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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책 없는 삶이 가능할까?
최근 나는 책을 거의 읽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책도 거의 사지 않는다(한때 나는 매달 100만원어치씩 책을 사다 날랐다! 도대체 그렇게 많은 돈이 어디서 난 것인지 스스로도 의문이다). 확실히 이것은 나에게 있어 이상한 상황이다. 왜냐하면 책은, 그리고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언제나 내 삶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즉 내 일과의 대부분은 글을 쓰는 경우는 제외하고는 대부분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런 나에게 지하철은 당연히 이동하는 공간이기보다는 독서하기 좋은 공간이었다(왜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 집중이 잘되는 것일까?). 그래서 아이와 동행하지 않는 길이면, 항상 차(몇 년 전 10년 넘은 중고차를 한 대 구입했다)를 집에 두고 나온다(물론 이것은 주차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신간서적 검색은 물론이거니와 신문에 서평이나 문예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지 오래다. 사정이 이러하니 최우수고객이었던 인터넷서점의 회원등급은 일반회원으로 떨어졌고(최근 세달 간 구입한 책값이 0원이다), 책 한권 사달라고 날아오는 인터넷서점 이메일은 아예 열어보지도 않았으며, 얼마 전에는 아예 스팸메일로 설정해 놓았다. 아니,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스스로도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책이 없는 삶도 가능했던 것이다! 흔히 책은 문화나 교양의 중심이며, 독서야말로 교양인의 증거, 삶을 보람되게 사는 수단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그것은 전부 출판계와 교육계가 만들어낸 환상(강박관념)인지도 모른다.
실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과 무관하게, 그러나 아무런 불편 없이 잘 살고 있다. 즉 독서(책)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있는 ‘기호(嗜好)문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꼭 야구를 좋아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일 년에 책 한 권 읽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업자들의 입장에서는 양쪽을 다 즐겨준다는 더욱 좋지만, 강요할 사항은 아니며, 또 강요한다고 해서 될 문제도 아니다. 그러므로 최근 불고 있는 ‘교양문화’운동(세계문학전집 붐, 고전읽기 운동, 대중인문학 등등)은 기본적으로 오타쿠적 운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2. 한국문학가들의 혜안(慧眼)
한국작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교수가 되어 생활이 안정되면, 그 후로는 소설을 제대로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비평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젊은 시절 열심히 글을 쓰던 비평가들도 대학에 자리를 잡고나면, 사실상 ‘비평가 폐업’을 하기 일쑤이다(그들은 ‘연구자’로 전환했다고 말한다). 물론, 메이저문예지의 편집위원들처럼 적잖은 대외적 ‘권력’(낯간지러운 단어지만, 마땅한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그대로 사용한다)을 가진 사람들은 예외이다. 하여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현상을 한국문학가들의 게으름(현실안주)로서 비판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모순적인 태도였다는 반성이 든다.
왜냐하면 “한국문학은 빈곤하다”는 것이 나의 핵심주장이라고 할 때, 어떤 작가가 몇 편의 출세작으로 안정된 직장과 생활을 얻었다면, ‘굳이’ 문학을 한다고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 필요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존경한다고 말하고 싶다. 소설가로서 자리를 잡고 소설을 쓰지 않으시는 분들, 비평가로서 교수가 되고 비평을 하지 않으시는 분들을, 아니 그들의 현명함을. 나의 비판이 ‘부정적으로나마’ 도리어 한국문학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면, 그분들의 문학에 대한 ‘적절한’ 무관심이야말로 실은 한국문학의 목을 제대로 내려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새로운 풍경의 등장
하지만 문제는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아직 그와 같은 현명함을 드러낼 만한 조건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문학을 문제삼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데, 그런데 최근 문학은 물론이고 책 자체에 무관심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대충 짐작한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범인은 스마트폰이다. 사실 나는 기계에 대한 욕심이 많은 얼리어답터와는 거리가 멀지만, 나도 모르게 지난 1년 사이 고가의 스마트폰을 세 개째 쓰고 있다. 그렇다. 내 책값이 모두 기기변경을 하고 위약금을 무는 데에 들어갔다. 아! 그런데 올해는 또 듀얼코어를 탑재한 새로운 놈들이 예고되고 있다. 나는 과연 지름신에 저항할 수 있을까?
