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읍 기남리남산대유래
순창읍 가남리 유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가잠(佳岑)과 남산대(南山臺)을 합하여 가남
리라고 하면서 가잠의 아름다울 가자와 남산대의 남녘 남 자를 합하여 가
남리라고 하였다.
가남리,남사대 유래
옥천의 명산 광덕산(廣德山)에서 기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내리어 다시
솟아 오른 산이 아미산(峨嵋山)이다. 여기에서 다시 동남쪽 가산 그리고 남
산을 주산으로 매봉(梅峰)이 이룩되었으니 일부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남산
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남산은 주산이요, 이 봉은 매봉이
라고 본다. 이유는 이 능선은 매화 가지 형상으로 매화미발(梅花未發) 형상
으로 꽃봉오리처럼 된 곳에 마을이 이룩되었으니 일명 남산대(南山臺)였으
나 법정리는 남산리이다.
이 마을 522번지 대숲 속에 숨겨져 있는 지름 3m, 넓이 2.5m 높이 0.6
m의 고인돌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이 살았던
취락지(聚落地)였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 앞산을 마봉(馬峰)이라고 하는데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渴馬飮水)이다. 이 마을 앞에는 갈마정(渴馬
井)이라고 하는 샘이 있어 갈아음수 형상이라는 입증을 하고 있으며 옛사람
들이 물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조그마한 저수지(연못)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곳에 고려초 충혜왕(忠惠王) 1339년경 한림학사문하시어사(翰林學士門
下侍御史) 문정공(文貞公) 인빈(印份)의 후손 교동인씨(喬桐印氏)들이 조선
조 초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또한 고려조에 순화백(淳化伯)의 봉작(封爵)
을 받은 설자승(薛子升)의 후손 옥천(玉川) 설씨(薛氏)가 이 마을에서 조선
조 초기까지 살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조선조 초기에 귀래공(歸來公) 신말
주(申末舟)가 이마을에 살았던 옥천설씨와 혼인하여 처향(妻鄕)인 이 마을
로 낙향하였고 그 후손이 지금까지 세거하 왔던 것이다.
그래서 취락지로는 순창 지역에서 제일 길지라고 한다. 따라서 고려조에
거성 교동인씨(喬桐印氏)와 옥천설씨(玉川薛氏)가 이곳에서 살았기에 조선
조 초기까지는 순창의 토반을 인(印).설(薛).양(楊).이라 하였고, 조선조
중기 이후부터는 신(申).설(薛).양(陽)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88고속
도로가 마을뒤를 가로질러 가로있으며 읍사무소에서 1.5㎞ 서남쪽에 위치하
는 101세대 314명의 인구가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