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경각산(660m)은 비행자들에게 낭만의 겨울 비행지로 자리 잡고 있는 산이다. 가을 겨울 대부분 강한 북서풍의 영향으로 비행횟수가 적어지는 겨울시즌에도 경각산은 좋은 조건을 보인다. 모악산과 더불어 산성처럼 둘러싼 산릉 덕분에 북서풍의 영향이 적어서 온난하다. 가을과 겨울시즌에도 능선비행과 열비행이 가능하고, 가을걷이가 끝난 넓은 들판은 초보자들도 어디나 안심하고 착륙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안겨준다.
경각산은 호수를 연상시킬 만큼 큰 구이저수지 동북쪽에 솟아 있는 암산으로 모악산과 마주보고 있다. 북으로 고덕산, 동으로 옥녀봉, 갈마봉과 가깝고 전주시가지와 구이저수지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능선 암봉은 겨울에 뛰어난 설경을 빚기도 한다.
필자가 경각산을 처음 접한 것은 작년 김진오 선수(어드반스)의 비행캠프에 참석하면서다. 당시는 바람이 맞지 않아 날아보지도 못하고 종이비행기만 날리고 돌아와야 했다.
-
- ▲ 먹구름이 뒤덮이고 있는 가운데 구이저수지 상공을 날고 있는 조인들.
-
나는 지나가는 가을과 다가오는 겨울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는 비행지를 찾고 있었다. 필연인지 거창 수승대의 김종회 선배와 전주시장배 패러대회 참가 중 경각산 처녀비행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시합보다는 가을걷이가 끝난 논밭의 텅 빈자리가 궁금했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훔쳐보느라 혼을 놓고 있었다.
그 선과 색에 새삼 이끌려 경각산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주 이미 와동 마을의 늦가을 풍경에 감탄한 후라서 빛이 있다면 아름다운 사진들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월요일 아침 홍필표 팀장을 부추겨 이삼우 회원과 장수-익산간 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큰 바위뿔 두 개가 달린 마이산을 지나 ‘패러인들의 집성촌’인 와동 마을로 접어들었다. 도로 주변 여러 개의 컨테이너박스는 각 팀에서 만들어둔 스쿨하우스다. 이 작은 마을에 스쿨하우스가 일곱 개나 있다고 하니 이곳의 유명도를 짐작할 수 있다.
국내 최고수 김진오 선수와 비행
국내에서 최고의 기량을 가진, 올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김진오 선수의 어드반스캠프를 찾아갔다. 이곳에는 김진오 선수와 국내 1위의 여성국가대표 선수인 박정훈 선수, 이들과 함께 숙식하며 큰 조인의 꿈을 품은 26세의 젊은 청년 임문섭(전주대) 선수가 함께 살고 있었다. 사각형의 전형적인 가정집을 스쿨하우스로 사용하고 있었다.
-
- ▲ 경각산록을 배경으로 비행중인 글라이더. / 구이저수지를 아름답게 장식한 글라이더.
-
우리는 해가 비추는 작은 발코니에서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 비행하는 사면에 해가 들길 기다렸다. 해가 완전히 돌아 빛이 사면 깊숙이 파고들 때 이륙장으로 향했다. 많은 스쿨 회원들이 활공하는 이륙장이라 당연히 차량으로 접근하리라는 이삼우 회원의 예상을 깨고 2m 넓이의 작은 숲길로 큰 배낭을 멘 이들이 쌍쌍이 걷기 시작한다. 조용한 오솔길은 이륙장까지 10분 정도의 거리로, 오늘의 바람과 열을 공략할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이륙장에는 오랜 세월 수많은 비행을 지켜보았을 노송이 한 그루 서 있다. 소나무 밑에서 각자 장비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김진오 선수는 처음 이곳에서 비행하는 우리에게 “오늘은 바람이 아주 좋아”하면서 하루 종일 비행을 즐길 수 있는 바람이라고 한다.
열은 좌측 바위산에서 잡고 고도를 올리면 우측 경각산으로 비행을 즐길 수 있으며, 벌판이 모두 착륙장이라며 넓은 벌판을 가리킨다. 앞의 고압선을 가리키면서는 오늘 제일 주의할 대상임을 인식시켜 준다.
바람은 강하다 싶을 만큼 이륙장을 향해 잘 밀고 들어온다. 바닥에 소복이 깔린 낙엽들이 날리지 않을까 싶을 만큼 무서운 기세로 바람이 몰려온다. 먼저 김진오 선수가 기체를 들고 이륙을 시도한다. 기체가 땅에서 뜨는 순간 작은 기공들은 공기를 머금고 지상 1m 위로 사람을 끌고 솟아오른다.
-
- ▲ 독수리가 먹이를 노리듯 하는 집중력으로 착륙점을 향해가는 조인.
-
능선을 타고 넘는 바람들이 강해서인지 기체의 움직임이 사납다. 들판을 향해 나아갈수록 고도는 점점 올라간다. 역시나 오늘은 우주를 무중력에서 유영하는 것처럼 ‘동동거리며’ 날아다니는 날이다.