이미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새로운 폰에 적응하는 데에는 적어도 한두 달은 걸린다(OS가 다른 폰이라면, 그보다 조금 더 걸린다). 적어도 이 시기는 고상한 문학이나 고차원적인 인문학 따위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는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모두가 느끼는 것이지만, 1년도 안 되어 지하철의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에는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으나(물론 DMB를 보는 사람도 종종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영화를 보는 사람도 있고 카카오톡을 하는 사람도 있고, 트위터를 하는 사람도 있고, 게임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당연히 나도 언제부터인가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읽지도 않을 것을, 무겁기만 하고, 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데도 시간이 부족하기에.
문학의 위기 또는 위축이 이야기될 때마다 자주 그 범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영화이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인적 이동의 관점에서 볼 때도 쓸 만한 인재들 대부분이 영화판(간혹 이쪽이 여의치 않아 문학판으로 되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그들이 영화에 대한 환상을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다)으로 달려간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니 문학계에 진입하는 사람들은 오로지 ‘문학’ 또는 ‘문학가’라는 낡을 대로 낡은 환상 하나만 믿고 있는 문창과(상대적으로 들어가기가 쉽다) 학생들이나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자유로운 독신여성이나 주부들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영화가 문학의 경쟁자라기보다는 동행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영화의 발전이 문학을 위축시켰다는 생각은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며, 많은 실례가 보여주는 것처럼 둘 사이에는 긴밀한 공생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즉 영화의 성공은 원작소설의 판매로 이어지고, 원작소설의 성공은 영화의 성공을 보장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학의 적은 무엇일까?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것은 스마트폰이다.
문학, 그리고 그것이 몸인 책이 가진 최대의 강점은 누가 뭐래도 휴대성과 경제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그(심지어는 문고판)보다 더 작고, 더구나 오늘날 신체의 일부분이 된 휴대폰의 형태를 갖고 있어서 사실상 추가되는 부피나 무게는 전혀 없다. 뿐만 아니라, 사실상 콘텐츠가 무한하기 때문에(e북은 물론이고) 매우 경제적이다.
더구나 스마트폰에는 책(문학)에는 없는 능동성이 구현되어 있다. 이 무슨 말인가? 주지하다시피 스마트폰(태블릿PC를 포함하여)은 소비형 기기다. 노트북(PC)처럼 생산적인(입력) 작업을 하기에는 적잖게 불편하다. 하지만 이것이 마냥 소비형 기기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스마트폰의 핵심서비스인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기존 PC보다 훨씬 빠른 전달속도로 수많은 새로운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 물론 이런 콘텐츠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콘텐츠에 유효기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속도 그 자체가 콘텐츠 자체의 빈곤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즉 메시지는 수신자에게 제대로 도착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게 아니라, 언제 도착했는지(또는 행방불명되었는지)에 대해서도 평가되어야 하는 셈이다.
4. 소비되는 메시지
모든 텍스트(콘텐츠)에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하지만 메시지가 해당 텍스트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다. 즉 어떤 콘텐츠가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수신자에게 영향을 끼치려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능동적/생산적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콘텐츠는 명칭으로부터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소비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매일 인터넷, 신문, TV로 국내외 소식을 보거나 듣는다. 이때 우리가 접하는 뉴스들(콘텐츠)은 과연 생산형일까 소비형일까? 아니, 질문을 바꾸어보자. 도대체 우리는 언제 움직이는(행동하는) 것일까?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당시 서울광자에 모여 촛불을 밝힌 군중들의 능동성을 어디에서 온 것일까?
