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과 친일 - 일제 강점기 문학의 두 얼굴
이병순(숙대 인문학부 강사)
1. 탄탈로스의 운명
저항과 친일은 일제 강점기 우리 문학의 두 얼굴이다. 조국의 운명이 격랑에 휩쓸려 그 향방을 알 수 없는 시기에 문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독립의 꿈은 점점 요원해져 갈 때, 먹장구름을 드리운 검은 세력이 점점 더 그 기운을 확장해 갈 때 문인들은 모종의 사상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온몸으로 저항하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존재증명인 창작을 포기한 채 절필하고, 또 다른 이는 새로운 운명을 타고 올라 자신의 조국과 양심을 함께 유기했다.
2009년 현재, 문단에서는 당대 문인들의 작품은 물론 그들의 문학 외적 행보에까지 찬사와 비난이 엇갈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할 때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학을 둘러싼 일제 강점기 우리 문단의 야누스적 면모를 들여다보는 것은 퍽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탄탈로스처럼 출구 없는 식민 조선의 현실에 발을 담근 채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허우적댔던, 그리하여 영원한 목마름이라는 형벌을 기꺼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일제 강점기 우리 문인들의 고뇌와 그 고뇌에 따른 행보를 저항과 친일이라는 키워드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저항문학
저항문학(littérature de la résistance)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의 反나치스 문학을 지칭하는 용어’로서, ‘민족적 자존심과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식이 표현되어 있는 문학’을 가리킨다. 따라서 저항문학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 러시아, 아일랜드 등 식민 지배 경험을 공유한 나라들과 동질성을 갖는다.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저항문학을 살펴보려면 우선 3·1운동의 문학사적 의의부터 확인해야 한다. 3·1운동은 거족적 민중항쟁으로서 저항문학의 배경이자 근대적 민족문학을 특징짓는 계기로 작용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전체에게 항일의 정신을 고취시켰으며, 조선 민족정신을 확인하고 규합하는 기폭제이자 구심점 역할을 담당했다. 비록 3·1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검거로 인해 좌절되었지만, 한번 폭발된 항쟁의 불씨는 남아 저항문학의 흐름을 이끌어내었다. 한용운, 이상화, 심훈 등은 직접 3·1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을 외쳤으며, 이 경험은 이후 저항문학으로 온전히 용해되어 나타났다.
저항문학의 대표적 인물로 이육사, 윤동주, 심훈, 이상화, 한용운, 현진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3·1운동뿐 아니라 다양한 항일운동으로 투옥된 경험이 있는가 하면, 국권 회복을 위한 내용을 작품 속에 담아 발표하는 등 일제에 항거했다.
특히 이육사는 저항문학을 거론할 때 제일 먼저 호명해야 하는 이름이다. 그는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무장투쟁에 투신하였고, 1927년 귀국 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바다. 북경으로 다시 건너간 육사는 조선군관학교 제 1기생으로 졸업하고, 이후 북경과 조선을 오가며 「절정」, 「광야」, 「청포도」, 「꽃」 등의 시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펼쳤다. 이중 특히 「절정」은 절박한 상황을 극복하려는 강인하고 불굴의 의지를 담고 있는 대표적인 저항시이다.
윤동주와 이상화 역시 저항시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시인들이다. 고뇌형 지식인인 윤동주는 「서시」, 「쉽게 씌어진 시」, 「참회록」, 「자화상」 등을 통해 섬세하고 유약한 보통사람들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되뇌었을 자기반성을 시화하였다. 이상화는 독립운동 혐의로 여러 차례 투옥된 바 있는 실천형 지식인으로 시 「선구자의 노래」, 「역천」은 물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통해 식민지하의 민족 현실을 아름다운 향토적 예술혼으로 완성시켰다.
한용운은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바 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신간회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에 투신했다. 「복종」, 「알 수 없어요」, 「나룻배와 행인」 등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을 종교적 외피로 감싸 안아 은유적 기법으로 형상화한 다수의 시편들이 있다.
소설가로는 심훈을 들 수 있다. 그 역시 3·1운동에 참여하여 옥살이를 한 바 있는데 「동방의 애인」, 「불사조」 등의 소설을 연재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연재 중지처분을 받은 바 있고, 특히 그가 쓴 시 「그날이 오면」은 당대 최고의 저항시로 평가되고 있다.
