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계양도서관 인문독서아카데미 강의노트 2014.9.11
죽산 평전, 한국 근대사의 언덕 넘기
1.평전 집필 동기
1)집필동기
(1)노경 바라보는 작가의 길은 4가지 → 제자 키우기 / 문단 문화계 지도자 / 역사소설 쓰기 /잊혀지는 길 = 이중 역사에 관심 돌리기로 결심
*20년 전 독립전쟁사 대하소설 <누가 이땅에 사람이 없다 하랴> 집필하며 답사 시작. 중국러시아 20여차 답사 특히 사회주의 독립투사들 관심
*독립운동사도 분단되었다는 자각-소주팩 약속/길림에서 부상당함
*그걸 바탕으로 역사소설로 갈 것인가 망설이다가 평전으로 결심 → <약산 김원봉> <김산평전> 출간하고 쏠쏠한 재미
*마지막 평전으로 죽산평전을 결심
*내가 가진 특장 – 못살겠다갈아보자 선거포스터/아버지 출혈된 눈/아버지 말씀 아버지 친구들-생존 대개 우익이지만 생존/강화출신 인고 동창들=오로지 나만이 쓸 수 있다고 자기도취에 빠져.
(2)연민과 위무慰撫
*비범한 생애를 살고 억울하게 희생된 분에 대한 연민
*죽산은 강화 출신이지만 인천에서 배출. 위무하고 싶은 생각.
(3)탐사의 욕망
*도대체 이승만은 왜 그랬을까. 도대체 죽산은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밝히자.
*지금까지 나온 연구서와 전기, 왜 광복 후에만 집중되는가. 청년기도 밝히자.
2)집필 인텐션 -- 지금 더욱 살아나는 죽산의 존재감--왜 오늘 다시 죽산인가
*죽산의 정치적 주장 3가지 →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그게 오늘 더 절실. 신뢰 받지 못하는 정치, 극심한 빈부 격차, 남북한의 첨예한 대립을 보면 그렇다.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보수와 진보가 수레의 양쪽 바퀴처럼 함께 수레를 지탱하며 굴러야/그러나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18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랬듯이 한국에서의 진보는 분단 모순의 현실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었다. 진보라는 말을 정치에서 처음 쓴 사람은 죽산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 조봉암)
*그것은 잃어버린 꿈--한국에서의 진보의 태생적 한계, 그리고 그것을 초극하는 길이 무엇인지 쓰자
2.죽산 조봉암은 누구인가
1)한국 근현대사의 풍운아 / 인천이 낳은 가장 걸출한 인물
-1899년 강화도의 한미한 농가 출생 - 보통학교 졸업 - 군청 사환, 임시 고원, 대서소 보조원 - YMCA 중학부→ 세이소쿠영어학교→ 주오대. 독서와 토론 - 진정성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술, 뛰어난 강연술, 그리고 탁월한 사회기(司會技) 등을 스스로 갖추면서 비범한 인물로 성장.
2)독립운동가, 건국공로자 - 강화 3․1만세 옥살이 - 공산주의가 조국 독립 최선의 길 판단 - 조선공산당 창당주역 - 상하이 망명 투쟁 중 체포당해 7년간 복역 - 8․15 광복 후 우익으로 전향했으며 초대 농림부장관으로서 농지개혁을 입안
3)세계 최고수준 토지 균등성을 빠른 속도로 - 농민들에 희망 안겨줘 혁명포기 - 나라 전체가 공산화 막는 원인 - 토지소유자가 된 농민들의 저력 자녀교육 집중 - 뒷날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동력
4.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 지내고 대통령선거에서 두 번 차점 낙선 거물 정치인- 젊은 날 조국 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편으로 공산주의 - 전향 뒤 원죄 -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 정책에 맞서 평화통일을 주장- 국가변란과 간첩죄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 - 식민지 피지배와 민족분단으로 얼룩진 한국 근 현대사의 축소판
5.1959년 7월 31 오전 11시 서울형무소 - 아침에 따님과 조카 면회거부 발길 돌려 - 바로 전날 오후 재재심 기각 - 11시 마지막 술 한 잔도 거부당하고 처형 - (첨부 원고 낭독)
6.조선총독부령 120호 - 일제강점기 독립투사들 처형한 뒤 행정처리 악법 적용 → 사회 안녕 치안 질서 문제 있다며 *조문 금지 *익일 장례 *비석 금지 - 약산 김원봉 평전 - 이종암 평토장 비석도 없어 - 3주기 때 김응현 선생이 비명 써줌 - 경찰에 시달림 - 인천의 원로들 - 국립묘지가 아니라 거기 그냥 계셔야지 비석도 그대로 가야지 권유
7.죽산의 정치적 주장 -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세 가지 - 그게 오늘 더 절실하다.