소고기 수입, 광우병을 둘러싼 오해와 은폐, 그리고 불신 속에서 결정적으로 그들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콘텐츠(뉴스, 괴담, 여론)에 담긴 어떤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해결된 것도 없는데, 그들은 왜 흩어진 것일까? 정부의 탄압 때문에? 그렇지 않다. 이 부분에서 많은 논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특히 촛불집회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그들은 애당초 왜 모였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콘텐츠가 가진 소비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어떤 콘텐츠에 담긴 나온 메시지가 반드시 도착한다(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식의 단선적인 사고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리해 보자. 미디어는 메시지가 아니라 콘텐츠다. 그렇다면, 콘텐츠란 무엇인가? 그것은 메시지를 소비함으로써 유지되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형체가 없는 용기이다. 바꿔 말해, 하나의 콘텐츠에 들어있는 메시지는 다수이며, 그것들은 소비되어 사라짐으로써만 스스로를 전달한다. 그렇다면 콘텐츠가 전달한다고 가정하는 하나의(궁극적인) 메시지(즉 소비되지 않는 메시지)란 도대체 무엇인가? 여기서 분명히 말하지만, 단 하나의 메시지, 즉 ‘생산적인 메시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메시지는 오로지 ‘소비적으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말하는 소위 ‘생산적인 메시지’라는 것도 실은 메시지 소비의 특정(단절된) 국면에 지나지 않는다. 즉 생산은 소비될 때야 비로소 인식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의 문학작품(또는 책)을 하나의 콘텐츠라고 했을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소비대상이다. 어떤 소설이나 인문서를 읽고 왠지 풍요로워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무언가를 얻어서라기보다는 그곳에 들어있는 메시지를 소비함으로써 얻은 만족감 때문이다. 어떤 이는 양서(良書)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얻었다고 말하곤 한다. 개인적 독서에서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에 이의를 달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여기서 사용된 ‘얻었다’는 표현만큼은 ‘해소했다’로 바꾸고 싶다.
왜냐하면 이때의 만족감은 무언가 새로운 것이 도입됨으로써 일어난 사태라기보다는, 정리되지 않은 자신 안의 무엇을 언어화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 안 되는 것은 메시지 소비란 그 자체로 어느 정도 능동적이라는 말이다. 아니 소비라는 것만큼 능동적인 것은 없다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생산이란 이와 같은 능동성의 굴곡(속도가 저하되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5. 콘텐츠와 미학
언제부터인가 ‘문화콘텐츠’, ‘서사콘텐츠’, ‘문학콘텐츠’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많은 문학자들은 여전히 이런 표현에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문학은 단순히 콘텐츠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콘텐츠+알파’가 문학이고, 문학을 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바로 이 ‘알파’를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당연히 이 ‘알파’는 ‘문학성(문학적인 것)’을 가리킨다 하겠다). 그렇다면, 그들이 말하는 알파란 무엇일까? 메시지? 물론, 아니다. 문학을 문학답게 만드는 것은 메시지를 넘어서 있는 무엇, 보통 ‘미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미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물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닐 뿐더러, 그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문학주의자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찍이 있어왔던 ‘미적인 것’(문학적인 것)에 대한 논의에 한마디를 더 보태는 대신, 이를 약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적인 것은 메시지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방금 이야기한 것처럼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메시지가 아닌가? 그러고 보면, 메시지 없이 미적인 것이 존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런 이율배반은 우리로 하여금 미적인 것을 메시지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정의하게 만든다. 미적인 것이란 결국 ‘메시지 소비’에 다름 아니라고 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앞서 우리는 콘텐츠란 메시지를 소비함으로써 유지되는 용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소비한다’는 것의 의미를 좀 더 명석하게 표현하지 못한 것 같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되물을 필요가 있다. 메시지가 소비되기(해소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분석가능성’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비평은 예술작품에 대해 경외감을 표현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예술작품에는 논리적으로 분석불가능한 무엇인가가 있다는 믿음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비평행위의 불가능성을 예술작품의 불가능성으로 착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즉 비평과 작품 사이에 괴리가 존재하는 것은 작품에 메시지 이외의 잉여(+알파)가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위 예술체험에서 발생하는 잉여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것은 바로 비평행위(읽는 행위)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예술감상에 존재하는 다양성은 예술작품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들 쪽에게 존재한다. 예술작품은 기껏해야 그런 다양성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일 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문학주의자나 미학주의자들의 통념과 달리 미적인 것이란 본래 역사적인 것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해당 텍스트가 어떻게 생산(구성)되고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소비(해체)되고 있는지 라는 점이다.
최근 들어, 황석영은 ‘문화콘텐츠’라는 말을 곧잘 입에 올리며 예비 작가들이 반드시 읽고 공부해야 할 책으로 <구비문학대계>를 들었다. 우리는 이를 단순히 그가 문학을 산업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고 비판하는 데에 그치기보다는, 문학이란 ‘문학적인 것’에서 생기는 것이라기보다는 ‘이야기의 구조’에서 나온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실제로 그의 최근 작품들은 이런 문학관에 충실히 입각하여 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나뉜다. 어떤 이는 황석영의 변화(또는 발전)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황석영의 퇴행으로 보기도 한다.