두 번째로 여성인 박정훈 선수가 이륙준비를 하자 바람은 그의 기세라도 꺾으려는지 좀더 세차게 불어대기 시작한다. 들판 앞에서는 김 선수가 나선식 강하 연습을 하며 비행의 묘미를 만끽하고 있다. 10년 동안 김치 보따리와 단 6개의 영어 단어를 가지고 세계대회에 출전했던 불굴의 경상도 사나이다. 월드컵에서 단 한 번이라도 수상대 위에 올라간다면 패러글라이딩을 접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의 움직임을 카메라로 잡아 보지만 신통한 앵글들이 없다.
바람의 기운이 쇠하자 박정훈 선수도 바람을 차고 더 넓은 공기 속으로 빨려간다. 그런데 번데기 모양의 하네스 밖으로 그녀의 다리가 나와 있다. 다리가 좀 남보다 길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보다. 붉은 그녀의 날개와 노란 김 선수의 날개가 오늘 경각산을 휘감고 있다.
-
충분한 고도 획득 후 촬영 시작
이삼우 회원이 이륙하고나서 나도 카메라를 목에 걸고 출사를 시작한다. 먼저 사진을 찍기 위한 첫째 작업을 시작한다. 바로 ‘열, 공’이다. 열을 잡고 고도를 획득해야만 사진을 찍을 준비가 된 것이다.
충분히 고도를 잡은 다음 유영하는 기체들을 살펴본다. 구이저수지 위로 날고 있는 기체들과 경각산 위에서 각각 그룹을 형성하며 비행하고 있다. 저 저수지 속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듯이 이들은 하늘 위의 물고기처럼 유영한다. 바람 사이, 나무, 바위 사이로 빠져다니며 하늘을 거대한 어항 삼아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잔잔히 헤엄치고 있다.
노란 기체와 붉은 기체 뒤를 따라다니며 겨울 산의 소리를 듣는다. 홍 팀장과 이삼우 회원은 뿔처럼 솟구친 절벽을 오가며 비행을 계속하고 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과 밭이 어울려 빚은 지상의 풍경이 한 폭의 추상화처럼 아름답다.
-
- ▲ 1 뿔달린 헬밋을 쓰고 이륙 준비중인 박정훈 선수. / 2 지상연습중인 박정훈 선수. / 3 비를 피해 비닐하우스 안에 든 조인들. / 4 가을의 끝을 날고 있는 김진오 선수.
-
전주시내 방향에서 조물주가 검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지, 하늘에는 점점 검은 구름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저 구름들이 몰려오면 우리에게 다가서기 직전에 기류 변화로 상승풍을 동반하고, 도착하는 순간 급격한 하강풍을 선사할 것이다. 급기야는 하늘이 열리고 오줌보가 터져 소낙비가 쏟아질 것이다.
열심히 고도를 획득하려는 순간 김진오 선수는 우리에게 다가올 20분 후의 구름들을 살펴보고 있었는지 모두들 고도를 낮추라는 무전교신이 들려온다. 무전을 듣고 방향을 직시하니 검은 구름들이 이미 소낙비를 벌판에 쏟아내며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다. 빨리 착륙장으로 향하기 위해 방향을 돌리고 양쪽 끝단의 날개를 접어 양력을 줄이고 하강을 시작한다.
김진오 선수는 착륙장 방향이 아닌 민가 인근의 비닐하우스 방향으로 착륙을 시도하고 있다. 보다 큰 벌판으로 향하는 나를 보고 비닐하우스 방향으로 날아오라는 무전을 날린다. 급회전해서 따라가니 논 주변의 작은 비닐하우스 속에 기체와 하네스를 숨기고 착륙을 유도한다.
-
- ▲ 비행중 내려다본 와동마을의 아름다운 추상화같은 경작지.
-
바람은 검은 구름을 몰고 점점 강하게 밀려오고 있었다. 생각했던 착륙지점보다는 못 미처 랜딩하고 기체를 운반이 쉽도록 줄여서 비닐하우스로 향하니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울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모두들 비닐하우스에 기체를 숨기니 소낙비가 쏟아진다. 하우스에서는 벼를 말리고 있었다. 소낙비가 지나고나니 단풍나무 잎들이 바닥에 소복이 깔려 가을의 끝을 말해주고 있었다.
클럽으로 돌아온 뒤, 지난 번 마음 놓고 마셔보지 못한 막걸리집으로 향했다. 오늘의 ‘열공’을 최고의 선수에게 듣지 않는다면 아쉬움이 많을 것 같아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진오 선수는 그 짧은 시간에 나의 모든 열 공을 간파하고 오늘의 나의 비행에 대해 굴비처럼 엮기 시작했다. 이륙장 직전 능선 비행에서 고도를 빨리 잡지 못한 이유는 사면에서 집중적으로 열을 공략하지 못했고 핵심적인 열을 사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두 마디의 조언으로 나의 부족한 비행 실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직면한 시합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랫동안 유럽의 강한 선수들과 싸우며 1등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자신은 기상변화와 열을 읽어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그들보다 배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먼저 내달릴 수 있는 확신 속의 용기, 그것이 배짱이다.
비행도 산행처럼, 진정한 가치는 정상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과 땀이 이루는 아름다운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는 그 진정한 비행의 의미를 지금 창공을 날고 있는 그 자유의 순간이라 말한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이동하는 비행이 그들에게 삶의 끈으로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