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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곡 (穀)-색 (穡)-종덕 (種德)-맹진 (孟畛)-연기 (衍基)-서 (湑)- 윤번(允蕃)-귀지(貴枝)-희백 (希伯)]
간략한 가계도와 서론
휘 귀지 (貴枝) 직장공 (直長公) 의 둘째 며느리가 되시며 휘 희백 (希伯, 1513~1566) 가선대부 (嘉善大夫) 연안부사 (延安府使公 ) 의 배위가 되시는 증 정부인 (贈 貞夫人) 반남박씨 (潘南朴氏, 1512~1564) 는 1) 사간원사간 (司諫院司諫) 증 영의정 (贈 領議政) 야천 (冶川) 박소 (朴紹) 의 5남2 녀 중 맏이며 장녀요, 2) 이조정랑 (吏曹正郞) 박조년 (朴兆年) 과 단성현감 (丹城縣監) 윤자선 (尹孜善)의 따님 파평윤씨 (坡平尹氏) 의 손녀요, 3) 상주 목사 (尙州牧使) 박임종 (朴林宗) 과 재령군수 (載寧郡守) 증 보조공신 양천부원군 (贈 補祚功臣 陽川府院君) 허손 (許蓀)의 따님 양천허씨 (陽川許氏) 의 증손녀요, 4) 부사 (府使) 박병문 (朴秉文) 과 판사 (判事) 박지 (朴?) 의 따님 밀양박씨 (密陽朴氏) 의 현손녀요, 5) 예조참판 (禮曹參判, 종2품) 박규 (朴葵) 와 통훈대부 판봉상시사 (通訓大夫 判奉常寺事) 변현 (邊顯) 의 따님 원주변씨의 5대손이요, 6) 부사 (府使) 남양인 (南陽人) 홍사부 (洪士俯) 와 판사 (判事) 한절 (韓岊) 의 따님 청주한씨 (淸州韓氏) 의 외손녀이다.
생몰년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증 정부인 박씨는 남편되시는 휘 희백 부사공보다 한 살 위 연상이었으며, 두 분은 30년 넘게 부부의 정을 깊게 나누며 오래 같이 사시다가 2년차이로 서로의 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가셨다. 부사공은 54세에 증 정부인은 53세에 각각 돌아가셨는데, 그 시대의 의학기술사정이나 주거위생환경을 고려해볼때 나름 천수를 누리셨다고 여겨진다.
인간의 평균수명에 대해 흔히 주류 의사들은 1800년 전까지는 100살 이상을 넘긴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1000년 전에는 50살 이상을 넘긴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그들은 고대 그리스인의 평균 수명이 19세, 로마 시대 28세, 16세기 유럽이 21세, 1900년 미국인이 47세, 조선 시대 왕들은 47세라고 한다. 이것이 100퍼센트 진실인지는 정확하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어 보인다.
4000년 전에 작성된 기독교의 구양 성경 시편에서 다윗왕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말한다. 박희진 경북대 교수가 몇 개의 족보를 분석한 결과 20세기 전반부까지 남성의 평균 수명은 59세였다. 초상화가 남아 있는 인물들을 연구한 ‘역사인물 초상화대사전’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평균수명은 60세를 훌쩍 넘는다는 것이 밝혀졌다. 조선시대 평민들의 평균수명은 이에 훨씬 못미치는 30대초반으로 조사 보고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렇듯 기득권층에 있으며 여러 측면에 걸쳐 특권을 누렸던 복받은 (?) 소수의 양반들은 다수의 평민들보다 훨씬 더 수명이 길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조선시대의 노인과 아이들)
증 정부인 반남박씨 역시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느 한산이문의 며느리처럼 대대로 벼슬살이를 하며 사대부 (士大夫) 의 신분을 유지한 명가의 따님으로 태어나 곱게 성장하시다가 나중 한산이문에 시집을 오셨다. 전에 살펴본 휘 귀지 직장공의 배위 증 숙부인 (贈 淑夫人) 원주변씨 (原州邊氏) 의 친정집 못지않게 정 부인의 친정집이 현달하여 부인의 가계도가 평상시보다 조금 더 복잡할 뿐이다.