3.평전 집필의 준비
[1단계] 2차 자료의 분석 - 기존에 나온 연구서들 집중 분석함 – 박태균 [조봉암 연구]-인물의 집중탐구/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시대상황 속 존재감/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죽산의 측근 / 이영석 [죽산 조봉암] - 기자로서 취재한/정태영 오유석 권대복[조봉암 전집] - 측근과 연구자들이 모든 자료를 모은
*연표 작성 시작
[2단계] 1차 자료의 탐색 – 2차 자료의 각주 미주에서 언급한 신문 잡지 미디어 자료 = 과제 앞의 책들 넘어서기-그래야 새 지평 열어 EX 조호정 여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 실물 / 미공개된 일제 기밀문서/
*연표 작성 확대
[3단계] 인터뷰 – 성패를 결정할 요소 그러나 늦었다는 느낌 – 많은 분들이 별세 – 특히 강원용 권대복 이명하 /그래도 몇분 남아 – 운전기사 이재윤 비서 조병선 처남 김영순 따님 조호정 여사 /묻혀 있던 인천 두 따님과 외아들
*연표 작성 더욱 확대
[4단계] 한국공산주의운동사와 중국공산당사 러시아산당사 속에 죽산을 들여놓기 작업 – 김준엽 김창순 저술/ 스칼라피노 이정식 저술 / 중극 측에서 나온 자료들
==대부분 앞의 평전 쓰면서 노트 갖고 있어
*연표 속에 죽산 살아남
4. 3년 기나긴 집필의 시간 그리고 희망의 빛
1)부닥치는 한계 – 특히 해방 후 정치상황/ 미군관련 / 북한 관련
2)다른 분의 평전 연재 시작과 출간
3)원로들의 증언 거부
4)인천시청 지원 안해
5)약속한 출판사의 위기
---
1)조호정 조임정 여사 인터뷰 성공
2)김영순 선생 / 김제영 선생 인터뷰 성공
3)한국일보 연재 시작 – 시선 끌고 연구비 얻어
4)대법원 무죄선고
5. 집필의 중점 - 무엇을 어떻게
1)어떻게-형식 = 앞의 책들과의 차별화 - 소설적 상상력 시퀀스 문제/시간축 비틀기 문제 /시점의 다변화 문제
2)무엇을-콘텐츠 = 재미있는 /알려지지 않은 소토리 텔링
3)이런 뼈대로 써나감
[1 출생과 소년시절]
*강화정신--고려 때 삼별초 저항-조선시대 병자호란 저항-조선말기 병인양요 운요호사건 신미양요-이동휘 진위대장과 잠두교회-1907년 진위대원 봉기-군청 뒤의 견자산 진위대 진지 보창학교
*1889년 강화에서 출생
*총명하나 공부 안 하는 아이였으나 학급회 토론과 주산에 탁월
*유찬식 조광원 조구원 정경창과 죽마고우로 교유(갈홍기는 나이 차가 많음)
*잠두교회에 나감. 농업보습학교를 나와 군청사환 임시고원으로 일함
[2 3․1만세운동과 청년시절]
*읍내거리 대서소 보조원으로 일하다가 김이옥을 만남-6천명 모인 3․1만세운동에 참가 구속
*혹독한 고문당하고 서대문감옥에 갇힘--이가순과 민족적 각성
*YMCA 중학부에 다님--이상재 선생--동급생 인천 박남칠을 만남
*대동단사건으로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21.7 석방 후 일본 유학길
*4명의 친구와 동숙 엿장수 고학 세이소쿠영어학교 → 주오대학 정경과 → 김찬의 영향으로 → 아나키즘과 사회주의 서적 탐닉 독서와 토론에 → 고학생동우회와 흑도회 → 가명을 朴鐵丸으로
*1922.8 귀국해서 청년논객으로 등장 → 22.11 베르후네우딘스크 연합대회 국내대표로 출국 → 모스크바 담판에 감 → 동방노력자공산대학 입학 → 폐결핵으로 중퇴 귀국
[3 조선공산당(조공) 창당과 상하이에서의 독립운동]
*코민테른이 조공 창당 예비작업으로 김재봉과 김찬 침투시킴--조봉암의 가세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상하이 트로이카의 석방 합류 급진전-신흥청년동맹 전국순회강연 선풍적 인기-조선일보 기자-최고의 논객-인천에서의 결산강연 24.4.19 -사회운동 후배 김조이와 결혼
*1925.4.17. 조공 창당(1차공산당/김재봉당) - 승인 얻으려 밀사로 모스크바행
*임무 완수하고 공산대학 실링 21명 받아냄--아우 조용암 아내 김조이 소년시절 친구 정경창
*조공1차당 붕괴 상하이에서 투쟁(여운형이 죽산의 멘토)--25.5 만주 밀행 조공만주총국 조직--6․10만세사건 주도--2차당 붕괴 25.11
*27.1 사랑하면서도 헤어졌던 김이옥이 상하이로 와서 동거 딸 호정을 낳음 28.9--동지들의 비난 경제적 곤경 위상 약화됨--공금 전용 시비--정윤교 사건--이 무렵에 양이섭을 수하에 둠
*1930년대 들어 만주사변 상하이사변 윤봉길 의거--안창호 여운형 현정건 피체, 양이섭 피체, 반제동맹 주도--32.12 체포되어 압송--7년 징역 선고 신의주형무소 수감--김이옥 귀국 뒤 죽음--딸은 친척에 의해 인천으로