어느 쪽의 주장이든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물론, 후자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곧장 평가를 곧장 내달리기보다는 조금 물러서서 바라봐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세계적으로 널리 읽힌 하루키의 최근 소설들(『해변의 카프카』나 『1Q84』)로 고개를 돌려보자. 기존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들은 소설로서의 결격요소를 ‘지나치게 많이’ 가지고 있다. 누구든 어렵지 않게 비판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그런 비판대열에 동참하기보다는 결격을 판정하는 기준 자체를 문제삼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어떤 관점에서 결격요소를 문제삼고 있는 것일까? 확실히 고전적인 서사(19세기 리얼리즘 또는 근대소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 작품에서 ‘소설성(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퍼스펙티브)’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이런 소설성의 상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콘텐츠로서의 문학의 등장이라고 본다. 어떤 통일된 하나의 시점(우리가 앞서 언급한 문학적인 것은 사실 여기에 기거하고 있다)의 상실은 다른 말로 수많은 이야기들(또는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로의 분할을 의미한다. 즉 『해변의 카프카』든 『1Q84』든 기본줄거리만을 놓고 보았을 때 지극히 소박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아버지 살해, 그리고 소년 소녀를 만나다), 그런 소박함에 포섭되지 않는 수많은 크고 작은 이야기들이 본(本)이야기 주위를 돌면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루키의 소설에서 어떤 메시지를 읽어내려고 하면(하루키 소설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선택하는 입장),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는 그의 소설에서 ‘문학적인 것’을 읽어내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하루키에 대해 비판적인 논자들이 주로 취하는 입장). 그의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메시지도, 그런 메시지를 넘어선 것도 아니라고 했을 때, 그제야 우리는 그것이 콘텐츠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사용한 표현을 되풀이 하자면, 그의 소설은 메시지를 소비함으로써 유지되는 일종의 용기이다.
근대소설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쉽게 말하면 다양한 형태로 변형가능한 원형적인 이야기 구조(프로프를 떠올리시면, 되겠다)에 시간(아무리 복잡한 기법을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한 지점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발견되지 않는다)이 투입됨으로써 지상에 발을 두게 된 서사물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문제의 하루키 소설은 어떨까? 그것은 이야기를 오로지 이야기의 차원에 머물게 하는 서사물이다. 이야기를 이야기 차원에 머물게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이야기를 공간적인 차원에 가두는 것이다.
이렇게 바꿔 말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본래 이야기란 메시지와는 무관하다. 아니 메시지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의 메시지는 어디까지나 ‘소비되는 메시지’이다. 그것은 청자(독자)를 능동적으로 탈바꿈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아니 도리어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게 한다. 즉 듣는 자(읽는 자)로 하여금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소비하게 만든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이야기를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의 능동성을 확인한다. 근대소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강한 전염성은 바로 이런 구조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으며, 하루키의 세계적 성공은 독자대중에 대한 폄훼로 향하거나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6. 게임의 현상학
문학(또는 책)의 최대의 적으로 등장한 스마트폰, 그것이 오늘날의 문학에 시사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미래의 서사는 앞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거나 감동시키기보다는 플레이하게 만들 것이다. 스마트폰은 SNS 등을 통해 빠른 속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하는 훌륭한 허브 역할을 한편, 그와는 반대로 순수하게 콘텐츠를 소비하는 제단 역할을 하는데, 우리의 입장에서 흥미로운 것은 당연히 후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새로운 서사(나는 이것을 게임서사라고 부르고 싶다)의 확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에서 구동된 게임영상)
물론 게임 산업은 PC의 등장과 함께,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의 특정 플레이기기(예를 들어, PSP나 닌텐도)의 발전과 더불어 엄청나게 성장하여 지금은 문화콘텐츠 산업의 핵심 분야가 된지 오래다. 하지만 그것들은 추가적인 기기를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전자게임과 자연스럽게 성장한 세대들을 제외하고는 접근성이 떨어졌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이런 문제점을 말끔히 해소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일전에 하루키에 대해 쓴 어떤 글에서 하루키 소설의 등장과 워크맨의 등장(1979년)이 같은 시기였음을 새삼 강조한 바 있다. 즉 음악콘텐츠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일반 오디오든 워크맨이든 큰 차이는 없지만, 후자의 경우 공중(예를 들어, 혼잡한 지하철) 속에서도 음악을 ‘혼자’ 들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며, 이것이야말로 하루키‘적’ 소설과 관련이 있다고 말이다.
