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영혼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곳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차지하게 하신다. 그곳은 드넓은 곳, 바다, 깊이를 잴 수 없는 대양이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마이스터 엑카르트
"김 목사님, 바닷가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거요?" 물이 겁나서 선뜻 카누에 올라타려 하지 않는 나를 놀리며 홍 목사님이 던진 한 마디다. 홍 목사님은 순천에 있는 평화학교의 교장선생님이시다. 얼마 전, 기독교 계통의 출판사에 몸담고 있으면서 나와 호형호제 하는 곁님들이 계동을 찾은 적이 있는데, 홍 목사님도 카누 두 대를 이끌고 그 일행과 동행하셨다. 배라고는 남해에서 살던 시절 유람선을 타 본 게 고작인 나로서는 카누를 TV에서 잠깐 보았을 뿐 직접 본 바도 없고, 손수 노를 저어 배를 몰아본 적도 없었기에 카누를 탄다는 것은 여간 두려운 게 아니었다. 일행이 카누에 올라타서 계동 바다를 휘젓고 다닐 때, 나는 몽돌 구르는 해변을 하릴없이 서성거리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바닷가에 살고 있는 나는 물을 좋아하면서도 물을 겁내는 편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에는 해빙기에 강으로 나가서 성엣장(流氷)을 타고 놀다가 익사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강가로 빠져나와서 덜덜덜 떨다가 겨우 옷을 말리고 밤이 이슥해져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동네 아이들이 이미 내 어머니에게 고자질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날 밤 나는 어머니에게 오지게 맞았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졸지에 잃을 뻔한 어머니는 "다시는 성엣장을 타지 않겠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받고서야 매질을 멈추셨다. 중학교 2학년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제천의 청풍강―지금은 충주호로 바뀌었음―으로 장마고기를 잡으러 간 적이 있었다. 강물이 쉽게 불어나는 장마철이 되면 물고기들은 급류를 피해서 강가로 몰려나오곤 하는데, 그때 강가의 풀숲에 반두를 대고 풀숲을 마구 밟아 휘저으면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가 반두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렇게 잡힌 민물고기로 어죽을 끓여먹으면 그 맛이 가히 일품이었다. 물이 불기 전 강 중간에 조그마한 섬 같은 게 있었는데 거기까지는 물이 깊지 않았다. 아버지와 나는 그곳으로 건너가서 신나게 장마고기를 잡았다. 어찌나 신나게 천렵을 했는지 강물이 부는 줄도 몰랐다. "아가야, 물이 많이 불었구나. 서둘러 건너가야겠다."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에 건너편을 바라보니 불어난 강물이 둔치에 있던 참외밭까지 삼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당신의 허리를 꼭 잡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나는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다. 아버지의 허리를 꼭 붙잡고 따라가는데, 강바닥의 진흙탕이 자꾸만 내 다리를 잡아당겼다. 허리까지 푹푹 빠졌다. 아버지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덜컹 겁을 집어먹고서 아버지의 허리를 놓치고 말았다. 천천히 따라갈 테니 먼저 건너가시라고 말씀드리고 나서 나는 방향을 돌려 방금 전까지 고기를 잡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물은 점점 불어나서 섬 같은 그곳을 야금야금 삼키고 있었다. 이미 강을 다 건너가신 아버지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르실 뿐이었다. 그런데 강 위쪽에서 젊은 아저씨 한 분이 거센 물살을 헤치면서 나 있는 곳으로 헤엄쳐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내 허리만 꼭 붙잡아라. 절대로 놓치지 말아라." 그 아저씨는 숨을 거세게 몰아쉬시면서 말씀하셨다. 나는 그 아저씨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그 아저씨는 나를 허리춤에 매달고 다시 거센 물살을 헤치면서 조금씩 아래로 헤엄을 치셨다. 