*전향 회유 정책 1년 감형 출옥 39.7
[4 출옥 후 인천 정착과 유휴의 세월]
*친척 조준묵과 YMCA 시절 동급생 박남칠 김용규 유두희 이승엽 등 미곡상 업계 인물들 인연, 부자가 된 정수근
*박남칠 등이 비강업조합 만들어줌--사무실은 서경정(내동) 건어물 거리에
*김조이와 재결합 부평으 셋집
*처가식구들이 인천으로 옴--처남들이 사업 도와줌--도원동 12번지 부영주택
*긴 유휴기간을 보냄-조공 조직과 멀어지고
*일제와 묵시적 타협선--우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두 가지--흥아신춘 광고와 국방헌금 사건
*45.1 결국 예비구금령으로 헌병대에 구속
[5 광복 후 롤러코스터와 같았던 영광과 굴레]
*45.8.15 여운형이 필동 헌병대 감방문 열어줌--내가 건준 만드니 인천을 장악하라--석방되어 인천으로
*집앞에 기다리는 청년들과 보안대 조직 치안장악 8.16 --건준 조직 8.18
*부활된 조공 동지들의 거부로 소외됨
*인천 민전을 조직, 그러나 박헌영이 비난 반조운동 충고와 자기반성 서신 CIC에 압수당함
*결국 공산당 약화시키기 위한 미군의 공작으로 연행 전향성명 내고 공산당을 떠남 46.6.23--<비공산정부를 세우자> 전국을 크게 흔듦
*우파와 결합 단독정부안 받아들임
*48.5 제헌의회 출마 당선--국회로 가서 무소속 그룹 통합 통합 통합 → 무소속 의원 85명의 대표로 떠오름--헌법기초위원이 됨--평등지권 주장 발언 이승만이 주목
*48.7. 초대농림부장관-농지개혁법 주도--신속한 토지 균등성 확보성공--농민들 장악
*국회부의장 탁월한 사회 솜씨--6․25전쟁으로 국회문서 피난 아내 납북
*부산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안 협조--이승만 한계 드러냄
*52.8.5 2대대통령 출마 70만표
*그후 야인이 되어 도정궁 칩거--호헌동지회의 요청으로 재등장
*55.12 진보당 구상하며 떠오름--서상일과 경쟁, 신익희와 단일후보 협상중 신익희 급서 단독후보 216만표 획득 56.5.15
*56.11진보당 창당 -- 여러차례 위기--장택상 벼룩에 굴레를 씌울 사람인데
*58.1 결국 서울시경 TF팀에 의해 함정에 걸려듦--양이섭이준 돈이 북한 공작금이라고--1심 인정하지 않아 5년 → 2심 사형 → 대법원 파기자판 사형선고
*조호정의 탄원서
*죽산의 유언--사형당해도 애국심은 변합없어
*59.7.31 재심기각 17시간만에 처형
*총독부령 120호와 장례식과 비문 없는 비석
*왜 처형당했는가--분단을 정권연장에 이용
*미국의 태도--양다리 걸치기
[6 53년만에 무죄선고 햇볕으로]
*05.2.5 과거사 정리 진실화해위원회 설치--05.11 위원회 재심권유
*12. 11.1 대법원 무죄선고
*네 자녀들 형극의 길--외아들 규호가 걸어온 길/조호정 여사가 걸어온 길
6. 리뷰와 출판사 연결 막판의 고비
1)한길사와의 인연
2)탈고 리뷰 3단계
3)윌슨 센터의 소련대사 비망록
7.[조봉암평전]에서 넓히려 한 지평
1)출생지 등
*2012년 가을 조사위원회 구성 → 강화 선원면 금월리 가지마을 혹은 남산대로 정해진 과정
*김이옥의 호적 찾아냄 김이옥의 야학과 여성 운동
*동생 조용암의 존재 드러냄
2)인천 현대사 확충
*강화독립투쟁을 한국 독립운동사와 연결-조광원 유찬식 조구원 조용암 김이옥 부각시키기
*인천현대사를 한국사회주의운동사 맥락과 연결
*죽산이 일제강점기 어떻게 미곡상업계 인물들과 교유했는가
*광복 후 어떻게 전향을 하고 어떻게 조직해서 떠올랐는가 -- 인천의 명망가 신태범 박사 -- 재정후원자들 →심계택 김수현 함효영 배인철 이필상 등
*어떻게 판세를 역전해 당선되었는가--하상훈, 이성민, 김성국, 임홍제와 겨뤄
3)인간적 풍모
*세 따님과 아드님에게서 들은 인간적 풍모--영화
*그를 사랑한 네 여성 이야기
4)해결되지 않은 문제들
*흥아신춘 광고와 휼병금 문제와 국가유공 수훈의 유보
*4․19당시 김일성 주석의 발언을 기록한 푸자노프의 저널 공개
*새얼재단의 동상건립운동과 맹목적인 안티조봉암 인사들
8. 죽산 조봉암의 꿈
1)실현시킨 꿈 → 농지개혁의 공적 → 국가 부흥의 발판
*죽산 관련 기자 인터뷰와 강연 - 가장 많은 질문 - 이승만은 왜 죽산을 농림부장관으로? → 세 가지 학설 = 한민당 견제설 = 미국 요구설 = 이범석 총리 거래설
*결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과 평등지권의 확신 - 당시 전체 농가는 200만호 - 완전 소작농이 49% - 반소작농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
*북한 이미 토지개혁, 중국 국공내전 공산군의 승리 원인 - 토지몰수분배 - 남한 민심의 향방 안심할 수 없다 판단