목은 선조와의 인연
(반남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1793년 처음 건립된 전북 완주군의 구호서원)
증 정부인의 친정집 선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면 한산이문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부인의 7대조부가 되는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박상충 (朴尙衷, 1332~1375) 반남선생 (潘南先生) 은 바로 목은선조의 문인 (門人) 인 동시에 제부 (弟夫) 가 되는 인물이였으니, 반남선생의 배위는 목은선조의 넷 누이동생들중 첫째로 한산이씨였던 것이다.
한산이문의 시작이 그러하였듯이 조선시대 500년동안 명문벌족 (名門閥族) 으로 이름을 날린 반남박씨의 시작도 한미 (寒微) 하여서 향리 (鄕吏) 가문으로 첫 시작을 하였다. 수대를 그렇게 내려오다 반남선생대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는데, 반남선생은 목은 선조의 문인으로 정몽주 (鄭夢周) 와 함께 성리학 (性理學) 의 보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는 반남에서 출생하였으나 1353년(공민왕 2) 22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종사하면서 향리의 자손에서 중앙의 사대부관료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문과합격을 계기로 선대의 세거지인 나주 (羅州) 를 떠나 송도 (松都) 로 이주하게 된다. 반남선생의 송도 이주는 향리가문에서 사대부가문으로의 전환인 동시에 반남박씨 경파 (京派) 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박상충의 출세는 기본적으로 그의 학문적 자질에 기초한 것이지만 명가 (名家) 와의 혼인, 즉 한산이문과의 혼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대 나라 최고의 학문을 자랑하던 한산이씨 가정-목은선조 가문과의 혼사는 박상충의 학문적, 사회적 기반을 강화시켜 준 절대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기초 위에서 박상충은 정몽주, 전녹생 (田祿生) , 이첨 (李詹) , 김구용 (金九容) 등 당대의 명사 (名士) 들과 교유하면서 한 시대의 문풍 (文風) 을 주도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여 <동문선(東文選)> 에 다수의 시가 전하고 있다.
반남선생은 급제한 뒤 벼슬이 예조정랑 (禮曹正郞) 에 이르렀다. 이때
고례 (古禮) 를 참작하여 순서대로 조목을 지어 사전 (祀典) 을 썼다.
1367년(공민왕 16) 성균관생원의 수를
늘려 100인으로 하고 오경사서재 (五經四書齋)를 마련하여 생원을 교수하게 하였는데, 이때 김구용 (金九容), 정몽주 (鄭夢周), 박의중 (朴宜中), 이숭인 (李崇仁) 등과 함께 경술 (經術)
의 사 (士) 로 교관을 겸하게 되었다.
반남선생은 뒤에 전교령 (典校令) 이 되었는데,1375년 이인임 (李仁任) 등의 친원책에 대하여 임박 (林樸), 정도전 (鄭道傳)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였다. 뒤이어 판전교시사 (判典校寺事) 가 되어 정몽주 등과 함께 친명책을 쓸 것과 북원 (北元)의 사신과 그 수행원을 포박하여 명나라로 보낼 것을 상서하였다. 그해 간관 이첨 (李詹), 전백영·(全伯英) 등이 상소하여 북원과 통하는 것을 반대하고 친원파 이인임과 지윤 (池奫) 의 주살을 주장한 것에 연좌되어 장형 (杖刑)
을 받고 친명파인 (田祿生) 정몽주,
김구용, 이숭인, 염흥방 (廉興邦) 등과 함께 귀양가다가 도중에서 개경 동문밖 청교역 (靑郊驛)에서 그만 죽음을 맞았다.
보통 역사가들은 매질을 심하게 받아 몸에 독이 번져서 죽은것으로 보고 있다.
반남선생은 성품이 침착하여 말이 적고 강개하여 의기와 큰 뜻이 있었으며, 경서 (經書) , 사서 (四書)
에 해박하고 글을 잘 지으면서도 천문 (天文), 점복 (占卜)
에 밝아 사람의 길흉 (吉凶)
을 점치면 대체로 적중했다고 한다. 한가할 때 책만 보았고 살림살이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으며, 집에서 부모에게 효도,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면서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하면서 신중했고 의롭지 못한 행동으로 부귀를 쌓은 사람에게는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전한다. 시호는 문정 (文正)
이다.