게임을 한다는 것, 바꿔 말해 플레이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순수한 형태의 콘텐츠소비다. 게임에 따라 어떤 것들은 메시지를 갖고 있지만, 그것은 그저 소비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도 좋을 것이다. 왜 지금 사람들은 읽는 것보다 플레이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일까? 그것은 고리타분한 비판자들의 흔해빠진 주장과는 정반대로 거기서 어떤 능동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이 그동안 메시지, 아니 그것을 넘어선 무엇(문학적인 것)을 자신들만의 가치로 스스로를 주장하고 보호해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수신자를 완전히 수동적인 위치에 놓는 것이기도 했다. 즉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었고, 이것은 사실상 근대적인 의무교육에 의해 비로소 길러질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플레이한다는 것은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어 서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설사 그 세계가 어떤 원(原)시나리오에 기초하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서의 자유로움은 근대문학에 비할 바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프란시스 후쿠야마(헤겔, 또는 코제브)는 ‘역사의 종언’을 주장한 바 있다. 한때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주장은, 그러나 한국에서 너무 쉽게 폐기처분된 감이 있는데, 우리의 입장에서 이 테제는 여전히 유효한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하는 식으로 정리하자는 말은 아니다.
헤겔주의자들은 인정투쟁이 사라진 시대에 자족적인 행위(놀이)만에 몰두하는 것을 ‘동물적’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문제삼아야 하는 것은 그런 ‘동물적 행위’가 가진 퇴행성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자명한 것처럼 보이는 ‘인간적/동물적’이라는 구분이다. 왜냐하면 이 구분은 ‘현실과 가상’, 그리고 ‘노동과 놀이’라는 이항대립으로 그대로 연장되기 때문이다. 즉 ‘인간’ 쪽에 해당되는 것은 현실과 노동, ‘동물’ 쪽은 가상과 놀이인 셈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진실은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을 인간으로서 보증하는 것은 현실과 노동이라기보다는 가상과 놀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인간적인 것, 그리고 다른 한쪽을 동물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문제의 본질에 도달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기 서로 다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앞서의 논의와 연결하면, 현실과 노동이 메시지라면, 가상과 놀이는 메시지의 소비(이자 생산)이다. 이는 두 가지가 대등한 개념들이라기보다는 후자에서 분리된 개념이 전자라는 것을 의미한다(물론, 이로 인해 후자 역시 전자에 의해 재규정/변형된다). 이는 소위 ‘역사감각의 발견’과 나란히 하는데, 주지하다시피 헤겔은 그것을 ‘인정투쟁’(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설명한 바 있다.
게임이란 기본적으로 역할수행 놀이의 성격을 가진다. 즉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게임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최종적으로 하나의 서사를 완성한다. 즉 공동의 게임저자가 되는 것이다(따라서 더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게임에 일정 정도의 자유가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자유 역시 서사의도에 포함된 것이라 할 때, 게임서사 역시 기존서사(근대문학 또는 책)와 다를 바 없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플레이어의 경우 게임서사의 ‘끝(end)’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책(문학)은 기본적으로 완독되어지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존재이다. 하지만 게임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실제 클리어에 이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일까? 간단하다. 게임서사의 경우는 일반서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요구하여 플레이어의 능동성(형식적으로 그것이 수동적으로 보일지라도)을 지독히도 끌어내기 때문이다.
7. 스마트한 시대의 문화
여기서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는 않겠다. 일반서사를 위협하는 게임서사의 의미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꽤 많은 지면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임서사를 핵심으로 삼고 있는 용기인 스마트폰이 사용자들에게 끼칠 영향에 대해 잠깐 언급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책과 스마트폰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이 아마도 그것들이 가진 핵심역할과 관계가 있을 텐데, 바로 이때 문제로서 등장하는 것이 ‘교육적 기능’이다.