*유상몰수 유상분배의 절묘한 선택과 관철 - 신속히 세계 최고수준의 토지균등성 확보 성공 → 실현단계에서 한국동란 발발 → 농민들 공산혁명 거부 → 자경농의 동력이 곧바로 자녀교육으로 집중 → 기적적 경제성장의 동력이 됨
2) 실현하지 못한 꿈 → 평등과 정의의 사회
(1)죽산이 추구한 진보의 개념
<창당대회 개회사>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진보당 발기취지문> 우리는 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 자본가적 특권경제를 쇄신하여, 진정한 민주책임정치와 대중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
<진보당 강령>*공산독재는 물론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이를 배격하고 민주주의체제를 확립하여 책임 있는 혁신정치의 실현 *생산 분배의 합리적 통제로 민족자본의 육성, 종합적인 연차 경제계획 *민주우방과 제휴 민주세력 결정적 승리를 얻을 수 있는 평화적인 조국 통일 실현 *교육의 완전 국가보장제 *노동자 권리 보장,
→죽산이 처음 사용한 진보의 진정한 의미==책임정치 -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 평화통일 흔히 3가지를 말하지만 강령에는 교육도 있다 →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반세기 동안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지금 고스란히 우리 정치의 주요담론이 되어 있다 - 놀라운 선견성 - 오늘 왜 다시 죽산인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3) 죽산이 안았던 원제와 숙명의 고리
(1)조공 창당 멤버,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이 인정한 핵심 → 광복 후 전향 → 결국 조공 창당 멤버의 농지개혁법에 의해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 막혀 =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행이지만 본인의 인생은 모순 속에 함몰
(2)3대대통령 선거 216만표 농지개혁의 결과 농민들의 지지 +무력 북진통일 독재 거부 민심 + 새로운 정치 이념 제시 → 충분한 정당성
(3)남한 정권의 실력자이면서 제3세계, 사회민주주의 추구 → 공산당이었다는 과거를 원죄처럼 뒤집어 씌워 → 사사건건 빨갱이로 몰려 → 장택상의 벼룩의 굴레론 → 그러나 결국 서울시경의 정권의 함정에 빠져 쓰러져 → 분단모순의 상황 민중은 속으로만 울어
(4)남북의 첨예한 대립 속에 정권은 분단모순을 이용 - 죽산에 대한 사법살인 뻔히 알면서도 인정하기 어려워 50년이 걸림
(5)올림픽, 월드컵 개최 세계 10위권 경제 - 소련붕괴 동유럽 블록 붕괴 → 국가의 자신감 진실화해위원회 발족 → 대법원 재심 무죄선고 → 국가 양심과 國格 회복
(6)그러나 독립유공 서훈은 유보되고 있고 아직도 남은 맹목적인 안티 조봉암 그룹
4)죽산이 뿌린 씨앗과 오늘
(1)죽산의 진보와 현재 한국의 진보
*국가 발전 위해서는 진보와 보수 좌우의 날개가 움직여야 - 그러나 한국 진보는 분단모순 속에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 공산주의는 용납 안 되고 제3의 길이 가능한데 백범 김구와 여운형도 암살되고 김성숙 박건웅 등 설 자리 잃어 - 분단된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나라 갈망 - 분단 모순 속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죽산은 제3의 길 신념대로 밀고가다가 쓰러짐 - 타협과 포용과 관용이 있었다 → 해방 조국에 진보와 보수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 - 그런데도 간첩으로 몰려 죽어
*오늘날 한국의 진보는 지켜보기 안타깝다 - 죽산과 함께 했던 늙은 진보당원들 - “죽산과 우리의 진보와 오늘의 진보는 다르다/임정치 경제민주화 평화통일이었다./ 오늘의 진보는 말과 행동이 다르다 말로만 하는 입 진보다”
*오늘의 진보 국민의 지지 10%도 안돼. <한겨레> 서평 - ‘넘사벽이다’ - 왜 그런가? - 현실정치를 무조건 부정하고 타협하지 않고 냉소적이다 - 죽산처럼 온 몸으로 뛰어들어 대안세력으로서 희망을 제시해야 하는데 입으로만 한다 - 종북 진보를 자처한다 - 변증법에서 말하는 진정성을 갖고 민중의 가슴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2)죽산이 남긴 씨앗 키우기
