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좋은 책을 참 재밌게 읽었습니다.
서머셋 몸의 '달과 6펜스'입니다.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화요일에 책향기'모임에 올봄 가입했는데..
3월 한달 나가고 계속 빠졌다가 '달과 6펜스'를 얼핏보고 내용이 와 닿아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화가인 '폴고갱'을 모델로 쓰여진 책입니다.
이책을 읽고 그림에 관심이 생겼어요.
탈없이 살던 한 중년의 런던 증권 브로커가 어느 날 느닷없이 화가가 되겠다고 처자며 직업이며 모든 것을 버리고 맨몸으로 집을 나가버린다.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빠져 죽어요"
얼마 동안 파리의 뒷골목을 떠돌던 이 사내는 이번에는 태평양의 한 외딴 섬을 찾아간다.
그곳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캔버스 앞에 앉아 사는데 결국은 문둥병에 걸려 장님이 된 채 신비로운 그림을 완성하면서 죽음을 맞는다.
악령의 포로가 되어 버린 듯 예술을 향한 충동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자신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이 사내의 기이한 삶을 작가는 '나'라는 나레이터를 통해 일종의 전기양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수입좋은 직업에 교양있는 아내와 자녀를 둔 화목한 중산층의 가장이 왜 세상의 모든 안락과 명예를 버리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대안의 삶을 선택하였던 것일까? 그는 결국 무엇을 얻었던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달과 6펜스'라는 제목에 암시되어있다.
달과 6펜스는 서로 다른 두가지 세계를 가리킨다.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서로 다른 두가지 힘을 암시하기도 한다.
달이 영혼과 관능의 세계, 또는 본원적 감성의 삶에 대한 지향을 암시한다면, 6펜스는 돈과 물질의 세계, 천박한 세속적 가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사람을 문명과 인습에 묶어두는 견고한 타성적 욕망을 암시한다.
달과 6펜스는 한 중년의 사내가 달빛세계의 마력에 끌려 6펜스의 세계를 탈출하는 과정을 부여준다.
그는 문명과는 멀리 떨어진 원시의 섬에서 낙원의 비젼을 보았음을 암시하고 있다.
!)
나는 처음 부터 줄곧 '스트릭랜드'라는 기이한 인물에 주목했다. 왜? 왜?
그는 왜 그토록 그리고 싶었을까?
그렇게 다 버리지 않고는 할 수 없었을까?
어떻게 그토록 빈곤과 질병, 고통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음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일까?
타인도 의식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을 이끄는 세계에만 집중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열정과 사로잡힘이 되는 것일까?
그는 행복했을까? 만족했을까?
그는 결국 무엇을 이룬 것인가?
예술은 이렇듯 배고프고 고통에서만 나오는 것인가?
그는 다 버렸을 때야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고 삶이 완성되었다.
문둥병으로 눈먼 눈으로 그 영혼속의 보고자 했던 세계를 보았고 완성시켰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앞에 섰을 때 말한다.
'무언가 들어있다. 이 그림에는!' 그러면서 놀라 뒤로 물러난다.
외면적으로 모든것을 버리고 못보게 되었을 때에야 그는 볼 수 있었다.
그의 삶과 기이한 말과 행적들..꼭 이렇게 해야만 그 세계를 이루는 것인가?하고 경멸하던 그 모든 것이 용서되는 것은
그가 천재적인 세계를 이루었음이어서다. 그의 그림앞에 섰을 때이다.
그래서 결국 그를 멋진자로 찬양하기로 결정했다.
스트릭랜드(고갱)의 세 여인도 참 흥미로왔다.
교양있고 명랑하며 가정적이고 어느모로나 훌륭한 본부인 에이미,
친구의 아내로 처음에는 스트릭랜드를 끔찍히도 혐오하더니 그의 병간호를 도와주며 사랑을 하게되나 결굴 자살한 블란치,
17살로 원주민 소녀로 타히티에서의 말년을 도운 맹종적인 여자 아타,
자기로 인해 블란치가 자살을 하고 난 후 그의 대사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 여자의 몸은 근사했소. 그래서 난 그 여자 누드를 그리고 싶었지, 그런데 다 그리고 나니까 여자에게 흥미가 없어지더군
..난 사랑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사랑은 내 정신을 구속해..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부니 없이 중요하게 생각한 단 말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여자는 사랑을 하게 되면 상대의 정신을 소유하기 전까지는 만족할 줄을 몰라. 약해서 지배욕이 강하지.
남자의 정신은 우주의 저 머나먼 곳에서 방황하는데 여자는 그걸 자기 가계부 안에다 가둬두려고 하는 거요.
그녀는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했어요. 내가 원하는 한 가지만 빼놓고, 난 혼자있기를 바랐거든"
..블란치는 나한테 버림받아 자살한 게 아냐 어리석고 균형잡히지 않은 인간이라 그랬지"
타이티로 같이 들어갔던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한 17살의 '아타'를 아내로 만날 때 나눈 단 몇마디..
"그래, 아타. 내가 남편감으로 마음에 드나?"
"ㅋㅋ"
"내가 너를 때릴 텐데"
"그러지 않으면 사랑받는 줄 모르잖아요"
그녀는 참으로 예술가인 어울리는 그가 원하는, 간섭하지 않는 맹종적인 여인이었다.
"그 애는 간섭을 안 해. 내 밥도 지어주고 애들 뒷바라지도 하지. 시키는 일은 뭐든 다해. 내가 여자에게 바라는 건 다 해줘"
"아타, 나는 병에 걸렸고 죽을 것이니 니 고향으로 돌아가!"