이렇게 살펴본 일제 강점기의 저항문학은 대체로 문인들의 삶과 문학이 일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을 던져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서는 그토록 절절한 저항문학이 창작될 수 없었을 게다. 이러한 점은 문인의 삶과 문학을 따로 떼어 개별적 가치평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경청해 보아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은 1930년대 후반부터 딱히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친일하지도 않은 많은 문인들 역시 저항문인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는 점이다. 1940년을 전후하여 대부분의 문인들이 어쩔 수 없이 혹은 자발적으로 친일을 선택하였을 때, 침묵하고 절필을 택한 것도 소극적이나마 저항의 한 방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일어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하더라도 김사량의 경우처럼 그 내용이 항일의 뜻을 담고 있다면 이 또한 저항문학의 범주에서 거론해야 마땅하리라 본다.
3. 친일문학
친일문학이란 본래 일본과 친화적 관계를 가지는 문학으로, 일본의 역사, 풍토, 생활관습, 사고방식 등에 대한 호의적 표현, 호의적 해석 등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을 가리킨다. 하지만 사회적 통념은 이러한 본래적 의미와는 그 해석이 전혀 다르다. 즉 친일문학이란 ‘조선’이라는 ‘주체적 조건을 몰각한 맹목적 사대주의적인 태도로 일본의 예찬 추종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1)으로, 나아가서는 ‘매국적 문학’이라는 의미까지도 포함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동아 전쟁 수행을 위한 총력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1938년 중국의 무한 삼진이 일본군에 의해 함락되는 것을 본 많은 문인들은 더 이상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친일의 행동을 개시하였고 그 결과물들을 표면에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39년 10월 총독부 학무국의 지시 아래 결성된 ‘조선문인협회’가 1943년 개편되어 조직된 ‘조선문인보국회’는 이러한 친일문인들의 본산지이다. 또 1941년 「인문평론」과 「문장」이 폐간되고 창간된 「국민문학」은 각종 친일문학의 발표매체를 자처했다. 최재서가 주간하고 서정주가 편집을 맡았던 이 잡지는 황도정신의 앙양과 고취를 목적으로 창간되어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친일문학가들의 작품 활동 주 무대가 되었다. 즉 이 시기 문인들은 「국민문학」을 통해 ‘내선일체의 황국신민화론’을 내세우는가 하면, ‘대동아공영권의 전쟁동원론’을 승인, 이를 공공연하게 유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친일문학행위에 대해서는 1991년에 설립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기획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이 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관한 국민모금을 시작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시민연대를 조직하여 친일문제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2008년 4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간의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자 명단을 발표하였다. 이중 문학인은 김동인, 김동환, 노천명, 모윤숙, 서정주, 유진오, 이광수, 이무영, 주요한, 채만식 등 유명인사 대부분이 포함된 41명2)이다.
우리가 친일문인을 거론할 때 제일 앞자리에 놓이는 인물이 바로 이광수이다. 이광수는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 「무정」을 발표한 당대 최고의 소설가이자 2·8독립선언서 기초자였다. 상하이 독립신문 주필을 맡기도 했던 그가 극렬한 친일파이자 민족반역자로 불리기까지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칭송과 비난, 환호와 질타 속에서 무수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광수는 조선문인협회 회장으로서 1939년 2월 「동양지광」에 시 「가끔씩 부른 노래」를 시작으로 「국민문학의 의의」, 「내선일체와 조선문학」, 「생활의 일본화」, 「징병제의 감격과 용의」, 「폐하의 성업에」, 「내 모든 것을 드림」(매일신보 1945.1.17) 등 총 103편의 친일적인 시, 소설, 논설 등을 태평양전쟁 막바지까지 각종 매체에 기고했다. 그는 이러한 글들과 강연을 통해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제창은 물론 징병, 징용, 정신대의 권고까지 철저하게 일본의 메가폰 역할을 수행했다. 이광수는 해방 후 자신의 친일 행각을 변호하는 「나의 고백」이라는 글에서 ‘애국을 위해 친일’했다는 논리를 개진하기도 했다. 일본이 융성하면 그 여덕이 조선에도 흘러넘쳐 함께 부흥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한편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라는 궤변으로 친일의 이유를 둘러댔던 시인 서정주도 이 자리에서 마땅히 언급해야 한다. 그 역시 1942년 친일 어용 문학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친일작품을 썼다. 「시의 이야기-국민 시가에 대하여」(평론),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평론), 「인보(隣保)의 정신」(수필), 「스무 살 된 벗에게」(수필), 「항공일에」( 일본어시), 「최체부의 군속 지망」(소설), 「헌시(獻詩)」(시), 「보도행」(수필), 「무제」(시), 「오장 마쓰이 송가」(시) 등 그는 시, 평론, 소설, 수필 등을 통해 조선 독립을 위해 힘쓰는 동족을 ‘불령선인’으로 매도하는 한편 조선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했다. 그는 해방 후에도 정당한 자기비판과 반성을 행하지 않은 채 정권에 아부하고 편승하여 철저하게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치문인으로 활동했다.