*죽산은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이 양날개처럼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잘 사는 나라 - 남북의 대회로써 평화통일을 이루기 - 네덜란드 북유럽 같은 복지국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 → 국가유공 수훈의 관철 - 진정한 복권은 국가양심의 회복
#첨부 1 : 낭독 텍스트 [조봉암평전] 중에서
[A] 대한민국 최초의 사법살인 시퀀스 1959.7.31 서대문형무소
인정신문이 시작되었다.
“본적 인천시 도원동 12번지, 현주소 서울특별시 충현동 산4의 5번지, 성명 조봉암, 나이 육십일 세,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다음은 인상(人相)조사였다. 신장, 체중, 얼굴빛, 머리숱, 전체적 체형 등을 확인하는 절차, 형무관은 가장 분명한 인상인 마디가 잘라져 없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확인했다.
임석검사가 집행을 선언하자 집행관이 다가와 물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습니까?”
죽산은 곧 숨이 끊어질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서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골고루 잘 살려고 한 일인데 결과적으로 죄를 짓고 가니 미안한 뿐이오.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고 술 한 잔과 담배 한 대 피울 수 있느냐 물었으나 거부되었다. 그는 곧바로 교수대로 옮겨졌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몸 전체에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산은 임석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부탁했다.
목사는 성경을 펴들고 「누가복음」 23장을 읽었다.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 두 손과 무릎, 두 발이 포승줄에 묶인 조봉암 선생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한 교도관이 그의 목에 밧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를 잡아당겼다. ‘쿵!’ 밧줄에 매달린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곧 숨이 끊어졌지만 30분도 넘게 매달아뒀다. 민족지도자로 추앙받던 죽산 조봉암은 간첩 누명을 쓰고 이렇듯 하루아침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B] 장례식 시퀀스
1959.8.2 망우리
윤길중 변호사는 장택상을 찾아가서 장례비를 부탁했다. 장택상은 애석해하면서 장례비 10만환을 마련해 주었다. 윤길중은 풍수지리를 좀 아는 편이어서 망우리(忘憂里) 공동묘지에서 좋은 자리를 골랐다.
8월 2일 오후 2시, 무장 경찰과 사복 경찰이 엄중하게 경계하는 가운데 충현동 집에서 장례식이 열렸다.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며 출입을 막는데도 조문객은 200명이나 왔다. 진보당원들은 깊은 밤 지붕과 담을 타고 넘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한 번 나가면 다시 올 수 없다며 골목에 앉아 밤을 새운 사람들도 많았다.
호정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난 이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러나 악에 받친 사람처럼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어린 동생과 친척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오래 살아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어떻게 사나 지켜보겠다고.
남편 이봉래가 조시(弔詩)를 낭독하는데 경찰이 장례식을 빨리 끝내라고 재촉해 댔다.