"당신은 내 남자고 나는 당신 여자에요. 당신이 날 두고 가면 뒤뜰 나무에 목매달아 죽어버릴거에요. 당신이 어딜 가든 나도 따라가요"
"여자란 알 수 없는 동울이오. 개처럼 취급하고, 팔이 아프도록 두들겨 패도 여전히 사내를 사랑한단 말이오"
...
!)
책을 읽는 내내 읽은 후에도 그 남자 스트릭랜드는 내 가슴에 살아있다. 멋지다!!
예술가로서 열정적인 그의 세계가 그렇고..
남자로서도 기이하면서도 야성적인 남자로 와 내 몸에 닿았다.
그가 삶과 예술가 세상의 현상을 통찰해 얻어 던지는 나름대로의 한마디 한마디가 깊고 진리였다.
이런 남자라면 왠지 타히티 같은 섬에 같이 간다 하더라도 '당신은 내 남자고 나는 당신의 여자예요"하며 맹종의 행복함을 누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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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긴 제목의 대작은 고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1897년 타히티에서 극도의 궁핍과 건강의 악화로 인한 절망속에서 자살을 기도하면서 하나의 유서 처럼 대작을 남기기로 작정하고 일년을 걸려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뒤 그는 산 꼭대기에 올라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작품은 미술사상 가장 철학적인 작품 제목으로, 지금도 우리 자신이 물어야 할 질문임에 틀림없다.
고갱은 그의 서신에서 오른쪽의 세여인과 어린 아이는 순결한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고, 중앙의 과일을 따는 젊은이는 인생의 뜻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세이며,
그 왼쪽의 생각하는 여인과 늙은 여인은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고, 그리고 새들과 배경은 인생의 풍요를 표현한다고 밝혔다.
아무튼 그는 지상의 낙원속에서의 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자기 자신의 심오한 질문들을 던진 것이다.
<Nevermore, O Tahiti, 1897,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타이티의 이브
19세기 말 파리에서 산다는 것은 아주 멋진 일이었다. 파리는 에펠탑에 대한 논란으로 들끓었고, 만국박람회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다.
이때 남태평양으로부터 온 예술품들이 젊은 화가 폴 고갱(1848~1903)을 매료시켰다. 주식중개인이던 고갱은 1891년 어느 날 낙원을 찾아 가족을 버리고 타히티로 떠난다.
고갱에게 유럽은 수렁이나 같았고, 따라서 그곳에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문명의 병폐를 피해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시 유럽인이라고는 단 세 명밖에 없던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갔지만, 그것도 삶도 고갱이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의 그림은 대부분 이러한 꿈과 진실, 낭만과 전통 사이의 갈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두 가지 이질적인 면을 한 곳에 모았을 때 그는 위대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다.
낭만적인 제목 <이제 다시는>은 에드거 앨러 포우의 <갈가마귀>를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는 이상하게 생긴 까마귀가 보인다.
너무나 요염하게 화폭을 가로질러 누워있는 여인에게 온통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이 불길하게 생긴 까마귀는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녹색이 도는 황금빛 여인은 순수하고도 아름답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여인은 너무나도 긴장해 있다. 발가락에는 눈에 보일 만큼 잔뜩 힘이 들어가 있고 얼굴에는 의심과 공포의 빛이 역력하다.
이 소녀 역시 삶의 굴레 갇혀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당시 고갱은 이 그림 속 소녀의 모델 파프라와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 10대의 어린 나이였고 이 그림이 그려지기 얼마 전 고갱의 아이를 낳았지만 아기는 금세 죽고 말았다.
소녀의 표정이 어두운 것은 분명 이 때문일 것이다. 이 제목의 의미는 이제 다시는 그런 고통을 안겨주지 않겠다는 뜻일까.
열대지방의 정적 속에서 아름다운 맥박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넓은 어깨, 굵고 둥근 다리, 가감하지 않은 구리빛 여인의 육체는 생생하다.
장밋빛 물감통에 담갔다가 꺼내 잘 다림질한 것 같은, 매끈하고 여드름 자국도 없고 털구멍도 없는 가식적인 유럽 이브가 아니다. 고갱의 이브는 벌거벗어도 음란하지 않다. 순수한 자연의 야성에 가깝기 때문이다. 원시의 땅 타히티에서 고갱은 실로 대담하고 진실한 그림을 그렷다.
도발적이지도 아양을 떨지도 않는, 그러면서 그 아래 신경이 떨리는 피부를 가진 육체. 그는 어느 화가보다도 먼저 진정한 자아를 가진 현대적인 여성을 그렸다.
<Contes Barbares, 1902, oil on canvas, 130 x 89, Essen, Folkwang Museum>
예술이란 이렇듯 세속적인 욕망의 사슬에서 자유로울 때 그 빛을 발하는 것일까. 말년의 고갱은 습진의 통증과 시력의 감퇴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 제외하면
‘이 고장에서 나는 행복하다’고 했다. 그러다가 <눈이 내린 브르타뉴 풍경>을 그리는 중이던 1903년 5월 8일, 고갱은 영양실조와 심장병으로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러나 어쨌든 주식중개인이었던 고갱의 인생 투자는 성공한 셈이다. 타히티 섬은 그에게 원초적 감성을 제공해주는 예술의 근원지였고,
원시에서 발견한 순수한 원색과 강렬한 이미지는 곧 고갱의 작품세계를 이끄는 중심이 되었다.
뜨거운 열대와 벌거벗은 황갈색 피부의 타히티 여인들을 통해 새로이 창조된 고갱의 모험은 20세기의 아방가르드 야수파와 피카소 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그리고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은 고갱을 모델로 20세기 영문학사에 빛나는 소설 <달과 6펜스>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