책에 오락적 요소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책에 대한 사회일반의 긍정적인 인식의 근원에는 그것이 담당하고 있는 교육적 역할(메시지를 통해 독자를 변형시키는 것)을 무시할 수 없다(따라서 책은 항상 어떤 공동체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로서 등장한다). 하지만 스마트폰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 물건은 순전히 콘텐츠소비용으로 사용되고 있다(그것도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따라서 다음과 같은 우려가 나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게임형식으로 포맷된 서사소비체인 스마트폰이 자칫 사용자들로 하여금 삶마저도 게임서사로 받아들이게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견 이는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한 플레이어가 현실을 부정하게 되는 것(게임을 하지 못하게 한다고 해서 부모를 살해한 아들 등)보다 더 위험한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회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문학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그것은 인생 자체를 무대로 본 셰익스피어의 통찰(이는 대부분의 예술이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는 무시하기 힘든 차이 또한 존재하는데, 예술이 기본적으로 축제형식에 기대고 있다면, 전자게임은 기본적으로 테크놀로지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촛불집회는 서울광장을 무대로 삼은 연극이었을까? 아니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해 가능해진 콘텐츠소비였을까? 이에 답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중 하나는 지금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막을 내린 연극이었다기보다는 클리어가 되지 않은 상태로 그만 둔 게임 같다는 인상이다. 이런 점에서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갈 서사는 일반서사에서 발생하는 메시지보다는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테크놀로지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작년 한국(물론, 한국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었다)을 풍미한 ‘정의’ 열풍도, 그리고 그 촉매제가 된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도 어떤 메시지와 연관시키는 부질없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지난번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기본적으로 메시지 전달보다는 콘텐츠(사례)소비에 초점이 맞추어진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성공과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추적하는데, MB나 국내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시킬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공한 해가 하필 스마트폰 열풍이 전세계적으로 분 작년이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매체의 변화는 우리의 삶은 물론이고 예술적 형식마저 변화시킨다. 물론 후자의 경우는 변화의 속도가 다소 더디기에 생활이 완전히 바뀐 후에야 겨우 인식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같은 ‘늦음’이 문학적(예술적) 미덕으로서 옹호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시장에서 완전히 클리어될지 모른다. 앞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운(미적인) 예술이 아니라 ‘똑똑한 예술(문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마지막 한 손의 자유마저 포기하면서까지 책을 집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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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게임의 능동성과 비슷한 형식이 앞으로의 서사/문학/콘텐츠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이야기하시는 것 같은데, 이 능동성이라는 것을 명확히 뜯어 볼 필요가 있는 거 같습니다. 요즘의 게임은 환상내용보다 상호작용 혹은 커뮤니테이션에 더 신경쓴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이라는 능동성의 배후에는 '타자'라는 대상을 원하는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인터넷 등장 이전의 게임, 즉 컴퓨터를 상대로 하는 게임과 다른 유저를 상대하는 게임의 구분이 있다고 말이죠. 이 두 측면에서 볼때, 컴퓨터를 대상으로 하는 간단한 게임들은 자기 존재와의 대면을 피하기 위해 일어나는 방어적/
측면이 강하고, 다른 유저와의 게임은 이도 근본적인 면에서는 앞과 이유가 같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보다 그 방어적/수동적인 면을 강화해줄 보완이 있다는 것이죠, 다른 유저라는 보완이. 말하자면 장기나 바둑 게임의 인공지능이 현저이 낮다는 점에서 게임의 한계는 제대로된 상호작용이 지속적으로 작동하게 해주지 못한다는데 있으니까요. (환상내용적 결점)
아직 사람들은 환상내용을 욕망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게임은 환상을 온전히 제공 할 능력이 아직 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환상이란 수동적인 현상이며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서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니까요. 꿈에서 우리가 우리의 소원대로 무엇을 달성하는 일은 없습니다. 게임이 환상과 닮은 점이 있다면 우리가 자주 실패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환상은 실패라고도 할 수 있겠죠. 그렇게 보면 환상을 유사-능동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소조님의 능동성이 개입된 서사를 생각하면 전 어드벤쳐 게임들이 생각납니다. 대부분의 어드벤쳐 게임들은 일정한 서사에서 중간마다 몇가지 선택을 하며 이야기를 따라가
하지만 이런 어드벤쳐 게임이 마니아층이 아니면 그리 호응을 못 얻는데, 그 이유는 완전히 개방된 서사와 닫힌 서사의 어중간한 위치에 플레이어들이 적응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사 안에서의 너무 개방된 자유는 너무 현실적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환상이 아닌 현실로 돌아오는 게 되고, 그렇다고 좁은 자유에 들어가면(PS2나 XBoX같은 게임) 충분한 환상을 얻지 못하죠. 그나마 잘 작동하는 환상을 주는 것은 그건 유저들끼리의 플레이를 제공하는 게임들로서, 게임자체의 한계라는 장막으로 숨겨진 타자를 가린 환상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콘텐츠가 하는 역할은 저 장막의 기능이다' 입니다.