“거기 부모님이 생떼 같은 목숨을 잃었는데 빨리 하라면 그 말을 듣겠어요?”
호정은 그렇게 쏘아 붙였다. 그러자 경찰은 그녀를 피해 윤길중 변호사를 닦달했다.
오후 3시 경, 관이 영구차에 실렸다. 뒤에 가족이 탄 버스 한 대 그리고 경찰 지프 여러 대가 뒤를 따랐다.
30~40분 후 망우리 묘역에 도착했다. 늦은 오후인데도 날씨는 무섭게 더웠다. 운구를 하기도 전에 경찰은 빨리 하라고 재촉했다. 가족들이 들은 척도 안하자 산역꾼들에게 “당신, 왜 느리게 하는 거야? 이름이 뭐야?” 하고 수첩을 꺼내 적으려 했다. 산역꾼들은 제 발등을 찍는지도 모르고 허둥지둥 삽질을 해 댔다.
호정은 남편 이봉래의 부축을 받고 서서 마른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죄를 졌다고 이러나요! 개가 죽어도 이렇게 하지 않아요! 왜 벼락이 안 쳐요? 여름에 벼락도 많이 치는데, 기가 막힌 날 왜 벼락도 안 치는지요? 나한텐 하늘도 없어요!”
그것이 끝이었다. 서해의 강화 섬에서 태어나 조국의 운명을 등에 지고 분투했던 죽산 조봉암, 책임정치와 수탈 없는 경제 체제 확립과 평화통일을 주창했던 거인은 죽어서 시름을 잊는다는 망우리의 한 자락 땅에 순교자처럼 묻혔다.
#첨부 2 : [한겨레신문]과 [중앙일보] 서평
[책]한국 진보정당의 ‘넘사벽’, 조봉암의 삶
한겨레신문 2013.03.15 22:26
<사진>1958년 죽산 조봉암이 재판정에서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간첩 혐의 등으로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담배 한대와 술 한잔을 청했지만 거부당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8년 후손들은 재심을 청구했고, 2011년 1월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한길사 제공
조봉암 평전-읽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한길사·2만2000원
사법살인당한 비운의 정치인
정치역정 이면엔 인간적 면모
딸과 영화 보는 아버지이기도
장관 인사철마다 이따금 등장하는 단골 이슈는 우리나라 정치 엘리트들의 농지 불법 취득 의혹이다. 1949년 6월21일 제정된 대한민국 ‘농지개혁법’은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의 원칙을 확립한 것이기에, 권력을 쥔 자들이 투기 목적으로 농지를 사기 위해 시골로 주소지를 옮겼다가 다시 서울로 되돌아오는 관행은 그 자체로 농지법과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것이 된다. 이 법을 통해 단군 이래 수천년 동안 이어진 소작제를 철폐하고, 토지개혁을 시행한 인물이 바로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1898~ 1959)이다.
조봉암은 <약산 김원봉>(2005년)과 <김산 평전>(2006년)을 통해 잊혀진 혁명가들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은 작가 이원규씨가 도달한 또하나의 큰 산이다. 저자는 책머리에서 죽산을 “평화와 정의의 씨를 뿌리고 간 순교자”라고 부르며 “마지막 평전으로 죽산을 쓸 것이라 다짐했었고, 더 이상 책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모든 힘을 여기 쏟았”다고 밝히고 있다. 결기 어린 그의 말처럼 책 뒤편에 붙은 10쪽이 넘는 참고자료 목록과 죽산의 주변인들의 인터뷰 기록을 보면, 저자가 책을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죽산이었을까. 그가 처음 다룬 김원봉은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이끌며 빛나는 항일 경력을 쌓았음에도 해방과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비극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 버렸고, 김산은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통해 하나의 완성된 신화로 남았으나 중국 대륙이라는 커다란 바닷속에서 형체를 알아 보기 어렵게 녹아버리고 말았다. 이에 견줘 죽산은 권력욕에 눈이 먼 이승만에게 ‘사법 살인’을 당하지만, 그가 뿌리 내린 농지법의 정신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관철되고 있으며, 그가 주장한 평화통일론과 사회민주주의는 이제 한국 사회의 주류 담론의 지위에 올라서 있다. 조봉암은 죽음으로써 자신의 삶을 완성해 냈기에 앞의 김원봉이나 김산의 죽음에서 묻어나는 허무함이나 무참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훨씬 덜하다. 그래서 조봉암은 앞서 두개의 비극을 다루고 난 저자가 도달할 수밖에 없었던 자연스런 귀착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6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서 알 수 있듯 조봉암의 출생에서부터, 한 사람의 공산주의자로 성장해 가는 청년기의 궤적, 그리고 모스크바-만주-상하이를 오갔던 항일 경력,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결별한 뒤 거물 정치인으로 떠오르는 과정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전문 연구자가 아니면 쉽게 이해하기 힘든 상하이파-이르쿠츠크파로 나뉘었던 조선공산당(조공)의 파벌 투쟁이나, 1·2·3차에 이르는 조공의 결성과 궤멸, 해방 이후 혼란스런 정치 격변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 책을 전문 연구자들의 난해한 논문과 구별 짓는 가장 큰 장점이다.
