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하다 -한기정
능동적 동사로서의 ‘자유하다’.
내게 주어진 것으로서의 자유를 소극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옷처럼 입고 즐기는 의미로서의 자유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 자유’의 포기를 전제한다. 자의이던 타의이던 포기각서에 서명한 것이다. 타인과 나누는 ‘관계적 자유’만이 존재한다. 그 자유의 타협점을 찾는 것이 삶의 과제이며 난제다.
남편의 고교 산악반 동기, 후배와 그들의 아내들이 부부동반 모임으로 만나기 시작한 것이 몇 년 된다. 남편들이 자기들끼리만 놀지 말고 마나님들에게 적절한 아부를 하는 것이 정년 후를 위해 보험 드는 것이라는 견해에서 시작됐다.
여름에는 팔월 초순경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만난다. 일명 ‘물텀벙’이다. 아침갈이 같은 길 없는 계곡을 찾아가 물길을 따라 첨벙첨벙 걷는 것이다. 신발도 양말도 바지도 심지어는 윗도리도 적시며 걷는다. 젖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일부러 적시기도 한다.
마침 큰물이 들어 행사를 건너뛰는 해도 있지만 매년 모임을 비슷한 시기에 시도하는 것이 원칙이다. 여름의 한 가운데에서 물이 풍부하고 볕이 내리쪼이는 때를 고른다. 햇살이 따가워야 젖은 옷이 잘 마르지만 하늘을 내가 원하는 대로 조작할 수 없는 법이니 그저 물길이 너무 급하거나 깊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팔월이 왔고 ‘물텀벙’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방동약수터에서 시작해 아침갈이로 가는 길은 사륜구동 자동차가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 바닥이 울퉁불퉁하고 굴곡이 심하다. 좁기까지 해 맞은편에서 차라도 오면 길가 나무와 풀들이 자동차 바퀴에 수모를 당해야한다.
자동차가 지날 때 나뭇가지들이 차창을 때리고, 바닥은 자유로워 차안의 우리는 끊임없이 상하좌우로 흔들린다. 갈비뼈에 골절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로데오 말 등에 올라탄 듯 흔들리며 우리는 십대처럼 연신 키득댄다. 이것이 ‘물텀벙’의 애피타이저다.
‘물텀벙’은 물 흐르는 계곡을 철버덕 철버덕 걷는 아주 단순한 놀이다.
물에 빠지지 않으려 애쓰는 걷기가 아니라 일부러 물에 빠지며 텀벙거리는 놀이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물웅덩이를 터벅거려 흙탕물을 여기저기 튀기는 것과 비슷하다.
수영도 아니고 낚시도 아니다. 높은 지력도 대단한 담력도 필요하지 않다. 준비물도 필요없다. 물 빠지는 신발과 스틱만 있으면 된다. 한 돌 지난 후 오랫동안 해왔던 걷기를 계곡물 따라 하는 것이다. 무릎 아프기 전에 해야 할 존재확인의 산행과 같은 처연한 도전이 아니다.
갈아입을 옷과 물, 간단한 간식을 넣은 배낭을 메고 스틱을 짚고 자갈이 울퉁불퉁한 계곡을 따라 걷는다. 맑은 물 속으로 바닥의 돌맹이와 굵은 모래가 얕게 들여다보이고 주변 산은 알프스의 산자락을 연상시킨다.
그 안온함은 고향집 툇마루에 누워 내다보는 여름 한 낮의 나른한 들판 같다.
발을 담그기 직전의 조심스러움은 사라지고 물에 나를 맡기며 자유를 만끽한다. 미끄러운 돌들을 살펴 밟으며 발목을 적시고 무릎까지 물을 채운다. 자칫하면 벌러덩 나가떨어지기 십상인데 그것도 재미다. 순간 엉덩이가 젖어 오줌 싼 아이처럼 되지만 엄마에게 야단맞을까봐 울지 않아도 된다.
브래지어가 젖을 만큼 물이 깊은 곳에서는 배낭을 이고 조심조심 피난민처럼 개울을 건넌다. 한손에 모아 잡은 스틱은 이미 물에 잠겼고 가슴까지 찬 물에 가벼운 공포와 스릴을 맛본다.
얕은 물가로 걸어 나와 홀딱 젖은 옷가지에 조금쯤 겸연쩍어지지만 뭐 어떤가, 물에 빠졌으면 그런 거지. 바지가 달라붙어 팬티 입지 않은 모양이 되더라도 뭐, 입었는데 뭘. 너도 나도 예외 없는 물에 빠진 생쥐 모양에 안도한다.
비가 쏟아진다.
손이 모자라 우산을 쓸 수도 없지만 쓰고 싶지도 않다. 자연에 온전히 나를 내맡기는 일을 언제 할 수 있을까. 도시여인들이야 더욱.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도시여인들은 더더욱.
쏟아지는 빗방울은 잔잔했던 수면을 젖유리처럼 만들고, 물 속의 작은 물고기들은 내 다리의 각질을 입질하며 닥터 피시인양 군다.
‘물텀벙’에는 언제라도 찾아가 만날 수 있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 같은 안도(安堵)가 숨어있다. 꾸밀 것도 애태울 것도 없이 나를 온전히 개울에 던짐으로 얻는다.
아침갈이 계곡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내가 원할 때 그것을 찾고 그것을 끌어안으면 된다. 날 거부하지도 차별하지도 않는다.
‘물텀벙’이 끝나는 순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물에서 발을 빼는 그 순간부터 다음 ‘물텀벙’을 기다린다. 오후 빗긴 햇살에 물방울 맺힌 나뭇잎들의 반짝임과 촉촉하면서도 시원한 자연바람을 뒤로 하고 올해 ‘물텀벙’을 마무리 지으며 어김없이 아쉬워한다.
든든한 보호자인 남자들이 있고 얘기 벗 여자들이 있어 ‘물텀벙’은 더욱 ‘자유’하다.
내게 있어서 ‘물텀벙’은 ‘자유’와 동의어다.
2012년 서초수필회 동인지 ‘없다’가 사라진 식탁에 게제
林谷 한기정
thoth52@naver.com
이화여자대학교 특수교육과 졸업
교육학박사
이화여자대학교 연구원
미국 워싱턴주 한인생활상담소 상담원
중앙대학교, 경인교육대학교 겸임교수
강북장애인복지관 자문위원
서울미술제 초대작가, 심사위원
이화여자대학교 이화문학회 수필부장
송파문인협회 한성백제 백일장 금상 수상
현대수필 등단
서초수필문학회 회원
현대수필문인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 펜클럽 회원
전공서적 특수유아교육, 아동미술과 특수아동미술 외 다수
논문 유아의 창의성 교육을 위한 철학적 심리학적 기초 외 다수
수필집 「어찌 지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