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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고독> 권성우 비평집 소명출판.
/대중적 관심도 자본의 저 화려한 마력도, 사회를 개선할 수 있는 추진력도 다 가져가라. 그러나 한 가지만은 문학에게서 절대로 빼앗아갈 수 없다. 패배하고 좌절하여 스스로 창공의 빛나는 별이 되는 문학의 고유한 힘만은/ <다시 문학이란 무엇인가> 세계의 문학 1994년 겨울호 권성우.
패배하고 좌절하여 별이 된다는 비유가 어색하다. 대체로 별이 된다는 의미는 관심, 자본, 추진력 등을 가졌을 때 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리고 별이 되기 위해 사람들은 얼마나 피나는 노력를 하고 있지않는가. 패배하고 좌절하여 창공의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는가. 문학의 힘이란 그런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문학은 아주 고약한 도구가 아닌가.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패배하고 좌절해 가는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 패배와 좌절이 빚어져서 빛나는 별이 되는걸까?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싶지만, '아름다운 패배자'를 의미하는 걸까.문학이 아직 힘이 있었을 당시에는 대중적 관심, 자본,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화려함이 사라진 시대에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문학이 대중의 취향, 자본의 마력과, 사회 개조라는 추진력에 문학의 고유한 가치가 사라진 시대에 대한 통렬한 저항으로도 읽힌다.
한 1년 정도 된 것 같다. 내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전 '루저'입니다 하였더니, 주위의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렇게 내 자신을 소개한 이유는 약간의 반항도 있었다. 모두들 잘 나고 똑독하였기에 약간 비꼬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당시부터 내가 루저라는 상태에 있음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객관적으로도 증명 가능하였다. 그렇지만 루저인 내가 한 번도 좋았던 적은 없었다. 단지 이제는 루저여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자신도 있었다. 대중적 관심도, 자본의 마력도, 추진력도 없었지만, 나에겐 한 가지 남들 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점이 있었다. 고독. 고독을 혼자 견다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오랜 훈련을 통해 아주 조금이나마 힘이 붙었다고 해야할까? 순전히 내 경우에만 한정한다면 문학이 큰 역할을 했었다고 하고 싶다. 패배하고 늘 죄절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이 책의 제목은 그래서 비평의 고독이다. 비평이 직업이라 평가를 하고 재단을 하지만, 대중적 관심과 자본의 마력과 사회 개조라는 기준에서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작품을 평가하겠다는 권성우의 의지의 표현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가치들에서 멀어질수록 비평가는 고독할 수밖에 없다. 대중의 유행과 취향, 자본의 무제한적 취득, 발전이나 진보는 지금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평가의 척도인데, 여기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선언은 고립을 받아들이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고립를 견디는 것이 고독이 아닐까.
문학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글들을 가끔 보게 된다. 검색 몇 번이면 몇 년에 걸쳐 이루어낸 작품의 줄거리나, 가치에 대해 손쉽게 취득할 수 있고, 돈이 가장 중요한 성공의 척도가 되는 시대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문학에 머리를 쳐박고 있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 문학은 이제 소멸해가는 양식일지 모르겠다. 문학 대신 읽을거리로서 글쓰기만이 살아남을지 모르겠다. 좀 더 쉽게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또는 좀 더 자극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만을 찾는 글쓰기 시장만이 호황을 누리고 있지 않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사회에서 다른 이들과 경쟁하여 생존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누구나 승리자가 되기를 원한다. 좋은 사회란 패배자도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라고 이야기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패배자는 비참과, 가난과 굴욕을 더 많이 견디어야 하거나, 이른 소멸을 감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누구나 승리자가 되지 못해 안달이다. 그러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넉넉히 계산해 보아도 패배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를 차지한다. 그렇지 않다면야 승리자가 무슨 의미가 잇겠는가. 그렇다면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패배자는 어덯게 할 것인가.
패배자가 승리자가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한다. 이 경우가 가장 일반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한 명의 승리자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패배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행히 내가 승리자가 되면 좋겠지만 고단한 노력에 비해 확율이 희박하다는 점도 문제다.자칫하다간 한 번 뿐인 인생을 헛고생만 하다가 죽음을 앞두고 억울하니, 세상이 불공평하네 하며 한탄만 하다 종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개중에는 다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겠다 같은 푸념만 늘어놓다가 선종의 기회까지 놓치는 경우도 허다하다.
패배자가 완전한 '정신 승리법'을 익히든가, 도통을 하여 패배자임을 몸과 마음으로 완전히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다. 우선 이런 방식을 택하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현재는 고정불변한 구조임을 벋아들여야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각자는 정해진 운명이 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곤란하다. 현대 사회란,모든 인간은 천부인권이 있고, 법 앞에 평등하다는 구성원리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중세가 좋았다고 아무리 우겨봐야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다. 바보이거나 믿음이 특별히 충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희박하다. 종교를 가진 사람이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종교가 이런 역할을 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지 싶다.