책의 백미는 후손들이 추억하는 조봉암의 인간적인 면모이다. 조봉암은 언변이 뛰어나고 조직 장악력이 강해 토론 모임에서 늘 중심을 잡았고, 큰딸과 영화 구경 가는 것을 좋아해 슬픈 영화를 보며 자주 눈물짓기도 했다. 여기서 자세히 언급하긴 곤란하지만, 간단치 않았던 그의 여성 편력과 그것이 이후 정치 역정에 드리운 그늘을 엿보는 것도 흥미롭다.
젊은 시절 조봉암은 철저한 공산주의자였고, 상하이 시절 저지른 ‘실수’로 인해 공산당 주류로부터 배척당한 뒤 전향을 선언하고 사회민주주의자가 됐다. 그래서 1956년 대선 때 30%의 득표율(개표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을 고려한다면 실제 득표율은 더 높았을 것이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이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어떤 진보정당도 넘지 못한 ‘넘사벽’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이념의 순결을 지켜 공산주의자로 남았다면, 야심이 없는 담백한 인물이었다면, 그가 한국 사회에서 누리고 있는 지금과 같은 독특한 지위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적잖은 잘못, 실책, 판단 착오를 저지른 인물이었고, 결국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지은이는 조봉암을 통해 다른 말을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이 ‘아이러니’의 비릿함이다.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책과 지식] 비극적 인간 죽산,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중앙일보] 입력 2013.03.16 00:48 / 수정 2013.03.16 00:48
조봉암 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지음, 한길사
632쪽, 2만2000원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의 억울한 죽음은 가장 먼저 시로 표현됐다. 신경림 시인은 죽산이 세상을 떠난 직후 비통한 마음으로 ‘그날’을 썼다.
‘젊은 여자가 혼자/상여 뒤를 따르며 운다/만장도 요령도 없는 장열/연기가 깔린 저녁길에 (중략) 사람들은 가로수와/전봇대 뒤에 숨어서 본다/아무도 죽은 이의/이름을 모른다/달도 뜨지 않은 어두운 그날.’
시인이 ‘그날’을 쓴 지 무려 52년이 흘러서야 법이 나섰다. 2011년 1월 20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이용훈 대법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피고인 망(亡) 조봉암. 재심청구인 피고인의 자(子)… 원심 판결과 제1심 판결 중 유죄 부분을 각 파기한다.”
뒤늦게나마 법원 스스로 반세기 전의 ‘사법 살인’을 인정하는 순간이었다. 조봉암이 뒤집어쓴 죄목은 간첩·간첩방조·국가보안법 위반 등이었다. 판결문은 이를 뒤집으면서 말미에 조봉암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덧붙였다.
“피고인은 일제강점기 하에서 독립운동가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였고, 광복 이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고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여 제헌의회의 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과 국회부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 제2,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고인은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재직하면서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하여 우리나라 경제체제의 기반을 다진 정치인이었다.”
『약산 김원봉』 『김산 평전』 등을 쓴 이원규(66) 작가의 『조봉암 평전』은 죽산에 대한 기존 연구서·자료를 충실히 소화한 위에 현지 답사, 유족 인터뷰 등을 더해 상당히 품을 들인 책이다. 자료 수집에 2년 반, 집필에는 3년이 걸렸다고 저자는 밝혔다. 기록과 증언을 우선하되 소설가답게 대화 내용 묘사 등 ‘허용될 수 있는 한도에서’ 상상력을 보탰다. 덕분에 한 편의 장편소설을 읽는 맛이 난다.