그 아저씨의 목숨을 건 구조 덕분에 나는 급류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참말이지 고마운 분이 아닐 수 없다. 백짓장처럼 하얗던 아버지의 얼굴에 비로소 혈색이 돌았다. 아버지는 그 아저씨에게 연신 고맙다며 머리를 조아리셨다. 그날 아버지와 나는 부리나케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때 그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때의 아찔한 기억이 지금껏 나를 따라다니면서 물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내가 살아오면서 밟아온 지리적 경로를 살펴보면 강원도 횡성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차츰차츰 물이 많은 곳으로 옮기다가 기어이 물가에 닿지 않았나 싶다. 내가 닿은 물가는 여수(麗水)의 돌산 계동이다. 여수는 글자 그대로 물이 아름다운 곳이다.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바다 위에 떠 있고, 파도마저 순하여 호수처럼 푸르고 잔잔한 수면을 자랑한다. 돌산 계동은 나지막한 산들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마을이 바다를 편안하게 굽어보면서 따스한 경치를 이루는 곳이다. 바로 그 계동의 바닷가에 갈릴리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창문을 열면 파도소리가 무시로 들리고, 게들이 수시로 예배당을 찾는다. 하느님은 이토록 아름다운 물가에 나를 풀어놓으셨다. 그런데도 나는 물가에서 서성거리기만 할 뿐 선뜻 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물을 겁내지 말고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라는 그분의 초대를 나는 제대로 받아 모시지 못했던 거다. "카누를 메고 조금만 걸으면 물가에 닿으니, 카누 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군요." 하면서 홍 목사님은 두 달 동안 무료로 임대해주시겠다는 말씀과 함께 카누 두 대를 갈릴리교회에 내려놓고 가셨다. 그렇게 해서 나의 카누 타기는 시작되었다. 때로는 아내와, 때로는 나의 두 아이와, 때로는 마을의 중학생들과, 때론 손님과 함께 카누에 올랐다. 나는 전혀 새로운 경험의 세계에 뛰어든 아이 같이 카누를 타고 계동 바다의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카누를 타고 무인도에 가본 적이 있는가? 계동 바닷가에서 왕복 두 시간이 족히 걸리는 무인도 불무섬에 난생 처음 발을 들여놓던 일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고, 곰솔, 돈나무, 동백나무 등이 거주자인 불무섬은 간조 시에 돌산 본도와 연결되어 자신의 비밀을 열어 보이기도 한다. 불무섬으로 가려면 계동의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 노를 저어가야 하는데, 이때 맞닥뜨리는 경치는 벌어진 입을 쉬이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기이한 형상의 갯바위와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시야를 막아서고, 낭떠러지 꼭대기에 무리지어 핀 원추리 꽃 군락은 보는 이의 시선을 슬쩍슬쩍 낚아챈다. 운이 좋으면 리아스식 해안을 따라서 자맥질하는 수달을 볼 수도 있다. 속도를 자랑하는 발동선이나 유람선을 타고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광경들이다. 혹자는 나를 보고 목회는 안 하고 놀기만 한다고 나무라겠지만, 나는 카누를 타고 심방이라는 것도 한다. 김경곤 집사님 내외가 홍합 양식장에 줄을 띄우던 둘째 날, 나와 아내는 손수 담은 매실음료를 듬뿍 챙겨 짊어지고서 카누에 올랐다. 목적지는 계동 해변에서 400여 미터 거리에 있는 김 집사님 내외의 홍합 양식장이다. 방파제에 도열하고 선 채 수면을 응시하는 갈매기 떼를 뒤로하고 쉬엄쉬엄 노를 저어 양식장에 이르니, 바지선 위에서 양식용 줄을 띄우는 작업이 한창이다. 놉으로 오신 동네 아주머니들의 손길이 어찌나 잰 지 눈으로 따라잡기가 힘들다. 김 집사님 내외가 환한 얼굴로 맞이하신다. 동네 아주머니들도 어서 바지선으로 올라오라고 성화시다. 바지선에 올라서 아주머니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우리 내외의 눈에는 마냥 신기할 따름인 그분들의 일하시는 모습을 차근차근 살핀다. "이렇게 굵은 줄 하나에 6미터 가량의 가는 줄을 120개 정도 매달고, 가는 줄 마디마디에 홍합 종패를 끼워 넣어 바다에 내리면 됩니다."