<비평의 고독>에서 권성우는 이 간극을 파고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에 문학의 역할이 있지 않냐고 하는 듯하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승리자의 도구가 아니다. 조선 시대였다면 혹 가능했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문학의 종말이니 하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문학이 더 이상 승리자의 수단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문학이 승리자의 편이 아니라면 패배자의 편이 될수는 없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아주 큰 시장을 차지할 수 있으니 더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망이 밝지 않아 보인다. 우선 승리자가 되기 위해 너무 많은 힘을 소모하여 문학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다. 생존에 급하여 가만 앉아서 책을 뒤적거릴 여유가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문학은 믿음이나 힐링을 주는 종교서가 아니라는데 있다. 오히려 믿음을 교란하고 평정을 파괴하는 편에 가깝다는데 결정적 결함이 있다.
/패배하고 좌절하여 스스로 창공의 별이 되는/ 것을 문학의 고유한 힘이라고 한다. 문학의 힘이란 마음의 평정이나 힐링이 아니라, 고뇌와 좌절, 존재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제공하므로써 그 패배에서 맑은 샘물을 길어올리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늘 패배를 하지만 꿋꿋이 걸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 한 번도 맑은 물을 길어올리지 못하지만, 두레박질을 멈추지 않을 힘을 문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한다. /오늘날의 성공과 그것이 초래하는 자기도취를 거부하고 소멸, 실패의 계열에 속하는 '최후의 경험'을 고통스럽게 경험하려는 자 앞에는 의외로 드넓은 지평을 지닌 새로운 경험의 영역이 펼쳐져 있다/ 후지타 쇼조. /다시 시도하라, 또 실패하라, 더 낫게 실패하라/ 사무엘 베케트. 길을 잘못 들기도 하고, 막다른 골목에 막히기도 하고.길이 끊어지기도 하지만 걷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걷는다는 행위다. 문학은 대중적 관심도, 돈도, 추진력도 주지 않지만, 우리가 자기 기만이나 위선을 떨지 않고, 패배나 좌절을 켜켜이 쌓으면서도 걸을 수 있는 힘을 준다. 신화(자본, 종교, 성공) 의탁하지 않고.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사건'으로 한국 문학에 대한 치부와 '주례사 비평'에 대한 한바탕 회오리 바람이 불었다. 한국 문학이 자본에 완전히 항복했고, 상업성에 함몰되어 문학에 고유한 힘을 잃어버렸다는 한다. 그 이면에는 '문학권력'과 거기에 기생하는 비평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비평가가 작가들에게 날카로운 메스를 들이밀지 못하고 유명 출판사나 문학지의 '홍위병'으로 전락했고, 그 홍위병들에 의해 우수작이라 평가받는 문학의 대표주자인 신경숙의 '표절'이 불거지면서 풍파를 일으켰다. 권성우는 비평이 작품의 부속품이나 하위가 아니라, 동등한 장르로서 자리매김 되기를 바란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평가는 철저히 고독해야 하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이해관계나 인간관계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비평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는 의미다. 제목의 비평의 고독은 그 자체로 문학장에 대한 저항의 의도가 있어 보인다.
사실 나에겐 비평이란 생소한 영역이다. 따로 비평문을 읽어본 적이 없다. 비평은 단지 책 뒷면에 작품에 대한 칭찬을 잔뜩 늘어놓거나, 서평 정도로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던 진짜 이유는 그동안 '내맘독'이라고 독후감 비슷한 것을 써 왔는데, 이게 독후감 축에나 드는지 아니면, 낙서 정도도 안되는지 궁금했다. 카페에 올린 이후에 부끄럽거나 창피하지 않은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다. 비평문을 조금 읽어보면 좀 더 낫게 써볼 수 있지도 않을까 하는 심정도 있었다. 다른 수십가지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잘못은 진지하고 성실하게 텍스트를 읽지 않은 점이 아닌가 싶다.이 책에는 김석범의 /화산도/에 대한 비평 에세이가 있다. 김석범은 20년 동안 허무와 자살의 유혹을 물리치면서 평생을 바친 작품이었다는데, 나는 한 사람의 일생과 그의 작품을 너무 쉽게 재단하고 평가하고 심심풀이로 읽엇지 않았나 싶다. 글쓰는 재주야 원래 천박하니 달리 방법이 없지만, 앞으로는 더 넓고 깊게 읽고 싶다.
임화, 최인훈, 서경식, 강상중, 조세희,김원일, 김연수, 김훈, 허준 김석범 등을 다루고 있고.나는 최인훈의 /화두/와 조세희의 /난쏘공/과 서경식의 /소년이 운다/를 구입했다. 임화의 에세이를 조만간 구입할 에정이다. 이 책들을 읽고 이 비평서와 꼼꼼히 대조해 보고 싶다. /문학의 운명 혹은 패배한 자의 아름다움/이란 장의 소제목은 1-스스로 상처가 되는 문학. 2-시인의 고독,결기,자의식. 3-소설가의 절망,침묵,잊힘. 4-문학, 그것은 소수자와 망명자의 언어.다. 권성우는 정치적 올바름과 미학적 품격의 만남에 대한 성찰이 이 비평집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의제로 제시한다. 비평이 그동안 천대받았지 않나 싶다. 비평가가 천대 받으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도 그만큼 얕아지고 천박해지지 않을까?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진은영의 시 중.
첫댓글 앞으로 더 넓고 깊게 읽고 싶다니요!
뭐 두 번씩 읽어야겠다는. 양으로 환산하면 ㅋ ㅋ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