반남선생의 학술적 공로와 정치적 희생은 오히려 자손들의 사회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반남박씨’라는 문벌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는데, 박상충이 개성을 무대로 반남박씨의 문호를 열었다면 아드님 좌의정 (左議政) 평도공 (平度公) 조은 (釣隱) 박은 (朴訔, 1370~1422) 은 이를 확충시킨 인물이었다.
(파주시에 있는 평도공 박은의 묘소)
증 정부인의 6대조부가 되는 평도공 박은 은 부친 반남선생이 44세에 비명횡사 (非命橫死) 하였을때 불과 6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박은 평도공 아래로는 여동생이 한 명있었는데, 이때 부친 반남선생만 죽음을 당한것이 아니라 반남선생의 남동생인 판서공 (判書公) 박상진 (朴尙眞) 또한 유배를 당하였다. 졸지에 아버지와 숙부를 읽은 어린 박은 평도공 남매는 천애고아가 되다시피하였고, 기록에 어린 생질 (甥姪) 들을 가엽게 여긴 외삼촌 목은 선조가 그들을 거두어 뒤에서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아래 시는 <목은집 (牧隱集)> 에 실린 것인데 “향사 (鄕寺) 로 글을 읽으러 가는 박생 (朴甥) 을 보내다.” 란 제목으로 목은께서 공부하러 산사로 떠나는 생질 박은을 기리며 지은것이다;
“내 생질은
기린의 뿔과 같고요 / 吾甥似麟角
그 아비는
용 머리의 다음인데 / 乃父亞龍頭
세상 경시하여
구학에 버려졌고 / 輕世遂塡壑
가문 전함은 위태롭기 그지없네 / 傳家如綴旒
적적한 풍경은 산사의 밤이요 / 寂寥山寺夜
아스라함은 해문의 가을이로다 / 縹渺海門秋
잘 배워서 선친의 뜻 계승하여 / 好學繼先志
후일에 의당 태학에 유학해야지 / 他年當出游
까닭 없이 내 얼굴 붉어지어라 / 無端赤我面
가고파도 내 머리는 이미 희었네 / 欲去白吾頭
서책 끼고 태학에 유학할 적엔 / 鼓篋游庠序
남 따라서 천자도 배알했었는데 / 隨行拜冕旒
질병 앓은 지가 지금 몇 해던고 / 呻吟今幾歲
일각이 삼추같이 지루도 하여라 / 頃刻似三秋
길은 막히고 몸 또한 노쇠하거니 / 路梗身衰老
무슨 도리로 다시 멀리 놀아 볼꼬 / 何從更遠游”
목은선조는 두 어린 남매의 훈육담당을 하였고 잘 교육시켜 성장시켰는데, 박은의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시도 <목은집> 에 실려 있다.
나중 박은 평도공은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9세에 문과에는 장원급제한 수재로 성장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이방원 (李芳遠)과 교유하여 큰 신임을 얻었으며, 역성혁명 (易姓革命) 후에도 줄곧 중용되어 출세가도를 달렸다. 특히 1398년 (태조 7) 에는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움으로써 태종의 강력한 친위세력 (親衛勢力) 으로 부상하였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그를 좌명공신 (佐命功臣) 으로 책봉하고 반남군 (潘南君:후일 금천군, 錦川君으로 고침) 에 봉하였다.
박은의 성격은 강직하고 언사에 준엄하고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하륜 (河崙) 과는 불화가 있었지만, 태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1416년 (태종 16) 에는 우의정 (右議政) 에까지 올랐다. 배위는 전법판서(典法判書) 주언방 (周彦邦) 의 따님 초계주씨 (草溪 周氏) 이다.
사후에는 좌의정 (左議政) 에 추증되고 평도 (平度) 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 예전에 “9세: 휘 계린 공무공 배위 정경부인 청주이씨 -- 공주님의 무남독녀 외동따님” 편을 다룰때 평도공 박은이 태종을 도와 깊게 개입하였던 왕실의 외척 청송심씨 대숙청작업을 살펴본 적이 있음. 관심있으신 분은 위의 링크를 클릭하시기 바람.]
박은 평도공 이후 반남박씨는 실제적으로 한동안 현달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다.