죽산 조봉암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그는 60년 전 분단 현실에서 진보를 꿈꾸며 책임정치,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을 부르짖었으나 간첩죄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 1952년 죽산이 무소속 후보로 출마했던 제2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2 그의 두 번째 부인 김이옥 여사와 큰딸 호정. 3 59년 간첩 누명을 쓰고 법정에 앉아 있는 모습. [사진 한길사]
그러나 소설이라 쳐도 너무 비극적이다. 설득력과 대중연설에서 재능을 타고난 죽산은 좌·우 양쪽에 걸쳐 불화를 겪었다. 1919년 3·1 운동에서 시작해 투옥과 가혹한 고문을 번번이 당했고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였지만, 몸담았던 공산 진영은 헤게모니 다툼 과정에서 그의 몇 안 되는 약점을 파고들어 괴롭혔다. 상당 기간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편안히’ 있었다거나, 당원 아내(김조이)를 버리고 비당원 여성(김이옥)과 재혼한 점, 혁명가 유족을 돕는 기금을 아내의 병 치료에 쓴 일을 박헌영 등 경쟁자들이 끊임없이 문제 삼았다. 일제강점기 말기 용산헌병대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해방을 맞아 풀려난 뒤에도 견제는 계속됐다.
해방정국에서도 공산주의 세력의 변두리로 밀려나 있던 죽산은 1946년 공산당을 주도하던 박헌영에게 장문의 편지를 쓴다. 자기 비판도 있었지만 박헌영 비판이 주된 요지였다. 미처 부치지 못한 이 편지가 미군 방첩대(CIC)의 사무실 압수수색으로 미 군정 손에 들어갔다.
미국은 이 편지로 국내 공산당에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46년 5월 7일, 조선일보·동아일보·한성일보·대동신문에 편지 전문이 실렸다. 경악한 죽산은 좌익계 신문에 편지를 압수당한 경위 등을 밝혔으나 이미 일이 틀어진 뒤였다. 한 달 뒤 죽산은 미 군정의 회유를 받아들여 전향을 선언한다.
전향했다지만 우익에 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제3의 길, 즉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로 가고자 했다. 48년 5·10 선거에서 인천 을구에 출마해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그의 앞길은 탄탄해 보였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초대 농림부 장관에 임명했다. 당시 전국 농가는 200만호. 자기 땅이 전혀 없는 완전 소작농이 49%, 약간의 토지를 갖고 소작을 병행하는 농민이 35%, 완전 자립농과 지주가 17%였다.
유상몰수·유상분배와 무상몰수·무상분배를 절묘하게 조합한 조봉암 장관의 농지개혁안은 성공했고, 신생 대한민국은 사회안정 토대를 든든히 할 수 있었다. 인기가 치솟은 죽산은 52년 2대 대통령선거(70만표 득표, 차점 낙선), 56년 3대 대통령선거(216만표 득표, 차점 낙선)에 연이어 출마해 무차별 선거부정·테러 와중에도 선전했다. 이승만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것이다.
결국 이승만 정권은 그에게 간첩 혐의를 씌웠다. 59년 7월 30일 대법원이 사형 재심 청구를 기각하자마자 다음 날인 31일 오전 11시 형이 집행됐다. 책임정치, 수탈 없는 정의로운 경제, 평화통일 등 죽산의 3가지 정치적 이상은 오늘날 상식으로 통한다. 선각자인 그에게 빚을 진 이는 비단 사법부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죽산은 사형이 언도된 직후 변호사(김춘봉)에게 오히려 담담하게 말한다.
“판결은 잘됐어요. 무죄가 안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정치란 다 그런 거지요. 이념이 다른 사람이 서로 대립할 때에는 한쪽이 없어져야 승리가 있는 거고 그럼으로써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편안하게 되는 거지요. 정치를 하자면 그런 각오를 해야 해요.” 과연 오늘날의 정치도 그래야 하는 것일까?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 죽산의 말말말
▶“사람이 어떤 중요한 결심을 하고, 굳이 그것을 실천하려 들면 그 굳은 결의가 얼굴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체험에서 알고 있었다.”
- 중국 공산당 활동 관련으로 1933년 신의주 감옥에 수감됐던 생활을 돌아보며.
▶“환영해주셔서 고맙지만 나는 관료주의와 권위주의를 싫어합니다.”
- 1948년 농림부 장관 시절 추곡수매 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강화군청을 방문했을 때, 군수와 전 직원이 나와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자.
▶“이 일에 국가의 장래가 달려 있습니다. 나는 강 국장만 믿습니다. 사무실에 앉아서 펜대만 놀리면 안됩니다. 농민들 속으로 파고 들어가십시오.”
- 농림부 장관 시절 강진국 농지국장에게 농지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모든 사람이 착취당하는 것이 없이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이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에서.
▶“너무 성급히 생각하지 말게. 우리가 못 한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후배들이 해나갈 것이네. 결국 어느 땐가 평화통일의 날이 올 것이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날이 올 것이네. 나는 씨만 뿌리고 가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옥중 유언에서.
***** 이 노트는 daum 카페 '소설가 이원규와 푸른 날개'애서 내려받을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