일단 여기서 제가 문제삼은 것은 콘텐츠소비라는 관점에서 문학감상과 게임하기의 차이점이었습니다. 게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저로서는 아직 무리입니다. 하지만 어느 수준까지는 철학적 성찰을 시도하려고 했습니다만, 그러다가는 너무 늦어질 것 같아(화요논평이기에...), 일단 <초고> 정도의 수준으로 올린 것입니다. 사실 많이 부족하죠...--; 조만간 좀 더 확장된 형태로 다시 올릴 예정입니다. ^^ 한 가지만 지적. 게임이란 기본적으로 <미션완수>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꼭 어드벤쳐 게임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상황이 이러하다면, 싱글플레이와 멀티플레이의 구분은 본질적인 것이라 보기 힘듭니다.
초고라고 하시니 다음 글을 기약해야겠지만, '미션완수'라는 라는 것에는 소조님의 게임에 대한 경험에 특정된 한계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무튼 소조님의 글로 인해 저도 여러가지 생각들을 하게 되는군요.^^;;
죄송하지만 끼어들자면 '개방된 서사와 닫힌 서사의 어중간한 위치'는 콘솔 게임 유저라면(아니, 스토리가 있는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 대다수가) 암묵적으로라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어드벤쳐 게임을 말씀하셨는데 어드벤쳐 게임의 분야만 해도 무지 넓은데다 소수 마니아들만이 즐긴다고 깎아내릴 장르는 더더욱 아닙니다. 아즈마 히로키 같은 경우는 병자님이 말씀하신 그런 관점(어중간한 위치에 대한)이 라이트노벨 작법 등 광범위한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까지 말하는데요. '호응을 못 얻는다'라는 표현이 거슬려서 끼어들어 봅니다.
뭐 세계 전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특수한 경우만을 말씀하시는 거라면야 이해하겠습니다만.
끼어드는게 죄송한 일은 아니죠^^;; 카페가 이런식으로 소통하니까요 시차가 있는 소통이죠. 호응문제는 게임유저들을 말하는 것이고 나름 객관적 서술입니다. 깍아내린다는 kurame님이 주관적으로 하는 말씀이시고...라이트노벨은 소설인데 제가 언급한 것이 게임측면의 사실이라는 점에서, 단지 kurame님이 라이트노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그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 게임과 소설의 시점 문제는 흥미로워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데, 그런 여유가 생기면 해야겠네요.
기울이지 않은 지, `양족을 다 즐겨준다', `오타쿠'적, 잡고 나면, (현실안주)이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때문이다' 이 부분 모호함. 동행자라는, 서울광장, 능동성은, ㅡ생산과 소비는 각기 `역사' 시작과 종말 아닌가 함ㅡ 접근하지 않으면, 분야가 된 지, ㅡ예술과 전자게임을 축제형식과 테크놀로지로 구분함은 멋대로 구분인 것 같음ㅡ ㅡ`~써'와 `~서' 구분은 이제 지적하기도 지쳤음ㅡ^^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제와 테크놀로지의 구분에서 축제란 카니발과 같은 말이라 하겠습니다.
소조님이 지적하신대로 자본의 논리에 비춰보자면 게임 제작자는 플레이어가 결코 궁극의 퀘스트를 완수하지 못하도록 안배를 해야겠지만, 동시에 게이머 역시 자신이 모든 임무를 완수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 같다, 정도로 말씀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스마트 시대의 문학의 미래"라는 주제의 관건은 (활자)문학의 독자들이 책을 끝까지 읽어'치울' 수 있도록 만드는 추동력은 무엇인가가 되겠구요.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이 아직 미치지 못했네요 ^^;
전 문학의 소비와 상품의 소비의 연관관계가 등가되며 회의적이라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문학 우월이나 인문학 우생학을 논자라 하는 보지 않습니다만, 가치의 문제에 있어서 문학 일반에 종사하는 삶과 상품 일반에 종사하는 삶의 구분은 조금 명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문학과 삶의 구분선과 기술과 삶의 구분선을 같은 선상에서 논의해야 할까요? 덧붙여 사적 변화(개인)와 일반 변화(다수)의 구분선 또한 세밀하게 존재합니다. 사적 변화의 핵심은 성할이며 일반변화의 핵심은 기술 진보가 아닐까요? "문학 또한 상품이다"라는 논리는 "우리 또한 동물이다"와 비슷한 비약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