물론 이들은 선대의 훈공 (勳功) 을 바탕으로 훈구세력 (勳舊勢力) 으로서의 기득권과 관직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박은 이후 3대에 걸치는 동안 한 명의 문과급제자도 배출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환로에 있어서는 박은의 아들 박규 (朴葵)가 예조참판을 지낸 정도이고, 손자 박병문 (朴秉文) 이 부사직, 증손자 박임종 (朴林宗)이 상주목사에 오른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전통의 훈구가문답게 혼맥은 그대로 유지하여 원주변씨 변안렬가문 (邊安烈家門), 양천허씨 허종가문 (許琮家門) 과 통혼하였으며, 장단 (長湍) ,양주 (楊州) , 파주 (坡州) ,김포 (金浦) 등지에 별업 (別業) 을 마련하고 선영 (先塋) 을 조성하였다.
5대조부로부터 조부에 이르기까지
증 정부인의 5대조부가 되는 박규 (朴葵, ?~1437 ) 는 음보 (蔭補) 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25년 (세종 7) 판통례원사 (判通禮院事) 가 되었다. 형조·이조의 참의를 지낸 뒤, 1429년 황해도관찰사 (黃海道觀察使) 를 거쳐 동지총제 (同知摠制) 에 승진되고 예조·호조·형조의 참판을 역임하였다.
1433년 평안도관찰사 (平安道觀察使) 가 되어 재직중 야인 (野人) 들의 약탈을 막지 못하여 함열 (咸悅) 로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어 경상도관찰사 (慶尙道觀察使) 로 부임하였다. 그 뒤로는 그에 대한 사적을 상고할 수 없다. 배위는 통훈대부 판봉상시사 (通訓大夫 判奉常寺事) 변현 (邊顯) 의 따님 원주변씨 이다.
증 정부인의 고조부가 되는 부사 (府使) 박병문 (朴秉文) 에 대해선 자세한 사적 (史蹟) 이 전해져 내려 오지 않는다.
증 정부인의 증조부는 박임종 (朴林宗) 이였는데 상주목사 (尙州牧使), 첨지중추부사 (僉知中樞府事) 등의 관직을 지냈다. 배위는 재령군수 (載寧郡守) 증 보조공신 양천부원군 (贈 補祚功臣 陽川府院君) 허손 (許蓀) 의 따님 양천허씨 (陽川許氏) 이다. 박임종은 아드님 둘을 두었으니 장남이 박억년 (朴億年) 이고 차남이 박조년 (朴兆年) 이다. 증 정부인의 조부가 되신 분이 차남인 박조년 (朴兆年, 1459~1500) 인데, 28세인 1489년 (성종20) 에 식년병과에 13위로 입격을 하여 벼슬이 이조정랑 (吏曹正郞) 에 이르렀다. 배위는 단성현감 (丹城縣監) 윤자선 (尹孜善)의 따님 파평윤씨 (坡平尹氏) 이다. 박조년, 박억년 형제는 생원,진사를 거쳐 문과에 합격한 신진기예로 청망 (淸望) 이 있어 중앙의 요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이렇듯 목은선생의 제부가 되는 반남선생 박상충이 고려말에 번쩍 일으켜 세우고 아드님 되는 평도공이 조선왕조건국 시기를 깆점으로 기반을 탄탄히 다진 반남박씨는 훈구세력으로 그 맥을 이어 몇대 내려오다가 박억년, 박조년 형제가 문과에 입격한 것을 계기로 새로운 중흥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박조년은 관료사회의 극선 (極善) 으로 불리는 이조정랑을 지내면서 훈구파 (勳舊派) 라기보다는 사림파 (士林波) 의 색채를 강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뒤이어 박조년의 아드님 야천 (冶川) 박소 (朴紹, 1493∼1534) 선생이 문과에 장원급제 (壯元及第) 하여 청요직을 거쳤으며 조광조 (趙光祖), 박영
(朴英) , 김안국 (金安國) , 이언적 (李彦迪) 등의 사림파의 명사들과 교유하였다. 이로써 반남박씨는 완전히 사림파 가문으로 정착하기에 이른다. 다만 야천선생의 선조가 좌명공신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향사림파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첫댓글 방대한 자료 감사합니다.
글을 올리고 나니깐 좀 더 자세하게 다뤄야 할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더군요. 예를 들면 야천선생과 사위되는 부사공과의 관계라던지 경기도 일대의 소론가들이나 서계박세당 가문에 대해서라던지요. 나중에 또 기회가 오면 그때 좀 더 상세히 쓰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