물론 이광수, 서정주 이외에도 많은 문인들이 친일에 가담했다. 그들의 친일이 자발적 내적 논리를 견지한 채 이루어졌든 탄압과 협박에 못 이겨 강압적으로 행해졌든 그들은 ‘친일’을 선택했고 그 행동은 이미 문학사에 각인되었다. 창씨개명을 하고 철저하게 일제의 정책 수행 대리인으로 협력하던 그들이 해방 후 철저한 자기비판과 반성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우리 역시 그들이 해방 이후에도 카멜레온처럼 정권에 밀착하여 활동한 것을 방치 혹은 묵인해 왔다는 점, 그래서 그들 대부분이 해방 후 남한 문단을 이끌어왔다는 점은 한국 근현대문학사의 큰 오점으로 남았다. 이제라도 투명하게 그들의 공과를 재조명해야 한다.
4. 반성하는 문학
해방 후 이태준은 자신이 고수해 오던 상고적 소견문학에서 현실문학으로 극적인 자기 변신을 꾀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그는 한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술은 언제나 진리와 정의의 편이다. 진정한 예술가는 언제나 반성한다.’3) 이 말은 이태준에게만, 그리고 당대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명징한 예술의 자기규정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당대의 정치, 경제는 물론 일상과 정서, 풍속, 모럴, 역사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할 때 문학 혹은 문인의 사회적 역할은 더욱 강조된다. 이런 의미에서 일제 강점기 문학에 대한 저항과 순응, 혹은 협력과 비협력에 대한 연구는 좀 더 깊고 섬세하게 분화될 필요가 있다. 즉 동원 가능한 모든 자료와 정황 등을 고려해 저항과 친일의 정도와 방법, 자발성의 유무, 기여도, 국민적 파급효과 등을 따져 보아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암흑기’라는 모호한 단어 속에 1930년대 후반부터 해방까지의 우리 문학을 묻어둘 수만은 없다. 우선은 문학사의 공백으로 치부하기에는 좋든 싫든 무수한 문학 활동이 있었고, 둘째는 암흑기였기에 어떠한 문학도 용인될 수 있다는 자기합리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항이든 순응이든 그것이 우리 문학사의 한 부분이라면 과감히 끌어안고 객관적이고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한다. 과거를 낱낱이 조명하여 성찰과 반성의 지료로 삼을 때 우리 문학의 미래는 빛나는 새벽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1) 임종국, 친일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2002:증보판), p.19
2) 곽종원, 김기진, 김동인, 김동환, 김문집, 김사영, 김성민, 김안서, 김영일, 김용제, 김종한, 노천명, 모윤숙, 박영희, 박팔양, 방인근, 백철, 서정주, 오룡순, 유진오, 윤두헌, 윤해영, 이광수, 이무영, 이석훈, 이원수, 이윤기, 이찬, 임학수, 장덕조, 장혁주, 정비석, 정인섭, 정인택, 조연현, 조용만, 조우식, 주요한, 채만식, 최재서, 최정희
3) 이태준, 「문학과 정치」, 한성일보 1946.3.3.