김 집사님의 자상한 설명을 따라서 부이가 달린 굵은 줄을 세어보니 어림잡아도 서른 개는 되어 보인다. 태풍 피해만 입지 않으면 올해 홍합농사는 풍작일 거라고 하시는 김 집사님의 얼굴이 홍합의 속살만큼 불그스레하게 그을려 있다. 너울 따라 출렁이는 바지선을 타고 일하시는 김 집사님 내외의 고단하지만 희망에 부푼 삶이 짠하게 다가온다. 나는 하느님께서 김 집사님 내외의 부푼 희망을 꼭 이루어주시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가져간 매실 음료를 내놓자 때마침 새참 먹을 시간이라며 김 집사님의 아내이신 백 집사님이 수박을 쪼개신다. 아주머니들과 함께 수박과 음료를 나누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운 뒤 노를 저어 돌아오는 우리 내외의 마음은 카누처럼 씽씽 물살을 갈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이렇게 바닷물을 가까이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오! 푸르고 푸르다. 갈매빛깔의 바닷물이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두텁다. 너무 깊어서 그윽하다! 노 젓기를 멈추고 시푸른 바닷물에 발을 담근다. 물고기 비늘 모양의 작은 너울들이 발을 간질인다. 시원하고 상쾌한 기운이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두루두루 훑고 지나간다. '은총의 바다'라는 말이 마음의 수면으로 두둥실 떠오른다. 산골 물이어도 좋고 냇물이어도 좋아, 빗물이어도 좋고 허드렛물이어도 좋고 냄새나는 구정물이어도 좋아, 냇물이면 어떻고 강물이면 어때, 기쁨이면 어떻고 슬픔이면 어때, 낮고 낮은 곳에 처하여 받아들이지 않음이 없고, 그저 품고 품어 시푸른 빛깔을 짓고, 무수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뭇 생명을 손짓하여 부르니 어찌 은총의 바다가 아니랴? 아주 오래 전에 받았으나 한동안 갈무리하지 못하고 밀쳐두었던 초대장을 마음의 갈피에서 꺼내 읽는다. '물가에 너를 풀어놓았으니 너는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살아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겹게 고마운 초대다. 초대장을 읽는 눈이 안개가 걷힌 듯 환해진다. 더 이상 서성거릴 일이 없다. 목말라할 일은 더더욱 없다. 그냥 뛰어들어 자맥질하면 그만인 것이다. 물 속에 둥지 튼 싱싱한 생명이 물살을 가르며 헤엄치듯이, 신적 은총의 바다 한가운데서 무자맥질하면 그만인 것이다. 은총의 바다는 어떤 곳인가?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말한다. "하느님은 영혼을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한 곳으로 데려가셔서 그곳을 차지하게 하신다. 그곳은 드넓은 곳, 바다, 깊이를 잴 수 없는 대양이다. 바로 거기서 하느님은 자비를 베푸신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자비의 대양, 곧 은총의 바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무자맥질하고 있다. 우리만 홀로 하는 무자맥질이 아니라 같은 바다에서 다른 피조물 형제자매들과 어우러져 하는 무자맥질이다. 자비와 은총의 바다에는 독차지나 독식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 은총의 바다에 뛰어든 자에게는 신적인 은총을 함께 들이마시고,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누고, 함께 어우러져 춤추는 일이 있을 따름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만물이 서로 의존하고 있음을 환히 깨달은 자들의 푸짐한 잔치자리, 그것이 다름 아닌 은총의 바다다. 은총의 바다에서 이루어지는 자맥질은 무엇을 내용으로 하는가? 그것은 감사와 찬미를 내용으로 하게 마련이다. 감사와 찬미는 은총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고, 은총을 감지한 사람의 입술에서 터져 나오는 벅찬 노래다. 또한 그것은 하느님의 낯을 향해 피워 올리는 노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이스터 엑카르트가 말한 대로, 은총이야말로 하느님의 낯이기 때문이다. 감사는 모든 피조물이 가장 많이 품고, 줄기차게 부르는 참으로 바람직한 노래다.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의 노래가 터져 나오는 순간, 만물은 환호를 지른다. 그 이유는 만물의 가슴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에너지가 감사이기 때문이다. 나는 은총의 바다에 카누를 띄우면서 사람의 영혼이야말로 카누와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영혼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마음이라는 말로 옮겨도 좋으리라. 사람의 마음이 카누라면, 사람은 누구나 영적 여정에 필요한 탈것을 한 대씩 갖추고 있는 셈이다. 시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에 매몰되지 않고 정지된 시간 경험을 향해, 곧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카누를 말이다.



