳤다. 모방품이 원조를 누른 것이다. 그리고 산짜이는 작년부터 휴대전화 시장에서 '대폭발'하게 된다. 중국 정부가 2007년 10월 휴대전화 제조·판매 허가를 개방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중국 정부의 딜레마산짜이는 물론 불법이다. 광동성 지적재산권국의 타오카이웬(陶凱元) 국장은 "산짜이 제품은 이미 다른 기업에서 투자하여 개발한 연구 성과를 훔치는 절도 행위이며 위조·불법복제는 명백한 침권 행위"라며 "소비자들이 개인 이익을 위해 산짜이 제품을 이용하다 보면 아무도 연구개발을 하지 않게 되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을 가져온다"고 비판했다.
또한 산짜이 제품의 성행은 WTO에 가입하고 지적재산권 보호를 외치는 중국 정부의 이미지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 일부 산짜이는 품질 보증이 안 되어 배터리 폭발로 인한 인명사고까지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는 사실상 산짜이를 묵인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러쩡(樂正) 심천시 사회과학원장은 지난 21일 정협(政協·정치협상회의) 개막식에서 "만약 정부가 심천에서 불붙은 산짜이 제품에 대해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면 이 기업들은 '산막'에서 걸어 나와 자주적 기술 개발의 길을 가게 될 것이며, 심천이 세계 IT산업의 기지가 되는데 역군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산짜이를 강력히 단속하지 못하는 것은 국민 절대 다수가 산짜이를 심정적으로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포털사이트인 소후(搜狐)가 '산짜이 제품에 대해 정부가 지원을 해야 하는가'란 문제를 놓고 네티즌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약 8대1의 비율로 '해야 한다'가 많았다. 한 네티즌은 "기업이란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처음에는 선진 외국제품을 모방하다가 그다음에 기술이 쌓이면 독창적인 제품 개발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정부는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산짜이 회사를 지원해서 정상적인 기업으로 커가도록 도와야 한다"고 했다.
산짜이가 이처럼 큰 호응을 얻은 배경에는 중국 사회의 밑바탕에 흐르는 '협객(俠客)'의 문화가 숨어 있다. 중국은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지만, 개혁·개방 이후 거대한 시장을 글로벌 기업에 내주는 수모를 겪었다. 산짜이는 구겨진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의리의 협객 같은 존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의리의 산적을 처벌하면, 국민적인 반감을 살 수 있고, 자칫 공산당의 권위에 상처를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정부는 산짜이가 시장에서 팔리는 것을 방치한다.
산짜이는 이제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까지 발전했다. 중국 국영방송인 CCTV는 매년 설날이면 13억 국민이 시청하는 '설날저녁대잔치(春節晩會)'를 방영한다. 여기에는 중국 최고의 가수와 배우, 개그맨이 등장한다.
그런데 올해 이 프로그램에 대항하는 짝퉁 프로그램이 인터넷에 등장했다. 이른바 '산짜이 설날대잔치'이다. 이 프로그램은 네티즌들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1000개의 장기자랑 가운데 35개를 선별해, 3시간짜리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노래와 성대모사, 자전거 묘기 등이 등장하는 이 프로그램은 인터넷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산짜이 설날대잔치' 프로그램을 편집한 라오멍(老孟)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 프로그램의 본질은 평민의 지혜와 역량에 의지하여 풀뿌리(草根) 문화의 정수를 담는 것"이라고 말했다. 산짜이 문화를 보는 중국인의 시각이 엿보인다.
산짜이는 개혁개방 30년 만에 '업체의 외국기술 모방 + 국민의 자존심 + 정부의 눈감아주기'가 합쳐져 만들어낸 중국적 특이 현상이다. 최근에는 '중화 민족주의'와 결합해 13억 국민 브랜드화(化)하는 양상까지 보인다.
앞으로 산짜이는 공산품의 영역을 뛰어넘어 음식·영화·광고 등 모든 분야로 확산될지도 모른다. 한국 기업은 산짜이 대응 전략을 짤 때 '법률적인 대응'과는 별도로 '산짜이 문화'를 고려에 넣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