카누를 타 본 사람은 알리라. 카누는 어느 한 자리에 정체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카누는 닻이 없는 까닭이다. 떠 있는 곳이 온통 은총의 바다인데 굳이 닻을 갖출 일이 무어 있겠는가? 설령 머물고자 해도 어느 한 지점에 머무는 것은 순간이다. 정체(停滯)는 집착(執着)의 자식일 뿐이다. 카누는 말한다, 무언가에 만족하여 멈추어서도 안 되고 사물이나 대상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사는 방식이 어떠하건 간에 이 세상에 정체해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물살을 씽씽 가르고, 때로는 은총의 바다가 지어내는 흐름에 온몸을 맡기라고. 마음을 쓰는 일, 곧 영적 여정은 카누를 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카누의 소임은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 자기라고 할 만한 것을 지니지 않으므로 카누가 가는 곳은 어디나 은총의 바다다. 그야말로 넘실대는 바다다. 그 바다에서 무엇을 마주하건 간에 그것을 최상의 것으로 삼지 않으니 매임이 없다. 탐착(貪着)이 없어서 실로 탐탁하다. 비면 빌수록 가는 길은 더욱 힘차고, 여정은 더욱 가뿐해진다. 하는 일마다 사욕을 꾀하거나 탐욕을 부리는 짓을 카누는 도무지 모른다. 그랬다가는 은총의 바다에 뜨기는커녕 끈적끈적한 늪에 빠져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음을 아는 까닭이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나그네(여행자)로 와서 나그네로 삶을 마감한다. 저마다 마음이라는 카누를 타고서 은총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여행자라면 알 것이다, 길을 떠나는 자의 마음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수님은 길 떠나는 자에게 이렇게 당부하신다. "길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밖에는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빵이나 자루도 지니지 말고, 전대에 동전도 넣어 가지 말고, 다만 신발은 신되, 옷은 두 벌 가지지 말라(마가 6,8-9)." 우리가 영적 여행길에 올라 있음을 망각할 때, 우리의 카누는 빵과 자루와 전대와 동전과 욕망덩어리를 넣어두고 보관하는 창고로 전락하고 만다. 그때부터 카누는 꽉 찬 채 뜰 줄을 모르고, 은총의 바다는 종적을 감추고, 그 자리에 거대한 늪이 똬리를 틀고 만다.


나는 이 아름다운 녹색별에서 실패한 여행자로 남고 싶지 않다. 내 사랑하는 임께서 나를 이토록 아름다운 물가에 풀어놓으셨으니 물가에서 서성거리는 일은 이제 끝이다. 나는 온갖 생명이 어우러져 벌이는 환희의 춤판으로 막 뛰어들기 시작했지만, 아직 마땅한 춤사위를 펼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면 어떤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여 부르는 바다가 있고, 손을 잡아끄는 춤꾼들이 무수히 많은데. 다만 나를 실어 나르는 카누를 부지런히 살피고, 그 속에 짐스런 것들을 들여앉히지 않으며, 신적인 흐름을 온몸으로 타면 그만인 것이다. 그러면 내 카누는 비할 데 없이 가벼워져서 나를 은총의 바다 구석구석으로 데려갈 것이고, 나는 순간순간 밀려오는 벅찬 감동의 파도를 놀람과 감탄으로 마주할 것이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감사의 노래가 무시로 터져 나올 것이다. →김순현 |
첫댓글 깊은 글에 깊이만큼 빠져들 수 없는 영성으로 다가갑니다. 손님의 모습으로 그 카누에 몸을 의지하고 갈릴리 교회 앞 바다를 떠 다녔던 며칠전 기억으로 단상의 일기를 시리즈로 쓰고 있었습니다. 제목을 카누로 해서 글을 올리려다 이렇게 놀람으로 멈칫합니다. ^^ 하하하, 올릴 일기 제동하는 핑계꺼리 낚았습니다.
새벽으로 치닫는 시간 갈리리 교회서 예배드림 같습니다. 뵈었던 모습과 말씀의 일치를 느끼며 노젓다 갑니다. 별꽃사모님, 한샘, 한솔이... 쨘하게 생각납니다. 은총을 실어나르는 수레에서 카누로...삶을 창조하는 영성의 깊은 맛에 목을 축이다 갑니다. ^^
좋은 글, 함께 나누고 싶어서 감신86카페에 옮겨놓습니다. 뒤늦은 허락을 구합니다.^^
지난 여름 지리산 구례에서 열렸던 독서캠프에 고진하 목사님과 함께 오셨을때 참 오랬만에 뵈었습니다. 에전 남해에서처럼 신비한 모습, 언제쯤 저도 그 참한 모습을 닮아볼까요!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글에 ....예쁜 사진이 있을 법 한데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왜지요???? 기독교 사상 8월호 홍 목사님 사진도 잘 나왔고요...
부족한 글 함께 읽어주셔서 제가 고맙습니다. 제 눈에는 잘 보이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로그인 한 상태에서 보시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